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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소식/퀴어퍼레이드

압도하는 스케일의 자긍심 행진, Taiwan LGBT Pride를 다녀오다

by 행성인 2015. 12. 7.

민수(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 필자는 비온뒤무지개재단에서 마련한 활동가생기충전기금에 이틀만에 후다다닥 작성한 신청서가 덜컥 선정이 되어 재단의 지원을 받아 해외의 퀴어 퍼레이드에 참여하였습니다. 이 글은 두번째 여정인 타이완 LGBT 프라이드에 다녀오고 나서 작성하였습니다. ** 




아시아 최대 규모, 8만명의 참가자 라는 이야기를 듣고서 막연하게 한번 가보고 싶다 라는 생각을 하긴 했었습니다. 병권 님의 작년 참가기를(여기) 보면서 더욱 호기심이 생기기도 했고요. 신청했던 금액보다는 약간 적게 지원을 받아서 잠시 망설였지만 원래 계획했던 두 군데를 다 다녀오는 걸로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방문하게 된 두 번째 여정, Taiwan LGBT Pride 입니다.


퍼레이드가 열리는 10월 31일 토요일, 총통부 앞 카이커다란 대도에는 행사 시작 예정이었던 1시 보다 더 일찍 참가자들이 와 있었습니다. 피켓으로 자신이 하려는 말을 어필하는 사람들도 많았고, 이날을 위해 무언가 다들 한껏 꾸미고 온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다른 퍼레이드보다는 규모는 적었지만, 기념품을 파는 일부 부스도 있었고요. 공식 기념품을 파는 부스는 아예 처음부터 줄을 서서 기다려 사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물론 저도 그 중의 한명이었지만요 ㅋㅅㅋ

 


1시가 되었을 때 카이커다란 대도에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우와.. 8만명이라는 이야기를 인터넷에서 봤을 때는 그냥 그렇구나… 하고 실감이 나질 않았었는데, 직접 눈으로 보니, 그리고 카메라로 담으려고 하니 정말 아무 생각도 나지 않을 만큼 스케일에 압도되었습니다. 

 


이 많은 사람들에 맞춰서 TLP의 퍼레이드 코스는 북쪽과 남쪽의 두 코스로 나눠집니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추측입니다만, 상대적으로 도심의 주요 번화가 스팟을 지나가는 가시성을 노린 코스가 북쪽, 이에 반해 주요 관광지를 끼고 있는 퍼레이드의 관광상품성을 노린 코스가 남쪽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나 합니다. (두 코스 다 적절히 배분되어 있기는 하지만요.) 어디로 가야 하나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ILGA 컨퍼런스나 Hand in Hand 와 같은 타 행사로 함께 참여한 활동가들이 있는 남쪽코스로 함께 돌았습니다. 




처음에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돈다는 사실에 흥분하여 즐거움에 소리를 질렀…습니다만 그런 패기는 30분도 안되어서 다 빠져나가고 멘탈도 산산히 부서져 나갔다고 합니다. 아시아 최대의 퍼레이드인 만큼 참가자에게 요구되는 체력과 의지도 스케일이 크더군요. 어우 정말 사람도 많지, 코스는 길지, 자긍심에 넘치던 초반과 피로감에 넘치던 후반의 대조감이란…!




아니 여기 사람들은 지치지도 않나. 무슨 트럭 위에서 2시간을 소리치고 춤추고 난리 부르스야… 아무리 자긍심의 뽕을 맞았다고 한단들 이렇게 쌩쌩하게 다닐 수 있단 말이야? 여러분 저는 글러먹었어요. 그냥 완주하는 것에 목적을 두고 걸었어요…

   



퍼레이드가 끝난 후 무대에서는 각계 각층에서의 사람들이 나와 발언을 했습니다. 올해의 대만 퍼레이드의 컨셉은 “연령무제한”이었습니다. 청소년 성소수자에 대한 이슈와 이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고자 하는 컨셉이었어요. 이에 맞춰서 교사, 학부모 등과 같은 각계 각층에서의 성소수자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지지 발언을 하기도 했고, 청소년 성소수자 당사자가 무대에 나와 커밍아웃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을 보며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만은 우리나라보다 “가족”이라는 개념에서 오는 보수적 가치를 중요시한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가족에게 만큼은 알릴 수 없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생활하는 사람들도 존재하지만, 가족들에게 먼저 인정받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해요. 성소수자를 가족으로 두는 당사자들 또한 ‘가족이기 때문에’ 다름아닌 자신들이 더욱 사랑해주고 지지해줘야 하지 않느냐 하는 의견들 속에서 더욱 성소수자를 지지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고 하네요. 지지 발언을 하는 사람들 속에서도 이러한 분위기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사랑에 대한 평등함과 소중함을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우리 아이들”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거든요. 




정당의 참여 및 연대 또한 대만 성 소수자 인권운동에 있어 큰 힘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대만의 제 1 야당인 민진당과 녹색당은 퍼레이드에 참여하고 성소수자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를 보내었습니다. 당선이 유력시되는 총통 후보의 공개적 지지발언도 한몫하고 있고요. 얼마전에는 정부 행정처가 주선하는 공개결혼식에 성소수자 커플 또한 참여하여 함께 식을 거행하기도 했지요. 결혼과 관련 법 제정 이후에 종교 단체를 비롯한 10만명의 혐오세력이 결집해 있기는 하더라도, 그리고 혐오와 차별에 대한 경계는 늘상 필요한 것이라 할 지라도, 대만에서의 상황은 아마 나빠지기 보다는 더 좋아질 일만 남아있지 않을까 합니다. 


행사장을 떠나며, 그리고 남쪽 코스 마지막에 보았던 자유광장을 지나가는 무지개 깃발을 다시 떠올리면서 어떻게 보면 이러한 현실이 부럽다는 생각도 함께 들었습니다. 우리나라로 치자면 광화문 광장 앞을 무지개 깃발과 함께 지나가는 거니까요. 퀴어 퍼레이드에서도 지나가게 된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아주 잠깐 들었습니다. 시위하려고 하면 차벽을 세우는 나라에서는 조금 실현되기 어려운 꿈 같은 일일지도 모르겠지만요. 



이번 일정에 거의 매일 빠지지 않고 나갔던, 타이페이의 번화가인 시먼딩의 유적지 홍루 뒷편에는 게이 바와 상점가로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퍼레이드 때처럼 술을 마시고 춤을 추는 사람들로 가득했고요. 야외 테라스에서 한잔 걸치고 있는 베어들, 속옷과 성인용품점에서 뭔가를 보고 고르고 있는 베어들, 머리를 자르고 마사지를 받고 있는 베어들. 어딜 가도 베어, 베어, 베어… 와… 말로만 들어왔던 “베어들의 천국”이라는 게 이런 거였군요. 홍루 뒷편으로 게이 거리가 이렇게 오픈된 방식으로 지나가는 사람들과 함께 어우러져 있다는 것은 굉장히 신기했습니다. 탁 트인 곳에서 오고가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는 점은 한국의 종로나 이태원의 바나 클럽과는 대조적인 느낌을 주었어요. 뭐, 한편으로는 ‘여기서만 놀아라’와 같이 ‘너희’ 구역과 ‘우리’ 구역을 보이지 않는 벽으로 나누는 것과 같은 폐쇄적인 맥락으로 읽히는 부분도 어떻게 보면 없지 않았지만요. (대만의 우호적인 분위기를 고려하면 기우에 불과한 이야기일 거에요!)

   

그리고 그 시끄러운 한켠에는, 어느 곳보다 조용하지만, 그 어느 곳보다 분주한 그룹이 있었습니다. 아무 소리도 없이, 그렇지만 손의 움직임 만큼은 굉장히 바빴던 8-9명의 무리. 아. 청각 장애를 가진 성소수자 그룹이었습니다. 일본에서 보았던 그들과는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대만에서 만날 수 있는, 소위 베어 부류들이 하는 체형, 옷차림, 머리스타일의 그것들로 말이에요. 그들이 나와서 어떤 활동을 볼 수 있다는 게 가능했었던 건 오픈된 거리여서… 이기도 하겠지만, 그럴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존재한다는 것도 굉장한 신선함으로 다가왔던 것 같습니다. 장애에 대한 편견은 제 안에도 아직 우아한 모습으로 포장되어 발견하지 못한 채로 존재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나아가야 할 곳은 어디일까요. 모든 사랑이 긍정되고, 모든 존재가 존중 받는, 언제쯤 우리가 생각하는 그 무지개빛 미래가 도래할까요. 그리고 그 미래는 어떠한 방식과 모습으로 우리가 쟁취해야 하는 걸까요. 일본에 다녀왔을 때 보다는 무거운 생각들로 머리를 채워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일부 사진 출처; 

Taiwan LGBT Pride 공식 홈페이지

Taiwan LGBT Pride Community 페이스북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