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서로 다른 세계들의 변칙적 조우

 

<변칙판타지>는 근래 아카이빙 전시와 단행본 출간 등으로 8년여 국극 프로젝트의 여정을 갈무리하는 정은영 작가의 무대연출이라는 점에서 이목을 끌었다. 한편으로 국극배우와 지보이스가 조우하는 컨셉은 다른 갈래의 관심사였다. 둘의 만남은 어떤 풍경을 만들어낼까. 공연 전부터 대강의 주파수를 가늠해보기도 했다. 남성중심의 판소리계에서 배제된 국극의 텅 빈 지층 위에 애초부터 설자리가 없었던 국극배우, 주어지지 않았던 자기 자리를 찾아가면서 일상을 노래하는 게이코러스의 만남이 어떤 시너지를 낼 것인가. 작가의 문장을 빌린다.

 

 

‘여성국극 남역배우라는 환상에 인생을 걸었으나 이제는 소멸의 끝자락에 아슬아슬하게 서있는 마지막세대 남역배우 남은진의 우울과, 성소수자로서의 몫 없는 삶을 부단히 정치화하는 아마추어 게이남성합창단 ’지보이스‘의 목소리를 공연예술의 본류인 디오니소스적 열광 속에 자리 잡게 하고 싶었다.’(프로그램북 중)

 

 

오래 전 성별위계적인 판소리계에 밀려나 전통으로 자리매김조차 하지 못한 국극의 끝을 잡지만 좌절을 거듭하는 배우가 등장한다. 그리고 앞뒤로 나란히 등장한 지보이스는 ‘세상아 너의 죄를 사하노니’와 ‘북아현동 가는 길’을 부르며 시작부터 포석을 둔다. 기억을 통해, 기억하겠다는 의지를 통해 공동체의 결속을 다잡는 지보이스의 태도가 발화하는 가사는 기실 세련된 감정의 언어가 아니다. 호흡이 엉키고 더러 쇳소리가 나기도 한다. 하지만 코러스의 목소리는 자괴와 자조의 연민에 빠지지 않고 단단하게 기억을 붙든다. 집단의 울림은 홀로 분투하는 국극배우의 든든한 배경이자 거울상으로서 우정의 시작을 알린다.

 

국극배우가 지보이스와 만나고 관계 맺는 과정은 커뮤니티와 예술 장르가 교차하는 가운데 무대 위 새로운 풍경을 만든다. 만남은 나를 노출하고 타인의 삶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배우 남은진은 남역배우로서 무대 위를 호령하고 휘젓는 카리스마를 과시하기보다 과시의 기술을 전시함으로써 일개 배우로서 자신을 드러낸다. 노출은 떨린 호흡과 목소리로 전달되기도 한다. 자신의 맨살을, 상처와 고독을 드러낸 것은 타인과의 만남을 준비하기 위한 태도였을까.

 

이에 게이코러스가 응한다. 지보이스는 공연의 배경이자 배우의 동료이고, 코러스이자 뮤즈이며 동시에 배우이다. 둘의 조우는 국극을 현재의 시공간에 교차시키는 동시에 퀴어커뮤니티의 역사와 공간을 재배치한다. 그리고 둘을 주선하고 무대 위에 둘의 궁합을 조율하는 작가가 있다. 국극을 재배치하기 위해 오랜 시간 분투한 작가는 연출 뿐 아니라 주파수를 맞춰 세계와 다른 세계의 연대를 주선하고 시간과 다른 시간을 꿰어내는 ‘매파’를 자임한다. 동시에 흔적만 남은 과거에 의미를 부여하며 현재의 시공간으로 끌어올리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자리매김한다.

 

이들이 오른 남산예술센터의 무대 역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국내 최초 ‘현대식’ 극장을 표방한 남산예술센터는 가장 ‘오래된’ 근현대식 공연장이기도 하다. ‘문화 권력이 만든 근대 예술 공간을 전유’ 했다는 문구는 ‘오래된 현대’의 또 다른 상징적 장소로서 낙원상가 주변의 골목, 60-70년대 이래 근대 극장 공간을 점유한 서울의 게토공간을 어렴풋이 연상시킨다. 장소의 점유는 기존 장소에 색을 입히고 덧대며 동시에 그 효과를 넘어선다. 기존 규범의 주변부에 밀려난 이들이 권위적이고 상징적인 공간을 점유함으로써 이질적인 장소를 만들어낸다. 아니, 근대의 공간들은 애초 다양한 이들이 공존했던 이질적 장소였다고 말하는 것이 좀 더 정확한 설명일 것이다. 다만 그들은 오랜 시간 침묵 속에 배제되었을 뿐, 이들이 제 장소를 주장하는 시도는 권위로 포장된 공간을 찢는다.

 

고대 원형극장의 형태를 갖고 있는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는 연극의 원형(原形)적 공간을 재현한다. 형식으로부터 구애받지 않는 조건에서 수행되는 연출이 원형적인 공간 위에서 ‘연극의 원형’을 찾는 시도에 가깝다는 것이 계획의도의 설명이다. 야심찬 취지지만, 기실 제대로 무대에 설 기회가 없던 국극배우나, 연극무대에 오를 일 없는 게이합창단, 처음으로 협업작업을 시도하는 작가의 무대는 전문적으로 장르화된 연극의 틀로 구획할 수 없다. 무대를 설명하는 텍스트들은 규범에 불완전하고 이질적인 접근이 외려 연극의 기원에 접근하는 시도일 수 있다고 표현한다. 하지만 문장은 다시 한 번 기술될 필요가 있다. 원초적 연극무대라는 판타지로부터 퀴어의 공간이 변주된다. 모든 요소가 첫발이고 어설프지만 낯설고 새로운 양식을 만들어내는 시도는 극의 원류를 향한다. 하지만 원형을 향하는 시도는 국극과 게이합창단의 낯선 조우를 거치면서 성별규범의 밑바닥으로부터 끝없이 울리는 이질성의 목소리를 마주하며 끝없는 ‘퀴어’의 태동에 공명한다.

 

 

애도의 반복, 쾌락의 수평성

 

변칙적 무대라는 공간이 작품의 한 축을 지탱한다면, 다른 축으로는 고전과 전통이 지금 여기의 시간 위를 가로지르며 무대의 층을 넓힌다. 무대에 인용되는 문장은 다름 아닌 소포클레스의 희곡 <안티고네>이다. 조국의 배신자로 낙인찍힌 오빠 폴리네이케스의 시신을 매장한 안티고네는 죽음을 불사하고 금지된 애도를 실천함으로써 제 아비인 오이디푸스 이후의 전복적 주체로 평가된다. 금기를 행하여 스스로를 벌한 오이디푸스와 달리, 의식적으로 금기를 행한 안티고네의 행위는 그 자체로 불복종을 실천한다. 안티고네의 애도는 여성에게 할당된 수동적 역할을 뛰어넘어 국법 너머 신의 법을 주장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금기를 행하는 시도는 기존의 권위를 전유한다. 이는 크레온의 명령에 저항하는 행위 자체가 크레온과 비등한 권력과 남성성을 체현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주디스 버틀러의 독법에 닿는다.

 

고전을 가져와 국극에 정통성을 입히는가 싶지만, 젠더 위반적 고전, 젠더 위반적으로 다시 읽은 고전은 전통의 규범을 뒤틀어 놓는다. 고전의 뒤틀린 인용, 뒤틀린 고전의 인용은 그리스 비극의 숭고한 죽음서사를 초라하게 쇠퇴한 국극에 겹쳐놓는다. 같은 맥락에서 법에 저항하고 법의 목소리를 전유하는 안티고네는 남성본유적 전통을 전유하며 남성이 ‘되는’ 여성 국극배우에 포개어진다. 그리고 안티고네의 금지된 애도는 기억해야만 남을 수 있는 성소수자 동료의 죽음, HIV/AIDS 낙인과 성소수자 혐오 속에 생을 마감한 오욕의 생을 애도하는 행위에 연결된다. 기억의 흔적이 겨우 남아있는 국극을 움켜쥐고 무대에 오른 배우 남은진의 무대는 상실에 대한 또 다른 애도의식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여기서 그녀는 유령 같은 국극의 흔적에 침잠하기보다 게이 코러스의 또 다른 애도의 장면에 교차한다.

 

그렇게 애도는 반복된다. 한번은 비극으로, 한번은 희극으로. 안티고네에서 국극으로 연결 짓는 작가의 연출과 선대 국극배우에서 후대로 계승되는 시간은 수직적이다. 이야기를 읽고 읽는 이의 이야기를 만들어 전달하는 방식은 구전으로 전승되었던 국극의 특이점이기도 하다. 그리고 계승의 기술은 무대 위에 다시금 반복한다. 배우 남은진은 선대의 국극배우 자전을 읽는다. 그리고 이를 읽는 배우의 이야기를 지보이스 단원들이 읽는다. 이들이 낭송하는 것은 과거의 목소리를 전승하여 족보로 남길 필요 없이 복제 가능한 문자들이다. 게이 코러스가 남역 배우의 텍스트를 읽는 것부터 목적은 탈구되고 계승은 명분을 잃는다. 계승이 함의하는 수직적 위계는 게이코러스와 남역 배우 간의 수평적 대화로 위상을 전환한다.

 

 

(사진출처: 남산아트센터 트위터)

 

선적인 시간의 흐름이 수평적 점으로 압축됨에 따라 무대는 밀도와 강도를 갖는다. 매체와 장르가 교차하는 가운데 배우들의 난망하는 몸짓이 속도와 힘을 표출한다. 영상에는 과거 국극 열혈팬의 요청으로 극단 전체가 함께 참여해서 남겼던 빛바랜 결혼식 사진이 입자단위까지 클로즈업되는가 싶더니 얼굴과 목소리, 손짓을 통해 남자-되기를 수행하는 노쇠한 배우의 화면들이 가속을 내며 교차한다. 여기에 키라라의 음악이 무대 위의 리듬을 변칙적으로 분절하며 공간을 휘감는다. 예의 예쁘고 강한 비트가 무대의 대기를 분절한다. 남성성 넘치는 앞세대의 국극배우들이 보이는 무게감이 지보이스의 명랑한 몸짓으로 흩어진다. 춤사위는 애도 너머로 튀어 올라 젠더규범을 가로지른다. 무대는 미니멀한 구조에 네온을 두르고 커다란 미러볼을 돌려 섬광 같은 만남과 해방의 순간을 빛으로 시각화한다. 전성기에는 전쟁 중에도 비단을 몸에 감고 무대에 올랐다 전하는 국극의 흔적이 게이클럽의 반짝임으로 출렁댄다. 시대와 장소, 향유관객과 배우도 다르지만 이질적인 두 무대는 쾌락으로 결속한다. 음악, 영상, 무대미술, 퍼포먼스, 연극, 문학이 접목된 종합예술이 절정으로 가닿는 순간이다. 지보이스의 노래 <콩글레츄레이션>이 피날레를 장식한다. 무대와 관객 할 것 없이 집단적 자긍심에 도취된다.

 

 

판타지의 무대: 관계의 훈련과 기술, 징후로서의 몸

 

시간을 극적으로 좁히고 응집하면서 감각적으로 터트리는 순간이 쾌락으로 채색되었던 것일까. 애도가 집단의 쾌락적 정동으로 상승하고, 무대는 디오니소스적인 카니발이 상연된다. <변칙판타지>는 국극 프로젝트의 갈무리로 읽을 수 있겠지만 그 양태는 규범 파괴적이라는 점에 지난 가을 아트스페이스 풀에서 열린 아카이빙 전시의 대극에 위치한다. 한편으론 지난 전시에 보여준 아카이브가 ‘변칙 판타지’를 싹틔우기 위한 물밑작업이라는 추측도 들게 한다. 게이코러스와의 조우는 작가가 수 년 간 천착했던 국극의 역사를 현재의 시간에 안착시키기 위한 고착된 과정이 내놓은 결과가 아니었을까.

 

애도가 말초적 감각의 떨림으로 연결되는 자리,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전복을 표명하고 전복으로부터 이질적인 시간성을 더듬어내는 자리, 젠더규범을 위반하고 일탈하는 몫 없는 삶의 자리를 해방으로 연출하기 위해서는 금기와 대면해야 했을 ‘스핑크스의 질문’이 등장해야 했으리란 계산이 따른다. 그렇게 던진 질문은 의외로 단순하고 명료하다. 코러스의 일원이 배우 남은진에게 묻는다. (기억에 의존한 문장인지라 워딩은 조금 다르다.)

 

 

‘여자면서 남자 역할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배우가 답한다.

 

 

‘남자/여자답다는 것의 본질이 무엇인가, 이는 기술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문답은 계몽적이고, 계몽적이라기엔 예스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질문은 단순히 답을 얻기 위한 문장이 아니다. 질문을 던지는 게이코러스의 천진난만하고 명랑한 몸짓과 음성이 건조한 질문의 단어들에 스며들어 질문은 발화되면서부터 뒤틀린다. 예의 ‘수행적 모순’은 지보이스의 몸이, 집단적 몸짓이 디오니소스적 카니발리즘으로 방사되는 전조였을 것이다. 배우는 젠더표현을 기술로 설명하지만, 질문자의 목소리는 기술을 행하는 이질적인 몸을 드러낸다.

 

하지만 계몽적 뉘앙스는 여전히 끈적인다. 문답의 주체를 고려할 때 질문은 외려 관객을 향하고 있다는 인상이 짙다. 평소에도 아무렇지 않게 여성성을 드러내며 끼 떨고 놀던 게이가 국극배우를 만났을 때 여자면서 남자 배역을 하는 이유를 궁금해 할까? 모처럼 귀한 만남에 던져야 했던 질문이 어째서 그것이었을까. 조우와 동시에 해방을 구성하기 위한 장치는 단순해야 했던 것인가. 어리석은 관객을 배려한 질문이라고 이해하더라도, 성별이분법 기반의 질문이 카니발적인 열락으로 넘어가는 지점은 급작스럽다는 인상이 짙다. 질문에 담긴 아포리아는 언어로 형언할 수 없는 몸의 쾌락으로 흩어진다. 그 결과 이질적인 만남과 잠재적인 관계의 다발들은 무대 위에 혼성과 다양성으로 성급하게 봉합되는 듯하다. 작가는 클럽에서 노는 게이들을 그리며 후반부를 연출했다고 한다. 변칙적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조우해서 만들어낼 또 다른 변칙 판타지는 정신 놓고 몸을 던진 클럽의 피로한 아침을, 다시금 지긋지긋한 일상을 기다려야 하는가. 반복되는 쾌락은 새로운 서사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변칙의 서사는 ‘판타지’의 궤를 벗을 수 없는 것인가.

 

해방은 순간이 아니다. 적어도 <변칙판타지>는 다른 무대들과 달리 해방의 장면 속에 관계의 훈련을 읽게 한다. 무대 없는 국극배우를 무대에 올리고, 지보이스 정기공연과 중복으로 준비해야 하는 무리를 감수하는 만남의 과정은 순탄치 않았을 것이다. 만남 이후에는 단내 나도록 육체적인 훈련과 반복이 지속되었을 것임은 물론, 각자의 생업을 영위하면서 시간을 맞추는 것부터 협상과 충돌을 예견해야 했음은 어렵지 않게 예상 가능하다. ‘합창은 협업이고 철저한 배려와 양보, 성실함이 필요한 일’이고, ‘서로의 쪽팔리는 밑바닥을 공유할 즈음이면 공연일이 다가온다.’ 공연 전날 페이스북에 올린 Jaewoo Jun 님의 문구는 그런 점에 의미심장하다. 날 것의 목소리와 몸짓이지만 이는 수다한 반복에 닳은 출연진들의 생채기와 웃음, 땀이 만들어낸 결실의 현장이었을 터. 우리는 판타지의 무대 뒤를 읽어내야 한다.

 

무엇보다 한정된 시간동안 체력과 인내의 바닥을 보이면서 그 결실로 우아하게 화음을 맞추고 교태를 부리는 배우들에 시선을 돌릴 필요가 있다. 지보이스는 남산예술극장의 공연에 뒤이어 자체 공연 <전체관람가>를 상연했다. 3부 무대에서는 마을어린이합창단과 목소리를 맞추기도 했다. 파리한 목소리를 덮지 않게 사려있는 볼륨조절을 했던 합창단이 만들어낸 하모니는 단지 기술적인 강약조절로만 이야기할 수 없다. 혹은 반대로도 설명할 수 있다. 몸으로 하는 울림의 연대는 의식이 깃든 반복적인 훈련에서 나온다. 그 사이에 서로의 욕망과 권력을, 관계를 조율한다. 젠더표현을 기술로 본다면, 목소리를 맞춰가며 해방을 구성하는 몸들의 폭발 역시 기술적이라고 봐야하지 않을까. 기술은 단순히 항목으로 표기된 순서도가 아니다. 관계의 과정과 몸의 상처들을 짚는 것 또한 새로운 서사를 상상할 수 있는 가능성일 것이다.

 

하지만 상상된 해방은 구속과 규범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하지만 그렇기에 우리는 또 다른 변칙, 변칙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발굴하여 새로운 의미를 상상해야 한다. 연출된 해방의 무대 밖에서 서성이는 쇳소리와 젠더 위반의 목소리들, 목소리 없는 목소리는 어떤 변칙적 서사로 엮어낼 수 있는가. 무대 위의 만남은 현실과 어떻게 조우할 것인가. ‘해방의 미학’ 너머 ‘해방의 과정’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이질적인 언어와 얼굴들이 조우하고 관계는 순간의 방점이 아닐 것이다.

 

해방의 스크린에 균열을 내는 불화의 목소리들이 도취된 자긍심에 생채기 내는 시도는 압축된 ‘해방’의 따옴표를 지우는 과정이다. 설령 그것이 고통스럽고 비틀거릴지라도. 균열과 불화, 무대의 내밀한 속살이 드러난다면 어떤 모습일까. 무대가 해방의 열락으로 봉합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절정에 치닫기 전, 국극배우는 무대 위에서 옷을 갈아입는다. 기술을 벗어낸, 기술의 뒷면을 노출한 배우의 맨살은 짧은 텀이었지만 해방되기 직전의 시간, 전복되기 전의 빈틈을 드러내는 듯 보였다. ‘남자가 되는 것은 기술’이라던 자신의 답을 실천하면서도 배우의 몸은 이에 저항한다. 굳이 무대에서 옷을 갈아입는 의도는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녀의 몸은 일상이 생존이라 말해야 하는 궁핍과 우울의 시간을 몸소 호소한다. 절정을 준비하는 가운데 옷을 갈아입는 행위는 결기로 보이기도 하지만, 관객들은 뒤돌아선 배우의 표정을 읽을 수 없다. 흑백의 시간, 배우의 맨 살은 변칙판타지가 도래하는 순간 직전 무엇을 말하려 했던 것일까.

 

작가는 규범과 성별전형성을 부수는 정동을 디오니소스의 주신제에 비유하며 프리드리히 니체의 『비극의 탄생』을 언급한다. 하지만 니체는 디오니소스와 함께 아폴론을 언급했다. 이는 해방의 열광과 도취 이면에 고뇌가 있음을, 분리와 고립, 개별화의 작용이 있음을 예술이 보여준다고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해방의 피날레는 고립으로부터 단절하거나 도약하기보다 짝패의 얼굴을 갖고 경쟁하고 대립하며 더불어 상호 보완적으로 공존한다. 경계를 가로지르고 규범을 전복하는 해방의 한가운데 고립과 고독은 피할 수 없는 맹점처럼 남아 도취의 순간 각성과 사유를 틈입시킨다. 해방의 순간 무엇을 해석해야 하는가. 배우의 맨 살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작가도 도취과 고립의 역설에 집중하기보다 해방의 순간 배우의 고립을 징후적으로 보여줄 뿐이다. 긴장의 시간, 방향 없는 서사와 생각들이 출몰한다.

 

‘변칙판타지’는 작가가 8년여를 다뤄온 국극 작업의 연장선상에 있다. 커뮤니티와의 조우는 새로운 전환의 시작으로 볼 수도 있고, 지속적인 전환의 또 다른 걸음으로 읽어낼 수도 있다. 재현 불가능한 국극을 읽어내고 기억하는 노력이 새로운 자리들을 만들어간다. 무엇보다 무대가 값진 것은 붙잡을 수 없는 기억에 침잠하기보다 곁에 지금 여기 노래하는 성소수자와 관계를 맺어나가고 있다는 점에 있다. 만남이 이뤄지는 무대는 배우와 코러스 개개인의 사적 경험을 공유하고, 발걸음을 맞추고 호흡의 리듬과 체온을 맞추면서 관계를 형성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규범 너머 우리에게 다가올 해방이 무엇인지, 규범을 변칙적으로 비틀어 써내려갈 파편들, 경계들의 조합은 어떤 모습일지를 곱씹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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