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소리(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웹진기획팀)
어김없이 추석이 돌아왔다. 맛있는 음식들을 먹을 수 있고, 용돈도 두둑이 챙길 수 있고, 잠시 학업에서 벗어나 푹 쉴 수 있다는 점에서 반겨했던 건 어릴 적 추억으로만 남아있다. 고등학생 때는 대입 문제로, 대학생이 되니 취직 문제로 스트레스를 받고 명절이 싫어지더니, 이제는 성정체성 문제까지 더해졌다. 명절이 더 싫어졌다.
나는 아직 누나 외에 가족에게는 커밍아웃하지 않았다. 양성애자라는 정체성을 자각하고 3년이 조금 지났다. 그동안 맞이한 명절(설, 추석)은 일곱 번. 그 전에도 “여친은 있니?”라는 오지랖들이 싫기는 했지만, 남자친구가 있는 지금은 그 싫음이 곱하기 백 정도로 싫어졌다. 그럼에도 여전히 명절을 명절을 쇠러가는 건, 친척들을 만나는 게 반갑고, 안 갔을 때 부모님이 서운해 할 것이 눈에 선하기 때문이다. 착한 아들, 성실한 친척으로 살아온 20년이 넘는 세월은 명절 모임에 빠질 수 없는 이유가 되었다. 지금이라도 반항하는 아들, 친척으로 살아갈 수야 있겠지만, 지금 같은 나의 위치가 싫지 만은 않다.
누나에게 커밍아웃한 것이 도움이 될 때도 있다. 작년 설, 여친은 있냐, 결혼은 언제 할거냐는 친척들의 질문 공세에 “얘는 결혼 안 한대요.”라는 누나의 한마디는 대화의 단절을 일으켰다. 그 뒤의 의아함으로 인한 적막함은 차치하기로 한다. 일단은 그 괴로운 상황에서 벗어난 것 만으로 족하니 말이다. 아, 물론 언제가 될진 모르지만 동성결혼을 하긴 할 거지만.
한 명이라도 온전한 나를 알고 내 편이 되어준다는 게 든든하긴 하지만, 한 명만으로는 여전히 부족할 때가 많다. 남자친구와 커플링을 맞추고 처음 맞이했던 명절에는 또다시 친척들의 오지랖이 발동했다. (심지어 이 때는 누나에게 커밍아웃하기 전이었다!) 커플링의 또 다른 한 명의 인물이 누구인 지를 두고, 그 순간 친척들은 탐정으로 빙의하여 나를 추궁하기 시작했다. 선선한 날씨였지만 어찌나 식은땀이 나던지. 어떻게든 추리의 장을 끝마치고 싶었던 나는 궁색한 변명을 하기에 이른다. “은반지가 몸에 좋다길래…” 지금 생각해도 헛웃음이 나오는 대답이었지만 그 순간에는 그 상황을 모면하는데 급급했다.
사실 아직 20대 중후반이기에 결혼에 대한 압박이 그리 크지는 않다. 하지만 점차 나이를 먹어갈수록 심해질 것은 불 보듯 뻔하다. 나는 계속해서 명절을 쇠러 갈 것이고, 이런 불편한 상황들을 계속해서 마주할 생각은 없다. 언젠가는 커밍아웃을 할 생각이다. 커밍아웃한 후의 명절모임이 어떨지는 쉬이 추측하기 어렵다. 성소수자에 대해 친척들은커녕 부모님과도 얘기해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누군가는 불편해 할 것이고, 누군가는 포용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분명한 건, 그 때가 되면 잔소리를 듣거나 혹여 언쟁을 할지언정 더 이상 나를 숨길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그걸로 나는 만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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