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림(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안녕하세요? 호림입니다. 이번 활동가 편지는 활동가보다는 올해 초 따끈따끈한 석사학위를 받은 새내기 연구자의 정체성으로 써보려고 합니다.

 

맥락 없이, 자료는 무의미하다(Data is meaningless without context)’라는 말이 있습니다. (주로 숫자로 주어지는) 자료는 맥락에 의해 비로소 구체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음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숫자는 그 자체로 객관성과 확실성을 담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오류의 가능성 위에 위태롭게 놓여있으며, 언제든지 잘못된 해석을 통해 왜곡될 수 있습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자주 등장하는 예시로 시간대별 교통사고 발생률이 있습니다. 통계에 따르면, 밤보다 낮 시간대의 교통사고 발생률이 더 높다는 것인데요. 낮 시간대의 통행량이 더 많다는 맥락을 놓친다면, 낮 시간의 운전이 더 위험하다는 잘못된 해석에 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양적 연구에서 숫자를 모으고 통계적 분석을 하는 일보다 중요한 것은 기존 연구와 이론을 바탕으로 의미 있는 연구 가설과 모형을 설정하고, 수집한 자료의 분석 결과를 제대로 해석해 내는 일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수집, 축적된 맥락을 가진자료와 자료에 대한 해석은 인간의 물리적 한계를 넘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에 대한 이해를 비약적으로 확장시켜 줍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이와 정반대의 일들을 벌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불확실성의 기반위에 놓인 숫자가 마치 완전한 객관성과 확실성을 담보하는 것처럼 포장하고, 자료가 놓인 맥락을 의도적으로 제거하거나, 왜곡된 해석을 덧붙이는 이들입니다. 이들은 사회적 지위와 명성을 위해 혹은 경제적 이득을 취하기 위해, 때론 자신의 불합리하고, 근거 없는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자료를 의도적으로 왜곡합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들이 떠오르지 않으시나요? 이러한 자료의 의도적 왜곡은 성소수자 차별 선동 세력이 만드는 유인물과 자료, 신문기사에서 자주 찾아볼 수 있는 것들이죠. 이들은 남성 동성애자의 HIV 유병율이 일반인의 000배 높다는 선정적인 주장을 위해 동성애자 비율을 말도 안 되게 적게 추정하고 그 근거로 출처가 불분명한 그래프와 숫자를 붙여 넣습니다. 한국에서 HIV 감염경로 중 동성 간 성행위가 높은 비율을 차지한다는 사실은 부각시키지만, HIV가 더 이상 죽음의 질병이 아니며, 한국은 세계 최저 수준의 HIV/AIDS 유병률을 보이는 국가라는 중요한 맥락은 언급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럴 듯 해 보이는 출처와 숫자가 덧붙는다고 그들의 주장에 결여된 정당성과 합리성이 갑자기 생겨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이 행하는 자료의 왜곡이 보여주는 건 그 자료를 통해 정당화 하고자 하는 그들의 주장이 곧 도태될 수밖에 없는 비합리적인 것들임을 폭로하는 것뿐입니다.

 

과학은 우리의 편입니다. 저는 맥락을 가진 자료와 자료에 대한 해석을 축적하는 학문인 과학을 통해서,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 대한 인간의 이해가 확장될수록 성소수자에 대한 낙인과 편견은 줄어들 수 있다고 믿습니다. 많은 분들이 아시다시피, 정신질환에 대한 진단 및 통계편람인 DSM에서 동성애가 삭제된 데에는 동성애자가 정신질환이 아님을 과학적으로 규명한 심리학자 에블린 후커(Evelyn Hooker)의 선구적 연구가 큰 공헌을 했습니다. 또한 성소수자에 대한 낙인과 차별이 성소수자의 삶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들은 성소수자라는 존재를 문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성소수자를 둘러싼 환경에 주목하도록 했고, 이를 변화시키기 위한 사회문화적, 정책적 흐름에 기여했습니다. 미국 동성혼 법제화를 이끈 재판 과정에서도 보건과학 연구자의 의견서가 큰 영향을 미쳤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처럼 성소수자에 대한 병리적 관점이 변화해 온 역사적 과정은 과학이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낙인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음을 잘 보여줍니다.

 

요즘, 모 일간지를 통해 화나는 기사를 자주 접하고 있습니다. 성소수자 커뮤니티 내에서 남성 동성애자인 HIV/AIDS 감염인의 삶을 기록하고, 조명하기 위해 만들어 진 자료집, HIV 예방과 감염인에 대한 보호와 지원 확대를 위한 정책전략을 수립하기 위해 작성된 보고서, 소수자 청소년의 인권 실태를 알아보기 위해 수행된 조사 자료의 일부를 맥락 없이 발췌해서 작성한 선정적인 기사들 때문입니다. 너무나 투명하게 드러나는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이를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파(!)하겠다는 악의에 화가 나서 맥이 풀려버리기도 합니다. 때론 맥락 없이 인용된 자료들로 인해 누군가는 그 기사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드릴 것이라는 생각에 크게 위축되기도 합니다.

 

아마 그런 기사를 접하는 다른 분들도 비슷한 마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럴 때마다, ‘과학은 우리의 편이라는 말이 위축된 마음을 펼 수 있는 자신감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성소수자 차별선동 세력의 악의적 주장을 마주하는 순간의 분노들이 그들이 그렇게나 좋아하는 숫자를 통해 그들의 주장을 깨부수고, 성소수자 인권을 증진할 수 있는 연구와 활동에 동력으로 이어졌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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