웅(동성애자인권연대)



4월 한 달 동안 공연계에는 성소수자를 주제로 하는 두 편의 작품들이 선보였다. <바후차라마타: Beyond Binary>(이하 <바후차라마타>)와 <BENT>가 그들이다. 한편은 창작극이고, 다른 한편은 원작을 갖고 있는 작품이다. 더불어 한편은 인도를, 다른 한편은 나치시대 독일을 배경으로 한다. 그런 점에서 둘의 감상 포인트는 다르다. 하지만 작품들을 보고 나니 둘을 나란히 놓고 비교하는 것이 무리 되지는 않을 것 같다. 특히 작품들이 성소수자를 어떤 관점과 형식으로 재현하고 있는지, 어떤 메시지를 만들어내는가를 살펴볼 수 있는데, 이는 성소수자가 사회적으로 인식되는 방식부터 재현되는 양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결고리를 논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한다.




<바후차라마타: Beyond Binary> 포스터



경계 ‘안’에서 바라보는 경계 ‘너머’- <바후차라마타: Beyond Binary>



공연제목 때문일까? <바후차라마타>는 공연을 소개하는 글마다 히즈라와 인도신화에 대한 설명들을 앞에 놓는다. 간단히 언급하면 ‘바후차라마타’는 인도 히즈라가 섬기는 신이다. 그리고 히즈라는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등에 존재하는 독특한 성정체성의 집단이다. 이들은 간성으로 태어나거나 남성의 성기를 거세한 이들로서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제3의 성으로 인식된다. 신화에도 등장하고, 태어난 아이를 축복하거나 결혼식 축하하는 공연을 통해 생계를 잇는 이들은 사회에 소속되어 특정 역할을 갖는다. 그런 점에서 히즈라는 국제적 정체성으로서 트랜스젠더개념의 자장에 완전히 포섭될 수 없는 지역적・역사적 맥락을 갖는다. 그렇다면 공연은 히즈라를 소재로 어떤 의미를 만들어내려 했던 것일까? 질문은 일단 넣어두고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공연제목만 읽는다면 누군가는 히즈라와 인도신화의 소재들이 풍부하게 가미된 작품을 기대할 수 있겠다. 하지만 <바후차라마타>는 신화나 민족지적 접근보다는 성정체성 또는 성적지향, 성별이분법에 대한 연출자와 배우들의 고민을 주로 다룬다.


작품소개와 함께 작업노트를 읽다보면 공연을 준비하기 위해 극단에서 들인 노고를 엿볼 수 있다. 이들은 성별이분법에 대한 고민을 열며 책과 자료들을 통해 학문적 지식을 찾았다. 그런가하면 인도로 워크숍을 떠나 히즈라를 인터뷰하고 현지 배우들을 섭외하는가 하면, 한국에 와서도 당사자들을 찾아 인터뷰했다. 일련의 시도들은 기실 성소수자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의 방식들이기도 할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가져온 고민들을 무대에 올려 관객에게 허심탄회하게 건넨다.  연출자는 공연시작과 끝, 막이 바뀌는 중간마다 무대와 관객석을 어슬렁거리며 생각을 읊고 물음을 던진다. 관객과 대화하고, 관객석을 찾거나 관객을  무대로 불러 눈높이를 맞추는 시도는 무대와 관객의 거리를 좁혀 성소수자에 대한 고민들을 함께 공유하고 이해를 넓혀보자는 의도로 해석된다. 그렇다면 그가 나누려던 고민은 뭐였을까. 연출자가 묻는다. 당신은 남자입니까, 여자입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질문과 대답이 이어지는 중에 객석 곳곳에 앉아있던 배우들이 무대로 내려와 고백한다. 저는 남자/여자입니다, 왜냐하면….


질문으로 시작된 공연은 세 파트로 나눠진다. 먼저 배우들은 인터뷰를 통해 채집했을 다양한 성정체성의 모델들을 연기한다. 그리고 학자로 분장한 배우들이 성별이분법과 동성애,  트랜스젠더에 대한 학문적 장광설을 늘어놓는다. 마지막으로 무대로 불려나간 관객들이 무대 뒤에 빼곡히 앉아있고 배우들이 카니발리즘적인 의례를 연상시키듯 ‘성전환  여성’(그녀가 히즈라인지, 트랜스젠더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인도배우를 둘러싸고 역동적이고 무게 있는 안무를 선보인다.


안무와 연기를 함께 상연하는 배우들은 무대를 골고루 활용한다. 무대 뒤 2층에는 밴드가 공연 내내 음악을 연주하며 생동감을 더한다. 특히 마지막 장에서 관객들이 무대로 내려가 무대 뒤에 앉아 머리 위에 쏟아지는 사운드에 압도된 채 조명 아래 배우들이 춤추고 연기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경험은 공연감상의 백미이다. 사막의 카라반들이 한밤중에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아 춤추고 노는 풍경이 이러지 않을까 싶다.


무대와 관객이 눈높이를 맞추고 서로 대화를 주고받으려는 노력은 둘 사이 거리를 좁힌다. 그렇게 하나 된 공연이 한목소리로 외치는 메시지는 세상이 뭐라고 하든 ‘마음 가는대로 하라’,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 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추측해볼 수도 있다. <바후차라마타>가 히즈라를 주요 소재로 삼은 것은 언어와 지식에 앞서는 마음의 진정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라고, 정체성의 경계에 대한 고민을 히즈라라는 존재를 통해 규범 ‘너머’ 초월적 경험과 신화적 도상들에 연결하고 의식의 지평을 열기 위함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나로선 좁아진 거리가 상정한 ‘우리’를 받아들이기에 망설임이 있었다. 시종일관 이들이 공유하는 관점은 ‘이성애자’의 테두리에서 관용과 이해를 나누며 여전히 성소수자를 밖에 두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연출자는 겸손하게 질문하고 고민하지만, 그의 관점은 ‘이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는 식의 반성과 깨달음 주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배우들이 이성애자의 관점을 취하는 것 역시 거리를 두게 만드는 이유이다. 다양한 정체성을 연기하는 배우들의 모습은 퀴어 이론에서 언급되는 ‘젠더수행성’이나 ‘젠더유동성’ 등을  연상시킨다. 배우 자신이 인식해온 정체성과 그들이 연기하는 배역의 성정체성 사이에서 일어날 분열을 생각해볼 수도 있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배우들의 고민이 나오기를 기대하는 것도 극의 취지에서 살펴본다면 당연하다.


하지만 연기하는 주체들은 공연의 처음과 끝마다 자신이 이성애자 시스젠더임을 굳이 밝히고 확인한다. 다양한 성정체성과 성적 지향을 ‘연기하는 이성애자’라는 도식은 주체와 타자의 이분법 사이에서 주체를 공고히 하며 ‘타자에 대한 관용’의 함정에 빠져버린 느낌이다. ‘마음 가는대로 하라’는 메시지는 마음이 어떤 규범들 위에서, 어떤 언어로 직조되는지에 대한 비판적인 질문을 생략하고 장광설 정도로 취급한다.


어쩌면 이런 불만은 질문을 주고받는 연출자와 배우, 그리고 관객들 모두 시스젠더임을 고백하며 그 이유로 이성을 좋아한다는 이유 이상을 넘어서지 않았던 것에 대한 반감이었는지 모른다. 관객들 중 누구라도 자신의 성별에 의문을 붙이고 다른 성정체성을 이야기했다면, 암묵적으로 합의된 ‘우리’를 깨고 나오는 대답이 들려왔다면 공연은 다르게 보였을까? 관객과의 대화에서 나온 동성애를 어디까지 받아줄 수 있느냐는 질문은 차마 끝까지 들어주고 싶지 않았다.





BENT 포스터



철조망 밖에서 바라보는 수용소 게이의 주체적인 비극- <BENT>


극작가 마틴 셔먼의 원작 <BENT>는 79년 런던 초연당시 이안 맥켈런이 주인공을 맡았고, 브로드웨이에서도 상연되었으며, 97년에는 영화로도 제작된 작품이다. 원작자가 동성애자라는 말을 굳이 붙이지 않더라도 작품은 동성애를, 나치시절 동성애자의 모습을 주요 소재로 삼는다.


<BENT>는 1934년 나치 돌격대 참모장 에른스트 룀이 살해되기 직전의 베를린에서 시작된다. 극의 주인공은 맥스이다. 그는 동성애 정체성을 갖고 있지만 드러내지 않고 게토 안에서 쾌락을 향유하는가 하면 파트너와 가족, 심지어는 나치 장교에게 몸을 내어주고 거래를 통해 살아나가는 인물이다. 사회적 배경을 생략한다면 자신을 숨기고 드러내지 않는 그의 면모를 개인 성격으로 국한시켜 독해하기 쉽다. 하지만 인물의 행동을 입체적으로 읽어내기 위해서는 나치 이전 동성애 하위문화가 번성했지만 사회적 인식이 그리 좋지 않았던 베를린과 동성애자에 대한 묵인 속에 상시적인 감시와 체포가 비일비재했던 나치 초기의 사회적 풍경을 고려할 필요도 있다.


근래 출간된 김학이 교수의 『나치즘과 동성애』를 비롯하여 당시 수용소에 수감된 동성애자들의 증언을 접한 독자들이라면 보다 넓은 맥락에서 작품에 접근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독자들도 알다시피 나치가 등장하기 이전 베를린은 동성애자의 천국으로 알려져 있다. 극에서는 스치듯 언급되는 히르슈펠트 등의 성과학자들이 n개의 성을 주장하며 동성애를 비롯한 다양한 성정체성들을 관용하거나 옹호하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를 반영하며 작품은 동성애자인 에른스트 룀이 살아있던 당시까지만 해도 동성애자들의 하위문화가 번성했던 것으로 그려낸다.


하지만 하위문화의 번영이 당시 사회의 동성애 인정과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사회에서, 더불어 가족들 사이에서 많은 동성애자들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거나 분리된 생활을 했다. 한편 동성애자들의 이중생활은 나치독일시절 수용소에 이르러 가장 낮은 등급으로 취급되어 죽음에 가장 쉽게 노출되는 존재가 되기도 한다.


극의 내용은 이렇게 전개된다. 룀이 숙청된 직후, 주인공 맥스가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파트너 루디와 함께 비밀경찰에 잡혀 수용소로 끌려간다. 끌려가는 기차 안에서 맥스는 동성애자 낙인을 피하기 위해 루디와의 관계를 부정하고 나치의 강압으로 죽어가는 그를 때려죽이는가하면 죽은 소녀를 범하면서까지 자신이 동성애자가 아님을 증명한다. 동성애자 정체성을 부정한 끝에 맥스는 분홍 역삼각형 대신 유대인을 표시하는 노란별을 달고 노역을 한다. 그러다 동성애로 수감된 홀스트와 정분을 나누지만, 홀스트 또한 아무런 이유도 없이 나치에게 죽임을 당하면서 뒤늦게 사랑을 깨닫고 죽음을 택하는 것으로 작품은 끝을 맺는다.


연극은 룀이 집권하던 전후시기 동성애 게토의 풍경이나 동성애자가 수용소 안팎에서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를 간명하게 묘사한다. 동성애 게토나 수용소 공간을 비교적 구체적으로 재현하는 영화와 달리 연극은 인물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상황에 집중한다. 당시 풍경을 자세히 그려내지 않는 것은 연극의 물리적인 한계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연극무대는 인물 가까이에서 호흡과 목소리를 직접 느낄 수 있다는 이점을 활용한다. 특히 수용소 노역에 찾아오는 3분의 휴식시간동안 차렷 자세로 홀스트와 나란히 철조망을 보고 접촉 없이 나누는 애무의 대화는 영화보다 집중도 있게 연출됨으로써 관객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조금 아쉬운 점이 있다면 사랑의 언어가 상대의 몸을 쓰다듬을 때마다 그의 각 부위들이 떨리거나 움찔거리는 몸연기를 보여줄 수 있었을 텐데 쉽게 읽어낼 수 없었다는 점이다. 배우들이 윗옷을 벗고 나오기에 필자는 눈을 크게 뜨고 지켜봤단 말이다.) 돌을 날라 쌓고 쌓은 돌을 다시 날라 쌓는 의미 없는 노역의 반복이나 병적으로 반복되는 수용소의 일상을 배우들 간 주고받는 반복적인 대사와 함께 공감각적으로 드러내는 것 역시 흥미롭다.


무엇보다 연극무대는 동성애자를 바라보는 관점을 조성하는 장치가 되기도 한다. 단적으로 무대와 관객 사이에 놓인 전기철조망은 관객들로 하여금 수감자를 감시하는 이들과 같은 위치에 놓는다. 철조망은 앞서 <바후차라마타>가 관객에게 직접 다가오고 불러내어 눈을 맞췄던 것과 반대로 무대와 관객의 분리를 수행한다. 관객들은 나치의 위치를 점하지만, 무대 위 인물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며 동성애자로서 존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맥스의 감정선을 따뜻하게 바라볼 수 있다.


수용소에서 말을 나누고 시선을 나눴던 홀스트의 허망한 죽음은 자신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된 결정적 동기로 작용한다. 동성애자의 존재를 부정하는 환경 속에서 나를 동성애자로 인정하고 드러낸다는 것, 이는 나 혼자 살자고 부정한 애인, 사랑하는 동료의 죽음에 대한 채무에 책임을 지는 행위이기도 하다. 하지만 수용소에서 동성애자로서 맥스가 나를 인정하고 확인하기 위해 주체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분홍색 역삼각형의 표식을 달고 자살하는 것이었다.


국내에 상연되는 동성애를 다룬 여느 작품들의 홍보문구처럼 이 연극도 동성애의 인권을 넘어서는 보편적인 인간성 회복, 사랑 등을 강조한다. 하지만 보편성을 강조하며 구체적인 삶의 언어들을 감추는 것은 쉽게 빠질 수 있는 보편성의 함정이다. 보편성은 구체적인 삶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성소수자의 인권을 넘어선 모두의 사랑, 인권, 인간’으로 소개되는 작품설명은 다시 쓰여야 한다.- 인간의 존엄은 내가 동성애자임을 인정하고 파트너와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고민과 선택을 통해 입증될 수 있는 것이라고. 구체적인 삶 속에서 보편적인 규범에 의문을 던지고 화자인 나조차도 의문에 몸을 던질 수 있을 때 삶은 새로운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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