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영 (로뎀나무그늘교회 목사)
찬란한 봄이 찾아왔다. 여기저기 꽃들이 피어나고, 새싹이 돋아나는 것을 보면 탄성이 저절로 나온다. 긴긴 겨울 속 그 혹독한 추위를 견디고 어쩜 이렇게 아름다운 빛깔로 부드러운 촉감으로 다시 살아난 걸까. 다 죽었던 것 같은 나뭇가지에 솟아나는 작고 여린 순들에서 사나운 겨울바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생명이란 무엇일까. 시골에서 자란 나에게 자연은 생명의 고귀함을 충만하게 일깨워주었다. 모든 것이 살아 있다는 것. 무생물처럼 느껴지는 물과 흙과 돌과 바람과 심지어 땅에 떨어져 바스러진 나뭇잎조차도 생명을 가득 품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 오묘한 생명은 다 어디서 오는 것일까. 무엇이 이 모든 것들을 살게 할까. 살게 하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왜 죽어도 죽어도 계속 살까. 나는 종교인으로서 그 생명의 원천이 신에게서 비롯한다고 믿는다.
기독교는 구원의 종교이고, 부활의 종교라고 말한다. 비종교적 언어로 풀어 말하면 기독교는 “살리는” 종교이고, “다시 사는” 종교이다. 한 생명을 존귀히 여기며 살리는 종교이며, 예수의 정신으로 끊임없이 새롭게 변화되어 사는 종교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기독교인들이 믿는 예수는 지금 어디에 살고 있는가? 저 멀리 하늘위에 살고 있을까 아니면 지금 여기 우리 안에 살고 있을까. 비록 첨단과학이 발전한 21세기를 살아가면서도 절대적 존재인 신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으며 그에게 불가능한 것은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그런 전지전능한 하느님은 세월호가 침몰하는 순간 손을 맞잡고 간절히 기도했던 아이들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았다. 세월호에 죽어가던 304명의 생명을 위해 누가 갔어야 하는가. 세월호를 겪으며 우리의 신앙도 죽고 새롭게 다시 살아야 한다. 하느님은 온 세상의 생명을 다양하게 창조하긴 하셨으나, 그것을 관리하기엔 너무 무능해서 사람을 보낸 것 아닌가. 사람을 통하지 않고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보여줄 수가 없을만큼 하느님은 누군가의 손발이 필요한 분이시다. 그 하느님의 마음을 가장 잘 알았고, 삶을 통해 잘 보여주었던 사람이 곧 예수라고 믿는 이들이 곧 기독교인들이다. 그 예수는 하느님의 마음에 사로잡혀 하느님과 하나가 된 사람이다.
그렇다면 예수의 삶이 어떠했는가를 보면, 하느님의 마음도 보일 것이다. 예수의 삶은 하나의 초점으로 설명이 된다. “살리는 일”이다. 온갖 기적들은 다 살리는 일과 연결되어 있다. 병을 고치거나, 악한 영을 내 쫓거나, 죽은 이를 살리거나, 배고픈 자들을 먹이거나, 외로운 이들의 친구가 되거나, 약자를 옹호하거나.. 예수의 삶이란 그런 것이었다. 예수는 십자가에 죽으려고 이 땅에 온 것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고 충분히 살게 하려고 이 땅에 왔다. 그 일이 결국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할지라도,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고, 하느님의 복음이라 믿었기에 물러서지 않은 것이다. 예수는 살리는 일 곧 자신이 굳게 믿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다가 반대자들에 의해 처형된 것이다. 살리는 일이란 그렇게 생명을 내놓아야 하는 위태위태한 일이다.
부활이란 곧 “다시 사는 것”을 말하는데, 예수가 다시 살아난 곳은 바로 그를 믿는 이들의 마음에서였다. 믿는 이들 외에는 부활한 예수를 만난 사람이 없다는 것이 그 증거이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이들은 그 안에 있는 예수의 영 곧 예수의 정신으로 충만해지게 된다. 따라서 그들도 예수처럼 하늘의 뜻에 따라 “살리는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고작 자기 목숨 하나 천국에 들이겠다고 비굴하게 구걸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이미 죽음을 초월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저 자기 목숨 내어 놓고 하늘 뜻에 따라 생명 살리는 일에 열정을 쏟게 된다. 각자 자기 자리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재능으로 자기 능력에 맞게 최선을 다해.
성소수자 인권에 대해 잘 알지 못했던 나는 육우당이라는 이름을 작년에 처음 들었다. 세상의 온갖 차별과 혐오에 저항하며 살았던 성소수자 인권활동가이며 시인이었던 그는 기독교의 동성애자 혐오에 저항하며 젊은 나이에 목숨을 내 놓았다. 그는 하느님을 믿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고, 하느님은 절대 자신을 차별하지 않는다고 믿었으나 기독교인들이 던진 혐오의 돌에 맞아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그의 삶에서 예수의 향기가 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자기 삶으로 예수의 삶을 살아냈다. 죽음의 소리에 맞서서 하늘의 뜻을 말하고 모두가 존귀한 자임을 용기 있게 말하였다. 그렇기에 그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남겨진 이들의 마음에 다시 살아서 우리를 새롭게 변화시키는 것이다.
한편 그의 14주기 추모기도회를 준비하면서 내 가슴이 미어지는 이유는 그가 받은 혐오와 차별이 현재 진행형이며 오히려 권력과 결탁하여 엄청난 폭력으로 변고 있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대선주자들은 앞장서서 차별금지법 제정을 반대하고, 한국군은 앞장서서 동성애자 군인의 인권을 박탈하고 있는 상황에서 부활한 예수는 도대체 어디에 살아 있는가? 부활한 예수의 영이 한국 교회에 있다면 그들은 성소수자를 살리는 일을 하지 않겠는가. 살리는 일이 아닌 죽이는 일에 앞장서는 것은 더러운 영에 사로잡혔기 때문이 아닌가.
부활을 사는 사람은 그 죽음의 고리를 끊어내는 사람이다. 차별과 폭력의 구조에 저항하고, 불의 앞에서 스스로를 성찰하며 끊임없이 새로운 생명으로 변화해 가는 것이 하나의 부활의 삶이요, 자신에게 주어진 사람들 곧 이웃의 생명을 지켜내고 살려내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또 하나의 부활의 삶이다. 앞서 그렇게 살아낸 수많은 이들의 정신이, 그들의 영이 하느님의 영 안에 모아져 우리를 다시 살게 하는 것이다. 자신의 안위보다 하늘의 뜻을 더 크게 받드는 이들을 세상은 두려워한다. 그래서 끊임없이 그들을 살해하고 제거하지만, 남은 자들은 그 고귀한 삶을 통해 계속해서 하늘의 뜻을 알게 되는 것이다. 더 충만하게 살고, 더 충만하게 살리는 일. 그것이 부활을 사는 것이다.
2017년 4월 봄, 세월호, 부활, 육우당을 생각한다. 죽음은 생명을 이길 수 없다. 어떤 죽음도 끝이 아니다. 그 이름이 하느님에 의해 기억되기 때문이다. 그 하느님의 영이 우리 안에 충만히 살아계시기 때문이다. 그 생명이 빛 속에 물 속에 흙 속에 바람 속에 모든 이의 숨 결속에 살아있고, 우리를 살리고 다시 살게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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