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주영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2001년에 처음 만난 테드 제닝스는 그후 10년 가까이 매년 한국을 방문할 때면 항상 행성인(구 동인련)을 찾았습니다. 언제나 인자하지만 단호하게 성소수자 인권 보장을 말했고, 동성애 혐오는 기독교 정신에 위배됨을 분명히 하는 노학자는 한국의 많은 성소수자들에게 용기와 위로,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는 한국 성소수자 운동의 아픔과 투쟁, 성장을 지켜본 벗이기도 합니다. 그의 바람대로 이제 한국에서도 기독교 안에 성소수자를 지지하는 동맹이 생겨났습니다. 아직 미약하지만 변화는 시작됐습니다.

 

지난 4월 10일, 테드 제닝스 방문을 맞아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는 60년대부터 지금까지 그가 경험한 성소수자 운동과 사회 변혁 운동의 경험에 대해 들어보는 조촐한 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무지개 농성장에서 외친 ‘사랑, 권리, 변화’를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테드와 함께 나눈 이야기를 공유하겠습니다!

 

 

 

테드 제닝스의 강연문을  번역하여 올립니다.

 

It is in this context that I have also been involved in the struggles of lesbian and gay people.  My first published essay nearly 40 years ago was on homosexuality and the church in which I argued against the exclusion and condemnation of same sex love.

성소수자들의 투쟁에 가담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습니다. 40여 년 전에 발간된 저의 첫 에세이는 동성간의 성적 사랑을 배제하고 비난하는 교회에 반론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In Argentina and Brazil and Mexico, in South Africa and Korea and Japan, in the Philippines and now Taiwan it has been my joy to stand with lesbian and gay people in the struggle for human rights for dignity in church and society.

아르헨티나, 브라질, 멕시코, 남아공, 필리핀, 대만, 일본 그리고 한국에서 성소수자들이 교회에서, 그리고 나아가 사회에서 존중받으며 살 수 있도록 인권 투쟁을 함께하는 것은 저에게 있어 아주 뜻깊은 일이었습니다.

 

Often the worst enemy of gay and lesbian people is found in the churches.  I am a Christian.  And I love the gospel of Jesus.  It gives me great sorrow that this message has been perverted in the churches to become a weapon to destroy the dignity and the hearts of lesbian and gay people.  The source of this perversion of Christianity is usually my own country.  Much of the anti-gay propaganda comes from the American churches, the right wind extremists who persuade other people around the world to accept their poisonous propaganda.  So as an American Christian I have a responsibility to oppose this propaganda that has colonized so many churches around the world, including here In Korea.

성소수자들의 최대 적은 교회에서 주로 발견됩니다. 저 또한 기독교인이고 예수의 복음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복음의 메시지가 교회에서 왜곡되어 성소수자들의 존엄과 마음을 해치는 칼날이 된다는 사실은 저를 매우 슬프게 합니다. 안타깝게도 이런 기독교 왜곡의 원천은 주로 저의 나라, 미국입니다. 주로 미국의 교회들과 극우파들이 세계 각지에서 독약과 같은 반동성애 메시지를 퍼트리고 있습니다.


This Spring my lady and I have been able to visit several places in Asia, After some days with muslim members of her family Indonesia, we spent some days in the Philippines with a wonderful gay rights group in the south called Bisdak Pride.  This is a movement of very poor gay and transgendered people in Cebu and other islands of the south.  They have heard from church and society that they are evil or diseased.  But in truth they are beautiful and lively.  We had wonderful days with them celebrating life and love and laughter, sexuality and spirituality, friendship and joy.

이번 봄 저와 제 아내는 아시아의 여러 국가들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무슬림 가족들과 인도네시아에서 며칠을 보낸 뒤, 필리핀 남부로 가서 ‘비스닥 프라이드’라는 아주 멋진 성소수자 인권연대 사람들과도 며칠간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 이 인권연대는 특히 세부와 근처 섬에서 가난으로 고통받고 있는 성소수자들을 위해 운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교회와 사회는 그들을 악하고, 병든 존재라고 떠들어댑니다. 하지만 사실 그들은 모두 쾌활하고, 명랑한 아름다운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짧은 시간 동안 삶, 사랑, 성정체성, 영성, 우정과 행복 등을 논하며 함께 웃고 좋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In Taiwan one of my students asked us to come to encourage lesbian and gay Christians who are under attack from the churches.  The churches have attempted to demonise them, to exclude them and to silence their allies.  There is a culture of fear.

대만에서는 제 제자 한 사람이 교회로부터 비난받고 있는 성소수자 기독인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달라는 요청을 했습니다. 그곳에서도 교회는 성소수자들을 악마화해 배제하고, 성소수자 지지자들을 입다물게 만들려고 하고 있습니다. 공포를 조장하는 문화입니다.


All around the Island in Taipei, Hualien, Kenting, Kaohsiung and Tainan we met with very brave young people who are struggling against repression.  They shared their stories, their suffering, their friendship, their joy and hope in the struggle. Last Thursday representatives from all of those groups gathered in Tainan, in the upper room of a Presbyterian church and we had a time to remember the passion of Christ, who suffered exclusion, condemnation and humiliation from the religious and respectable people just as those gathered had as well.  And we also celebrated the resurrection joy together as we shared food and whisky, laughter and love.  And lots of erotic fun as well as we raised money for a queer Christian to attend my graduate school in the US by engaging in kissing games.

타이페이, 후아롄, 켄팅, 카오슝 그리고 타이난, 대만 각지에서 우리는 탄압에 용감하게 맞서 싸우고 있는 사람들과 만났습니다. 그들은 이 투쟁 속에서 느꼈던 고통, 희망 그리고 우정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지난주 목요일 대만의 성소수자 단체들의 대표들과 저는 타이난의 한 장로 교회에서 만났습니다. 그 곳에서 저희는 예수 그리스도의 열정을 기억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지금 성소수자들이 고통받고 있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또한 사회에서 힘을 가진 자들로부터 버림받고 비난받는 굴욕을 겪었었습니다. 그 열정을 기억하는 시간을 가진 후 우리는 위스키와 음식을 나눠 먹으며 부활절을 축하했습니다. 제가 가르치고 있는 미국 대학원으로 와서 공부하려는 퀴어 기독인을 위한 모금을 하려고 키스게임을 진행하기도 하는 등 조금은 에로틱한 재미를 보낸 즐거운 밤이었습니다.


And now I return to Korea, to my friends here who have allowed me to be a part of their struggle for change for so many years.

그리고 이제 오랫동안 변화를 위해 투쟁한 친구들이 있는 한국에 왔습니다.


So I will speak a little about your slogan: love, rights, change.

사랑, 권리 그리고 변화라는 여러분들의 슬로건에 대해서 조금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Everything begins from love.  We are made for loving, for loving and for being loved. 

모든 것은 사랑으로부터 비롯됩니다. 우리는 사랑하기 위해 태어났고,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입니다.


We are made to be in relationship, to yearn for ways of being together.  We are created in relationship, the relationship of our parents.

우리는 관계 속에 있도록 만들어진, 어떻게든 함께 있기를 갈망하도록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우리는 관계 속에서, 우리 부모님의 관계 덕분에 태어납니다.


We are formed by love, by the love of those who care for us, by the love of our friends and comrades in life.

우리는 우리를 아껴주고 돌봐주는 사람들로부터, 친구들과 동지들의 사랑으로 완성되는 존재입니다.


Sometimes we are also wounded by love.  Our love is betrayed. Those we love reject us or condemn us.  Love makes us vulnerable to pain and suffering.

사랑은 우리를 배신하고 상처주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우리를 비난하고 떠나가기도 합니다. 사랑 때문에 우리는 쉬이 고통과 아픔을 겪기도 합니다.


And so we are tempted to give up on love.  But that would mean to give up on our humanity.

그래서 우리는 사랑을 포기하고 싶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랑을 포기한다는 것은 인간됨을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It is also our capacity for love, for loving and being loved, that makes it possible for us to care for others who need love, who are wounded, who suffer.

주저없이 사랑을 받고 사랑할 수 있는 수용력이야말로 상처받고 고통받는 이들, 사랑이 필요한 다른 이들을 감싸줄 수 있도록 하는 힘입니다.


For we recognize that they need love, deserve love.

다른 사람들도 사랑 받을 자격이 있고, 사랑이 필요한 존재임을 깨달을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So we enter into struggle that has its birth is love, in love for those who are abandoned or deserted or betrayed or marginalized.  That is the origin of struggle that seeks change,

이렇게 사랑은 투쟁을 낳습니다. 버림받고 배신당하고 소외당한 이들에 대한 사랑 속에서 우리는 투쟁에 참여합니다. 사랑은 변화를 요구하는 투쟁의 출발점입니다.


For what we desire is a world in which all are free to love and be loved, in which the essential importance of very one is respected.

우리가 원하는 세상은 모든 이들이 자유롭게 사랑하고 사랑받는 세계, 모든 이들의 본질적인 소중함이 존중받는 세계입니다.


That is where the struggle for human rights begins: in the love that reaches out to recognize how infinitely valuable each one is.  Male and female and all other genders, hetero and homo sexual and also those who seem not to be sexual at all, for the neighbor and the foreigner, for the damaged and the healthy, for all.  But especially for those whose full humanity is denied

세상 한 사람 한 사람의 무한한 가치를 인정하는 것까지 나아가는 사랑은 인권을 위한 투쟁이 시작되는 지점입니다. 여성과 남성, 그리고 다른 젠더들, 이성애자와 동성애자 혹은 성적이지 않은 사람들. 우리의 이웃들과 이방인들, 건강한 사람들 혹은 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 모두가 귀중합니다. 하지만 특히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빼앗겨 버린 사람들을 위해 우리는 투쟁합니다.


And the goal of the struggle is the change, the transformation of human society so that all are affirmed, loved, respected. We don’t seek change for its’ own sake, not just any sort of change.  We seek change that brings justice for all, generosity to all, joy for all.

우리의 목표는 변화입니다. 모두가 받아들여지고 사랑받고, 존중받는 사회로 변화시키기 위해 우리는 지금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 변화나 원하는 것도 아니고 단지 변화 그 자체만을 위해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에게 행복과 정의, 관용을 가져다 주기 위한 변화를 원하는 것입니다.


Walt Whitman was a great American poet of the middle of the 19th century, a friend of Abraham Lincoln.  He is also regarded the great poet of democracy.  He was gay.  He found love in the arms of strangers, many strangers.  Men and lads of all races and classes.

월트 휘트먼은 19세기 중반의 미국 시인이었고, 에이브러햄 링컨의 친구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민주주의를 옹호한 위대한 시인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월트 휘트먼은 동성애자였습니다. 그는 인종과 계급을 뛰어넘은 많은 낯선 남성들의 품 안에서 사랑을 찾았습니다.


And out of that experience he wrote of democracy as the joining together of people of all races, all nations, all classes to care for one another, to rejoice in one another’s differences and to be in solidarity with one another.  He called his basic principle “adhesion” a sort of erotic stickiness or glue that holds all together across all our differences. That gives us a feeling of a common destiny, a common yearning for connectedness.

그러한 경험들로 빚어 그는 민주주의를 모든 인종과 계급 그리고 국가들이 힘을 합쳐 서로를 위하고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연대를 맺는 데서 완성된다고 정의했습니다. 또한 자기 사상의 기본 원칙을 설명할 때 “끈끈함(adhesion)”이라는 단어를 쓰길 좋아했는데, 조금 에로틱하기도 한 이 단어는 인간들이 모든 차이를 극복하고 함께할 수 있게 만드는 요소를 말합니다. 이 단어는 친밀함과 연결성을 갈망할 수 밖에 없는 모든 인류의 공통적인 운명을 느낄 수 있게 합니다.


Out of this grows deep respect for one another in our differences.

그리고 이로부터 차이를 극복하고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Of course this may seem a dream.  But it is the dream of a truly democratic, a truly social democratic humanity.

물론 꿈 같은 소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진정으로 민주적인, 진정으로 사회민주적인 인류애를 향한 꿈입니다.


In contemporary society there are many who have their humanity, their dignity denied.  But because we know we are connected to them we enter into struggle with them and for them.

현대 사회에서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거부당한 많은 이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그들과 연결되어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들과 함께, 그리고 그들을 위해 투쟁에 참여합니다.


All struggle for human rights, for human dignity grows out of love, love for the neighbor, love for the stranger even love for the enemy.

인권과 인간의 존엄을 위한 싸움은 모두 사랑에서 비롯합니다. 이웃을 향한 사랑, 이방인을 향한 사랑, 심지어 적에 대한 사랑. 


It may even be that queer people have a particular vocation in the struggle for a more humane, a more democratic society.  Certainly some of the most ardent supporters of this vision have been queer people, people like Walt Whitman.  Perhaps it has to do with finding love in many different places, with people that others do not love, with folk one is not supposed to love.

어쩌면 더 인간적이고 민주적인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사회 활동이 성소수자들에겐 특정 임무가 된 것 같기도 합니다. 현재도, 역사적으로도 가장 불타는 열정을 가지고 그런 사회 전망을 지지한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월트 휘트먼 같은 퀴어였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다양한 곳에서 사랑을 발견하고, 다른 사람이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고,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In the US and in other parts of the world the struggle for gay rights has been focused on a few immediate and perhaps symbolic goals.  One of these has been the right to marry for persons of the same sex.  In the US this grew at least in part out of the trauma of the AIDs crisis in the late 80s.  For men who lived and loved together suddenly found that their love gave them no rights to be with one another in the hospital or in medical care and so on.  Their relationships could be simply denied or ignored often in the most brutal way.

미국과 다른 몇몇 국가에서는 동성애자 운동이 몇 가지 상징적인 목표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그 중 하나가 동성 결혼 권리입니다. 미국에서 이 운동이 성장한 배경에는 부분적으로나마 80년대 후반 에이즈 위기의 충격이 있었습니다. 함께 살고 사랑한 남성들은 어느 날 갑자기 자신들이 입원했을 때나 치료 과정 등에서 서로에 대한 권리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의 관계는 흔히 아주 잔인하고 철저하게 무시당하고 부정됐습니다.


One way to ensure that their relationships would be respected, would have social dignity was to be married in civil society.

그들의 관계가 존중받고 사회적 존엄을 얻을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 시민 사회에서 결혼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This has been a long struggle but in the US it seems like it has finally succeeded.  20 years ago very few people supported gay marriage, now a strong majority of the population does.  And it seems likely that it will soon be legal in all states in the US,

동성 결혼을 위한 투쟁은 길고 긴 여정이었지만 마침내 성공한 것으로 보입니다. 20년 전에는 아주 소수의 국민들만 동성 결혼을 지지했지만 지금은 과반수 이상의 든든한 지지를 얻고 있습니다. 머지않아 미국 전 지역에서 동성 결혼이 법제화될 것으로 보입니다.


There are of course still many Christian groups that refuse to bless these relationships but that too is changing.

물론 이 추세를 기뻐해 하지 않는 기독교 단체들이 여전히 많지만 이 또한 바뀌고 있습니다.


As you know another battle was won just a couple of years ago, the right of lesbian and gay folk to serve openly in the military in the US  It is deeply ironic that the rules against same sex relations in the Korean military were written by American military lawyers and imposed upon the Korean military in the 1950s.  But the US military itself may no longer discriminate against lesbian and gay soldiers.

아시다시피 2년 전 우리는 또 다른 큰 싸움에서 쾌승을 거두었습니다. 게이와 레즈비언 군인들이 커밍아웃하고 군복무를 할 수 있는 권리를 쟁취했습니다. 미국인 군사 법률가들이 쓴 동성간 성관계를 금지하는 규칙이 1950년대부터 한국 군대에 적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아이러니합니다. 이제 미국 군대에서는 더는 게이/레즈비언 군인들을 차별할 수 없습니다.


So some change comes rapidly.  And much of this has come because a growing number of people in the US know someone who is gay, maybe a son or daughter or father or aunt or schoolmate.  Out of friendship for them they feel it is wrong to discriminate against them.  They discover the lesbian and gay folk are human just like themselves, people they like and even admire. So it is often because of friendship, of love, that change comes.

어떤 변화는 아주 빠르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적어도 미국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용기를 내어 커밍아웃을 하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주변에 성소수자 가족, 친구, 동료들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소수자 가족과 친구에 대한 사랑과 우정 때문에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은 옳지 않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성소수자들이 자기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또는 자신들이 존경하고 좋아하는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변화의 출발점은 흔히 사랑과 우정입니다. 


There is a problem with this however.  In focusing on things like the right to serve in the military or to get married and have children, the struggle for LGBTQ rights will leave a great many behind, in the shadows. But as the song says: None of us is free, until all of us are free.

하지만 이런 운동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몇몇의 상징적인 목표, 즉 군대에서 복무할 권리나 결혼하고 아이를 키울 권리 같은 목표만을 쫓아가다 보면 우리는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을 음지에 내버려 두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노래 가사처럼 “모두가 자유인이기 전에는 아무도 자유인이 아니다”.


For while all of us may want to be accepted and respected, not all of us want to be married.  There are a great many patterns of LGBTQ sexual expression that cannot be squeezed into the box of marriage.  Indeed marriage doesn’t even work very well for heterosexual people.

모두가 받아들여지길 원하고 존중받길 원하는 건 사실이지만, 모두 다 결혼하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LGBTQ 커뮤니티 내에서도 다양한 삶의 패턴과 성적 취향이 있고 이 다양성을 결혼이라는 한 상자 안에 다 구겨 넣을 수는 없습니다. 사실 결혼이란 이성애자들에게도 쉽지 않은 것입니다.


There is a danger that in our struggle for respect we will turn our backs on those of our sisters and brothers whose sexual life is not contained in the marriage box. This is who I have written a book and teach an online course on Queer sexual ethics: in order to affirm many sexual patterns that are often silenced in our struggle for rights.

존중을 위한 투쟁에서 결혼이라는 상자에 들어맞지 않는 성적 생활을 하는 형제 자매들에게 등을 돌릴 위험성도 존재합니다. 제가 ‘퀴어 섹스의 윤리학’라는 책을 썼고 온라인 강의를 한 이유가 이것입니다. 권리를 위한 투쟁 속에서 흔히 침묵을 강요당한 다양한 성적 양태에 대한 존중을 일깨우기 위해서 말입니다.


There are other important and equally respectable and responsible patterns of relationship.  There are open relationships where two people with primary loyalty to one another have sexual partners outside that marriage.  These may be of the same or the opposite sex.  The primary loyalty is open to celebrating sex with others, perhaps many others.  I have been in such a relationship for over 40 years.  It has been difficult and also wonderfully rewarding.

결혼 말고도 중요하고 똑같이 존중받을 만하고 책임감 있는 다양한 방식의 관계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열린 관계를 선호하는 커플들은 한 사람과 우선적인 관계에 있지만, 자유롭게 혼외 성관계를 갖습니다. 이 커플들은 이성애자일수도, 동성애자 혹은 양성애자일 수도 있습니다. 이들의 사랑은 타인과의 성관계, 어쩌면 아주 많은 사람들과의 성관계도 축복하는 것입니다. 저 역시도 40년 이상 그런 관계에서 살아왔습니다. 어렵기도 했지만 놀라울 정도로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Sometimes this opens the way to what is called polyamory where there is more than one primary relationship; equal relationships with more than one. In France a movement for the inclusion of such relationships in the legal code has been growing for several years.  It simply maintains that the state should approve of committed relationships regardless of gender or number.  Such a law was also proposed by legislators in Taiwan.  I think it makes a lot of sense.

열린 관계는 때로 폴리아모리(다자연애Polyamory)라고 불리는, 우선적인 관계를 한 명 이상의 사람과 맺는 패턴으로 발전하기도 합니다. 프랑스에서는 이런 관계들을 법률에 포함하기 위한 운동이 몇 년째 꾸준히 성장하고 있습니다. 이 운동의 의미는 성별이나 숫자와 관계없이 ‘충실한 관계’에 대한 정의를 정부가 아닌 개개인이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하고 그 개인의 선택을 정부가 법적으로 존중하고 보호해 주기를 바라는 데서 비롯되고 있습니다. 대만에서도 이런 법안이 제안됐습니다. 저는 이것이 아주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But there are other relationships as well.  What of those who seek no primary relationship but engage in many sexual relationships, some for an hour others for a night, some for a week, sometimes more than one at a time.?

이뿐만 아니라 더 많은 종류의 관계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과 성관계를 맺지만 아무와도 우선적인 관계를 맺지 않는 사람, 한 시간만, 하룻밤만 아니면 일주일만 관계를 가지길 원하거나 또는 한번에 여러 명과 사랑을 나누길 선호하는 사람들도 있겠습니다.


As long as people treat one another with respect and generosity I think these are perfectly fine ways of relating to one another.  It is in fact closer to the sort of experience that Walt Whitman celebrated,

앞서 소개한 월트 휘트먼이 살아왔던 삶의 방식도 이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서로에 대한 존중과 관용만 있다면 이러한 관계들 또한 너무나도 정당한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I said I am in a primary but open relationship, but it is precisely because of the number of folk to whom I have been sexually connected that I have grown to appreciate so many different cultures, people of so many different faiths as well as those who are humanists and atheists.   It is because of my libido that I have met so many fascinating people, fallen in love with so many of them, and through them gained a better understanding of the wealth of diversity of humanity,

저는 제가 한 사람과 우선적이지만 열려있는 관계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다양한 사람들과 육체적으로 통해봤기 때문에 다른 문화권에서 온 사람들, 종교적 견해가 다른 사람들, 인도주의자 혹신 무신론자 등 모두를 감싸안고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제 인생에서 아주 흥미롭고 매력적인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그 중 다수와는 격렬한 사랑 또는 성적 충동에 빠지기도 했었습니다. 그런 경험들을 통해서 저는 인류의 다양성의 재산에 대해서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확신합니다.


This also fuels my desire for a more just world, a world in which those I have come to love will not suffer discrimination and shame.

저의 그런 경험들은 저로 하여금 더 평등하고 정의로운 세상, 즉 제가 사랑해온 사람들이 차별로 인해 고통당하지 않는 세상을 원하게 합니다.


There are others who are often hidden from view when we struggle for respectability.  Sex workers, those who make a living by sharing sexual pleasure. Over the years I have come to know several sex workers.  Boy hustlers in Mexico or the US.  Some who are or have been sex workers have become very dear friends.

우리가 존중을 위해 투쟁할 때 시야에서 제외되곤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타인의 성적 쾌락을 위해 일하는 성노동자들이 그러합니다. 오랜 시간 동안 저는 성노동자들을 여럿 알게 되었습니다. 멕시코와 미국에서 일하는 남성 성노동자들입니다. 성노동자이거나 성노동자였던 이들 중 몇몇은 제가 아주 아끼는 친구가 되었습니다.


Perhaps it is because of them that I have also become an advocate for sex workers generally.  They deserve respect, affirmation.  Just like massage therapists, or psychotherapists or pastors or professors.  Laws that discriminate against them serve to make them vulnerable to criminals who can make their lives into a living hell.  Much of the misery experienced by some prostitutes comes from the lack of legal protection for them and their work.

아마 제가 성노동자들을 옹호하게 된 것은 그들을 알게 됐기 때문일 것입니다. 성노동자들도 똑같이 존중받을 권리, 사회에서 환영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마사지 치료사들이나 심리치료사, 혹은 목사나 대학 교수들과 다를 것 없이 말입니다. 성노동자들을 차별하는 법은 그들을 범죄에 취약하게 만들고 위험한 상황에 노출시키게 합니다. 실제로 많은 성노동자들은 자신들을 보호해주는 법적 방어책 하나 보장받지 못한 채, 많은 범죄에 노출되어 지옥 같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If we get over our idea that sex is somehow dirty or degrading then all of us will be better off, straight and gay, as well as sex workers and those who simply have a lot of sexual partners.

섹스는 불순하고 더러운 것이라는 생각만 버린다면 더 많은 사람들의 삶이 나아질 것입니다. 이런 마음가짐은 성노동자들뿐만 아니라 이성애자들과 성소수자들 혹은 단지 섹스 파트너를 다양하게 만나는 사람 등, 모두의 삶을 개선시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Sexuality is how we come to be connected to one another, it is a connectedness that opens us to bot suffering and delight.

성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는 방식을 말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과 연결됨으로써 우리는 기쁘기도 하고 고통받기도 합니다. 


As people who are condemned because of our sexuality we LGBTQ folk have a special vocation to help all learn to affirm sexuality, their own as well as other peoples’ sexuality. This may be the decisive contribution we make to a healthier world, a more just world a more joyful world.

섹슈얼리티 때문에 비난받는 LGBTQ들은 다른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섹슈얼리티뿐만 아니라 타인의 섹슈얼리티도 긍정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하는 특별한 임무가 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우리가 더 건강하고 공정한, 행복한 세계를 위해 결정적으로 기여하는 부분일 것입니다.


Love, including erotic and sexual love leads us to struggle for a world in which all love is resected, and celebrated.  It is a reality that we also begin to experience here and now with one another.  For it is here that a new world is being born, a world of justice and generosity and joy.

육체적인 사랑을 포함해 사랑은 우리를 모든 사랑이 존중받고 축복받는 세계를 위한 투쟁으로 이끕니다. 그런 세계는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함께 경험하기 시작한 현실입니다. 바로 이곳에서 새로운 세계, 정의롭고 관대하며 기쁨이 넘치는 세계가 태어나고 있습니다.

 

 

 

* 테드 제닝스는?

테드 제닝스는 시카고신학대학(CTS) 성서와 구성신학 교수로 퀴어신학의 개척자로 알려져 있다. 미국은 물론이고 필리핀, 아르헨티나 등 다양한 나라의 LGBT 인권을 위해 힘써왔고, 2001년부터 한국을 방문해 퀴어신학을 소개하고 기독교 안에서 성소수자를 지지하는 목소리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저서로 <퀴어 섹스의 윤리학: 원칙과 변주>(2013), <플라톤 아니면 바울? 서구 동성애혐오의 기원>(2009), <야곱의 상처: 고대 이스라엘 문학의 동성성애 서사>(2005), <데리다 읽기, 바울 생각하기: 정의에 관하여>(2005) 등이 있고 한국에는 <예수가 사랑한 남자: 신약성서의 동성애이야기>(동연, 2011)가 번역출간된 바 있다.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구 동성애자인권연대) 웹진에 다수의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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