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원(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웹진기획팀)
처음에 “채식인의 추석 나기”라는 주제로 글을 제안 받았을 때 솔직히 너무나 막연했다. 딱히 글쓰기가 어려워서라기 보다는, 한국사회에서 채식을 하는 입장에서, 적어도 나는 추석 (혹은 설날)이나 그렇지 않은 날이나 딱히 다를 게 없어서이다. 채식인으로서 추석 날 육식위주의 식단은 평소의 육식위주 식단과 별반 다르지 않다. 퀴어로서, 페미니즘을 지향하는 사람으로서 보통 날보다 명절이 더 곤혹스러운 경우가 있을 수 있지만, 채식을 하는 입장에서는 명절이라고 딱히 “더” 곤혹스러울 건 없다. 다르게 말하면 평일도 명절만큼 곤혹스럽다.
채식인으로서의 고통보다는 동물들의 고통을
추석에 먹는 한끼 상이 나의 음식 섭취에 미치는 영향은 그리 크지 않다. 아무지 제사상이라도, 한국 전통 나물 반찬은 으레 있기 마련이고, 두부 부침과 김도 우리 제사상에 빠지지 않는다. 내가 딱히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추석에 가장 힘든 부분은 내가 먹을 게 없다는 그런 인간중심의 불편함보다는, 이 순간에도 이번 추석을 위해 감금당하고, 호르몬제를 맞고, 폭행당하고, 살해당하는 수많은 동물들에 대한 죄스러움일 것이다. 나에게 힘든 것은 이 셀 수 없는 동물을 이용하고 소비하는 인간의 시스템에 대한 자각일 것이다. 그리고 그걸 바라보는, 그 소비를 무력하게 쳐다봐야 하는 나의 부족함이 아닐까 싶다. 모이는 친척도 거의 없고, 동생도 유학 중이며, 채식을 하는 나까지, 우리 집에서 전을 먹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래도 추석이라고, 푸짐해야 하는 제사상에 올라가는 최소한의 달걀의 수는 30개, 한판이다. 호르몬과 살충제로 범벅이 된 달걀들이 깨져가는 모습을 보고 그 진실을 배반이라도 하듯 풍기는 단백질 굽는 역한 냄새를 맡을 때마다, 그 한판을 낳기 위해 닭들이 겪었을 고통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구역질이 올라온다. (자연상태에서 야생 닭 한 마리가 낳는 알의 수는 1년에 10~15개이지만, 현대 공장식 사육에 들어가는 유전자가 조작된 닭이 1년에 낳는 달걀의 수는 250개에서 300개 정도이다. 20배에 가까운 생산량을 위해 닭들이 겪는 고통은 이 글에서 논하지 않겠지만 온라인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탕국에 들어가는 고기 한 덩이, 맥적 요리에 들어가는 고기 두덩이, 구워지는 생선 세 마리. 육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우리 부모님이 추석에 쓰는 동물들이다. 추석 당일 몇 마리의 동물들이 죽을까 또 다시 생각한다. 각 집마다 달걀 최소 한판을 쓴다고 가정하면, 각 집마다 소비되는 동물들의 양을 생각하면, 많은 윤리적인 이유로 채식을 하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으로 태어난 게 싫어진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듯이 추석 날 죽는 동물들의 수는 명절이 아닌 날과 큰 차이가 없는 듯 하다. 아침에 계란후라이, 소시지, 햄, 누구는 삼겹살. 점심에 햄에그 샌드위치, 삼계탕, 육개장, 순댓국. 저녁엔 돼지고기와 소고기. 어떤 날은 초밥이나 회 덮밥. 야식으로 먹는 닭튀김 한 마리와 피자에 들어가는 치즈와 페페로니. 식사 사이사이에 먹는 우유와 계란을 기반으로 한 빵과 과자들. 이런 현실에 대한 자각은 추석이라고 특별하지 않다. 매일매일 내가 아끼는 주변 사람들이 끊임없이 소비하는 것들이 누군가의 젖, 누군가의 알, 누군가의 살점, 누군가의 뼈와 피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 인지를 거부하기도 한다. 너무나 고통스러우므로.
채식하는 퀴어, 게이 채식인
우리 가족은 내가 처음 채식을 시작했을 때에 엄청난 반대를 한다거나 크게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최소한 나에게 많은 티를 내지는 않았다). 물론 같이 밥을 먹으러 나가기가 어려워졌고, 그에 따라 짜증도 내고 언쟁을 할 때도 있었지만, 내 고집(믿음이라고 읽는다)과 채식의 실천 이유를 어느 정도는 이해해주셨다. 물론 우리 집 자체가 육식을 지양하는 편이어서 더 수월했을 지도 모른다. 아니면 미국에서 받아들여온 “외국 선진 문화”라는 오해를 했을지도 모른다. 우리 부모님은 내가 성소수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듯이 채식을 한다는 사실도 받아들였다. 근본적으론 이해하거나 더 알고 싶어하시지는 않지만 나의 다름을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말이다.
추석 때에 오시는 큰아버지는 그래도 사람이 고기를 먹어야 한다는 둥 혼잣말같이 이런저런 말을 하시지만 나는 그냥 못들은 척 한다. 그렇게 가까운 사이도 아니고, 교류도 없어서 별로 대꾸를 할 필요를 못 느낀다. 이러한 상황이 명절에만 있는 일은 아니다. 평소에 채식인으로 “커밍아웃”했을 때 끊임없이 듣는 말이기에 딱히 특별 할 건 없다. 명절에 모이는 사람이 많았다면 다대일로 질문세례를 받고 불편했을 게 뻔하지만 다행히 모이는 친척이 거의 없는 우리 집에서 그런 상황은 일어나지 않는다. 작년에 개봉한 황 윤 감독의 <잡식가족의 딜레마>에서도 페스코 채식을 하는 그녀가 가족 구성원들에게 “고기를 사람이 먹어야 하지 않나,” “단백질은 어디서 섭취하냐” 등 흔한 질문을 받고 곤란해 하는 장면이 나온다. 솔직히 이러한 질문들은 너무 식상해서 질문하는 사람이 짜증날 때도 있다. 동성애자에게 “동성에게 느끼는 감정은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거다”라는 식의 말을 듣는 것과 비슷하다. 아직 채식이 익숙지 않은 한국 사회라지만, 요즘 같은 세상에 채식에 대한 자주 묻는 질문은 온라인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채식인 커뮤니티에 이런 농담이 있다: “평소에 영양에 관심이 눈곱만큼도 없던 사람이 채식인을 만나면 영양학 박사가 된다”고. 내가 채식인으로 겪는 사회적 고립과 소외, 그리고 그 사회적 소통은 내가 성소수자로서 느끼는 그것과 비슷한 점이 많다.
무엇을 위한 풍요로움인가
언젠가 내 블로그에 올린 “채식은 내가 할 수 있는 최소의 페미니스트적 행동이다”라는 글이 온라인에서 많이 읽혀지고 공유되었다. 채식은 우리가 더 이상 동물의 섭취가 필요할 만큼 궁핍한 사회에서 살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전제한다. 먹을 것이 넘쳐나고 동물성 음식의 섭취 과다로 비만, 고혈압, 당뇨, 암 등으로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있는 현실에서 동물 소비는 동물 생산 공장을 중심으로 공급된다. 그리고 동물 생산은 다른 생필품과 다르게, 동물들 암컷의 자궁을 공장으로 한다. 현대 사회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소비를 위한 수의 동물을 생산해 내기 위해서는 암컷의 자궁을 인간이 끊임없이 착취해야 한다. 암컷은 가임시기부터 죽을 때까지 강제 임신 당한다. 낳은 새끼는 태어나자마자 격리되고, 소의 경우에 새끼에게 가야 할 모유를 종이 다른 인간에게 빼앗긴다. 수컷은 고기로 팔려나간다. 수평아리들은 산채로 갈려 죽음을 당한다. 채식을 하는 많은 이유 중에 가장 근본적인 것은 이것이다. 고통을 느끼고 지각하는 생명의 목숨을, 그리고 특히, 암컷 동물들의 자궁착취를 기반으로 한 동물 소비를 나는 지지 할 수 도 없다. 추석상에 이러한 시스템의 고통으로 얼룩진 “음식”들로 인간의 풍성함을 축하하는 것이 나에게 가능할 리 없다. 죽는 것, 강제 임신 당하는 것은 불쌍하고 안됐지만 너무 “맛있어서 ~한다” 라는 이유는 얼마나 권력자이자 착취하는 자의 오만한 생각인가?
이번 여름 폭염으로 인해 폐사 된 동물들의 숫자가 떠오른다. 수백만이 넘는 동물들이 죽었다. 케이지가 비좁아서 움직일 수도 없고 햇빛 한번 제대로 쬐어 본적 없다. 그래서 면역력도 없고 건강하지도 않은, 공장에서 살코기로 팔리기 위해, 먹히기 위해 태어난 생명들이 항생제만 맞아가다 죽어나가는 모습이 생각난다. 곧 또 구제역과 조류독감과 같은 질병으로 수천만 마리의 동물들이 치료받을 기회도 박탈 당한 채 산채로 생매장 될 계절이 다가오고 있다. 추석은 수확의 풍요로움을 축하하는 전통 아니었던가? 풍요가 넘쳐 탐식으로 변모하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과연 인간이 추석을 어떻게 이해하고 보내야 할지 생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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