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순 (텍사스 크리스천 대학교 브라이트 신학대학원 교수)
내가 일하고 있는 대학교는 부시대통령계의 정치적 보수주의 지역이라는 텍사스에 위치해 있다. 텍사스는 미국을 지배하고 있다는 “WASP: 백인, 앵글로색슨, 개신교도”들 중에서 종교적으로도 보수적인 사람들이 진을 치고 있는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한국의 여섯 배가 된다는 텍사스에 이렇게 극보수주의자들만 사는 것은 아니다. 성적소수자 문제에 대한 대학의 입장을 가늠하는 기준 중의 하나는 그 학교가 교직원들의 파트너들에게 연금/보험의 혜택을 주는가 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일만여명의 학생과 이천여명의 교직원이 있는 내가 일하는 대학교에서는 이렇게 동성애자들의 파트너(domestic partner) 들에게도 이성애자들의 배우자들과 동등한 혜택을 준다.
매 학기마다 나의 수업을 택하는 학생중에는 성적소수자들이 여러명 있다. “성적소수자(sexual minority)”의 범주에는 단지 동성애자들만이 아니라, 양성애자, 트랜스젠더, 무성애자, 또한 그 어느 범주에도 포함되지 않는 사람들까지 포함된다. 또한 정식으로 이러한 성적소수자들의 학생모임(LGBTQ Alliance)이 있어서, 정기적인 모임도 갖고 있다. 교수들 중에도 성적소수자들이 있으며, 현재 내가 소속한 신학대학원의 학장은 목사안수를 받은 레즈비언 교수이다.
미국의 소위 유명한 대학교에 소속된 여러 신학대학원들에도 이미 이렇게 성적소수자가 학장이었었거나 현재 학장직을 맡고 경우가 점점 늘어가고 있다. 물론 미국내에 있는 수 없이 많은 신학대학들의 숫자에 비하면 이렇게 성적소수자들을 제도적으로 차별하지 않는 대학들은 여전히 소수의 학교들이겠지만, 이제 극보수적 성향을 지닌 신학대가 아닌 곳에서 한 교수의 “성적성향”이 신학을 가르치는 교수직을 수행하는데에 이전과 같이 결정적인 “결격사항”으로 간주되지 않기 시작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성적소수자들을 이성애자들과 평등하게 대우하는 신학대학교들은 모두 성서를 잘못 해석하고,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는 그릇된 방향으로 가는 것 일까, 아니면 기독교인들이라면 따라야 할 "예수정신"에 보다 가깝게 접근하는 성서읽기/해석/실천을 하고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한 대답은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성서에 대한 이해와 해석, 예수의 메시지에 대한 이해, 그리고 신을 믿는다는 종교적 신념/신앙의 복합적이고 구체적인 의미들을 어떻게 확립하고 있는가의 깊이와 넓이에 따라서 각기 다르게 나올 것이다.
동성애는 죄인가?
과연 “동성애는 죄인가?” 이 물음을 묻기 위해서는 우선 “죄란 무엇인가”라는 보다 근원적인 물음부터 생각해보아야 한다. 기독교의 이천년 역사는 어떤 의미에서 보면 “죄”를 어떻게 규정하는가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런데 “죄”를 "어떻게," "누가," 그리고 "어떤 기준/시각"으로 설정하는가는 사실상 보기만큼 단순하지가 않다. 그래서 기독교의 역사를 깊숙히 들어가보면 흥미로운 일들이 많았다. 지구가 둥글고 돌고있다는 과학적 사실을 주장하는 것도 교회가 규정하는 “죄”의 범주에 들어가던 시기가 있었고, 여성이 공공장소에서 남자여자 모두를 모아놓고 설교하는 것이 “죄”의 범주에 들어가 마녀로 몰려 처형되던 시기도 있었고, 부부가 성적관계를 가질 때에 출산이 목적이 아닌 성적 즐거움을 느껴도 “죄”라고 교회가 규정하던 시기도 있었고, 자위행위도 “죄”라고 규정하던 시기도 있었다. 즉 “죄”를 규정하는 것은 사실상 아무리 성서의 이름과 교회의 권위를 빌린다 해도, 결국 인간에 대한 매우 협소한 이해와 성서에 대한 왜곡된 해석에 기반한 경우가 매우 많다는 것이다. 성서에 대한 왜곡된 주장들은 성서가 쓰여진 시대와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 사이의 엄청난 간극을 보지 못함으로서, 오히려 성서가 시대와 문화, 역사를 초월하여 전하고 있는 절대적 가치/진리를 가리고 있는 결과를 낳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동성애(homosexuality)를 비롯하여 양성애(bisexuality)와 무성애(asexuality)등 “이성애(heterosexuality)”가 아닌 다양한 양태의 성성(sexuality)을 뭔가 치료가 필요한 “병리학적인 것”으로 범주화하던 것이, 이제 다양한 생리학적/심리학적/정신의학적 연구들에 의하여 더 이상 치유되어야 할 “질병”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지닌 “성향(orientation)”이라는 것임이 밝혀진지 이미 오래다. 그래서 ‘미국 정신의학협의회(American Psychiatric Association)’는 오랜 연구와 임상실험 등을 통해 1973년 동성애를 “정신적 장애(mental disorder)”의 범주에서 삭제하였다. 이러한 결론은 한 두 사람에 의하여 단시일에 결정된 것이 아니라 무수한 연구자들이 다양한 방식의 세밀한 전문적 연구를 한 결과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한국이든 다른 나라에서든, 기독교인들이 이러한 전문적 연구결과들도 완전히 무시하고 매우 협소한 성서해석을 가지고 성적 소수자들을 “죄인”으로 다루거나, 치료의 대상인 “질병을 지닌 사람들"로 여전히 규정하는 것은, 마치 지구가 둥글다는 과학자들의 연구결과를 그 당시 성서와 교회의 권위를 들이대며 교회가 과학자들을 심판하던 것과 유사한 실수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심각한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지동설에 대한 교회의 정죄와는 달리 성적소수자에 대한 이러한 왜곡된 성서해석과 그 해석의 적용으로 인해 무고한 사람들이 지금도 그 인권이 박탈되고, 자살을 하고, 폭력의 대상이 되는 상황을 정당화하는 것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갈릴레오는 교회의 심판을 피하기 위해 재판관 앞에서 과학적 사실을 부정하고서 속으로는,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하면 그만이었다. 자신이 부정한다고 지구가 둥글다는 것,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변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굳이 목숨까지 걸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적소수자들은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존재방식”과 “권리” 자체를 부정해야 하기 때문에, 성적소수자의 문제는 매우 심각한 신학적/철학적/사회정치적 이슈가 아닐 수 없다.
성서/기독교의 상충하는 두 얼굴: 억압과 해방
미국이든 한국이든 동성애자들을 포함한 "성적소수자들(LGBTQ)"에 대한 정죄를 하는 기독교인들이 우선적인 근거로 삼는 것은 단연코 “성서”이다. 그런데 이렇게 성서의 이름으로 다양한 차별을 정당화하려는 기독교인들의 태도는 노예제도, 마녀화형, 여성억압등의 역사에서도 동일한 양상을 반복해 왔다. 그것은 왜일까?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고백하는 성서가 왜 인간에게 자유와 해방이 아닌 노예제도, 유태인 학살, 이슬람 박해, 여성억압제도등 다양한 양상의 인권유린의 제도들을 정당화하는 것으로 쓰여졌는가? 그러면서도 동시에 무수한 억압 받은 이들, 소외 당한 이들이 그 성서의 메시지에 의하여 자유와 해방에의 열정을 끈기 있게 지켜낼 수 있었을까? 인류의 역사에서 성서가 지닌 이러한 상충적 역할과 기능에 관한 물음은 "성서는 도대체 어떤 책인가"에 대한 근원적인, 어찌보면 매우 "기본적인 물음"으로 돌아가야 함을 암시한다.
우선 “성서가 무엇인가”는 두 차원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첫째,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이러한 기독교인들의 “고백”은 그 성서 속에 시대와 공간을 초월한 “절대적 가치”가 담겨있다는 신앙고백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신앙고백”이 성서를 “문자적”으로 모두 믿어야 한다고 해석하는 입장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축자영감설은 이미 그 정당성을 상실하고 있는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문자적”으로 성서를 받아들이려고 할 때에 성서는 너무나 많은 상충적인, 우리의 현실속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들을 담고 있다. 레위기에서 볼 수 있듯이 돼지고기를 금하는 내용, 생리중의 여성과의 성적관계를 금하는 내용, 또한 여성들이 금과 같은 화려한 장식물을 하는 것을 금하는 내용(베드로전서 3:3) 등 성서에는 그 시대적 정황을 가지고 읽어야 이해할 수 있는 내용들이 곳곳에 산재하여 있다. 또 다른 무서운 예는 자신의 집에 온 “남자손님”을 환대하고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딸이나 첩을 다른 남자들에게 내어주어 처참하게 유린 당하게 하는 윤간, 토막살인 (창세기 19장, 사사기 19장)등의 이야기들도 성서는 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구약신학자는 이러한 성서귀절들에 대하여 분석한 <공포의 텍스트 (Text of Terror)>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기독교인들이 이러한 성서귀절들을 읽으면서, 성서의 모든 귀절 하나 하나가 하나님의 말씀이니, 자신의 딸, 첩을 다른 남성들의 윤간의 대상으로 삼게 내어줄 것인가? 또한 부언할 필요도 없이 성서에는 일부일처제가 규범적인 결혼양식으로 전제하지 않은 이야기들을 쉽게 찾아볼 수있다.
그러므로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고백의 포괄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기독교인들이 분명히 이해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의 이름으로 타자의 억압과 유린을 정당화하는 “악”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들은 사실상 그들 역사 속에 각각의 “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왜곡된 이해를 바로잡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성서에 대한 다음의 두 번째 이해이다.
둘째, 성서는 “역사적 산물”이다.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the Words of God),” 즉 사랑, 정의, 평화 등과 같이 시공간을 넘는 “절대적 가치”를 지닌 책이면서, 동시에 특정한 문화/역사적 상황을 반영하는 “역사적 산물(historical product)”이라는 점이다. 이 말은 즉 성서의 저자들은 하나님이 아니며, 성서자체도 신이 하늘에서 뚝 떨어뜨려 내려준 책이 아니라, 특정한 역사문화적 상황들에 제한된 인간이 저자라는 점, 따라서 시공간을 초월하는 “절대적 가치”만이 아니라 시공간에 제한되는 “상대적 가치”들도 성서는 담고 있다는 말이다.
성서의 66권이 “정경화(canonization)”된 과정을 보아도 성서 자체가 지금 우리가 보는 그대로 마치 하늘에서 떨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 성서에 대한 매우 제한된/왜곡된 이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올바른 성서읽기는 그 텍스트가 어떤 문화/역사적 배경에서 쓰여졌는가를 면밀히 살펴야 하며, 그 텍스트가 오늘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비판적이해”를 병행하지 않으면 성서의 깊은 의미를 오히려 성서의 이름으로 왜곡시키게 된다.
예를 들어서 기독교인들이 잘 알고 있는 예수의 “오병이어의 기적 이야기”를 보면 5천명이 먹었다고 하는데, 이 5천명은 “남자들"만 세었다고 되어 있다. 이것은 하나님이 성서저자에게 "남자들만 세서 기록하라"고 한 것이 아니라, 여성과 아이들을 “사람수”에 넣지 않았다는 성서저자가 몸담고 살았던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지금도 어느 지역에 가면 이 성서귀절 때문에 여성들을 교회의 정식교인으로 간주하지 않는 교회들이 있다. 또한 여성을 남성의 소유물로 보는 시각이 성서의 곳곳에 있는데, 기독교인들이 이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며 아직도 여성을 소유물로 여기고, 여성차별적 제도를 “성서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진정 성서의 의미를 잘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일까.
이러한 맥락에서 볼때, 성서읽기/해석은 언제나 단지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사회구성원인 인간으로서의 평등과 인권과 직간접적으로 연계되는 중요한 “정치적 행위”가 된다. 성적소수자 문제에 관해서, 다양한 종교들이 공존하고 있는 한국사회에서 유독 기독교인들만이 “성서”를 들이대며 성적소수자들을 정죄하고, 치유해야 할 지독한 질병에 걸린 사람들로 주장하는 뉴스를 이곳 저곳에서 접할 때마다, 신학대학에서 교회/기독교와 사회의 소위 “지도자”들을 교육하는 교육자로서 나는 참으로 깊은 암담함과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
무엇이, 그리고 누가 기독교인들을 저러한 "일그러진 종교적 전사들"로 만들어 내고 있는가.
"성적 소수자" - 예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기독교인(Christian)"의 우선적인 단순한 정의는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문제가 제기 되었을 때에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예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 이 물음, “예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는 영어약자로 “WWJD(What Would Jesus Do?)”라고 하는데 이것은 1896년 ‘챨스 셀돈(Charles Sheldon)’이라는 미국의 한 목사가 출판한 <예수의 발자취를 따라(In His Steps)>라는 책의 부제로 사용된 것이다. 이 어귀는 이후로 예를 들어 “예수라면 어떤 차를 운전할 것인가(What Would Jesus Drive)” 등 다양한 소위 “WWJD Industry”에 불을 붙이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예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매우 진지한 물음을, 자본주의적 사업으로 전향시키고, 또한 그것이 대중들에게 강력한 설득력을 가지게 된 것은 여전히 성서위에 손을 얹고 대통령 취임식을 하는 나라인 미국이니 가능한 것이리라.
그런데 동성애자들을 “비성서적”이라고 정죄하는 기독교인들이 주로 사용하는 성서귀절들을 보면 매우 흥미로운 사실들이 있다. 첫째, 그 어느 귀절에도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전거가 되어야 할 “예수”로부더 나온 것은 없다는 것이다(창세기 14장, 레위기 18:22, 레위기 20:13, 로마서 1:27, 고린도전서 6:9~10, 디모데전서 1:10, 히브리서 13:4 등). 둘째, 그 어느 귀절에도 여성과 여성끼리의 관계나, 또한 “트랜스젠더”등에 대한 언급은 없다. 이것은 물론 성서의 배경인 가부장제적인 남성중심적인 시대적 배경을 드러내는 것이며, 또한 "트랜스젠더"와 같은 개념은 현대사회에서나 등장하는 것이기 때문이지만, 성서에 대한 “문자적” 근거를 대고 성적소수자를 정죄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논리적 허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남성끼리의 동성애적 사랑의 문제가 그렇게 중요한 죄의 문제였다면 왜 예수는 그러한 문제에 대하여 전혀 언급을 하지 않았을까? 사실 “동성애(homosexuality)”개념 자체도 하나의 독립된 개념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이다. 즉 성서자체는 우리가 현재 이해하고 있는 “동성애”라는 개념자체가 존재하지 않은 시대적 배경 속에서 쓰여졌다는 것이다. 19세기 이후에도 물론 “동성애”에 대한 개념이해는 무수한 변화를 거듭해 왔다.
물론 다양한 해석의 개연성이 있겠지만, 예수의 메시지의 핵심은 “신에 대한 사랑은 바로 약자에 대한 사랑, 이웃/원수에 대한 사랑"이라고 나는 본다. 그런데 예수의 메시지를 보면 “사랑”은 그저 “낭만적인 사랑”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회적 위험까지를 감수해야 하는 “정치적 의미”를 담고 있는 사랑이다. 예를 들어서 소위 불법노동자를 “사랑”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하는 매우 사회정치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예수사상을 담고 있는 가장 중요한 택스트 중의 하나를 예수의 “최후의 심판”이라고 하는 마태복음 25장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이 텍스트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중요한 신학적/신앙적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 “죄”란 무엇을 “함으로서의 죄(sin by commission)” 와 무엇을 “하지 않음/생략함으로서의 죄(sin by omission)”가 있다는 죄의 두 가지 차원을 암시하고 있다. 둘째, “죄”에는 “개인적인 죄”와만이 아니라 “집단적/사회적/구조적 죄”가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리고 셋째, 소위 신의 “최후 심판”이란 어떠한 종교에 몸을 담았는가, 교회에 나갔는가, 어떠한 종교적 신조를 따랐는가 등이 아니라, 놀랍게도 어떻게 나 자신이 구체적 도움과 연대가 필요한 이들에게 해야 할 책임/사랑/연대를 나누었는가 혹은 하지 않았는가 라는 점이다. 놀랍게도 이 "최후의 심판"에 대한 예수의 절절한 가르침에는 "제도화된 종교"나 "종교적 교리"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텍스트는 “예수 믿는 것”의 의미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하여 기독교인들이 근원적으로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매우 중요한 점을 시사하고 있다. 자신이 돌보아야 하고, 연대해야 할 일들에 대하여 외면하는, “하지 않음”의 죄는 “몰랐다”는 것으로 용서가 되지 않는다는 참으로 엄중한 "책임성/연대성의 윤리"를 예수는 이 성서본문에서 분명히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최후심판"의 판단기준이 되는 항목에 "동성애"라든지가 들어가지 않은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서를 가지고 성적소수자들을 "죄인"으로 몰아대는 기독교인들이 이러한 예수의 중요한 가르침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성적소수자를 포함하여 누군가를 정죄하는 것—그것이 성서의 이름이든 신의 이름이든, 또는 교리나 교회의 이름이든—그것은 인간이 "신의 역할"을 하려고 하는 것과 같은 행위로, 결국은 신을 모독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예수를 자신의 구세주로 삼는다"고 고백하는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건네준 “최후의 심판”의 메시지로 다시 돌아가서 “남을 정죄”하는 것에 목청을 세울 것이 아니라, 자신이 타자들과 어떠한 책임적/연대적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물음으로 근원적으로 되돌아보고 자기 자신에 대한 깊은 비판적 성찰을 해야 할 것이다. 교황의 최근 발언처럼 "도대체 내가 누구를 정죄할 자격이 있는가?(Who Am I to Judge)"라는 선언은 사실상 우리 모든 기독교인들, 모든 인간들의 선언이 되어야 할 것이리라.
“성적 소수자”--예수라면 어떻게 할것인가.
나의 답은 매우 간결하다.
예수는 그들의 인간으로서의 존재방식이 사회정치적, 종교적으로 인정되기 위하여 그들과 연대하고, 그들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함께 서서, 성서를 들이대며 성적소수자들의 인권과 존재방식을 무화시키고 정죄하는 "예수의 이름"으로 모인 종교인들을 참으로 안타깝고 슬픈 시선으로 바라볼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가장 적은자(the Least)"들에게 하는 것이 바로 예수에게, 신에게 하는 것과 같다고 가르친 예수를 철저히 망각하고 왜곡시키는 행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취급 받지 못하던 여성들, 그 누구도 제대로 인정해 주지 않는 무수한 주변부인들을 진정으로 신의 형상을 지닌 소중한 “한 인간”으로 바라보는 예수의 그 “급진적인 존재론적 평등의 눈빛”—예수를 따르는 "기독교인들"이라고 자신을 지칭하는 이들은, 자신 아닌 타자를 정죄하는데 마음을 쓰기 보다는 이러한 예수의 눈빛을 늘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하리라.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그 "누구"가 다른 성이든 같은 성이든—그것은 신이 내려준 고귀한 인간의 권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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