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나더(성소수자 부모모임)
두 달 넘게 머릿속에서만 상상했다. 한국, 중국, 일본, 그리고 미국에서 건너온 성소수자 부모님들이 한 자리에 모이면 어떤 모습일지, 사람들은 어떻게 느낄지, 그리고 난 어떨지. 포럼 기획을 시작했을 때부터 포럼 전날까지 메일로만 서로 연락을 주고 받으며 ‘직접 만나면 어떤 분일까? 만나면 무슨 얘기를 하지? 메일로 이것저것 요구해서 불편해하시지 않을까?’ 별별 생각을 했더랬다.
초청 포럼 당일 행사가 진행되는 중앙대로 향했다. 당일 오전에 언론 인터뷰가 있었지만 학교 수업 때문에 함께하지 못하고 부모님들을 초조하게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처음 그분들을 마주한 순간 너무 반가웠다. 미국 API Project에서 클라라윤님과 함께 오신 아야 야베님을 제일 먼저 뵈었는데, 나도 모르게 ‘Hi! So nice to meet you’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갑습니다!)라고 급하게 통성명을 하고 바로 안아드렸다. 일본 부모모임을 대표해서 오신 나카지마 미츠코상과도 포옹으로 인사를 했다. 곧이어 오신 PFLAG China의 탕 마마님과 파파 로즈님과도 첫 인사를 했는데, 아침부터 중국 부모님들이 나를 애타게 찾으셨다고 해서 감사함에 마음이 찡하기도 했다. 포럼이 시작하기 직전까지 해외에서 오신 부모님들은 본국에서 가져오신 기념품과 명함을 나눠주시느라 바빴고, 난 수행역할을 하면서도 부모님들의 열정적인 자기 소개에 푹 빠져버렸다. 서로 다들 반가워하는 모습에 괜히 내가 다 흐뭇했다고 하면 이상할까?
포럼이 다 끝났을 때에는 포럼을 준비하면서 받았던 스트레스들이 다 씻겨나가며 마음이 꽉 차는 기분이들었다. 서로 다른 환경에도 같은 목표를 갖고 여러 활동을 한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직접 보게 되니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당사자들도 갖기 힘든 의지를 가지고 활동하신다는 사실에 감사함도 느꼈다. 그래서였는지 서로에게 빨리 마음을 열었던 것 같고 짧은 시간에 정이 든 것 같다. 마지막 저녁식사를 하러 가는 도중에도 아쉬운 마음에 서로 사진을 남기며 작별 인사를 하기가 참 어려웠다.
미국 API Project의 아야 야베님과 함께
포럼 다음날에는 서울에 산재하는 성소수자 인권단체 방문이 계획되어 있었다. 애인의 도움으로 차를 빌려 부모님들을 픽업해 짧은 시간 동안 총 네 단체를 방문했다. 솔직히 말하면 포럼보다도 단체 방문이 기대되었다. 포럼을 기획하면서 발표 내용은 얼추 접했던 터인지라 직접 부모님들을 수행하고 다니면 더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를 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은 내가 몸담고 있는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였다. 첫 장소여서 그랬는지 긴장이 되었다. 일본 부모님에게는 일본어 통역이 붙고, 나는 중국인 부모님들의 통역을 담당했다. 통역은 영어를 하시는 파파로즈를 통해 순차통역을 거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외국인분들을 수행하는 것도 처음이었지만 내가 중국어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의사소통이 순조롭게 이뤄질 수 있을지 속으로 걱정이 많았다. 행성인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이것저것 많이 물어보시고 사진도 많이 찍는 모습을 보고 왠지 더 잘해야겠다는 다짐도 하게 됐다. 영상을 보며 단체를 설명해드리는 것은 순조로웠다. 하지만 일본 부모님과 달리 중국에서 오신 부모님들은 이중으로 통역을 진행했던 까닭에 시간이 두 배로 걸렸고, 모두들 질문이 많으셔서 시간이 많이 지연되었다. 이어서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를 방문해 센터와 비온뒤무지개재단에 대한 설명을 들었고 그 안에 함께 있는 퀴어락과 별의별 상담소, 퀴어문화축제, 조각보도 간단히 둘러보기도 했다. 다음에 간 곳은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사무실이었는데, 이 근방이 게이 스팟이라고 말씀 드렸을 때 호기심 있는 표정으로 눈빛을 주신 것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 마지막으로 간 곳은 청소년성소수자위기지원센터 띵동이었다. 네 곳 중 내가 유일하게 가보지 않은 장소였기 때문에 나 또한 궁금했다. 띵동을 방문할 때는 이미 한국 어머님들과 언론 인터뷰를 진행하는 기자 분도 함께 계셨다. 약속된 시간을 훨씬 넘었기에 부모님들이 피곤하셨을 텐데도 불구하고 끝까지 적극적인 자세로 참여해주셔서 너무 감사했다.
단체들을 돌아다니며 부모님들께서 질문도 굉장히 많이 주셨는데 그 중에 두 나라 모두 공통적으로 매 단체마다 여쭤보시는 질문이 있었다. 바로 기금 조성 방법이었다. 한국에서는 CMS, 즉 자동이체가 보편화되어 있는 반면, 중국이나 일본은 단체 기금을 자동이체로 해놓는 것이 보편화되지 않은 듯했다. 반대로 한국에서는 중국과 일본이 지역별로 부모모임이 조직되는 것에서 많이 배울 수 있었다.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사무실에 방문한 부모님들
점심시간부터 저녁시간까지 계속됐던 단체 방문 일정이 띵동에서 마무리 되었고 어느덧 식사를 할 시간이 되었다. 나도 그렇지만 자유시간을 반납하고 방문 일정에 흔쾌히 동의해주신 것도 모자라 모든 스케줄에 잘 따라주신 부모님들도 분명 많이 지치셨을 것이다. 그만큼 맛있는 것을 대접해드리고 싶었다. 부모님들이 한국에 오시기 전부터 저녁 메뉴를 무엇으로 정할까 수행을 같이 한 애인과 많이 고민을 했다. 고민 끝에 요즘 해외에서 뜨겁다는 한국 치킨을 먹기로 했고 띵동 인근 치킨집으로 향했다. 다행히도 부모님들께서는 맛있게 드셨고, 회포를 간단히 풀 수 있었다. 미츠코상은 본인 자녀 사진을 보여주시기도 했고, 탕 마마와 파파 로즈는 간단한 중국어를 그 자리에서 알려주시기도 했다. 한중일 성소수자 부모들이 모여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 화목하게 이야기 하는 풍경이 참 좋았다. 이런 그림이 한 순간에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나도 알고 다른 사람들도 알 것이다. 정말 많은 사람들의 염원이 담긴 자리이고, 부모님들을 비롯해 보이지 않은 곳에서 힘쓰신 분들 덕분에 이뤄졌다. 나 또한 기억에 남을 순간에 함께 해서 뿌듯함을 많이 느꼈다.
식사를 마치고 세 부모님께 작별인사를 드렸다. 단 이틀을 뵀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정이 많이 들어 자리를 뜨기가 참 어려웠다. 심지어 미츠코상은 마지막으로 안아 드렸을 때 우셔서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틀 뒤, 다른 행사에서 클라라윤님에게도 마지막으로 인사를 드리고 나서는 지난 5일이 참 꿈 같다고 느껴졌다.
(왼쪽부터) 나카지마 미츠코님, 파파 로즈님, 탕 마마님
미국 API Project의 클라라 윤님과 함께
고작 1년 전, 성소수자 부모모임에 처음 발을 들였고 그 사이에 정말 많은 일들을 겪었지만, 이렇게 비현실적이라고 느껴질 만한 경험은 처음이었다. 세계 각지에서 살아오신 분들이 내 이름을 불러주면서 다들 한결같이 ‘이번에 수고 참 많았다. 앞으로도 잘할 거라 믿고 우리 다시 꼭 만나자.’ 라고 말씀해주시니 정말 앞으로도 열심히 할 수 있을 것 같고, 또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야 야베님은 나에게 ‘새로운 부모를 얻었다고’도 하셨다. 맞는 말씀이었다. 아무래도 이번에 여러 어머니와 아버지를 등에 업은 것 같다. 푸근했던 파파 로즈, 사진 찍기를 참 좋아하셨던 탕 마마,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가지신 클라라 윤님, 이쁜 미소를 지니신 아야 야베님, 그리고 정말 어머니 같으셨던 나카지마 미츠코 상, 모두 다 반가웠고 감사드리고, 사랑한다는 말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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