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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 이야기/행성인 활동가 편지

[활동가 편지] 사십의 문턱에서

by 행성인 2016. 12. 27.

정욜(청소년성소수자위기지원센터 띵동 대표, KNP+ 간사)

 

 

 

한 해가 저물어갑니다. 2016년은 저에게 30대의 마지막 시간이기도 해요. 그래서 더 특별한 한 해였던 거 같습니다. 모든 분들이 한 해 계획했던 일 잘 마무리하고, 더 나은 2017년을 맞이할 수 있길 간절히 바래봅니다.

 

사실 저는 요즘 마음이 복잡해요. 20대에서 30대 넘어갔을 때 가졌던 감정과는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앞자리 숫자가 바뀌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있고, 뚜벅뚜벅 걸어왔던 나의 역사에 대해 되돌아보기도 합니다. 나이 들어 주책인지 몰라도, 젊은 활동가들을 보면 그냥 웃음이 나고, 그들과 함께 하는 공간에 있다 보면 묘한 긴장감을 갖게 되기도 합니다. 아마 이 글을 한국HIV/AIDS감염인연합회 KNP+ 형들이 본다면 웃을 거예요. “나이도 어린 주제에 별 생각을 다 한다.”며 한 마디 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거기서는 제가 거의 막내거든요. 40-50대를 살아가는 형들과 함께 활동하고 있지만, 참 많은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서툴고 급하기만 했던 20대와 달리, 중요한 실무를 맡고 목소리와 얼굴이 되었던 30대를 넘어, 이제 40대가 되면서는 다른 사람들의 삶에 인권운동이 어떻게 개입해야 하는지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릴 준비를 하게 됩니다.

 

투박한 느낌의 인권운동을 하는 감염인들은 세련되고 정제된 인권운동과는 달리 정감이 있습니다. 감염인들이 찾아오는 PL사랑방은 소박한 식사를 나누면서도, 공감의 일상을 이루는 혁명적인 공간이 되기도 합니다. 한글과 엑셀작업은 서툴지만, 음식을 기가 막히게 만들고, 음식을 서로 나눌 줄 아는 여유가 있습니다. 나에겐 프로젝트 사업이 진행될 때 영수증을 챙겼는지, 회의일지에 서명을 했는지가 중요하지만, 감염인들은 프로그램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과 얼굴을 기억합니다. 밥 챙겨먹었는지, 감기 걸리지 않고 건강 챙기며 활동하라는 조언이 그들에게는 일상의 언어였는지 모르지만,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내가 그렇게 활동하지 못했기 때문에 미안한 순간들과 사람들이 더 떠오르기도 합니다.

 

올 해 저는 사람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들을 많이 얻었습니다. 유엔에이즈 감염인 낙인지표조사를 통해서는 15명의 감염인 생애사를 접할 수 있었고, 청소년성소수자위기지원센터 띵동에서 진행한 <청소년 성소수자 인권친화적 환경 구축을 위한 기초조사>에 참여하면서 15명의 청소년 성소수자들을 만나고 학교나 가정에서 경험한 이야기를 아주 가깝게 들을 수 있었습니다. 사람으로서 살아온 삶의 시간이 기록으로 남겨졌을 때 얼마나 중요해지는지 그 가치와 무게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정말 값진 경험이었습니다. 성소수자운동이 왜 인권과 만났는지, HIV/AIDS감염인운동이 왜 인권과 만나야 하는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민을 덧댈 수 있었습니다.

 

행성인이 내년이면 활동 역사 20년을 맞이합니다. 차별이라는 벽 앞에서 무기력했던 순간들, 상처를 가슴에 품고 등을 돌린 사람들 앞에서 눈물을 삼킨 적도 많지만, 그것은 우리 성소수자 운동을 단단하게 만들고 더 모이게 만드는 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허름한 제기동 사무실에서 전화기를 하나 두고 시작했던 행성인의 꿈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입니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 옆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끈끈한 연결고리가 되면서 뚜벅뚜벅 오늘 하루를 나아갔으면 합니다.

 

2017년, 역동하는 공동체가 되길 바랍니다. 세련된 인권운동을 추구하지 않고 작은 공동체를 지향하며 성소수자 인권운동을 양적으로 질적으로 성장시키는 밑불 때는 역할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투박하지만 정감있는 공동체로서, 따뜻한 쉼터로서, 자유와 평등의 열망을 잇는 인권운동, 행성인의 20년을 멋지게 기다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