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6월 12일 새벽, 열광적인 행진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뉴스를 접했습니다. 성소수자 자긍심의 달이라 일컫는 6월 한복판에 발생한 사건입니다. 자긍심에 고무될 시간은 너무도 짧았습니다. 퀴어퍼레이드에 역대 최대인원이 참여했다는 고무적인 뉴스에 뒤이어 증오의 표적으로 희생된 50여 명의 이름들이 화면에 오르내렸습니다.
클럽 펄스는 올랜도지역 성소수자와 지지자, 성소수자의 가족과 동료들이 모이는 공간입니다. 클럽은 HIV/AIDS 합병증으로 잃은 형제를 기리기 위해 개업했다고 합니다. '펄스(Pulse)'라는 이름처럼 세상을 떠나고 없는 형제의 박동이 지금 여기서 울리기를 소망하며 만들어진 장소입니다. 클럽으로 운영되지 않는 시간에도 친교와 교육이 이뤄지는 일상의 커뮤니티입니다.
‘라틴 나이트(Latin Night)’ 파티가 진행된 당일 클럽에는 흑인과 라틴계 등 유색인종 성소수자와 지지자들이 많았습니다. 이들도 평소의 우리처럼 친구를 만나 인사를 나누고 주말을 즐겼습니다. 누군가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백했을지 모릅니다. 한참동안 고민한 끝에 성소수자로서 자신을 드러내고자 첫발을 디딘 이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을 즐기고 새로운 시간을 기획했을 공간에 직접적인 혐오가 드리웠습니다. 과거의 희생으로부터 일궈낸 커뮤니티에 참담한 희생이 반복되었습니다. 지난 아픔을 기억하고 오늘을 즐기며 미래의 시간을 만들어가는 자리에 증오의 총구가 성소수자 동료들을 살육했습니다.
절대 일어나선 안 될 사건이지만, 여전히 혐오가 잔존하는 성소수자의 일상에 아주 예상하지 못할 일은 아니었습니다. 특히 성소수자를 반대하는 외침이 거리를 가득 채우고, 동성애자를 죽이겠다는 공공연한 협박과 언어폭력이 만연한 한국사회에서 증오범죄는 이미 싹트고 있습니다. 더욱이 미국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점에서 동성 결혼이 법제화되고 동등한 시민권이 보장된다고 혐오가 온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반대로 성소수자의 존재를 지지하고 혐오로부터 보호해줄 구체적인 제도 마련이 시급함을, 혐오의 위험에 대한 대중사회의 환기가 절실하다는 것 또한 확인하게 됩니다. 고통스런 교훈입니다.
사건 이후 혐오의 목소리는 사회적 소수자들을 고립시켰습니다. 한국 영사관은 피해자 대부분이 성소수자이기에 교민의 피해는 없다고 일갈하며 성소수자를 외부 존재 취급하고 차단했습니다. 많은 언론들이 아프가니스탄 이주민 2세라는 가해자 신상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 공화당 대선후보를 비롯한 보수정치인들은 이 사건이 이슬람 테러리스트의 공격이라고 호도합니다.
희생자를 추모하며 우리는 해시태그와 뉴스 기사에 언급되는 이름들로부터 질문을 빚고 사회에 문제제기합니다. 주변에는 사회적 소수자를 양산하고 폭력을 정당화하는 요소들이 산재해있습니다. 동성애 혐오를 주입하는 가부장적 가족주의가, 사명을 빌어 사회적 소수자를 삭제하는 종교 근본주의가 소수자 혐오와 폭력을 실체화합니다. 중동지역을 고립시켜 이슬람 사회를 범죄국가로 잠식시킨 서구의 국가들과, 소수자 증오폭력에 이렇다 할 보호정책 없이 자국 국민에게 총기를 허용한 미국정부에도 책임을 물어야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이 이슬람 혐오와 성소수자 혐오가 상호 교차하는 악순환으로 연결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무슬림의 동성애자 증오살해로만 부각시켜 특정 집단 간 혐오로 의미를 좁히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어떤 모습으로 우리를 구획하고 사지에 내모는지, 그 속에서 우리는 어떤 태도로 살고 있는지 비판적으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소수자 역사는 희생을 기억하며 차별에 저항해온 궤적입니다. 강인한 투사처럼 기갈지게 세상의 편견과 혐오를 이기며 살아낸 성소수자의 어제와 오늘이기도 합니다. 그 과정에 성소수자들은 공동의 언어를, 음성과 몸짓을, 공동체라는 울타리를 구축하며 감수성을 세공해왔습니다. 우리 삶은 크고 작은 아픔으로 눌려있지만 무지개 색으로 약동합니다. 슬픔에 사무친 아픔이 많지만 차별과 혐오의 경험을 공동체의 감각으로 만들어냅니다.
퀴어퍼레이드가 마무리되고 사건이 발생한 시간동안 우리는 자긍심과 생존의 위협 사이를 오르내리며 극단적인 낙차를 감당하고 있습니다. 여느 때보다 높아지는 자긍심에도 불구하고 언제든 혐오폭력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실감합니다. 혐오가 재난으로 도래한 지금 자긍심과 생의 위협 사이 낙차는 보다 압축적으로 느껴집니다. 성소수자 커뮤니티의 새로운 국면 위에서 우리는 많은 고민거리를 마주합니다.
총격사건은 자긍심을 구축해온 역사에 짙은 얼룩으로 남을 것입니다. 성소수자로서 일상이 혐오에 노출되고 언제든 위험해질 수 있기에 성소수자 자긍심은 온전할 수 없습니다. 성소수자의 자긍심은 생사를 위협하는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성소수자 혐오를 강화하여 공포를 조장하는 의도가 성소수자를 음지에 몰아넣고 부정하려는 것임을 모르지 않지만, 위협의 파고가 높아진 만큼 우리는 몸을 더 낮추고 사리라는 요구에 흔들리기 쉽습니다.
그렇기에 성소수자의 자긍심은 집단적으로 구축되어야 합니다. 뼈저린 아픔 주위에 모여 서로를 맞잡읍시다. 항상 그래왔듯 우리는 우리로서 모이고 춤추며 노래합니다. 성소수자의 삶이 위험으로부터 안정된 기반을 갖기 위해서는 공포를 조장하는 세력들에 함께 맞서고 문제제기하며 우리가 원하는 사회를 그려나가야 합니다. 당신을 사로잡은 불행이 무엇인지, 나에게 드리운 공포가 무엇인지 읽어내는 노력은 공동체의 역량으로 남을 것입니다. 고된 여정일지라도 비틀거리는 걸음들은 다양한 얼굴과 몸짓을, 목소리와 리듬을 담아내며 우리의 시간을 만들 것입니다.
사건의 맥락을 찾고 책임을 묻기 위해서는 혐오에 의한 희생을 반대하고 희생을 애도하는 이들과의 연대가 중요함을 다시금 새깁니다. 이슬람 근본주의를 비판하며 성소수자 희생자를 애도하는 무슬림 이주민과 여전히 인종혐오의 타깃이 되고 있는 유색인, 폭력적인 국가안보를 반대하는 모든 이들이 함께 증오범죄를 반대하고 혐오와 배제에 저항하는 목소리를 모아야할 것입니다.
희생자의 안녕을 기원하는 문장은 먼저 보낸 이들에게만 향하지 않습니다. 부상자에 건네는 회복과 건강의 인사 역시 증오와 폭력에 노출된 모든 이들에게 전해질 것입니다. 차별과 증오에 희생된 이들의 박동이 살아있는 우리를 광장으로 모이게 합니다. 모든 차별을 반대하기 위해 성소수자와 여성, 무슬림과 이주노동자, 장애인과 빈민, 비정규직 노동자를 비롯하여 사회의 차별과 혐오를 견뎌내는 모든 이들이 연대할 것입니다. 우리의 평안을 위해, 성소수자로서 일상을 일구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누구와 함께 싸워야 할지 함께 이야기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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