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 주: 이 글은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소모임 전국퀴어모여라 블로그에 중복 게재되었습니다.


 

속기: 모리, 레놀(전퀴모)


참석: 

- 재경, 태희, 어나더, 레놀, 모리(전퀴모)

- 벗들, 옥상별빛, 앤드(레즈비언생애기록연구소)

- 혜욘세(QIP)



 


자기소개


어나더: 저는 오늘사회를 맡은 어나더미입니다. 스물 두 살이고 서울에서 살고 있어요. 서울에서 왔어요. 고향도 서울이에요. 지금 행성인에서 부모모임과 전퀴모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어요.


태희: 저는 태희라고 하고 지금 행성인에서 전퀴모 대전회원들을 아우르는 역할을 하고 있어요.


재경: 저는 재경이고 행성인에서 전퀴모와 웹진팀을 하고 있어요. 고향은 광주, 서울에서 10년 살다가 6개월 전에 제주도로 이사 가서 제주도에서 살고 있어요. 나이는 스물 다섯에서 단식 중.


혜욘세: 저는 혜욘세이고 부산대 성소수자 인권동아리에서 기획을 맡고 있고 해운대에서 22년동안 살다가 동래로 이사 가서 살고 있어요. 24살입니다. 


벗들: 저는 벗들이라고 하고요. 레즈비언 생애기록연구소 부산팀 팀장을 맡고 있어요. 나이를 안 밝히는 게.. 나이가 많은 느낌이 들어서 안 밝히는 걸로 (웃음)


옥상별빛: 저는 부산에서 태어나고 부산에 계속 있는 부산 토박이이고요. 생애기록 연구를 하고 있고. 앤드님 짝지 분의 소개로 들어왔어요. 이런 모임이 있는지도 몰랐는데 들어와보니 괜찮더라고요.


벗들: 너무 사람들이 안보이니까 ‘일단 다단계로 시작을 하자’고 해서.. (웃음)


옥상별빛: 지인들 소개로 (웃음)


재경: 닉네임이 어떻게 되세요?


옥상별빛: 닉네임 말하기가 너무 힘이 들어서.. 생애연구회에서 처음 말한 닉네임이 있는데 그걸 말하기가 자꾸 힘이 들어서 말을 할까 말까. 옥상별빛이에요.


태희: 되게 좋은데요?


어나더: 줄여서 옥별님.


옥상별빛: 그건 저랑 좀 안 맞는 것 같아가지고요 (웃음)


앤드: 전 생애기록모임 들어온 지는 2년 정도 됐고 사실은 글쓰는 걸 좋아해서 가입을 했는데 아직 많은 성과는 내지 못하고 있고, 원래는 서울에 살았는데 지금은 부산에 와서 살고 있어요. 꼭 서울에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있었고, 하고 싶은 일도 있고 해서 내려왔는데요. 처음엔 아는 사람도 아무도 없어서 생애기록 모임에 가입하게 되었어요. 그 사이 애인도 생겼고요. 애인인 친구가 이쪽 친구들이 많아서 덕분에 옥상별빛님도 꼬시고. 


어나더: 벗들님은 어떻게 들어오게 되셨어요?


벗들: 저는 생애기록연구소 만든 수진님이 예전에 알던 사람이예요. 20대 때 부산에서 모임이 조그맣게 있었어요. 부산 여성 성소수자 인권센터라고. 그때 수진님이 서울에서 활동하고 계셨고. 그러다 부산모임이 없어져서 연락을 안하고 있다가 트위터 통해서 수진님과 연락이 되어서 다시 이야기 하게 되었어요. 수진님은 기록에 대한 굉장한 의지를 가지고 계세요. 그전에도 레즈비언 연구소라는 곳에서 계속 기록을 하고 계셨는데 그걸 이어가고 싶으셨나봐요. 그래서 몇몇 지인들한테 같이 해보자고 제안을 했고 저한테도 연락이 왔어요. 생애기록아카이브팀 팀장을 맡아달라고 연락이 와서 고민을 했어요. 부산에 있어서 도움이 될지 걱정이었는데 너무 아무 것도 안하고 있어서 뭔가 해야겠다 싶은 마음에 같이 하게 되었어요. 지금은 처음에 수진님이 그린 그림과는 조금 달라요. 생애기록 아카이브 팀이라고 하니까 너무 거창하고 힘들어서 저는 부산에 있으니까 아카이브팀을 빼고 아예 생애기록팀을 서울과 부산으로 나누자, 해서 부산팀을 다시 꾸리고 팀원들을 모집해서 만들게 되었어요. 서울과는 조금 떨어진 활동을 하고 있어요. 부산팀 안에서 우리끼리 생애기록도 하고, 이 안에서 할 수 있는 프로그램들 이것저것 해보면서 저희 색깔을 만들어가고 있어요. 


재경: 블로그 보니까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지면서 여러가지 활동을 하시더라고요. 저희 이름이 나온 것도 봤어요.


어나더: 회의록이 특이했어요. 대화체로 되어있더라구요.


벗들: 어차피 회의를 하면 이야기를 많이 하니까 이야기 회의록으로 기록하자고 한 거예요. 그래서 저희가 주고 받는 이야기를 다 기록해요. 나중에는 큰 의미가 되지 않을까 싶어서.. 


재경: 혜욘세님은 QIP에 어떻게 들어오시게 되었어요?


혜욘세: 태연씨와 같이 만든 초창기 멤버예요. 


재경: 부산대 성소수자 동아리에서 활동을 많이 했어요. 길원평 교수 사건대응도 하고.. 설명 좀 부탁드릴게요.


혜욘세: 그 분이 부산대학교 물리과 교수인데 홍석천씨 강연이 부산대에서 있었어요. 세미나 당일 날 그 강의실이 있는 건물 앞에다가 동성애를 하면 안 되는 이유에 대해서 세 장의 거대한 혐오 대자보를 붙이셨어요. 그래서 저희가 반박 대자보를 다섯 번 붙였는데 다 찢어지고.. 사람들이 다 찢고 가더라고요. 그래서 계속해서 붙이고 학내 다른 학우분들도 이 대자보를 찢지 말라는 대자보를 붙여주시고. 그렇게 일곱 차례 대자보를 붙여서 길원평 교수의 반응이 있을 줄 알았는데 전혀 없더라고요.


어나더: 부산대 성소수자 모임 소개도 간단히 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혜욘세: 저희는 ‘부산대 성소수자 인권 동아리 QIP(Queer in PNU)’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어요. 2013년 11월에 처음 4명이 모였고, 2014년 3월에 출범했어요. 국립국어원에서 ‘사랑’의 정의를 이성애중심적으로 바꿔서 문제가 되었을 때 대자보를 붙이면서 출범했죠. 부산대학교 성소수자 인권 동아리라고 되어있지만 부산대학교 학생은 스무 명 안팎으로 많지 않아요. 부산대 학생이 아니라도 부산 경남 지역에서 온 회원이 많아요. 대학생이 아닌 분들도 많이 오시고요. 그래서 그에 걸맞게 명칭을 바꾸려고 준비 중이에요.


어나더: 교내 동아리로 시작했지만 앞으로는 지역을 다 아우르는 모임으로 꾸려가시려는 거군요.


혜욘세: 그렇죠.


벗들: 부산대학교 모임이 있다는 걸 작년에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같이 어떤 식으로든 연락을 취하고 알고 지내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뭔가 연결고리가 없어서 못했는데 오늘 뵙게 되어 기뻐요.


태희: 이제 할 일이 엄청 많아지겠는데요. (웃음)






레즈비언 생애기록 연구소는 어떤 곳인가요?


어니더: 이름이 레즈비언 생애기록 연구소잖아요? 이름 그대로 레즈비언의 생애를 기록하는 작업을 하시고 계실 텐데, 그런 작업을 부산에서 해오시면서 부산에 사는 레즈비언들의 삶만의 특별한 점을 찾게 되시는지 궁금해요.


벗들: 저희는 연령별로 정체성이 확립될 때부터 지금까지의 자기 기록을 수집하고 있는데, 부산만의 특별한 어떤 것은 없는 것 같아요. 우리와 만나는 사람이 부산지역의 사람이라면 그 나름대로 서울과 다른 기록이 되긴 하겠죠. 레즈비언 커뮤니티가 서울과 부산에서 다르게 형성될 테니까요. 


태희: 기록되는 시간에 따라서 지역적으로 다른 특성이 나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은 초창기로 일단 많은 기록을 받는 단계라고 볼 수 있겠네요.


재경: 제가 느끼기에는 지역마다 특징들이 조금씩 있는 것 같았어요. 부산과 광주의 성소수자 분들을 비슷한 시기에 만나서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는데 부산에서 만난 분들은 굉장히 적극적이었던 반면 광주에서 만난 분들은 좀 조용하달까? 지역의 특성이라는 게 그 지역 인구나 경제규모 등에 따라 다른 것 같아요. 전 광주 사람인데 광주는 소비도시지 산업도시가 아니에요. 그래서인지 성소수자 커뮤니티의 규모도 상대적으로 작아요. 인구가 작아서 커뮤니티가 좁은 곳에 사는 성소수자들은 다 아는 사람들이니까 조금 소극적으로 활동하는 측면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제주도에 갔더니 또 다른 거예요. 제주도에서는 동성애자들이 이성애자와 결혼을 많이 해요. 그래서 게이바 사장님이 아들이 중학생이시고... 그런데서 느낀 문화충격이 컸어요.


태희: 그건 비단 제주만의 문제가 아니고 서울 같이 큰 도시 지역에도 있는 문제인 것 같아요. 전 대전에 사는데 30대쯤 되면 점점 성소수자들이 없어져요. 20대까지 커뮤니티가 활발하다가 그 후론 점점 안 보이게 돼요. 물론 직장이나 다른 어쩔 수 없는 이유 때문에 다른 곳으로 가는 사람도 있겠지만 점점 커뮤니티에 나가지 않게 되는 거죠. 근데 성소수자 업소는 반대로 20대를 위한 곳보다 중년들을 위한 곳이 더 많아요. 소비력도 있고 남들의 눈을 피할 수 있는 공간을 찾다 보니까. 


재경: 여성 커뮤니티와 남성 커뮤니티의 차이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벗들: 부산은 일단 여성들만 갈 수 있는 바 자체가 별로 없어요. 2군데? 3군데?


혜욘세: 그나마 있던 한 군데는 없어졌어요.


어나더: 얼른 커뮤니티가 부흥했으면 좋겠어요. 레즈비언 생애기록 연구소에서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요. 


벗들: 원래는 생애기록연구소를 처음에 만들 때 연구출판팀도 있었고 교육사업팀, 영상기록사업팀, 생애기록팀, 소모임 등 여러 팀이 있었어요. 그런데 중간중간 팀장들이 바뀌고 그만두고 하면서 지금은 모습이 많이 바뀌었죠. 기본적으로 서울과 부산의 생애기록팀이 있고요, 지금은 없어졌지만 교육사업팀 같은 경우에는 임신을 준비중인 분을 모셔서 레즈비언의 결혼, 출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어요. 호응이 좋았어요. 영상기록사업팀에서는 주변에 있는 레즈비언분들을 몇 년마다 영상으로 기록해서 주기별로 이야기를 남기는 분이 계셨는데 작년에 활동을 쉬게 되셨어요. 연구팀은 이성애의원인연구팀과 가족연구팀이 있어요. 소모임도 많은데, 여성학 글쓰기 모임, 책읽기 모임, 드로잉소모임, 그리고 새로 생긴 성서와동성애모임도 있어요. 


재경: 부산팀에서는 그 중에 뭘 하고 있어요?


벗들: 저희는 생애기록 부산팀으로 활동하고 있어요. 욕심일지도 모르겠는데 저희도 회원이 늘어나면 다른 소모임을 만들거나 서울과 또 다른 팀을 만들어서 활동하고 싶어요.


태희: 부산에서는 몇 명 정도 활동하세요?


벗들: 저희 세명 밖에 없어요.


재경: 오늘 전원 참석하셨네요! (웃음)


벗들: 네 명이 있었는데 한 명 빠지게 되고.. 사람이 적은 것 같긴 한데 홍보할 수 있는 수단을 잘 모르겠어요


재경: 뵙고 싶다는 분들이 많았어요. 되게 활동하시는 게 많더라구요. 사람들도 많이 만나시는 것 같고, 같이 모여서 일상 공유하는 것도 좋아보였고요.


벗들: 회의 때 모여서 그런 이야기 하는 게 거의 반이에요. 뭔가 하는 일이 없더라도 두 달에 한 번씩은 일단 얼굴을 보고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활동을 많이는 못해요.


재경: 예전에 하셨던 활동들 소개해주신 것 중에 ‘인생곡선 그리기’가 인상 깊었어요.


벗들: 네. 만날 때마다 뭐든 한 가지 씩은 해보고 싶어서 기획했던 것 중에 인생곡선 그리기가 있었죠. 이슈가 되는 일이 있으면 그것에 대해서 이야기 하기도 해요. 모임 때마다 주제를 잡아서 이야기를 나눴어요. 올해에는 영화를 같이 한편 보고 감상을 나눠보자고 해서 저번 모임부터 시작했고, 다른 활동들도 그때그때 즉흥적으로 생각나면 하고 있어요. 


어나더: 회의록을 보니까 인터뷰를 꾸준히 진행하시는 것 같더라고요.


벗들: 그건 저희가 기본적으로 꾸준하게 하는 활동이에요.


재경: 인터뷰할 분들은 어떻게 연락이 닿아서 만나시는 건가요?


벗들: 알음알음으로 하는거죠. (웃음) 아는 분들의 아는 분 이런 식으로. 레즈비언생애기록연구소에서 인터뷰 하려는 사람 중에 부산 가까운 곳에 사는 분이 있으면 저희가 부산에 있으니까 서울팀 분들이 저희에게 넘기기도 해요. 모르는 사람이 하는 건 또 다르니까.


어나더: 생애기록을 주 활동으로 하시는 만큼, 생애기록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실 것 같아요. 어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해요.


앤드: 예전에 제 친한 친구 중 하나가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안네 프랑크의 일기가 굉장히 유명하잖아요? 근데 그 때 숨어 살았던 유태인 어린이가 안네 프랑크 한 명이 아니었을텐데 기록을 했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서 알 수 있는 큰 자료가 되고 그래서 유명해진 것이라고요. 적절한 비유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우리가 특수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사실인데, 이것을 기록한다는 것 자체가 세대별, 지역별로 많이 모으면 더 많은 시간이 지났을 때 소중한 자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거죠. ‘그 때 퀴어들이 이렇게 살았구나’ 하면서요.


어나더: 말씀을 들으니 존재가 잘 가시화되지 않는 소수자들의 삶에 생애기록이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럼 아카이빙 작업을 하신지는 얼마나 되신 건가요?


벗들: 2013년부터 시작했으니 이제 3년 정도 됐죠.





레즈비언 생애기록 연구소 부산팀은 어떤 활동을 하고 있나요?


어나더: 그동안 하셨던 활동 중에 기억에 남는 게 있었나요?


앤드: 갑자기 엠티가 생각나네요. (웃음)


벗들: 저희 세 명 회원과 짝지들과 해서. 처음에 엠티를 기획했을 때 그냥 좀 아는 사람들 알음알음 해서 여러 명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수진님이나 서울 분들은 회원 아닌 분이 참여하는 엠티에는 같이 하기가 힘들겠다고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처음에는 서울에서 내려오실 수 있는 분들은 와서 같이 프로그램도 하자고 얘기했었는데 서로 생각이 달랐던거요. 그래서 저는 아는 사람들도 같이 참여하는 형태라서 오기 힘들겠다고 이야기를 했었어요. 그래서 일단 짝지 분들은 회원이 아니라 뭔가 같이하기 어렵다고 해서 저희끼리 친목도모의 형태가 된거죠. 


태희: 그것도 지역차이인것 같아. 서울은 인프라가 많아서 그냥 가면 되잖아. 그런데 지역은 어떻게든 사람을 많이 모으고 해서 많이 얘기를 하려고 하잖아요.


재경: 부산대 모임에선 엠티 가보신 적 있으세요?


혜욘세: 많이 가죠. 일년에 두 번 정도 가요. 저희는 비회원이 참석하려면 가시는 회원 분들의 허락이 있어야 해요. 뒷풀이나 행사를 할 때도 그렇죠.


벗들: 저희 모임을 보면 수진님도 그렇고 그전에 모임들을 해서 많이 힘드셨나봐요. 정말 계속 꾸려가는게 쉽지 않은 일이잖아요. 서로 서로 지치지 않고 함께 가자고 말씀을 하셨어요. 치열하게 또는 많은 활동은 하지 않지만 천천히 꾸준하게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하자라는 생각을 하고 계시는 거에요. 저도 직장이 있고 학교도 다니고 하니까 이것에 매달릴 수 없지만 할 수 있는 만큼 천천히 조금씩 하자고 얘기를 하더라구요. 그래서 조금 부담이 덜 가는 거죠. 제가 좀 못하더라도 이해해주는 부분이 있고 나중에 조금 에너지가 생겨서 더 할만 할 땐 더 하면 되는 것이고. 그렇게 조금씩 해나가고 있는 것 같아요.


태희: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하고 싶은 게 생기더라고요. 오늘도 부산대 모임과 레즈비언생애기록연구소가 만나게 된 자리가 된 것도 의의가 있는 것 같아요.


재경: 술 먹는 거죠. 부산에서 뭘 마셔야 하나. 그것만 고민한 것 같아요. 뭘 먹어야 하나 (웃음)


어나더: 생애기록을 위해 인터뷰 하는 과정에서 개인적으로 공감가는 것이나 또는 나와는 좀 다른 것 같다고 느낀 것이 있으신지 궁금해요.


벗들: 제가 제일 처음에 인터뷰한 분이 있는데, 제가 원래 아는 분이었는데 인터뷰를 해 보니 그냥 아는 사람인 거지 정작 제대로 아는 게 없더라고요. 그 분은 자기가 레즈비언이라고 생각을 안 하지만 여자는 만나고 있었어요. 20대 때는 남자도 만났다가 자연스럽게 흘러간 거예요. 뭔가 스스로 정체화를 한 게 아니고 등산을 같이 간 여자분이 너무 괜찮아서 그냥 만나게 된 거예요. 그분이 30대 후반 때 남자도 사귀고 결혼도 했다가 이혼하고 그러다가 그런식으로 자연스럽게 흘러흘러.. 아 저럴수도 있구나, 내가 그분에 대해 아는 게 없었구나 생각했어요.


태희: 그런데 혹시 인터뷰를 하다 보면 본인의 한계가 있잖아요. 그런데 기록하시는 분들이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감정적인 그런.. 상담하시는 분들이 오히려 자기 자신도 감내할 수 없는 기분에 동요하기 쉽잖아요. 이정도 까지만 알고 싶었는데 상대가 너무 많은 정보를 드러내면 의도치 않은 감정에 노출될 수도 있고요.


벗들: 아직 회원이 많지 않아서 그 정도는 아직까지 없었고요. 저는 이야기를 듣고 공감하는걸 많이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많이 공감해주는 편이고. 아직까지는 감당이 힘들 정도의 역사를 가진 분을 만나지 못해서 그런 건진 모르겠지만요.


태희: 방금 말씀하신 분도 마지막에 아름다운 장면에 초점을 맞췄는데 사실 그 과정은 본인에게 매우 힘든 과정이었을 것 같았거든요.


벗들: 그분이 굉장히 긍정적이더라고요. 너무 덤덤하게 얘기를 하셔서. 제가 더 놀라울 정도로. 저는 그분이 결혼하셨던 분인지도 몰랐는데 너무 담담하게 별 일 아닌 것처럼 털어 놓으시더라고요. 저희 입장에선 되게 고마웠죠.


혜욘세: 인터뷰로 기록을 남기는 것 외에 매체에 알린다거나 외화하는 작업도 하고 계신지 궁금해요.


벗들: 일단은 저희 블로그가 있어서 거기에 모든 걸 올려요. 길게 봤을 때는 나중에 기록이 많이 쌓이면 자료 아카이브를 만들고 자료집도 만들고 그렇게 해야되겠지요.


모리: 인터뷰 받는 분들의 연령대는 주로 어때요?


벗들: 제 나이대랑 비슷한 것 같아요. 저 같은 경우에는 제 나이대, 제 위로 아는 분들이 다섯 살 언니들이 많아서 그분들. 그리고 서울에는 20대분들이 좀 많아요. 지인 위주로 가니까 그렇게 형성이 되더라구요.


어나더: 회의 간격이 2, 3개월에 한 번씩으로 생각보다 길더라고요.


벗들: 자주 만날 것까진 없는 것 같아요. 한 달에 한 번은 잦은 느낌이 들고 두 달에 한 번도 ‘어 벌써?’ 이런 느낌이 들거든요. 그래서 2, 3개월에 한 번이 적당한 것 같아요.





서울이 아닌 부산에서 활동하면서 어려운 점은 없으신가요?


어나더: 레즈비언생애기록연구소가 서울팀과 부산팀이 있는 건데, 서울팀과 같이 활동하기에 어려운 점은 없으신가요?


벗들: 운영회의를 한 달에 한 번씩 서울에서 해요. 대부분 못 가는 일이 많으니까 부산 팀으로 서면으로 회의록을 보내달라고 하죠. 근데 회의가 다 끝나고 나서 회의록이 나오면 저는 저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이 된 건지 과정이 너무 궁금한데 그 부분을 전혀 못 듣고 결과만 보는 거예요. 무슨 얘기인지 알고 싶어서 답답한 부분이 있더라고요. 이야기를 주고 받다가 의견이 나오는 부분이 많은 건데 그냥 결과만 알게 되니까 아쉽죠.


어나더: 서울팀에서 부산으로 온 적은 있나요?


벗들: 작년에 10월에 서울팀에서 내려와서 퀴어 정세 강의 하나, 애니어그램 테스트를 같이 했었어요.


어나더: 회의 이외에 부산 분들이 서울에 활동하러 올라간 적은 있으세요?


벗들: 아직은 없어요. 퀴퍼는 개인적으로 갔죠.


어나더: 일년 계획서를 제출하신다고 했는데, 그 중에 가장 하고 싶은 게 있으시다면 어떤 활동인가요?


벗들: 작년엔 엠티였고 올해는 야유회를 가자는 의견이 나왔어요.


태희: 저희랑 똑같네요 (웃음)


어나더: 앤드님이 만드신 기독교와 동성애 소모임도 활발할 거 같아요.


앤드: 올해 만들었어요. 기독교와 동성에 관련해서 성서 공부를 좀 같이 해보자고 해서 만들게 됐어요. 저는 아무도 안 올 줄 알았는데 한 분이 오셔서 지난 주에 모임을 했어요. 일단은 관련 서적이나 영화를 같이 보고 얘기를 하려구요. ‘하느님과 만난 동성애’라는 책을 읽고 만나서 얘기를 하기로 했어요. 그런데 참여하는 분이 책의 배송이 아직 안 되어서 못하고 있어요. (웃음)


모리: 지역모임의 또 다른 어려움이네요. 서울은 하루 만에 오는데.. (웃음)


앤드: 그래서 책 이야기는 아직 못 나눴고, 이 모임에 바라는 점 위주로 서로 이야기를 나눴어요.


혜욘세: 그 모임은 레즈비언 정체성인분들만 가실 수 있는 건가요?


앤드: 일단 레즈비언생애기록연구소 안에 있는 소모임이기 때문에 레즈비언생애기록연구소의 규칙을 따라야죠. 보니까 이성애자 남자를 제외하고는 가입이 다 가능하다고 되어있더라고요. 


벗들: 제일 처음에 모임 만들 때는 인터뷰 하는 사람이 바이여도 상관없고, 자기 정체성은 상관이 없다고 이야기 됐어요. 여성이면 상관이 없다구요.


어나더: 회원모집 관련해서 올해 계획하시는 게 있나요?


벗들: 제가 제일 많이 느끼는 게 회원모집의 한계인데 너무 힘들더라고요. 통로가 잘 없어요. 몇 년만에 제가 부산 커뮤니티에 재가입을 했어요. 활동하던 카페도 문을 닫고 oo넷도 이제 없으니까(온라인 레즈비언 커뮤니티였으나 2015년 해킹으로 인한 개인정보유출 사건 이후 폐쇄됐다. - 전퀴모 주), 30대 이상 경상지역의 회원100명정도 규모의 커뮤니티를 가입하여 거기서 활동을 한번 해봐야되겠다 생각도 했어요


혜욘세: 그 모임에서 레즈비언생애기록연구소를 홍보하시는 거예요?


벗들: 네. 그 전에는 oo넷도 하고 oo도 하고 트위터도 하고 페이스북도 하고 그랬죠. 그런데 그곳에 부산 분들이 별로 없는건지 이런 활동에 관심이 없으신지 반응이 별로 없더라구요.


어나더: 서울팀 분들은 회원모집 관련해서 도움을 주시거나 하나요?


벗들: 어차피 경로는 비슷해요. 그런데 서울에서는 뭔가 홍보를 하더라도 많이 오나봐요. 드로잉 모임을 하는데 인원이 차서 신청자를 잘랐다고 하더라고요. 대학생들은 좀 다르지 않을까 싶어서 부산의 대학생 커뮤니티가 있으면 연계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서울엔 많으니까.


어나더: 부산대 모임이랑 같이 뭔가 해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오늘 만나셨으니. 


앤드: 벗들님이 말씀하신 모임도 대구 쪽에서는 되게 활발하게 활동 하시고 30대 이상 모임이고 역사가 있어서 그런지 40대 이상인 분들도 좀 계시더라고요. 참석하려는 분들이 많아서 모일 때 빨리 안 알려주면 잘리고..


벗들: 회원관리가 굉장히 까다롭다고 하더라구요. 1년에 몇 번 이상 참여하지 않으면 회원이 유지가 안 되는 거예요.


태희: 그래도 100명 이상이 진성 회원이라면 상당한 거네요. 


벗들: 그렇죠.






“퀴어 클레이카드”

: 인터뷰에 이어 전퀴모에서 제작한 질문 카드를 뽑아 이야기를 나누는 프로그램을 진행했습니다. 한 명씩 카드를 뽑아 카드에 적힌 질문에 답하며 이야기를 나눴어요.




어나더: <커밍아웃:첫 커밍아웃은 언제였나요?> 자발적인 커밍아웃은 한 번도 없어요. 부모님한테 먼저 아웃팅을 당했거든요. 원래는 보통 차근차근 과정이 있잖아요. 자기 주변 친구부터 시작해서 맨 끝 보스가 부모님인데, 저는 보스부터 찍고 시작을 하게 된거예요. 한창 재수할 때 아웃팅을 당한게 상처가 남았어요. 

지금 행성인 내에서도 활발히 활동을 하고, 네이버에서 운영하는 블로그도 올해 6월이면 3년이 될 정도로 오래 활동을 했음에도 유리벽장인 이유는 맨 처음에 한 커밍아웃이 굉장한 상처가 되었거든요. 그래서  그 이후로 커밍아웃 시도를 전혀 못하고 있어요. 별로 답답함을 못 느끼기 때문인 것도 있어요. 이미 생활범위가 이쪽(퀴어)으로 기울어져 있거든요. 

고등학교 다닐 때는 왕따는 아니었지만 친구들과 그렇게 많이 친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쪽에서 활동을 시작하면서 제 또래 친구들도 많이 만나고 서로 속깊은 이야기도 나누고 공감하는 친구가 많아졌어요. 그걸 통해서 오프라인 활동에 대한 갈증이 많이 해소 되었기 때문에 주변 동기나 친구들에게 애를 써가면서 커밍아웃을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지 않아요.


태희: 그럼 아웃팅 경험으로 이야기해주면 어때요?


어나더: <첫 아웃팅> 2014년 8월 중순이었어요. 그게 광복절 즈음? 생일 전 주 쯤일 거예요. 부모님은 공부할 때 전자기기 쓰는 걸 굉장히 싫어하셨어요. 어느 정도였냐 하면 중2 때 샀던 햅틱 팝 휴대폰을 재수할 때까지 썼어요. 그래서 친구들한테 아이팟 터치를 빌려서 몰래 카톡하는 데도 썼어요. 그걸 전날밤에 쓰다가 그대로 잠이 들었나봐요. 부모님이 제 머리맡에 있던 것을  발견해서 거기 있는 카톡 내용, 어플로 블로그 내용도 다 보셨어요. 

재수할 때는 성소수자 단체도 몰랐고 남성 동성애자도 거의 몰랐어요. 블로그를 통해서 아는 20대 후반,  30대 초반 의 레즈비언 누나들이 있었거든요. 서로 다 커플이고 저 혼자 청(홍)일점으로 있었던 톡방이 있었는데 그 내용도 다 읽으시고. 그걸 보신 부모님이 앉혀놓고 이런 이상한 애들이나 만나고 있느냐. 니 머리속에 똥만 가득 차서 공부나 하겠느냐는 이야기를 하셨어요. 저도 공부를 해야 하고 부모님도 크게 일을 키우고 싶지 않으셨나봐요. 그냥 묻어졌지요. 

그런데 재수 끝나고 저녁 늦게 왔다 갔다 하는 것에 불안을 느끼셨나봐요. 밤에 어디 나돌아다니는게 당연히 다른 게이들 만나러 다니는 건데. 대학 첫 학기 때 되게 갈등이 컸어요. 암묵적으로 외박이 안됐고 1시 넘으면 전화 오고. 그래서 지금은 학교 앞에 방 얻어서 살고 있어요. 

기분이 참담했어요. 항상 블로그에 커밍아웃은 금전적으로 안정되어있고 본인이 가장 준비가 잘 되어 있을 때 하라고 이야기하고 다녔는데 반대되는 상황을 직접 겪어버리니까. 어떻게 보면 되게 쪽팔리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하고 그 때 한참 부모님과의 갈등이 되게 컸던 시기여서 더 골이 깊어지고. 저도 스트레스를 받고 부모님도 부모님 나름대로 스트레스를 받으니까 최악의 상황이었던 것 같아요. 그러고 나서 그걸 풀 곳이 딱히 없었어요. 그 땐 공부 자체도 너무 힘들었고. 아웃팅에 대한 압박감도 있었고요. 

지금은 행성인에서활동을 많이 하면서 고민을 풀어놓고,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 만나면서 마음이 많이 편해졌어요. 지금은 학교 앞에서 부모님 몰래 애인이랑 동거중이예요. 되게 어두운 시기를 지나 지금까지 왔어요. 지금은 행복해요. 




태희: <주변인:주변인에게 한 커밍아웃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커밍아웃> 동생에게 했던 게 제일 기억이 남아요. 서울에 있다가 명절이라 집에 내려왔는데 서울은 온전히 제 공간이잖아요 이반시티도 제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고. 그때가 20대 중반이었던 것 같아요. 동생이 컴퓨터를 하고 있었어요. 오랜만에 대전에 내려  갔으니까 술번개를 해야하는데 동생 때문에 못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다가 동생한테 “야 나 사실 남자 좋아해” 그랬더니 “응 그래 수술은 하지마” 그냥 그게 끝이었어요. 

동생은 성소수자에 대해 이해하려고 노력은 해요. 성소수자를 온전히 이해하는 게 아니라, 가족에 대한 아가페적인, 맹목적인 사랑으로라는 데에 한계가 있어요. 그렇다 보니까 얘가 사귀는 여자친구 한테도 우리 형은 게이야, 결혼한 재수씨한테도 우리형은 게이예요, 재수씨 동생한테도 우리형 게이예요. 우리 집안 어르신은 다 모르는데 재수씨 가족은 다 아는거예요. 그 때 사귀었던 제 파트너랑 같이 동생 결혼하기 전에 동생 부인 될 사람이랑 넷이 같이 부산 해운대에 같이 여행도 가고 그랬어요. 같이 종로도 가고. 가족과의 예쁜 추억. 물론 그 헤어진 애인이랑도 같이 잘 이야기 하고 있는 상황이고요. 그래서 행성인 웹진에 글도 올렸던 것 같아요. 재수씨 가족과의 여행기. 그땐 솔리드라는 닉네임이었을거야 (웃음) 

그 아가페적인 사랑 때문에 내가 어떤 상황이라는 것을 이해 해주는 거지 명확한 이해가 없어요. 똑똑한 애라고 생각했는데 지기가 관심이 없으니까 너무 모르는 거예요. 심지어 트랜스젠더나 게이나 그런 용어 자체도. 내가 남자가 좋으면 여자가 되고 싶은 걸로 이해하는. 

지금은 몇 년(웃음) 안됐지만 사람들의 인식이 상당히 좋아진 것 같아요. 이게 단지 시간이 지나서라기 보단 활동하는 사람들과 단체들 덕분인 것 같아요. 커밍아웃은 많이 한 편이예요. 고등학교때  선배한테도 “형 저 형한테 할말이 있어요” “왜? 커밍아웃이라도 하게?” “네!” 그렇게도 했었고, 대학교에서도 선거 때 학생회 자료집에 - 그 때가 홍석천 커밍아웃 1,2년 후 였을거예요- 학생회 선거 자료집 최초로 성소수자 관련 의제가 나왔어요. 




재경: <차별:퀴어라고 차별 받았던 경험> 많아요. 키가 크고 머리가 짧아서 사람들이 대부분 남자라고 생각해요. 저 같이 예쁜 남자가 어디있다고. 그래서 제주도에서 길을 가는데 여인숙 같은 곳 앞에 할머니가 종이를 정리하다가 갑자기 저를 부르는 거예요. “총각~ 방 있어 놀다 가” 이렇게. 그래서 “네?” 했더니 목소리 듣고,  “아, 아니네 가던 길 가~”  라고 하시고. 화장실 들어갈 때마다 사람들이 놀라는 건 다반사고요. 

외모 때문에 아니라 퀴어라고 해서 차별을 받았던 경험은 많죠. 정말 서러웠던 적이 있었어요. 재작년인가 사귀던 분이 있었는데 제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을 했어요. 그러면 대부분 회사에다가 제 애인이 아프니 일찍 가볼게요 라고 말하면 보내주잖아요. 그런데 애인은 회사에서는 공식적으로 솔로인거잖아요. 여자가 여자를 사귄다고 말 모하니까. 그래서 애인이 아파서 간다고 말도 못하고 계속 야근을 한 거예요. 그래서 3박 4일 정도 제가 입원을 했는데 한 번도 못 왔어요. 나올 핑계가 없어서. 게다가 주말에는 워크샤에 간 거예요. 그것도 애인이 아프니 병간호 해야 한다고 말도 못하고, 그냥 끌려 간거죠. 그날 새벽에 술에 취해서 문자가왔어요. ‘내가 우리 재경이 아픈데 가보지도 못하고 미안해’ 라고  맞춤법도 안맞고 오타도 막 나고 그런 문자가. 그때 좀 서러웠던 것 같아요. 


어나더: 부모모임에서 같이 일하는 행성인 활동가 한 명이 있는데, 그분은 자취를 하세요. 방 벽에 애인 사진을 붙여놨는데 부모님이 오신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전날 밤에 애인 사진을 다 빼면서 술을 좀 드셨는데 우셨대요. 너무 속상해서. 

그 전 주에 열린 성소수자부모모임에 계신어머나와 함께 오신 여자분도 한 쪽 벽에 다 애인 사진이 있대요. 그런데 어머니 옆에서 쿨하게 이야기하고 오히려 어머니가 더 방에 들어가기 조심스러워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온도차이가 크다는 걸 느꼈어요.


재경: 회사에서도 이야기가 많이 나오잖아요. 왜 연애 안하니? 남자 친구 있니? 결혼 안하니? 그런 일을 겪을 때 화가 많이 나요.

회사 다닐 때, 사수가 혼인 신고를 해야 한다고, 빨리 가서 점심시간에 내야 하니까 저보고 증인을 서달래요. 자기가 혹시 몰라서 혼인신고서 두 장을 가져왔다면서 “쓸 일 있으면 써” 하면서 저한테 한 장을 줬어요. 태어나서 처음 보는 혼인 신고선데, 양식이 되게 간단했어요. 부부 이름, 서명, 증인 이름, 서명. 우리는 이 간단한 걸 못해서  싸우잖아요. 화가 많이 났어요.


모리: 저는 구청에서 근무하는데 구청 민원대에 보면 벤치가 있고 그 벤치에 한복을 입은 남자와 여자가 ‘방금 혼인신고 했어요’ 라고 해서 거기 부부가 앉아서 사진을 찍도록 해 둔 곳이 있어요. 우편물을 받으러 가면서 거기를 매일 지나다니는데 보면서 “하아~~~” 거기 앉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혜욘세: <목표:일 년 후, 십 년 후의 목표는?> 십 년 뒤에는 아마 결혼이 합법화 돼 있겠죠? 파트너와 생각을 했던 게 퀴어타운을 세우자. 저희 QIP에서 퀴어타운 만드는 걸 꿈꾸고 있어요. 이미 하고 있는 분들도 있더라고요. 공동육아를 하는 거죠. 한가람 변호사님이 생각했던 건 1층은 활동가, 대학생들. 2층은 다르게 사용하고. 같이 밥을 먹고 눈치 안 보고 우리만의 생활을 꾸릴 수 있는 곳을 만들자고 하고 있어요. 그러기 위해선 법이 바뀌어야겠죠?

1년 뒤에는 부산에서 큰 행사를 열지 않을까해요.  원래는 올해 하려고 했어요 바닷가에서. 그런데 우리가 반대에 부딪히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내년으로 좀 미루고 기획을 세세하게 할 예정이예요. 모든 컨셉을 다 짜 놨어요. 일단은 여름. 누가 벗든 상관이 없잖아요?  (박수)


태희: 서울 퀴어퍼레이드는 행렬이 엄청 길어서 반대세력이 많다는 걸 못 느꼈는데 대구에 가니까 반대 세력과 1:1매칭 수준이더라고요. 올림픽 끝나고 선수단 환영하는 행렬들이 동성애아웃 들고 있는 느낌. 


혜온세: 우리는 드렉폼 때도 행진을 했고 할로윈 파티도 매년 하고 있어요. 저번 할로윈 파티 때는 콘돔을 나눠줬거든요. 코스튬을 하고.. 저는 백설공주를 했는데 콘돔을 나눠주니까 되게 좋아하더라고요. 

한 번 이상한 경험을 했어요. 경성대에서 드랙폼을 했는데 남부 경찰서에서 저한테 연락이 온거예요. 정보과 과장이라면서 부산대학교 성소수자 인권동아리 대표 XXX씨 맞으세요? 이러는 거예요. 제가 연락처를 준 적도 없는데. 저는 그 때 자다 깨서 받아가지고 그냥 네~ 네~ 하고 끊었는데 생각해 보니까 너무 무서운거예요. 정말 정보과 과장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경찰서에 전화해서 물어봤죠. 그런 사람이  정말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분이 경찰서 전화도 아니고 개인 전화로 전화했다고 신고 좀 해달라고 해서 누가 알려줬는지 찾았죠. 신문 기자가 다 이야기를 하고 다닌거예요. 그 경찰서 출입 기자인거죠. 그래서 물어봤어요.  너가 준 거 맞냐고 하니까 처음에는 계속 부인을 해요 아니라고. 그래서 정보과에 이거 다 신고해서 그 사람도 옷 벗게 하고 당신도 옷 벗게 할건데 어떻게 할거냐고 했더니, 원래 출입을 하면서 자기 남부 경찰서 관할 지역에 커다란 행사가 있으면 경찰이랑 다 소통을 한대요. 그럼 그것만 이야기 하면 되지 제 대학이 어딘지 무슨 단체에서 무엇을 하는지 다 이야기를 왜 하냐고요. 그 때부터 개인 전화로는 인터뷰도 안하고 그랬어요. 




벗들: <만족:활동중인 퀴어 커뮤니티가 있나요? 어떤 곳? 만족스러운 점과 아쉬운 점> 지금은 하나 밖에 없어요. 예전엔 커뮤니티 활동을 많이 했었는데 지금은 부산 커뮤니티가 많이 줄고 있는것 같아요. 예전에는 카페 검색만 하면 많았는데 지금은 들어갈 곳이 없어요. 

레즈비언이 커뮤니티가 너무 폐쇄적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한 커뮤니티사이트가  해킹을 당하고 없어지면서 더 불안감을 느끼는 거죠. 그래서 커뮤니티들이 더 폐쇄적으로 변한 것 같아요. 


앤드: 그 모임에 회원의 애인까지 갈 수 있어서 한번 따라가본 적이 있어요. 보통 모임에 새로운 사람이 와도, 별 관심이 없잖아요. 그런데 그곳은 회원도 아니고 회원의 애인인데 되게 관심을 많이 가져주셔서 좋았어요.


태희: 그렇게 열정적으로 활동하시는 분을 보니까 저는 레즈비언이 그만큼 커뮤니티에 대한 욕구가 강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옥상별빛: <롤모델:롤모델이 있다면? 그 사람을 꼽은 이유?> 언니입니다. 언니가 저랑 나이차가 열 살 차이가 나요. 중학교 때 언니는 이미 일을 하고 있는 상태였어요. 언니가 사회복지쪽에 일하고 있었는데 자원봉사 시간이 필요해서 그곳에 자원봉사를 하러갔어요. 감동도 많이 받고 언니가 하는 일이 좋게 보였어요. 치매나 중풍 어르신들이 계시는 요양원 이었는데 저도 뿌듯하고 어르신들도 좋아하시는 거예요. 

그 계기로 사회복지사의 꿈을 가지게 되었어요. 학교 다닐 때 계속 노인 쪽으로 관심을 가졌고 대학 전공도 사회복지 쪽으로 전공을 했어요. 거기서도 노인, 청소년, 장애인 등 여러 분야가 있는데 저는 노인 쪽으로 계속 꿈을 꾸고 있다 보니까 실습을 나가도 원래는 종합복지관을 먼저 간 후에 관심분야에 가는데 저는 노인 쪽으로만 계속 나갔고요. 

언니는 지금 사회복지를 그만뒀어요. 열악하기도 하고 일에 회의를 많이 느꼈더라고요. 형부도 학교에서 커플로 만나서 결혼까지 한 사회복지사인데 형부도 그만두었어요. 그게 일 적인 부분이 힘들다기 보다는 그 안에서도 인맥을 중요시하고 승진할 때도 비리들이 많고 그러다 보니 다른 일을 하고 싶어서 그만 뒀다고 하더라구요. 

어쨌든 언니로 인해서 제가 사회복지를 하게 되기도 했고 성취감도 있어서 롤모델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예전엔 막연하게 형부랑 언니가 둘 다 사회복지사니까 저랑 같이 건물을 지어서 복지 관련한 일을 하면 어떨까 생각하기도 했어요. 


어나더: 사회복지 이야기가 나오니까 영화 <메종 드 히미코>가 생각나요. 그런 요양원도 생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옥상별빛: 영화 <두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을 보면 할아버지가 몸이 안 좋으신데 주인공이 보살펴주는 장면이 있잖아요. 우리가 나이가 들면 다 노인이 되는데 우리는 결혼도 못하고 자식을 가질 수도 없으니. 한국이라는 상황에서 더 회의감을 느껴요. 나중에 늙으면 독거노인이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있어요. 

애인이 있어도 한 명이 먼저 죽을 것 아니예요. 어쨌든 그런 미래를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빨리 사회적으로도 제도가 잘 되었으면 좋겠어요.


어나더: 정말 안타까운 것 같아요. 가족구성원에 대해서 노후를 이야기할 단계도 아직 못 갔다는게 너무 아쉬워요. 이제서야 동성결혼 법 제도화에 대해서 첫 발자국을 떼었는데.




앤드: <직장:직장에서 성 정체성 때문에 난감했던 적이 있나요. 어떻게 대처 했는지> 저는 직장생활을 안 하는 사람이에요. 학교에서 좀 힘든 일을 겪은 것 같아요. 가까운 친구들에게 커밍아웃을 하고 지내는 편이었는데요. 대학원 다닐 때였는데, 남자 교수님이 약간 성추행을 일삼는 교수여서 뒷담화를 하고 다녔어요. 

그 교수님을 흠모하는 것으로 보이는 친구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 성추행을 하는 것에 대해서 제가 뒷담화 하는 것에 분노한 나머지 그 교수에게 저를 아웃팅 시킨거예요. 그 교수가 저한테 밥을 먹자고 해서 단둘이 밥을 먹는데 되게 돌려돌려서 너가 그러그러한 사람이라는 것을 안다고 말하더라구요. 자기에 대해 더 그런 말을 하고 다니면 널 아웃팅 시키겠다는 식으로. 

지금 같았으면 좀 더 잘 대처할 수 있었을 같은데 그 땐 너무 맨붕이 왔어요. 아무리 그 사람을 좋아해도 그 사람에게 할 말 안 할 말은 구분할 줄 알거라고 생각 했었는데 말이죠. 성추행은 범죄이고 동성애는 범죄가 아닌데 그 협박이 성립이 되고 결국 제가 졌다는 것. 그것 때문에 4~5년 정도는 정말 힘든 시간을 보냈어요. 속해있던 학교나 그런 것을 다 떠나고 싶었어요. 제 직업 특성상 그 학교 사람들을 계속 봐야만 했는데 그 상황을 견디고 저런 사람한테 선생이라고 인사를 하고 지내는 그런 것이 도저히 싫고. 

작년에 제 지인의 친한 친구가 있는 학교에서 성추행이 심한 교수 때문에 자살시도까지 한 분이 있었어요. 여러가지 문제로 그 교수의 성추행 문제가 수면 위로 나오고 매스컴도 타고 하면서 자살시도를 했던 그 분이 증인으로 나오고 제 지인과 학교 사람들이 다 힘을 모아서 그 사람을 상대로 싸운거예요. 1년 정도의 시간을 다 쏟더라고요. 주변 사람들이 거의 아무일도 못하고. 결국 학교에서는 해임당했는데 교원 소청위원회에 항소를 해서 위원회에서 정직 3개월로 변경해서 다시 소송을 하는 바람에 길어졌어요. 마지막에는 학생들이 승소를 했는데, 다시 그 교수가 항소를 한 상태예요. 

그사건을 보면서 나도 좀더 적극적으로 대처했으면 좋았을텐데 라고 생각했어요. 저도 좀 더 시도해봤다면 좋지 않았을까. 그런 걸 담아두고 사는게 굉장히 정신건강에 해롭더라고요. 저는 연애에만 관심이 있던 사람이예요. 이런 커뮤니티에 관심도 없고 인권에 관심도 없었어요. 그런데 제가 그런 일들을 막 겪다 보니까, 아 나 같은 일로 고생하는 사람도 정말 많겠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생애기록 모임이 아무것도 관심 없던 사람이 생각하기에는 좋은 단체였던 것 같아요. 앞으로는 어려운 상황이 닥친다면 예전보다는 잘 대처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살고 있어요.




모리: <처음: 언제 처음 다른 사람과 다르다고 느꼈나요? 어떤 기분이었나요? 어떻게 대응했나요?> 초등학교 5학년 때였어요. 초등학교 5학년 때는 여자애들은 2차 성징이 일어나지만 남자애들은 2차 성징이 많이 안 일어나는 상태거든요. 근데 유달리 발육이 빠른 애가 있었어요. 목소리도 완전 저음이고 목에 울대뼈가 되게 섹시한. 점심시간에 걔가 농구하는 모습 하염없이 처다보면서 좋아서 헤벌레 하고 있고 그랬어요.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하진 않았어요. 그냥 ‘아 이게 사랑이구나’, 처음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는 감정을 느낀 거니까, ‘아, 이걸 사람들이 사랑이라고 부르는구나’하고 생각하고 말았어요. 고백하거나 그런 건 안 했고 그러다 끝났어요. 진지하게 동성애자로 살아갈 날들에 대해 고민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아무에게도 이 사실을 말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은 했던 것 같아요.

그게 처음이고, 중 2때 좋아한 다른 애가 있었는데 걔를 좋아하면서 나의 동성애자로서의 삶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됐어요. 걔는 이성애자였는데 저랑 베프여서 완전 친했어요. 걔가 어떤 여자애랑 처음으로 뽀뽀하고, 뽀뽀한 걸 저에게 이야기를 했는데 그냥 너무 화가 나서 집에서 엄청 분노하고 울었던 기억이 나요. 

아무것도 안 되고 짝사랑을 끝날 거라는 걸 인식하게 되면서 앞으로의 나의 삶에 대해서 처음으로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때는 나랑 똑같은 사람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못했어요. 사실 너무 당연하잖아요. 당연히 나랑 똑같은 사람이 있겠지. 동성애자라는 단어도 이미 있고, 커밍아웃한 홍석천도 있고. 그때는 평생 숨기고 살아야 겠다고 생각을 했던 거죠. 나는 평생 이렇게 짝사랑만 하다가 끝나겠구나, 나는 혼자서 늙어 죽겠구나 라는 생각에 우울해져서 상태가 정말 안좋았어요. 그때 처음으로 그런 인식을 했던 것 같아요.


재경: 스무살 되면서 커뮤니티 처음 나오신 분 중에 제가 들었던 충격적인 말이 뭐냐하면 신촌 술집에 가신거예요. 그런데 “처음 왔는데 스무살이고요” 하니까 “그래 와서 술마셔”하고 언니들이 반겨 주었대요. 근데 그 분이,  “그런데 언니들, 경찰 오면 어디로 도망가야돼요?” 그랬다는 거예요. 불법이라고 생각을 했대요.


어나더: 그럴 줄 알고 들어갔다는 게 더 대단한 것 같아요.


재경:  지금은 어때요?


모리: 올해 한번은 연애하지 않을까요? 최소 한 번은 하겠지. 


어나더: 그런 생각을 저도 안 해본 건 아니예요. 행성인에 들어오기 직전, 학교 입시문제가 다 끝나고 대학생활과 이쪽 생활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어요. 첫 연애는 작년 여름에서야 했어요. 저는 썸 그런 것도 없었고 데이트 어플을 해도 하면 할수록 사람 마음이 되게 심난해지고.  그러다가  “나는 이런이런 활동을 하고 있으니,  너네는 연애 편하게 해라” 이러고 있는게 아닌가? 싶은 거죠. 

삐딱하게 생각하면서도 제가 또 활동을 하고 있는거예요. 계속 자기연민에 빠지고 점점 비참해지고 그랬어요. 가족 문제 때문에 골이 되게 많았어요. 안정감을 찾으려고 했는데 그게 안 찾아지는 거예요.


재경: 그럼 애인이 있는 지금은 어때요?


어나더: 저는 평생 아마 안정이라는 걸 연애에서 밖에 찾지 못할 것 같아요. 저는 성격이 좀 불안정한 사람이라 연애밖에 잡아줄 수 없다고 아직은 느껴요.




 

레놀: <아웃팅:아웃팅의 위험을 겪어본 기억, 어떻게 대응?> 아웃팅을 당한 적은 없지만 썰이 하나 있는데 그걸 말씀드릴게요. 제가 취향이 음식도 그렇고 여러가지로 독특해요. 제가 예전에 짝사랑하던KTX 승무원이 있었어요. 그 때 되게 열심히 열차 스케줄 같은 것을 외우고 그랬어요. 철도도 되게 좋아하는데 세상에 승무원 옷을 입은 잘생긴 남자가 나타나니 얼마나 좋겠어요. 제가 좋아하는 가수도 되게 마이너해요.

중학교 때 인터넷을 통해서 한 친구를 알게 됐어요. 너무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 같이. 천재긴 천재인데 너무 기계 같은 사람이라고 해야 하나. 좀 다른 사람들과 많이 달랐어요. 사람한테 정을 줄 줄도 모르고 받을 줄도 모르고 베풀 줄도 모르고 차가운 사람이었던. 생각하는게 되게 독특한게 1에서 10까지 마음에 드는 숫자를 말하라고 하면 보통 하나를 말하잖아요. 근데 이 친구는 “그게 정수여야 돼” 그런식으로. 

그래도  이 친구랑 친하게 지냈어요. 그런 마이너한 음악을 같이 따라 부를 수도 있고 노래방도 같 수 있어서. 서운한 건 계속 참고 살았는데 대학을 들어가고 나서는 걔가 사람을 무시하기 시작하는거예요. “넌 가서 이거나 해” 명령조로. 저만 그렇게 느끼는 게 아니라 주변에 같이 알던 지인들이 다 그걸 느끼고는 있었던 거예요. 

그러다 이 친구가 제 트위터를 염탐을 하면서 제가 게이인 걸 파악을 한 거예요. 말한 적도 없는데. 그 친구의 의도가 뭔지 그 의중을 지금도 모르겠는데 어느날 저한테 이런 문자를 보낸 거예요. ‘너는 부모님한테 가서 게이라고 커밍아웃이나 해라 ㅉㅉ’ 그 친구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는데 너무 무섭고 화가 나서 캡쳐 해서 이름을 가리고 트위터에 올렸는데 사람들이 누구냐고 무슨 이런 사람들이 있냐고 했어요. 얼마 후에 그 친구한테 메일이 왔더라구요. 그런데 그 트윗을 캡쳐해서 메일을 보냈더라구요 “나 봤다” 뭐 이런식으로 다른 아무 말도 안 적고 사진만 보낸거예요. 원하는 게 뭐냐고 물었는데 그 이후로는 답장이 없었어요.


재경: 그래서 차단을 했나요?


레놀: 그 사람이 저한테만 그런 게 아니라 여러 사람한테 그렇게 행동을 했는지 다 그 사람을 떠났어요. 그게 1년 반 정도 전 일이었죠. 그 친구가 최근에 트위터를 다시 시작한 걸 친구를 통해서 알게 되었어요. 여기저기 저 옛날에 누구예요 라고 하면서 친구신청을 하는데 아무도 안 받아주지 않는 거예요. 혼자 이야기하고 있고 혼자 트위터로 내가 그때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내 용서를 제발 받아줬으면 좋겠다 이런 글도 올라왔는데. 제 계정이 비공개라 저한테도 신청이 왔어요. 저는 거기에 대한 사과를 아직 듣지 못했기 때문에 받지 않았어요.


어나더: 직접 사과를 받은 적이 한번도 없나요?


레놀: 네. 카톡이나 이런 걸 통해서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나더: 저는 블로그 하면서 고등학교 동창들에게 아웃팅을 당했어요. 갑자기 제 ask 계정에 문과학생 누구 아니었냐고. 처음엔 되게 살갑게 와서 날 아는구나 싶어서 맞다고 했는데 그 후에 또 연락이 와서 고등학교 이름을 지워라, 학교 이름에 먹칠한다고. 글들을 지우라고 하더라고요. 

당시에 1년 정도 남고에 다니는 게이 컨셉으로 블로그를 했었거든요. 그때는 제가 대처를 잘 하지 못했죠. 그냥 무서웠던거예요. 왜냐하면 부모님에게 아웃팅을 당하고 나서 또 다른 아웃팅 위협이었기 때문에 무서웠어요. 제게는 너무 보물 같은 글들이니 지울 수는 없고 결국 비공개처리로 바꿨어요. 1년 정도 비공개를 했다가 올해 다시 공개로 바꿨어요. 생각해보면 고등학교 친구들에게 밝혀져도 상관이 없겠더라고요. 

지난 1년동안 활동하면서 제 자신에 대한 프라이드도 생기고, 직접적인 커밍아웃을 하지 않았다고 해도 만약에 누가 사진이 이런게 찍혔는데 너 맞냐고 하면 맞다고 할 수 있는 자신감 정도는 생긴 것 같아요. 다음에도 그런 비슷한 일을 겪으면 더 당당하게 잘 대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들의 경험이 아니고 내 경험인데 지우라 마라 할 권리는 없으니까요. 2016년이 딱 되고 비공개를 공개로 전환할 때 뭔가 뿌듯했어요.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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