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애자인권연대)

 

 

외설적 타자, 당신의 악의적 변태성

 

이번 퀴어문화축제의 화두 하나는 단연 ‘빤스논란’이었다. 동성애는 문란하다는 반대논리가 퀴어퍼레이드로 옮겨와 동성애자들이 헐벗고 노는 빤스퍼레이드로 진일보한 것이다. 퍼레이드의 다양한 풍경과 이야기들을 ‘빤스’의 오명으로 일축해버리는 이들의 어휘력은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어쩜 저렇게 귀에 꽂히는 저열한 단어들만 선별해낼까?

 

타인의 존재를 부정하고 배제하기 위해 이들이 사용하는 전략이란 대개 공격 대상의 일면을 자의적으로 잘라내고 노골적으로 연출하여 극단적으로 일반화하는 것이다. 동성애자 노출에 대한 반대 발화는 노출의 의도와 맥락을, 나아가 노출여부에 대한 당사자의 복잡한 상황이나 깊은 고민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말초적인 표현으로 눈먼 귀들을 선동한다. 대상을 호명하는 역시 폭력적이다. 반대하는 대상을 ‘동성애’로 수렴시키다보니 이성애 트랜스젠더나 일부 무성애자의 경우 종종 ‘논외’가 되어 반대당할 자격조차 얻지 못하는 웃지 상황이 발생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게 동성애를 반대하며 꺼내는 키워드란 문란/음란/광란, 항문성교, 에이즈, 등의 적나라한 수사들이다. 그리고 올해, 지지부진한 혐오발화 속에서 ‘빤스’가 나왔다.

 

그런데 필자의 눈을 끄는 것은 이들에 의해 성소수자들이 배제되고 삭제되는 것보다 과정 속에서 외설적인 언어들이 넘치도록 만들어지는 지점이다. 금지하기 위해 금지대상을 과잉 묘사하는 것에 대해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외설적 타자’로 개념화한다. 타인을 부정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공격이나 폭력도 불사하지만, 그를 없애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지워야만 하는 타인의 얼굴을 다시금 호출해야 하는 역설을 피할 없는 것이다. 당신이 사용하는 악의적 표현과 욕설들은 당신이 절대로 지울 없고 지우는 과정 속에 어떻게든 출몰하고야 마는 억압된 이의 다른 이름이다. 하지만 타인을 금지하는 언어는 당사자를 주변으로 몰아넣는 편견과 혐오의 악순환을 반복하기도 한다.

 

글에서는 노출과 검열을 키워드 삼아 동성애 반대세력들의 언어가 만들어지는 과정과 그에 대한 커뮤니티의 대응 논쟁지점들을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여기서 다루게 가지 사례는 8-90년대 미국에서 활동한 미술작가 데이비드 워나로위츠(David Wojnarowicz) 선례와 이번 퀴어퍼레이드의 노출논란이다.

 

 

검열에 대한 근성의 투쟁- 데이비드 워나로위츠

 

워나로위츠는 54 생으로 뉴욕으로 건너와 독학으로 미술을 배운 작가이다. 80년대 에이즈 위기의 한복판에서 활동한 그는 동성애자이고 질병당사자이자 에이즈 운동에도 참여한 이력이 있다. 그의 작업들 80년대 말에 작업한 <섹스 시리즈>(The Sex Series) 1990 전미교육협회(National Education Association)로부터 15,000달러의 재정지원을 받아 일리노이주립대학 갤러리에서 전시된 있다. 아날로그 흑백 인화로 작업된 풍경사진에 동성 성교장면이나 세포나 세균을 확대한 이미지를 집어넣어 음화 처리한 작업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병적인 위험이 존재한다는 에이즈 위기의 증상을 이미지로 시각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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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섹스 시리즈” <무제>(마리옹 씨마마Marion Scemama 위하여), 1988-89. From a eight gelatin-silver prints, 31 × 34 1/4 each. P.P.O.W., New York.

(아래) <주네>(Genet), 1979. Photocopied collage, 8 1/2 × 11. P.P.O.W., New York.

 

 

흥미로운 점은 전시를 둘러싸고 전개된 사건의 과정들이다. 미국가족협회(American Family Association) 협회 창설자이자 감리교 목사였던 도널드 윌드먼(Reverend Donald Wildmon) 전시의 재정적 지원을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인다. 방식이란 79 <주네>(Genet) 에서 마약주사를 놓고 있는 예수 이미지를 표적삼아 공격하면서 <섹스 시리즈> 작품들로부터 성교장면만을 오려내어 짜깁기한 찌라시 200,000 장을 교회와 방송국에 배포한 것이다. 편집된 이미지들은 원본의 선명도를 높이고 기존 작품보다 크게 확대함으로써 성교장면을 적나라하게 부각시킨다. 더구나 전단지 안에는 “주의- 극단적으로 역겨운 내용 포함” 문구가 들어가 외설성을 극대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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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가족협회, “당신의 세금이 ‘예술작품’에 지원됩니다. 찌라시, /. The David Wojnarowicz Papers, Fales Library/Special Collection, New York University.

 

동성애와 포르노그래피를 금지하기 위해 이들이 제공한 이미지는 표면적으로 작품을 조작한다는 점에서 작가의 의도를 벗어나 있다. 하지만 작업을 비난하기 위한 그들의 전략은 오히려 작가가 ‘은밀하게’ 재현했던 장면들을 역설적이게도 ‘노골적으로’ 변형함으로써 타인에게 전가한 변태성을 십분 발휘한다. 종교를 빌어 자극적인 표현들을 조직적으로 쏟아내는 뒤틀린 심성은 예나 지금이나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주목할 점은 작가의 이후 행보다. 그는 미국가족협회와 도널드 윌드먼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한다. 그리고 1990 8 연방법원은 워나로위츠의 손을 들어준다. 사건은 일개 예술가가 우익기독교집단을 고소한 최초의 사건으로 기록된다. 사실 재판의 결과 자체는 소박했다. 법원은 작가가 얻는 손해가 적음을 이유로 들어 1달러의 벌금형을 판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1달러 수표에는 미국가족협회가 인쇄되고 도널드 윌드먼의 사인이 기입되었다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었다. 그는 수표를 평생 쓰지 않고, 사후 그의 작품컬렉션으로 보관하도록 지시했다.

 

다른 한편, 검열에 응답이라도 하듯 작가는 같은 가을 <하이 퍼포먼스>지에 자화상을 표지로 싣는다. 사진을 설명하는 문구는 다음과 같다. ‘왜 윌드먼은 남자(워나로위츠) 검열하는가?(Why is Reverend Donald Wildmon Trying to Censor This Man?) 표지는 86년도에 제작한 영상 < 뱃속에 >(A Fire in My Belly) 삽입된 장면으로 사진 작가는 자신의 입을 꿰맨 침묵하고 있다. 외부로부터의 ‘검열’을 스스로 전유하고 수행하는 퍼포먼스인 셈이다. 검열당한 자의 고통을 표현하고 나아가 검열 자체를 표현하는 그의 시도는 급진적인 뉘앙스를 선취하며 당대 에이즈운동의 대표적인 구호 Silence=Death’를 몸소 실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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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이비드 워나로위츠에게 주는 1달러 수표, The David Wojnarowicz Papers, Fales Library/Special Collection, New York University.

(아래) High Performance: A Quarterly Magazine for the New Arts, no. 51 (Fall 1990), Cover photograph of David Wojnarowicz by Andreas Sterzing, From the film Silence= Death by Phil Zwickler and Rosa Von Prauheim. High Performance and The David Wojnarowicz Papers, Fales Library/Special Collections, New York University

 

 

검열을 전유하기- 급진적 정치표현으로서 노출

 

이제 시선을 한국으로 돌려보자. 표현과 검열 사이의 투쟁에 있어 앞의 사례와 지금 우리의 현실은 매우 근접해있다. 하지만 표현매체와 맥락에는 다소 차이를 보인다. 특히 여기서는 ‘공공장소에서의 노출’이라는 논쟁이 커뮤니티 안팎에서 이뤄지는 특징이 있다. 현재진행형인 ‘빤스논란’을 다루기 위해서는 앞의 사례처럼 사건정리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논점의 결들을 짚어내는 것이 이슈에 접근하는데 도움이 것이다.

 

퍼레이드 참가자들의 노출에 많은 논란이 따르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예상했고, 실제로도 확인했다. 키워드가 ‘빤스’에서 ‘항문노출’로 옮겨가면서 논란은 커뮤니티 내부로 점화된 듯하다. 노출행위를 옹호하는 가장 기본적인 주장은 ‘하루 동안의 자기표현’이니까 용인해서 문제될게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제약된 시간 아래 표현을 보장해달라는 소극적인 변론에 그칠 수밖에 없다. 앞뒤 맥락과 구조를 간과함으로써 노출 자체를 일종의 ‘객기’로 이해할 우려도 있다. 하지만 ‘노출이 용인된 하루’를 준비하기까지 적지 않은 부침이 있었음을 모르는 이는 별로 없을 것이다. 퀴어퍼레이드는 시작 전부터 전운이 감돌았다. 반대진영에서는 서대문구청과 서대문경찰서를 협박하여 수백 명이 반대집회를 것이라고 엄포를 놓으며 선전전을 벌였다. 그런가하면 서대문구청은 퀴어퍼레이드 허가를 취소하고, 경찰서는 퍼레이드장소 바로 반대집회신고에 눈감으며 퍼레이드 당일 어떤 방해와 충돌에도 수수방관하는 기행을 서슴지 않았다. 이는 앞서 미국의 예보다 조직적인 반대의 방식이다. ‘민관 합작’에 다름 아닌 공격에 직면하면서 참가자들에겐 뭔가 ‘센’ 것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와 별개로 일부 동인련 활동가들과 퍼포먼스를 준비하는 몇몇 회원들은 퍼레이드 며칠 전까지도 노출에 관한 고민을 쉽게 놓지 못했다. 준비 초반 애도분위기가 가시지 않은 사회분위기 속에서 ‘수위’를 조율해야 한다는 심적 부담을 져야 했지만, 본래 계획했던 표현의 당위까지 무시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빤스퍼레이드’, ‘동성애자광란파티’ 따위로 자신들을 비하하는 공격을 접하면서 ‘가만히 있’지 않기로, 기왕 작정하고 벗는 화끈하게 벗어주기로 결의를 다졌다고 전한다. 결과적으로 퍼포머들은 퀴어퍼레이드를 비하하고 공격했던 언어를 그대로 전유하여 기꺼이 벗음으로써 ‘급진적’인 시각성을 획득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세월호 추모 운운하면서 동성애 반대하고 ‘대-한민국’이나 외치는 이들 앞에 움츠릴 것이 뭐가 있나 싶기도 하다. 한간에는 우리에게 ‘노출의 역사’가 없었고, ‘외국 따라하는데 급급하다’는 비판이 안팎에서 제기되고 있는데, 모르고 하는 소리다. 이미 역사는 만들어지고 있지 않은가.

 

극단적인 비판의 다른 편에는 ‘동성애를 반대하지는 않지만 노출은 된다’는 관용적 회유가 논점을 어지럽힌다. 여기에는 ‘대중의 인식’을 감안하여 표현을 자제하라는 기기묘묘한 방패막이가 부연으로 첨언된다. 노출 자체가 강도 높은 표현임에도 쉽게 규제할 수는 없기에 일반화된 대중을 논거에 끌어들여 자제를 요청하려는 심산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사용하는 ‘대중’이 성소수자의 표현을 감시하고 구속하는 ‘규범’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타협가능성을 앞세워 제재의 효과에 편승하는 것이 아닌지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가령 회유는 노출을 자제할 경우 ‘건전한’ 동성애자 이미지를 성취하여 동성애에 대한 찬성여론이 것이라는 ‘조건부 관용’의 성격을 갖는다. 하지만 대중 운운하며 자제를 요청하는 태도는 어떤 확신도 근거도 없이 실체 없는 ‘여론’을 오용한다는 인상이 짙다. 단적으로 우리는 얼마 치른 대구퀴어문화축제에서 수백 명의 반대세력들을 또다시 맞닥뜨려야 했다. 노출이라곤 거의 없어 시각적으로 건전하기 그지없었던(개인적인 감상이다) 대구에서도 보수 기독교 세력들은 여전히 동성애가 죄악임을 외치며 수백 명이 한데 모여 회개와 저주의 기도를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

 

어쩌면 동성애 반대세력에게 노출 자체는 시비를 걸기 위한 음해일 , 벗는 자체는 애당초 관심이 없는지 모른다. ‘종북타도’를 외치며 속옷까지 벗어던지고 도로를 질주하는 할아버지들이나, 반대피켓을 들고 신촌거리를 활보한 ‘전자발찌’도 눈감아주던 그들이 아닌가. 전략적인 관점에서건, 개인의 표현 욕구에서건 우리에겐 표현을 재고해야할 추호의 명분도 여지도 없다. 오히려 사방에 넘쳐나는 헐벗은 몸들이 상품이미지로 유통되는 나라에서 ‘노출 논란’의 좌표를 재정위하기 위해서는 다른 결의 접근이 필요하다. 말하자면 노출반대논리의 핵심에는 동성애자를 위시한 성소수자가 금기이자 죄악이고, 광란적으로 문란하며, 수치스럽고 더러운 헐벗은 존재라는 비하가 각인되어 있는 것이다. 이들에게 동성애자는 사회에서 보이는 자체로 불편하고 신경 쓰이는 존재일 , 수위를 낮추라는 회유성 언급은 어디까지나 공공장소에서 쉽게 눈에 띄지 말라는 것과 다름없다.

 

하여 우리는 우리의 노출이 벽장문을 부수는 적극적인 ‘결기’의 표현이라는 해석을 다시금 제시할 있다. 기실 이는 사회적 소수자들의 노출에 오랫동안 부여되어온 의미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다소 지루해지기 쉬운 노출표현에 바짝 긴장을 당겨준 빤스 운운하며 성소수자의 ‘빤스고무줄’을 당긴 호모포비아들이다. 음지로 내몰려온 자신의 몸을 전시하는 행위는 선정적이기에 앞서 정치적인 실천으로, 나아가 선정성 여부와 공적으로 전시 가능한 몸을 판단하는 기준 자체에 질문을 던지는 행위로 생각할 있다. 그리고 방식은 다양한 경로로 가시화되고 교차한다. 혹독한 관리를 통한 욕망에 충실한 몸의 과시일 있고, 이성애 남성중심의 관점에서 성적 대상으로 표상되어온 몸을 전유하거나 조롱하는 시도일 있다. 나아가 성별이분법에 여과되지 않는 몸을 드러내는 전략일 있으며 살찌거나 마른 , 살이 트고 수술자국이 선명한 , 질병과 장애를 가진 , 트러블 많은 정상성의 규범을 거부하고 저항하거나 새로운 교환질서로 표상되는 몸일 있다. (한간에는 벗은 몸들이 ‘미적으로 떨어진다’는 불평이 더러 있다. 표면적으로 이는 정치를 배제한 개인적인 감상이라고 주장될 있으니 논외로 있다. 하지만 호기롭게 벗고 나온 그들의 몸이 당신의 미적 규범을 폭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일이다. 다양한 몸을 마주하면서 당신의 불편함이 어디에서 연원하는지, 부디 당신의 ‘기준’을 한번쯤 되물을 있다면 좋겠다.)

 

다소 짓궂은 평가이겠으나 노출수위를 높였으니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 않았느냐는 긍정도 가능할지 모른다. 더불어 노출에 초점이 집중됨에 따라 반대논리 안에서도 ‘혐오는 아니지만(또는 인권을 지지하지만) 노출은 자제’하라는 ‘우회적’ 입장이 분리되어 나온 것이 아니냐는 해석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우려되는 점은 노출을 퀴어퍼레이드의 주된 주제로 삼았을 발생할 있는 오해들이다. 퀴어퍼레이드를 노출로만 접근하는 논거는 당사자들이 벗게 배경과 ‘어떻게’ 벗었는지의 내용을 생략할 아니라 (노출에도 구호가 필요한 것일까), 만여 명이 훨씬 넘는 참가자들의 외침들을 도매금으로 매도할 소지가 크기 때문이다. 우리의 노출이 가십으로 끝나지 않고 그간의 논의들을 소모적인 뒷담화로 남겨두지 않기 위해서는 이후에도 거리로 나올 다양한 표현들과 함께 일련의 논점들을 나눌 있는 논의의 장을 지속적으로 열어가야 한다.

 

 

기억해내기 위한, 기억을 표현해내기 위한 혐오와의 투쟁

 

워나로위츠는 92 에이즈 합병증으로 세상을 등졌다. 하지만 ‘재현의 전쟁’은 근래에도 끝나지 않았다. 2010 워싱턴 스미소니언 국립초상화미술관에서 열린 전시 "Hide/Seek: Difference and Desire in American Portraiture." 전시된 작가의 작업 < 뱃속에 > 기독교 연맹의장과 몇몇 공화당원의 반대로 스미소니언협회에 의해 특정 장면을 삭제당한 것이다. (앞서 언급한 90년도 <하이 퍼포먼스>지에 표지로 실었던 이미지의 영상이다.) 삭제된 부분은 십자가 예수 위로 개미가 지나다니는 장면이다. 사회를 뒤덮은 에이즈 위기 속에서 몸을 잠식하는 HIV바이러스를 연상시키는 소재들은 삭제를 강요하는 세력에 의해 신성 모독적이고 세금 낭비라고 반박되었다. 일방적인 검열은 80년대 에이즈 위기 당시 질병당사자로서 심리적 압박을, 작가와 연결된 집단적 상처로서 에이즈 위기를 맞아 극복해온 역사를 지우는 행위에 다름 아니었다.

 

검열소식을 듣고 사람들은 곧바로 항의전화와 서신을 끊임없이 보내고, 미술관 앞에 모여 그의 자화상 피켓을 들고 시위를 진행했다. 전시기획자들은 목소리를 모아 비판성명을 내고 언론에 투고하는가 하면, 비영리미술관 등에서는 종일 상영회를 갖거나 개인단위로 전시장 바깥에 영상을 틀어놓고 1 시위를 하는 다방면으로 항의를 표시했다. (어딘지 친숙한 대응들이다.) 시위는 동성애혐오적인 근본주의 기독교와 보수적인 사회도덕이 여전히 영향을 미치는 사회에 일격을 가하는 행위였지만, 다른 한편으로 에이즈를 안고 떠난 작가를, 더불어 집단의 상처를 기억하는 노력을 표현하는 방식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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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뱃속에 >(Film In Progress)스틸, 1986-87, Super 8mm film, black and white & color (transferred to video). Courtesy of The Estate of David Wojnarowicz and P.P.O.W Gallery, New York and The Fales Library/Special Collection, New York University.

(오른) 국립 초상화 갤러리 계단에 시위장면, 2010 12. Courtesy the Washington Post, photo: Bill O'Leary.

 

 

89년과 2010 작가를 비방했던 이들처럼 2014 지금 한국의 동성애 반대세력들은 퍼레이드 이후 노출한 이들의 적나라한 포즈만 짜깁기하고 동성애반대문구를 실어 퀴어퍼레이드의 의미를 왜곡하고 실추시켰다. 말하자면 퍼레이드 이후 악의적인 수를 놓은 것이다. 이에 우리는 어떻게 맞수를 놓을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행사당일 동성애반대 기독교세력의 방해에 대구퀴어문화축제 측이 검찰고소를 넣은 것과 법적절차를 밟기 위해 서울에서 일어난 혐오사례를 수집하는 시도들은 일종의 선방일 것이다.

 

이번이 번째 퍼레이드라고 밝힌 청소년 참가자는 ‘낯선’ 거리의 모습이 지난해보다 익숙했다는 소감을 밝혔다. 노출이든 드랙이든 아무리 낯선 타자의 몸일지라도 계속 보고 접하면 금세 익숙해진다는 만고불변의 진리가 다시 확인된 셈이다. 하지만 /녀의 언급은 서사와 맥락을 외면한 자극적인 문구와 이미지들이 금세 소비되고 지루해지기 쉬울 있다는 역시 시사한다. 우리의 노출이 ‘노출’에 갇혀 소비될 가능성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것이 노출을 둘러싼 표현의 고민을 내려놓게 명분이 수는 없다.

 

그렇다면 고민의 발은 반대세력들이 ‘빤스의 블랙홀’로 논점들을 가져가는 동안 감춰질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들을 뒤돌아보는 시도가 아닐까? 상호 기억을 듣고 읽는 노력이 다시금 표현의 정치적 가능성을 제시할 있으리라는 희망은 이야기가 아니다. 여기에는 듣지 못한 수만 개의 경험들이 무엇이었는지, 우리가 드러내려던 몸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숙고와 더불어 당신의 목소리에 기울이는 시도가 함께 요청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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