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방울(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커밍아웃 과정이나 당시 상황을 얘기하는 글들은 많은데, 그 이후를 다룬 글이 많이 없다며 웹진팀에서 내게 이 글을 요청했다. 아마 커밍아웃이 잘 받아들여진 가정 안에서는 더 이상 퀴어임이 특별한 일로 다뤄지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커밍아웃을 준비하는 많은 퀴어들이 커밍아웃 이후의 가족관계 변화를 궁금해한다. 짧은 부모모임 활동을 하며 지켜본 가족들을 바탕으로 말해보자면 커밍아웃 이전과 이후의 가족관계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 경우가 많은 듯 하다. 커밍아웃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서로 싸우거나 거칠어질 수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원래의 가족관계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원래 부모와의 상호존중이 잘 이루어지는 관계였다면 커밍아웃을 할 때에도 대개 극단까지 치닫는 경우가 적고, 부모가 본인의 위계를 지나치게 내세우거나 기존에도 가족이 서로 싸우는 관계였다면 커밍아웃 시에도 그러할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그렇기에 부모가 아직까지도 자녀를 소유물처럼 다루려 한다면, 우선 자녀를 하나의 인격체로서 인식할 수 있도록 어떻게든 반항하고 싸워서 자녀가 가족 내에서 적절한 주체성을 찾는 것도 커밍아웃을 준비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커밍아웃 그 이후


나 또한 커밍아웃 이후에 가족관계에 있어 극적인 변화가 있지는 않았다. 커밍아웃 이전에도 부모님은 나와 깊은 대화를 자주 하셨고, 언제나 나를 믿고 따라주셨으며, 그것은 이후인 지금도 마찬가지다. 달라진 것이라면 부모님이 가끔 성소수자 인권시위에 나가고 성소수자 부모모임 운영위원 활동을 한다는 것 정도이다.


커밍아웃 전이든 후든 부모님과는 언제나 똑같이 사이가 좋지만, 클로짓(closet)일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오픈리 게이(openly gay)인 지금 부모님은 나에게 정말로 큰 힘이다. 내가 성소수자 가시화를 위해 주변에 여건이 된다면 내 정체성에 대해 커밍아웃 해주시면 좋겠다고 말한 뒤로 부모님은 주변인들에게 커밍아웃도 서슴치 않으신다. 


심지어 며칠 전에는 심상정 의원이 많이 득표해야 한다며 모든 외가 친척들이 모인 자리에서 커밍아웃을 하셨다. 그 중에는 보수 기독교인인 이모도 있었다. 이모는 그 자리에선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다가 커밍아웃 이후 며칠 뒤 엄마에게 문자로 '나도 너무 놀랐다'며 '예준이를 걱정하는 마음에' 찾았다는 '나는 더 이상 동성애자가 아닙니다.'는 혐오세력의 동영상을 보여줬다고 한다. 그것에 답한 엄마의 반응은 이랬다.


"이미 본 영상이야, 어떤 목적을 가지고 제작된 왜곡된 동영상들이 많으니까 잘 찾아봐야 해! 나도 처음엔 언니처럼 부정하는 단계가 있었어, 이해해. 나중에 얼굴보고 깊게 얘기 해줄게.^^"


엄마가 저렇게 밝고 단단하게, 오히려 전복적으로 조언까지 하자 이모는 그러냐며 아무런 말도 덧붙이지 못했다.


나는 새삼 엄마가 그 정도로 단단해진 것에 놀랐다. 이제 나보다도 더욱 단단해진 것 같았다. 엄마는 항상 그렇게 행동할 수 있는 것이 나의 당당함 덕분이라고 한다. 이제는 서로가 서로를 당당하게, 그리고 단단하게 만들어주게 된 것이다.




만약에 커밍아웃이 실패했다면


아직도 편지를 던지고 집에서 나와 친구집으로 가는 지하철을 기다리며 혼자 했던 상상들이 또렷하다. 부모님의 폭언이나 폭력을 구체적으로 상상하며 속으로 막 화를 냈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성소수자가 아니었다면 평생 없었을 이런 일로 왜 이렇게 스트레스 받고 고민해야 하는지, 그 처지의 내 자신에게 화가 났던 것 같다.


커밍아웃이 실패했다면 아마 예정대로 군대에 입대했을 것이다. 전역하고 나서는 고등학교 내내 배웠던 기술로 재취직해서 나름의 독립된 삶을 꾸려갔을 것이다. 가끔씩 '언젠가는 부모님이 본인의 잘못을 깨우치겠지.' 하는 생각을 했겠지만.



성소수자 부모모임


하지만 그랬더라도 나는 분명히 성소수자 부모모임에서 활동했을 것이다. 커밍아웃을 준비할 때부터 활동가 부모님들이, 딱히 무언가를 챙겨주지 않더라도 그곳에 계시다는 것만으로 큰 위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커밍아웃이 실패했더라도 그곳에서 대리만족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부모모임이 가지는 힘은 그러한 점이라고 생각한다. 


부모모임에 새로이 오는 부모님들에게는 몇 가지의 패턴이 있다. 그 중 부모모임에 와서 가장 많이 우는 부모님들은 커밍아웃 이후 자녀에게 폭언이나 폭력을 저질렀던 부모님들이다. 본인들이 자녀에게 저지른 행동이 너무 부끄럽고 미안하다는 것이다.


엄마는 나의 커밍아웃 직후 미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황에도 나름의 침착함을 유지하며 '아니 그렇다고 이게 죽을 이유는 아니잖아' 라고 말했다. 그렇다. 자녀가 성소수자인 것은 상식적으로 어떻게 봐도 죽을 일이 아니다.


많은 부모가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될' 자녀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심지어 어떤 탈동성애 목사의 어머니처럼 그것을 이유로 자살하는 비극이 생기는 것은 차마 두고 보기 힘든 일이다. 나는 그 부모님들도 '디나이얼(denial), 클로짓(closet) 부모님'이라고 생각한다. 본인의 ‘진실된 세상이 무엇인지 알지만, 그걸 받아들이면 분명 불행해질 것’이라는 착각 속에서 쉽게 마음을 잡지 못하는 것이다.


이때 부모모임은 성소수자 당사자들 뿐만 아닌 디나이얼, 클로짓 부모들에게도 '밖으로 나와 자녀의 성정체성을 받아들이고, 성소수자 부모로 살면서도 행복할 수 있어요, 모든 게 다 괜찮을 거예요'라고 말하며 그들을 감싸 안아주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주변 친구들 중에 부모가 자신이 성소수자임을 알면서도 그 사실을 부정하는 경우가 수도 없이 많다. 부모모임의 활동이 더 확대되어 이러한 벽장 속 부모들도 우리를 제대로 볼 수 있게 되었으면 한다.


성소수자 부모모임에 감사하며 이 글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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