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 l2lMrFox(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성소수자 인권학교 제3강 <장애를 이해하는 방식들 : 다름이 문제인가?> 는 인터넷 장애인 언론 ‘비마이너’ 의 발행인 김도현씨가 해주셨습니다.
 
인류 200만년 역사 중 3~400년 전 까지만해도 인간 사회에는 ‘장애인’이 없었습니다. 불과 3~400년 전 근대자본주의가 시작되면서, 시각·청각·발달·지체 등의 장애인을 비장애인과 구분하기 시작했습니다.
 
장애와 비장애 뿐 아닙니다. 근대는 분리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세상에는 각각의 인종이 있는데, 백인종이 식민 지배 이후로, 그 다양한 인종들을 단지 백인종과 유색인종으로 구별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양한 특징을 가진 사람들을 한데 묶은 범주를 만드는 것에는 권력관계가 관여합니다. 비단 ‘인종’ 에 관한 것뿐 아니라, ‘장애인’과 ‘동성애’도 마찬가지로 객관적 범주가 아닌 권력관계로부터 형성되었습니다. ‘비장애인’ 과 ‘이성애’ 라는 하나의 제도가 있기에 등장한 범주라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어디까지 ‘장애’라고 볼 수 있을까요? ‘장애’에 대한 정확한 규정은 고작 몇 십 년 전에 등장했습니다. WHO는 1980년에 ‘사람의 몸에 손상이라 불릴 수 있을 만한 것이 존재하고, 그것으로 인해 무언가를 하는데 제약·불능이 있어 사회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게 되는 것’을 ‘장애’라고 규정했습니다. 맞는 말 같으면서도 한편으론 조금 꺼림직합니다. 예컨대 휠체어를 탄 사람이 일반 버스를 타려면 장애를 경험합니다. 한편으로 동일한 손상을 가진(휠체어를 탄) 사람이 저상버스를 탈 경우, 장애를 경험하지 않고 문제 없이 탈 수 있습니다. 휠체어를 탄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버스가 문제라는 뜻이지요.
 
비슷한 예를 다시 하나 들어봅시다. 농·맹인들은 ‘의사소통을 할 수 없음’ 이라는 장애를 경험한다고 말합니다. 생각해 봅시다. 과연 농·맹인들이 ‘농·맹’ 의 손상 때문에 장애를 경험하는 걸까요? 내가 영어를 배운 적이 없다고 가정해 봅시다. 한국어를 배운 적이 없는 누군가가 ‘나’ 에게 와서 영어로 말을 걸면, ‘나’ 는 당황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 는 ‘그런데 한국에서 왜 영어를 못한다고 당황해야 하는가?’ 라는 생각을 하면서, 영어로 말을 건 사람에게 한국어로 답을 합니다. 나와 영어로 말을 건 누군가 사이에서는 서로 의사소통이 불가능 하겠지만, 영어로 말을 건 사람은 한국어로 대답한 ‘나’를 ‘의사소통 할 수 없는 사람’ 이라 생각하지는 않을 것 입니다. 농인(聾人)과 청인(聽人) 사이의 의사소통도 마찬가지 입니다. 농인과 청인 각자의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농인에 대해 ‘의사소통을 할 수 없는 사람’ 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결국 세상이 ‘청인 중심’ 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 나와 누군가가 서로 의사소통 하려면 서로 상대의 언어를 배우거나 중간에 통역사가 들어와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농인과 청인이 의사소통 하려면 청인이 수화를 배우거나 수화 통역이 필요한 상황에 제공되어야 합니다. 만약 농인과 청인이 서로 의사소통 하는 것이 가능해 진다면, 최초의 의사소통불능 원인을 ‘농인의 손상’ 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장애인들은 활동보조서비스에 관련한 투쟁을 하고 있습니다. 이명박씨가 서울시장 임기 할 때인 2006년 4월 28일, 한강대교에서 중증 장애인 50명이 전동휠체어를 버리고 온몸으로 한강대교 건너는 투쟁을 벌였습니다. 투쟁 이후 지자체와 정부에서 활동보조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그러나 ‘활동보조서비스는 자립을 위한 서비스인데, 인지영역에 손상이 있는 사람은 자립을 할 수 없다’는 이유로 보건복지부에서 발달장애인을 서비스 제공대상에서 제외한다고 밝혔습니다. 발달장애인이 애초 자립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활동보조서비스를 제공할 수 없다는 논리입니다. 여기서 자립 불가능의 원인은 과연 ‘손상’ 때문일까요? 또한 장애인들은 탈시설 투쟁을 하고 있습니다. 서울시는 탈시설 5년 계획’ 에서 ‘5년동안 서울시 관할 시설거주장애인의 장애인 중 20%(600명)을 자립시키겠다.’ 라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그러나 총 장애인 중 발달장애인은 7% 이며, 시설 밖에 있는 발달장애인은 70% 입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손상 때문에 무언가를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면, 과연 무엇이 할 수 없게 만드는 걸까요? 바로 차별과 억압 때문입니다. 손상은 ‘장애’ 로써, 흑인은 ‘노예’ 로써, 섹스는 ‘젠더’ 로써 차별과 억압을 받고 있습니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차별과 억압’ 이 개인관계로부터 발생하는 것이든 구조적인 것이든 상관 없이 차별과 억압이 애초 이들의 자립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장애인이라 차별 받는 것이 아니라, 차별을 받아서 장애인이 되는 것 입니다. 그리고 장애인 이라는 ‘labeling’ 에는 권력이 개입합니다.
 
이번 강의에서는 장애에 대한 지식과 정보들에 앞서 장애 자체를 바라보는 관점에 대해 고민할 수 있었습니다. 장애와 비장애를 구분하는 것에 사회인식과 제도가 분리의 효과를 얼마나 배가하고 있는지, 제한적인 정책과 사회서비스들이 장애인들을 지속적으로 고립시키고 있는지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어떤 정책이 필요할지, 어떤 인식변화가 요구되는지를 모색하는 일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강의를 통해 장애에 대한 접근을 고민할 수 있었다면, 추후에도 장애와 비장애를, 장애와 성소수자의 접점을 찾을 수 있는 기회들이 많이 생기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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