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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성인 활동354

웹진 ‘랑’ 일년 돌아보기 동성애자인권연대 웹진 너, 나, 우리 ‘랑’이 탄생한지도 어느새 일 년이 넘었습니다. ‘랑’은 ‘함께’라는 의미의 순우리말로 2008년, 활동의 새로운 10년을 전망하며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동성애자인권연대는 활동 초기부터 월간 혹은 계간으로 인쇄물 형식의 소식지를 발행해 왔습니다. 하지만 2006년 이후 2년간은 힘겨운 단체 재정으로 소식지를 발간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회원 분들의 소중한 의견과 우리의 힘찬 활동을 더욱 널리 알리고자 노력한 끝에, 2008년 온라인을 통해 새롭게 소식지를 선보일 수 있었습니다. 그럼, 동성애자인권연대의 생생한 활동 소식과 주장, 여러 흥미로운 글들이 가득한 ‘랑’을 몇 개의 숫자로 한번 되돌아볼까요? 24,900 현재까지의 ‘방문자 숫자’입니다. 월 평균 1,500.. 2009. 7. 6.
누구에게도 퀴어하지 않은 퀴어문화제가 되길 2009 퀴어문화축제 퍼레이드 참가기 4. 친구와 단 둘이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던 중이었습니다. 친구가 저에게 물었지요. “주말에 뭐 할거냐?” 저는 서울에 가서 ‘퀴어문화제’에 참석할 거라고 대답했습니다. 그게 뭐냐는 친구의 질문에 성소수자들이 모여서 당당하게 정체성을 드러내고 축제를 즐기는 자리라고 대답했지요. 5초 쯤 생각한 다음, 친구가 물었습니다. “거길 네가 왜 가냐?” 저도 5초 정도 생각한 다음, ‘뭐랄까, 인권의식을 함양하기 위해, 라고나 할까-’라고 대답했습니다.(함양이라는 단어가 좀 우습지만, 정말로 저도 모르게 그런 단어가 튀어나왔습니다.) 친구는 희한하게 작동하는 조형물을 감상하는 표정으로 5초가량 저를 쳐다보더니, 한 마디 했습니다. “아 그래.” 저는 같이 가자고 권했습니다. .. 2009. 7. 6.
퀴어문화축제를 가게 되기까지... 2009 퀴어문화축제 퍼레이드 참가기 3. 내가 퀴어문화축제에 처음 참가한 것은 2007년, 바로 재작년. 그 때 나는 라틴 회원이 아니었기 때문에 참가경위가 자세히 기억나진 않지만, 지금 기억으로는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라는 카페에 올라온 퀴어문화축제 개최공지를 보고 참가했던 것 같다. 거기서 ‘아수나로’ 회원이자 라티너인 해밀을 만났고, 그로 인해 퍼레이드에 처음 참가했음에도 적응을 잘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때까지만 해도 나는 당시로부터 2년 전(2005년) 나 자신의 첫사랑이 여자였음을 까맣게 잊은 채 인식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내가 처음부터 이 세상에서 가장 흔한 '이성애자'는 아니었다는 사실도 말이다. 잠시 다른 얘기로 그것도 슬픈 얘기로 빠지자면, 난 첫사랑에 첫 아웃팅을 당해본 경험이.. 2009. 7. 6.
미소가 떠나지 않던 날 2009 퀴어문화축제 퍼레이드 참가기 2. 친구에게 물어봤다. “넌 ‘인권’이나 ‘인권운동’하면 어떤 생각이 들어?” “글쎄, 잘 모르겠는데…난 좀 부정적?”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 인권운동이란 이런 이미지 아닐까. 오랜 기간 억압을 받아온 듯한 표정과 그에 걸맞는 옷차림을 한 사람들이 어둠의 세계에서 하는 그 정도의 일. 이 부정적인 이미지와 실제가 괴리감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인권운동을 비롯한 각종 운동의 지나친 비장함은 그런 이미지를 생성해내는데 일조했다고 생각해왔었기에, 이번에 처음 참석해본 퀴어문화축제는 나에게 발상의 전환을 가져다주었다. 운동과 즐거움은 하나가 될 수 있구나. 시종일관 화려하고 유쾌했던 그날의 축제 속에서 내 얼굴에서는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축제를 통틀어서 가장 인상이 .. 2009. 7. 6.
광주 기행문 - 동인련과 함께한 5월의 광주 신이에게 전화가 왔다. 글 하나를 쓰란다. 반갑지 않은 전화였다. 분명 부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특별히 월요일까지 시간을 주겠노라고 한다. 백수는 언제나 소심하고 한가해야 하기에 별 불평도 못하고, 딱히 핑계거리고 못 찾고, 그러겠다고 허락, 아니 인정했다. 갑작스럽게 찾아오신 이모 덕분에, 평소 새벽 5시의 클럽같이 휑한 우리집이 좀 소란스러워졌다. 그리고 덕분에, 평소보다 일찍 내방에 자리를 잡았다. 좋은 기회다. '글이나 써야겠다.' 망가진 컴퓨터 때문에 손글씨를 써야한다는 생각이 미치자, 내 마지막 섹스 때 굴렸던 나의 몸보다 오랜 시간동안 쓰지 않았던 연필을 찾기 위해 책상을 뒤지기 시작했다. 연필, 연필깎기, 종이는 꼭 이면지어야 하고, mp3에, 적당한 .. 2009. 6. 1.
4월 이야기 동인련 4월 회원프로그램 '외출' : 벚꽃놀이 참가기 영화 가 개봉한 것은 내가 고3이었던 무렵이었다. 수능 시험이 끝나고 대학에 입학한 이듬해 4월, 나는 친구의 자취방에서 그 영화를 보았다. 벚꽃이 비처럼 우수수 떨어지던 계절이었다. 마츠 다카코가 우산 속에서 청초하게 미소 짓는 의 포스터를 볼 때면, 아직도 아련하게 그 시절의 기억이 떠오른다. 그 기억은 가물거릴 듯 선명하고, 따뜻하면서도 스산한 바람이 부는 흐릿한 풍경이다. 기억과 욕망으로 얼크러진 잔인한 4월이 다시 돌아왔다. 동인련은 이토록 잔인하게 아름다운 4월을 맞아, 꽃비나리는 봄의 산 속으로 잠시 외출하는 특별한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스무 명이 넘는 회원들이 참가했고, 우리 모두는 일상의 욕망을 떠나 살구 빛 봄 속으로 녹아들었다. 조.. 2009. 4. 28.
세상을 아름답게 비출 또 하나의 무지개별 - 먼저 하늘로 간 동성애자인권연대 회원들을 추모하며 - 평소 같았으면 기억도 나지 않을 꿈 때문에 중간에 몇 번이나 깼을 법한데 그 어느 때보다 깊은 잠을 잔 것 같다. 너무 슬프고 서러웠던 장례 때문이었을까. 술에 취했는지, 슬픔에 취했는지도 모른 채 이틀간을 장례식장에서 지내다보니 많이 지쳤었나보다 오랜 시간 뇌종양 말기로 투병생활을 해 왔던 故 원희영(단영) 회원이 3월11일 사랑하는 파트너와 친구,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먼저 하늘로 떠났다. 늦은 새벽 핸드폰 진동소리에 잠깐 일어난 나는 전화를 건 이의 이름을 보고 직감적으로 A가 파트너의 부고를 전하려고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그 어느 때보다 침착한 목소리로 희영씨가 편안한 얼굴로 하늘로 떠났음을 알려주었다. 그날 밤 급하게 회사 .. 2009. 3. 30.
동인련 회원프로그램 ‘외출’ 10여년 동안 활동가, 회원, 후원회원… … 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사람들이 동인련을 스쳐갔다. 그러는 동안 동인련은 어느새 훌륭한 동성애자 인권모임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깃발을 들고 집회에 나가는 등의 활동에 부담을 느끼거나 쉽게 적응하지 못해 떠나버린 회원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은 지금 다 어디에 있는지(어디 있는지 안다면 잡아오고 싶다). 이젠 거리에 나가서 힘차게 우리의 요구를 외치고 정치적인 활동을 하는 것 못지않게, 기존회원간의 친목을 도모하고 서로의 삶을 격려해줄 수 있는 프로그램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처음 모임에 나오는 사람이 있더라도 편안하게 동인련의 활동과 사람들에게 적응할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 이러한 취지로 시작한 2009년 회원프로그램 “외출”이 벌써 두 번의 .. 2009. 3. 30.
2009년 동성애자인권연대 총회 날씨가 아직 쌀쌀했던 3월 7일, 2009년 동성애자인권연대의 정기 총회가 열렸다. 총회 시작 전에 이번 웹진 글로 총회를 스케치 해달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제대로 된 후기 같은 걸 쓴지 반년도 넘은 상황이어서 제대로 쓸 수 있을지 겁부터 났다. 하지만 웹진을 통해 동인련의 그간 활동을 집약해서 보여주는 일도 동인련을 알리는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인련이 뭐하는 단체야?’라고 물어봤을 때 ‘이거 읽어봐.’라고 해줄 수 있는 그런 스케치가 되었으면 하는 생각으로 총회를 하는 동안 어떤 식으로 쓸지, 어떤 사진을 넣을지 많은 고민을 했었다. 하지만 고민만 한 덕분인지, 마감을 며칠 앞둔 상황에서 다시금 총회를 생각하려니 머리가 반은 백지가 되어버린 느낌이 든다. 찍어둔 사진을 보고 있자면 한.. 2009. 3. 30.
네 시작은 미비하나 끝은 창대하리라 * 활동소식 _ 2009 겨울 동인련 청소년 세미나 "청소년 이반, 인권활동을 위한 첫 걸음" ‘이반만세’는 ‘이반들의 (자신)만만한 세미나’라는 이름을 줄여서 만든 2008년 동인련 세미나 이름이다. 2008년 여름에 기획해서 정말 가볍게 진행하려고 했던 것이 갈수록 스케일이 커졌고, 이반만세가 끝난 후 다시 세미나를 준비하기 위해 회의를 할 때까지만 해도 일이 이렇게까지 커지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다음 이반만세 주제를 잡다가 내가 ‘청소년’을 주제로 건의했고, 그러다가 비공개 겨울 세미나가 순식간에 잡혔고, 청소년 자긍심 팀이 갑자기 확 커지더니 ‘무지개 학교 놀토반’까지 열게 되었다. 처음 기획 때까지만 해도 정말 아무도 예상하지 못 했다. 이번 세미나는 이름도 참 길었다. 풀 네임이 2009.. 2009. 2. 27.
열 가지 키워드로 알아 본 2008 동인련 활동 “나이가 든 다는 것은 단순히 쇠락만은 아니네, 그것은 성장이야” “삶에서 의미를 찾았다면 더 이상 돌아가고 싶지 않아. 앞으로 나가고 싶어하지. 더 많은 것을 보고, 더 많은 일을 하고 싶어하지...” -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중에서 - 동인련도 이제 한 살을 더 먹었습니다. 조금 있으면 초등학교도 졸업할 나이가 됩니다. 세월이 유수와 같다는 말이 정말 새삼스럽게 떠오릅니다. 새해를 맞이할 즈음이면 개인이나 단체 할 것 없이 지난 1년을 돌아보며, 목표했던 바를 얼마나 이루었는지 돌이켜보게 됩니다. 시작조차 못한 일들도 있고, 마무리가 되어 갈수록 흐지부지되어버린 일들도 있을 것입니다. 동인련도 마찬가지입니다. 2008년 12월 여러 동인련 회원들이 함께 모여 1년 동안 우리가 일구어 온 활동들을 점검.. 2009. 1. 30.
서로에게 '말 걸기' -Part 1. 동성애자인권연대 회원이야기 앞으로 3회에 걸쳐 동성애자인권연대 내부의 이야기 (회원이야기, 활동이야기, 꿈이야기)를 해 보려고 합니다. 개인마다 감추고 싶은 비밀도 있고 자랑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듯이 단체 활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11년 동안 참 많은 회원들이 거쳐 갔고 또 많은 활동들이 있어왔지만 우리에게, 서로에게 솔직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밝히기 싫은 것은 철저히 숨기기 바빴습니다. 단체 활동도 사람이 만들어 나가는 것! 사람 냄새나는 동인련을 만들기 위해 다시 출발선에 선 다는 마음으로 이 글을 적습니다. 지난 활동을 되돌아보고 현재를 점검하며 앞으로 더 나은 활동을 만들어나가는데 초석이 되었으면 합니다. Part 1. 동성애자인권연대 회원이야기 최근 동성애자인권연대(이하 동인련) 내부에서는 단체명을 변경해야 되지 않.. 2008. 8. 25.
이반만세 돌아보기 오리 동성애자 인권연대에서 진행하는 세미나는 이번이 처음이다. 조그마한 방 안에 옹기종기 모여, 처음 보는 사람들과 동성애의 역사, 문화를 이야기하고 있다니. 새롭다. 일상의 공간에서는 이런 이야기가 나와도 아웃팅 당할까봐 참거나, 호모포비아 발언을 고쳐주고 단어 설명해주느라 시간을 다 잡아먹곤 하는데. 이 사회에서 성소수자는 세미나도 제대로 하기 힘들다. 이제야 조금 세미나하는 맛이 나는구나. 역시 세미나는 많은 생각거리를 던지고, 후기는 복잡했던 머리를 정리시켜 주는 것 같다. 안타깝게도 이 글에는 나의 관점만이 들어가서 풍부하고 다채로운 이야기와 농담이 삭제되어 있으니, 궁금하면, 다음 세미나에서 만나요. 세미나 첫 번째는 주제는 “동성애의 역사”였다. 사회의 경제, 정치적 구조에 따라 동성애를 포.. 2008. 8. 25.
2박 3일 동안 동인련과 '랑'하기 아니마 지난 1일부터 3일까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2박 3일의 동인련 워크샵 '랑(함께라는 뜻의 우리말)'을 다녀왔다. 주말에 비가 올 것이라는 기상청의 예보가 있었지만 다행히도 왔다 그치기를 반복해서 큰 문제는 없었다. 큰 비가 한 번에 내리고 맑게 개었으면 무지개를 볼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은 남았지만 말이다. 어쩌다보니 선발대가 되어버려서 떠나는 날 일찍 사무실에 나와 짐을 옮기고 아용이 형 차를 타고서는 먼저 가평으로 출발했다. 심상치 않게 생긴 먹구름이 하늘을 빼곡하게 덮고 있어서 불안한 마음이었지만 어디론가 떠난다는 설렘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중고등학교 때 가던 수학여행이나 대학교 때 가던 OT, MT는 아는 사람들끼리 가는 것이어서 긴장감 같은 것이 없었는데 모르는 사람들과 같이.. 2008. 8.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