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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수자와 가족/명절과 가족

[추석-커밍아웃] 용기를 싹틔우는 첫걸음

by 행성인 2016. 9. 3.

루카(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동성애자로 정체화 하고 나서 맞는 첫 명절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거리를 지나다보면 추석 선물을 파는 가게들이 심심치 않게 눈에 띈다. 학교에서는 대입을 앞두고 결코 게을러져서는 안 된다며 신신당부를 하고, 그러거나 말거나 친구들은 저마다 고향으로, 시골집으로 갈 계획을 세우는 데 분주하다. 특히 자취생들은 집으로 가는 날만을 손꼽아 기다린다. 명절 주제가 나오면 저마다 각자의 이야기를 늘어놓고, 질문의 화살은 자취생 중 한 사람인 내게도 향한다. “너도 명절 때 집에 가지?”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번 추석에 나는 집에 가지 않을 작정이다. 학교에서 추석 연휴 전 이틀을 재량휴업일로 내준 덕분에, 나 홀로 제주도 여행을 계획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집에는 철저히 비밀로 해둔 상태다. 변명도 확실히 준비했다. 대학 수시모집 원서접수를 한 주 앞두고 해야 할 것이 많아 연휴임에도 학교에 나가보아야 한다는, 나름 그럴 듯한 내용이기에 죄책감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여행 계획을 세우면서 달력을 마주할 때마다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15, 추석. 붉은 글씨로 쓰인 그 흔하디흔한 몇 글자가 도대체 무엇이기에 나를 이토록 괴롭히는 걸까.

 

처음에는 그저 피하고 싶은 마음이 커서라고만 생각했다. 아직도 여자 친구 하나 못 사귀었냐는 엄마의 짓궂은 농담을, ‘나중에 결혼하면 아내와’를 시작으로 피어나는 친척들의 무수한 이야기꽃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는 이름 모를 확신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그런 게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내 생각의 정반대에 서있었다. 나는 솔직하고 당당하고 싶을 뿐이었다. 속이고 숨기고 피할 필요가 결코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선 용기가 필요했고, 용기를 위해선 준비가 필요했다. 환한 웃음을 보이기 위해, 서로에 대한 사랑과 이해를 더욱 키우기 위해, 나는 잠시 어설픈 웃음의 가면을 내려놓는 것뿐이다. 제주도 여행은 그 과정의 출발점이 되어줄 것이라고 멋대로 정의 내린 것도 그 때문이다. 아직은 비겁한 내가 이번 명절을 앞두고 내놓는 부끄러운 변명이기도 하다.

 

몸과 마음이 심히도 병들고 게을러, 이제야 씨를 뿌리는 농부의 마음으로 내년 추석을 그려본다. 정직하게 땀 흘리고, 정성을 쏟는다면 수확의 기쁨을 누릴 수 있을지 모른다. 더불어 수확한 것들을 가족, 이웃, 친구와 나눌 수 있는 정다운 순간도 올지 모른다. 나의 용기가 성실한 일 년을 보낸다면, 자긍심 한가득 일궈낸 나의 두 손을 그들에게 당당히 내밀 수 있을 것이다. 자연스레 악수를 청할 수도 있다. 그러니 지금은 용기를 싹틔우는 데 집중하기로 한다. 사랑의 터전을 일구기 위해서, 부끄러운 꽃을 피워내지 않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