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웹진기획팀)
추석 연휴 끝무렵이던 9월 18일 저녁, 각자 명절 음식을 싸 들고 행성인 사무실로 성소수자들이 모였습니다. 바로 웹진기획팀에서 기획한 <커밍아웃 경험 나눔 수다회>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는데요. 여러 성소수자 가시화 주간이 많은 9. 10월을 맞이하여 가시화를 위해 성소수자들이 필수적으로 거쳐야만 하는 관문인 커밍아웃 경험을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아마도 여러 성소수자들의 이야기를 보며 비성소수자 분들은 어떤 태도를 취하면 좋을지 생각해볼 수 있고 또 커밍아웃을 준비하는 분들은 방법상의 힌트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커밍아웃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궁금하신 분들의 궁금증도 해소하고, 커밍아웃에 두려움이 큰 분들에게는 ‘저렇게 삶은 계속 되는구나’ 하며 용기를 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오소리: 오늘 모인 여러분 반갑습니다. 여러분은 커밍아웃을 한 적이 있나요? 있다면 왜 하기로 결심했는지, 안 했다면 왜 나는 커밍아웃을 안하기로 했는지 이야기 해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커밍아웃을 했을 때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 같은 것도 이야기 해주시면 좋고요.
겨울: 저는 겨울이라고 합니다. 저는 커밍아웃을 했는데요. 내 자신에게 진실해지고 싶다기보다 ‘남자친구는 언제 생겨?’ 같은 질문을 듣는 것이 싫어서 정체성을 밝혀왔어요. ‘나를 이성애자로 미리 짐작하지 말고, 나는 이런 사람이니 이상한 질문은 그만해라’ 같은 의미가 가장 컸어요.
제 베스트 커밍아웃 경험은 동생에게 했던 것이었어요. 동생은 ‘아 그래?’ 하고 그저 하던 게임을 할 뿐이었죠. 가장 나빴던 것은 어머니에게 한 커밍아웃이었어요. 어머니께서는 “너는 늘 나쁜 이야기 밖에 할 게 없니?”라고 하셨거든요.
제이: 저는 커밍아웃을 두 번 했어요. 동성애자로 커밍아웃 후, 트랜스젠더로 커밍아웃을 또 했어요. 제가 외국에서 산지 10여 년이 넘었는데요. 현재 네덜란드에 있는데 굉장히 개방적인 곳이라 친구들이나 학교에서 커밍아웃 하기 쉬웠어요.
계속 해외에서 있다 보니 부모님을 자주 못 뵈잖아요. 커밍아웃을 안 해도 사는데 지장이 없겠다고 생각해서 숨기고 있다가, 어머니에게 대학교에 들어가자마자 동성애자로 커밍아웃을 했어요. 반응이 별로 안 좋았죠. 그 다음부터는 가족들에게 말하기 겁나더라고요. 4년 후, 제가 트랜스젠더라는 게 느껴지기 시작해서, 그 때 친구들에게 커밍아웃을 다시 했어요. 알고 있었다는 친구들도 있고 상관없다는 친구들도 있었죠. 어머니에게도 트랜스젠더로 커밍아웃을 했는데, 어머니에게 제 정체성을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서 “엄마 나는 홍석천이 아니고 하리수야.” 그랬어요. 어머니께서는 더 충격을 받으셨죠. 그때 전화 상으로 엄청 싸웠어요.
오소리: 네덜란드는 어때요?
제이: 저는 지금 암스테르담에 살고 있는데 외국인 이어도 사회적인 보호를 해줘요. 1년 이상 살면성기 수술이 무료에요. 네덜란드 건강보험을 가지고 있으면요. 저는 아직 수술까지는 생각 안하고 있고, 호르몬만 맞고 있어요. 지금은 가슴 수술까지는 포함되지 않는데, 2~3년 전만 해도 무료였어요. 그리고 제가 트랜스젠더로서, 취직할 때 불평등이 있으면 바로 고소할 수 있으니까 좋아요. 사회인식 자체가 성소수자를 폄하하는 사람이 나쁜 사람이 되는 사회에요.
사과: 제 커밍아웃 경험을 이야기 해볼게요. 제가 부모님께 아웃팅에 가까운 커밍아웃을 하게 된 것은 제가 기차에 관심이 많아서 철도 총파업에 갔다가 행성인에서 활동하는 덕현과 나라를 만났는데요. 만나서 저녁을 먹고 번호교환을 했어요. 그 때 핸드폰을 엄마와 같이 쓰고 있던 때였는데요. 그날 저녁 덕현이 ‘오늘 반가웠다’고 문자를 보냈는데, 문자 끝에 '성애자인권연대(행성인의 옛 름) 덕현' 하고 보낸 거예요. 그런데 그날 어머니께, 제가 인권 관련 단체 관련자 분들을 만났는데 나도 함께 활동을 하고 싶다고 했었거든요. 그런데 바로 문자가 와서 어떤 인권 단체인지 바로 아시게 되었죠.
고등학교 때에는 커밍아웃을 했어요. 본격적으로 게이라는 정체성에 대해서 생각을 해봤던 때였거든요. 숨기는 것에 대한 거부감도 있었고요. 기숙사 룸메이트는 커밍아웃을 하면 다음날 모든 애들에게 소문을 낼 것 같은 친구였는데, 바로 그래서 그 친구에게 했어요. 일일이 하지 않아도 되잖아요. 여러 가지 반응이 많았죠. 물론 대다수의 반응은 뒤에서 뭐라고 할 지 언정, 대놓고 뭐라고 하지 않았어요. 응원하는 친구도 있었고요.
대학 친구들에게는 안 했는데, 이미 다 알 것 같아요. 대학교 ‘대나무 숲’ 게시판 글에 댓글을 단 적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직접 제게 ‘너 게이 아니냐’고 물어본 친구도 있고요. 친구가 다 이해해줄 수 있다고 했지만 제가 볼 땐 전혀 아니어서, 아니라고 했어요. ‘동성애를 존중은 하겠지만 이해는 못하겠어’ 라고 말하는 친구였거든요. 아직까지는 대학 친구들에게 커밍아웃을 할 생각이 없어요. 딱히 해서 좋을 것이 없는 것 같아요. 저희 과는 사람 수도 적고 도제식 교육을 하는 편이라, 학생들 사이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오면 교수님 귀에 들어갈 수 있겠다 싶어요. 제 전공은 직업을 구할 때, 교수의 입김이 세서 불이익을 당할 수 있거든요.
퐁퐁: 저는 중학교 1학년 때 친구에게 처음 커밍아웃을 했어요. 제 커밍아웃은 다 성공적이었어요. 중 고등학교 때는 자주 했고요. 특히 고등학생 때에는, 제 입에서 정체성을 부정하는 말이 나오는 것을 못 견디겠어서 방안을 생각하기도 했지요. 그래서 찾은 게 “내 성정체성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라고 말하는 거예요. 그러면 상대는 알아서 이성애자로 생각하더라도, 저는 나는 게이고 내 성정체성에는 문제가 없으니까 부딪치는 게 없는 거죠. 대학교 와서도 진짜로 친한 친구에게는 다 말하거든요. 다 반응이 좋았어요. 실패한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저는 가족에게는 누나에게 먼저 했어요. 누나에게 이야기 할 때 엄청 힘들었어요. 누나가 나를 받아줄 것을 알면서도 1시간 동안 오열하며 말을 못했어요. 누나가 답답해 하며 “나는 네가 사람을 죽였다고 해도 괜찮아.” 라고 했죠. 그 말에 용기를 얻어서 나는 사실 남자를 좋아한다고 말했어요. 누나는 허탈해하며 제가 정말 사람을 죽인 줄 알았다며 ‘뭐 그런걸 가지고 그러냐’고 했죠.
어머니에게는, 함께 병원에 간 적이 있는데, 거기서 어머니께서 자신의 힘든 이야기를 꺼내시더라고요. 아버지로부터 가정 폭력을 당하신 이야기 였어요. 어머니도 진실한 이야기를 했으니까 저도 진실한 이야기를 해드리고 싶어서 말을 했어요. 이야기 후, ‘엄마는 어떻게 생각해?’ 라고 물었더니 ‘그럼 아들 하나 잃는 거지 뭐’ 라고 말씀하셨죠. 그때 벙쪄서 한참 힘들었다가 어머니와 소원해졌어요. 누나가 중간에서 힘들었죠. 서로가 상대를 설득 해 달라고 누나에게 부탁한 거예요. 그러던 어느날 누나가 어머니를 설득 했대요. 저 애는 어려서부터 그랬다고 말을 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말이 어머니께 비수로 꽂힌 거죠. 자신이 잘못해서 그렇게 되었다는 식으로 받아들인 거에요.그러다 얼마 전 부모모임에 나갔다가 ‘부모모임 책자’를 샀어요. 집에 가져가서 어머니께 사실 내가 이런 모임에 다녀왔는데 ‘한번 읽어보면 어떻겠냐’고 전달했죠. 어머니께서 그 책을 읽으시고는 거기에 ‘부모의 잘못도 아니고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고 적힌 말에 많이 위로를 받으셨어요.
오소리: 저는 대학교 3학년 때 제일 친했던 친구에게 커밍아웃을 했어요. 그 친구가 ROTC여서 훈련 받으러 가기 전 날이었어요. 그 친구가 멀리 가니까, 가기 전에 가장 친한 친구에게 말을 하고 싶었어요. 그때 제 애인과 사귀고 있을 때여서, ‘나 연애한다’고 사진을 보여주며 ‘나 얘랑 사귄다’고 했어요. 그 친구가 한동안 ‘진짜? 얘?’ 그런 반응이었죠. 제가 ‘맞다’고 했죠. 근데 그 친구가 했던 말이 참 좋았는데, ‘그래서 네가 그렇게 요즘 행복해 보였구나’ 라고 했거든요. 그게 제 베스트 커밍아웃 경험이었어요. 워스트도 대학 친구인데, 제 소문을 과 사람들에게 내고 다녔어요.
그리고 누나에게도 커밍아웃을 했어요. 제 애인이 한신대를 다니는데 한신대 축제에 제가 놀러갔다가 찍힌 영상 때문이에요. 그때 야외 무대에서 음악 다방-사연을 문자로 보내면 읽어주고 신청곡을 틀어주는 무대-이 있었는데요. 주제 없는 음악다방이었는데 사연이 다 사랑 이야기인 거예요. 저도 사연 문자를 보냈죠. <나는 한신대 학생은 아니고 애인이 한신대 학생이라 축제에 놀러왔다. 오늘 사랑 이야기가 주되게 나오는데, 나는 내 애인이 남자다. 그런데 한번도 공개적으로 사랑한다고 한 적이 없는 것 같다. 나는 오늘 이 자리를 빌어서 공개적으로 얘가 내 애인이라고 당당하게 말하고 싶다>고 사연을 보냈어요. 사연을 읽어주는 분은 총학생회장이었는데 그 분이 성소수자 친화적인 사람이었어요. 문자를 읽더니 ‘이 사연은 제가 읽는 것보다 사연을 보내신 당사자 분이 가능하다면 직접 나와서 말해주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애인이랑 같이 나가서 사연을 읽고 ‘사랑해’ 하며 포옹을 했어요.
같이 있던 형이 그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어서 페이스북에 올렸는데요. 그런데 누나의 남자친구가 그 페이스북에 올린 형의 친구랑 친구였던 거예요. 그 영상을 보고 누나에게 말 한 거죠. 누나에게 연락이 왔고 그때 누나에게 커밍아웃 반 아웃팅 반의 커밍아웃을 했어요. 누나는 전화로 되게 덤덤했어요. 그 뒤로 누나는 우리 커플에게 되게 잘해줘요. 이번에 애인과 같이 놀러갈 때 누나가 차를 빌려줬는데, 운전 연습도 시켜주고 차에 기름도 넣어줬어요. 아이스박스에 반찬도 넣어주고요. 어머니께는 아직 말 못했어요. 계획은 있지만 막연해요. 그런데 누나는 엄마에게 절대 말하지 말래요. 그리고 누나는 어쩌다 엄마에게 말하게 되더라도 절대 자기가 먼저 알고 있었다고 말하지 말래요. 아마 퐁퐁네 누나처럼 되지 않을까 싶어서지 않을까요?
케이: 사실 최근에는 커밍아웃을 한 적이 잘 없어서, 이야기 하려면 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해요. 저는 정체화를 커밍아웃과 같이 했어요. 가장 친하게 지냈던 여자아이가 있었는데 그 친구에게 정체화하는 과정을 털어놓는 것이 커밍아웃이었던 것 같아요. 저는 무성애자로 정체화를 했는데 그 친구는 잘 모르니 동성애자와의 구분을 먼저 묻더라고요. 트랜스젠더와의 구분도 묻고요.
상대방은 본인의 궁금증을 말하는 건데 궁금증이 저에게는 어떤 벽처럼 느껴졌어요. 하나를 이야기 하고 나면 또다른 벽이 나오고.
그래서 한번 어디까지 가나 하며 설명해본 적이 있어요. 그랬더니 장장 8시간 정도를 이야기 하게 되더라고요. 그러니 그 친구가 좀 이해를 한 것 같았어요. 무성애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 동성애와 비교해서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알려주고, 그렇게 근원으로 찾아갔어요. 그 친구가 생각하는 개념들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꼬여있으니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고 설명했지요. 그러고 나니 다른 사람과 이야기 할 때 어떻게 말하는 게 좋을지 조금은 알겠더라고요.
그리고 ‘내가 이야기로만 하는 것으로는 한계가 있구나. 매번 설명하기도 어렵다. 텍스트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텍스트가 준비되어 있으면 텍스트를 보여주고 '네가 이해하라'고 하면 되잖아요. 제가 에이로그(A-LOG)를 만드는 것도 그때의 답답함에서 나온 거예요.
용용: 저는 용용이라고 하고요. 청소년인권팀과 HIV/AIDS팀에서 활동하고 있어요. 저는 2년 전에 반 강제적인 커밍아웃을 했고, 지금은 잘 지나가고 있어요. 커밍아웃은 어머니와 아버지에게만 했는데 동생이 눈치가 빨라서 알게 되었어요. 어머니에게는, 그 당시 애인이 보낸 카톡 메시지 알림창이 잠금화면에서 미리 보기로 뜬 것을 어머니가 보셔서 하게 되었어요. 메시지 내용이 “자기야 뭐해 하트” 였거든요. 남자 이름이 떠서 변명의 여지가 없었죠. 너 게이냐? 물어서 어머니께 ‘맞다’고 했더니 밖에 있던 아버지를 데리고 왔어요.
어떻게 하지 싶어서 애인에게 그날 헤어지자고 했어요. 어머니께서는 울면서 이것저것 말씀 하신 후 밖으로 나가버리셨고 아버지께서는 ‘네가 남자를 만나는 것은 상관 없으나 집에 데려오면 같이 빠져 죽자’고 하셨죠. 충격이었어요.
모리: 동성애를 해도 동성 파트너를 데려오지 말라는 이야기가 대체 무슨 말이에요. 그런데 그런말 되게 많이들 하더라고요.
용용: 차라리 내 눈 앞에 보이지 말고 혼자 살라고 하셨어요. 그 후에는 퀴어퍼레이드 갔다가 행진을 한 사진이 뉴스에 실렸는데, 부모님께서 보신 거예요. 드랙을 하느라 가발쓰고 핫팬츠에 하이힐을 신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트랜스젠더’인 것은 아닌지 물어보셨어요. 게이면 내가 그냥 넘어갈 수 있겠는데, 트랜스젠더는 절대 이해할 수 없다고 하셨죠.
모리: 반대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어요.
제이: 이란이나 파키스탄은 이슬람 국가 인데도, 트렌스젠더라고 하면 수술을 해주는 경우도 있어요. 근데 게이나 레즈비언이나 바이면 죽이죠. 트랜스젠더는 네가 사회의 성과 너의 성이 맞아 떨어져서 이성애자가 되니까 괜찮다. 그런 경우도 많아요.
함께 먹은 음식들
모리: 저는 커밍아웃을 별로 한 적 없어요. 맨 처음에 했던 사람은 성소수자 동아리 활동을 하던 대학교 같은 과 후배였어요. 엄청 떨었던 기억이 나요. 두번째 커밍아웃은 아웃팅이었어요. 작은 누나랑 발렌타인 데이에 영화를 봤는데, <친구와 연인사이>라는 영화였어요. 게이 캐릭터가 나오는데, 누나가 나도 게이 남자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거예요. 집에 와서 트위터에 ‘본인 동생이 게이인 줄도 모르고 그런 말을 한다’고 쓴 게 리트윗이 많이 되었어요. 근데 그것을 누나가 보고 제 트위터 계정을 팔로우 한 거예요. 게이라고 하니 신기해서 였겠죠. 근데 팔로우를 하고 보니까 그날 자신과 있었던 이야기들인 거예요. 트위터를 통해 제 블로그 까지 알게 되었고요. 그걸 보고 누나가 ‘아 얘는 되게 확실하다’고 알게 되었어요. 왜냐면 그 블로그가 진지한 이야기를 쓰는 블로그 였거든요. 그래서 작은누나가 큰누나에게 이야기 했고 큰누나는 부모님에게 이야기해서 아웃팅이 되었어요.
그 다음에는 부모님과 싸우며 3년간 연락을 하지 않았어요. 현재 부모님과는 화해를 했고요. 부모님과는 사이가 좋아요. 큰 문제가 뭐냐면, 내년이 부모님 환갑이라 고향에 내려가야 하는데 큰 누나를 보게 될 거란 말이죠. 큰누나와도 아직 연락을 안 해요. 아웃팅 되어 싸우던 때에 큰누나가 임신 중이었고 그때 큰 누나가 저를 뱃속에 든 애를 죽이려는 살인자 취급을 했었어요. 누나는 질병과 관련된 동성애자에게 할 수 있는 모든 저주를 저에게 말로 했죠. 누나가 2년 전에 사과 문자를 하긴 했어요. 문자의 내용이 썩 나쁜 편은 아니었는데, 한 95점쯤 되는 사과였어요. 그래도 사과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서 아직도 연락을 안하고 있어요. 그래서 내려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어요. 큰누나에게 두 명의 아이가 있는데, 조카들을 한번도 본 적이 없어요. 그 애들을 명절에 가면 봐야 하는데, 그 애들을 봤을 때 어떻게 대해야 하지 싶어요.
좋았던 커밍아웃 경험은 제가 대학 들어와서 제일 친하게 지낸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가 후원의 밤에 왔었어요. 충정로 사무실에서 홍대 사무실로 이사 가려고 돈을 모으는 행사였는데, 동인련 회원의 친구를 소개합니다라는 ‘동친소’ 프로그램에 초대했거든요. 그 친구가 ‘동친소’에 와 줬어요. 커밍아웃 한 것을 매우 잘 받아줘서, 행성인 후원도 해주고, 띵똥도 후원하고 있어요.
Jimo: 저는 퐁퐁님과 비슷하게 친구들에게 커밍아웃을 많이 했어요. 한 명에게 성공하고나니 자신감이 붙어서, 계속 하게 되더라고요. 과가 서른 명인데, 열명 정도 모르는 상태에요. 안 좋았던 것은 부모님이요. 제가 고등학교 2학년 초에 몸이 좀 안 좋아서, 집에 오래 있으며 저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었어요. 그 해 말에 밖으로 나가면서 문자로 커밍아웃을 했죠. 그날 밤에 집에 난리가 났어요. 제가 부모님께 심한 말도 많이 하고요. 고 3때는 약도 먹고 그랬는데, 대학교 때는 성소수자 인권위 활동을 하면서 제 마음의 안정을 많이 찾았어요.
그래도 항상 집에 들어갈 때가 문제인 거예요. 늘 문제가 있었다기보다 여느 가정처럼 지내다 한번씩 크게 싸우니, 마음이 힘들었죠. 이렇게 살면 내 삶이 불행한 것 같아서, 그분들을 설득하려 하기 보다 내가 엄마 아빠를 좀 이해를 해야 하지 않겠냐고 생각을 바꿨어요. 제가 외동인데 위에 누나가 두 명 있었어요. 큰 누나는 백혈병을 앓다가 죽었고 둘째 누나는 어렸을 때 선천적 심장병이 있어서 죽었어요. 그런데 하나 남은 아들이 게이 라니까 부모님이 힘든 것이었지요. 저는 저대로 ‘나를 왜 이해를 못해주지’ 라는 마음 때문에 거기에 갇혀 있어서 부모님의 아픔을 돌보지 못했는데, 작년부터 부모님을 이해하려고 해서 요즘에는 좀 사이가 좋아요. 제가 좀 많이 누그러졌고요. 억지로 참는 것은 아니고 부모를 좀 불쌍히 여기기 시작했어요. 어머니는 대화를 나누고 싶어도 울기만 하세요. 그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아파요. 이번에 추석 때도 ‘나중에 너 며느리 데려 오면..’ 이런 이야기 하셨는데, 예전에는 ‘나 게이인걸 알면서도 왜 그러나’ 하고 화가 났다면, 요즘에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요.
조나단: 저는 친구들은 거의 다 아는 편이고 직장 동료들은 몰라요. 사실 커밍아웃을 한 지 너무 오래 되어서 각각은 기억이 잘 안 나요. 오래된 친구들이 많고 특히, 대학 졸업 후에는 성소수자 커뮤니티 위주로 만나며 지내서 더 그렇고요. 그래도 딱히 나빴던 경험은 없어요.
저희 집은 저와 제 남동생이 함께 성소수자인데, 제 남동생은 게이고 저는 레즈비언이에요. 저희 둘은 서로를 되게 지지하고 의지도 많이 되어서 좋아요. 서로 통하는 것도 많고요. 제 동생의 정체성은 부모님께서 아시고 저는 타이밍을 놓쳐서 아직 부모님께서 제 정체성을 모르세요. 그래서 내년 초에 부모님께 커밍아웃을 하려고 준비하고 있어요. 그런데 동생과 커밍아웃 방법에 있어서는 조금 생각이 달라서 고민이에요. 저는 커밍아웃 하고서 성소수자 부모모임에 모시고 가고 싶었는데 동생은 반대하더라고요. 아마 동생은 이런 인권 단체 활동이 전무하기 때문에 부모모임에 모시고 간다는 게 어떤 것인지 잘 상상하지 못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동생도 행성인 후원인인데 후원 정도만 하는 편이거든요.
오소리: 그런데 왜 내년 초에요?
조나단: 일단 올해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너무 겁이 나요. 내년 여름에 부모님들을 여행 보내드리기로 해서 그 후에 할까 했는데, 동생이 그냥 할거면 내년 초에 하자고 해서 내년 초에 하려고요. 아이컨택을 하면서 잘 하고 싶어요.
람보: 저희 집안은 천주교 집안이라서 제가 커밍아웃 한 후에 부모님께서는 저에 대해서 걱정을 많이 했어요. 결혼 이야기나 아기 이야기도 자주 나왔고요. 제가 커밍아웃을 하지 않았던 것처럼요. 너무 짜증이 났었죠. 그러다 올해 초 어머니께서 저를 좀더 이해해보기로 했다면서 부모모임을 소개시켜주셨어요. 부모님께서 알아보셨나봐요. 저는 이런 단체가 있는 줄 몰랐거든요. 그렇게 4월 달에 부모모임에 처음 나가보게 되었죠. 그 뒤로 여러 단체도 나가보고 종교적인 단체도 나와보며 제 자신에게 확신이 생겼어요. 어머니께서는 이해 하겠다고 했지만 100% 받아들인 상태는 아니세요. 이번 추석에 갔을 때도 완전히 인정한 것은 아니라고 말씀 하셨고요. 그래도 엄마도 부모모임에 오고 싶어 하세요. 지인님, 하늘님과 이야기 하고 싶다고 하세요. 저는 부모님이 인정하든 말든 중요하지 않고 제 확신이 생겼기에 원하는 대로 살겠다고 생각했어요. 누가 인정하든 말든 저대로 살려고 하는 생각이에요.
바람: 저는 다 했어요. 완전 오픈리 게이에요. 정체성은 게이라고만 딱 말하긴 어렵지만요. 가족에게 한 커밍아웃 이야기는 많이 했으니 빼고, 교회 이야기를 해보려고 해요. 제가 5년 간 다닌 교회가 있었는데, 14살 때 제가 게이라는 정체성을 자각해서 15살 때 교회 친한 누나 세 명에게 커밍아웃을 했어요. 누나들은 각각 걱정을 하기도 하고, 프로이트 이야기를 하기도 했죠. 한 명은 ‘남자 맛을 먼저 봐서 동성애가 된거다. 여자 맛을 먼저 봤으면 안되었을 거다’라고 해서 충격을 받기도 했어요. 그래서 그 누나와 싸웠고요.
시간이 흘러서 교회 사람들이 다 알게 되었어요. 학생회 간부를 하고 있었는데, 교회 내에서 말이 많았죠. 성경적으로 떨어지니 간부를 하면 안 된다고요. 결국 18살에 그 교회에서 나왔어요. 제가 나가려고 할 때 붙잡으면서 제가 상처 받은 만큼 시간을 들여서 교회 구성원을 변화시키면 어떻겠느냐’며 교회 구성원을 저 혼자 설득시키라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런데 저는 제 뒤에서 ‘쟤 수술을 시켜야 하는 것 아니냐’는 그런 말을 들으며 상처를 많이 받았거든요. 교회 행사에서 갸루상 패러디를 했는데, 캐릭터상 입어야 하는 치마도 못 입게 해서 저는 바지입고 하며 한계를 많이 느꼈어요.
세인: 저는 스무살 초반에는 이야기 안하고, 유학 가서 지내면서 친한 사람들에게는 몇몇에게 이야기 했어요. 가족에게는 커밍아웃이 쉽지 않더라고요. 한국에 와서 정말 턱 밑까지 이야기할까 싶어서 망설인 적이 있는데 차마 못했어요. 어머니 아버지가 건강하시면 이야기해보겠는데 어머니가 충격 받으면 아프실 몸이라서 못했지요.
독일에 있었다가 지금은 한국에 온지 1년 정도 되었어요. 독일은 차별이 없다고 하는데 독일 사람들 내부에서는 차별이 없어도 동양 사람인데 게이라고 하면 차별을 해요. 그런 대 사회적인 것 외에 직접 커밍아웃 한 것 중에는 아직 나쁜 기억은 없어요. 가장 좋았던 기억은 한국에 와서 가장 친한 친구에게 말했을 때, 너를 친구로서 오래 보아왔기 때문에 너를 너로만 본다는 말이었어요. 그 말이 좋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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