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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 이야기/행성인 활동가 편지

[활동가 편지] 우리의 시대는 다르고, 우리의 두려움은 서로의 용기가 되어 돌아온다

by 행성인 2017. 5. 22.

그림자(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나는 영세자영업자 레즈비언이다. 자영업을 시작한 이후로 일상과 생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삶을 살았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 하면 이명박 정권 광우병 집회의 패배를 시작으로 박근혜 정권으로 이어지는 광풍의 9년 동안 황폐한 일들은 더 이상 알고 싶지 않았던, 스스로를 돌아 볼 때 아주 많이 비겁했던 삶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11년이 넘는 시간 동안 서로의 결핍을, 무기력함을, 결코 닿을 수 없는 내면의 그 곳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배워가는 삶을 살았다. 이제야 돌이켜 그때 10년의 일기들을 다시 읽어 보니 그런 사랑이 내게 있기에 황량한 그 시절을 살아낼 수 있었다는 생각이 차오른다.

 

19대 대통령 선거 후보 토론회. 그날은 조금 상기된 밤이었다. 지난겨울 몇 겹으로 방한복을 챙겨 입고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가 탄핵을 일구어 낸 이후, 우리가 뽑을 새 대통령의 토론을 들을 수 있는 가슴 벅찼던 밤, 이 세상의 미래를 함께 이야기 할 수 있을 거라 기대했던 밤. 한 주도 빠짐없이 무지개 깃발 아래 친구들은 모였고 어느 누구도 차별 받지 않는 세상을 바라며 민주주의 역사에 함성을 더했던 자긍심이 남아 있던 그 때였다.

 

유력 대통령 후보에게 (지금은 대통령이라는 최고 권력자가 된) 우리의 존재 자체를 부정당했다. 문재인 후보는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우리를 향해 “싫어합니다. 반대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다음날 항의하러 갔던 활동가들은 경찰서에 연행되었다. 이명박근혜 정권에 대항하며 뜻을 함께 했던 사람들이라고 생각 했던 많은 이들에게 ‘나중에’라는 오래 묵은 연호도 계속해서 들어야만 했다. 진보라는 프로필사진을 단 사람들이 감춰져있던 호모포빅한 말들을 sns 등에서 함부로 지껄이기 시작했다.

 

나는 울분과 황망함과 분노가 뒤섞인 마음에 눈물을 쏟아 내었고, 밤새 뒤척이며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이 세상의 성소수자들이 여기저기 섬처럼, 나와 같은 밤을 보냈을 거란 생각에 더 가슴이 메어왔다.

 

나는 비록 오랫동안 현실의 삶 속에 안주해 있었지만, 20년이 넘는 시간동안 어떠한 조건으로도 사회가 어느 누구도 차별을 해서는 안 된다고, 인권은 목숨이라고 맨 땅에서 싸워왔던 이름 모를 여러 세대의 성소수자 활동가들이 얼마나 무력감을 느꼈을까? ‘세상이 요구하는 질서와 다른 자신을 부정하며 정체성 찾아가기의 험난한 여정 중이었을 청소년 성소수자들은 이 폭력적인 세계가 얼마나 무서웠을까.’ 라는 생각으로 연결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제 방안에서 홀로 울고 있지만 않을 거라는 것을 안다. ‘우리의 시대는 다르고’ ‘우리의 두려움은 서로의 용기가 되어 돌아올 것'이라는 외침들을 믿는다. 경찰서 앞에서 연행된 활동가들을 기다리고, 국방부 앞에서 A대위의 당연한 무죄를 함께 외치고, 아이다호 필리버스킹에서 우린 함께 울었고 소리쳤고 더 많이 웃을 수 있었다.

 

나는 생각했다. 좀 더 자주 너의 안부를 묻고 차 한 잔을 건네고 함께 밥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성소수자 운동의 어느 누구도 소리 없이 사라지지 않도록 나의 힘을 보태고 싶다. 지지자들이 될 수 있을 나의 주변 사람들에게 나를 보여주고 지지를 이끌어 내고 후원을 얻어 내는 것에도 용기를 내겠다. 이번 일을 겪어내며 그 일련의 과정들이 나의 관계망을 촘촘하고 따뜻하게, 내 삶을 좀 더 풍요롭게 만드는 방향이 될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