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1

많은 이들이 말한다. 인권운동은 세상의 맨 얼굴을 마주하는 일이라고. 삶의 의미를 다시 정의내리는 과정에 나 또한 사람이라고 외치며 인간의 존재를 재정의하는 이들이 있다. 그 과정은 호소와 선언, 폭력과 투쟁을 동반하기도 한다. 생존의 기슭에서 무언가를 걸러내는 순간이면 항상 입안에 단내가 났던 것 같다. 세상의 경계를 겨우 붙잡고 살아가는 이들이 끝내 무언가 쥐기 위해 몸부림칠 때, 옆에서 어렴풋이 위의 문장을 새겼던 것 같기도 하다.

 

인권은 보편적이고 아름다운 언어지만, 그만큼 오용되고 부정되기 쉽다. 질서의 구심은 도덕과 질서를 앞세워 끄트머리의 존재들을 잘라낸다. 인권을 오용하고 부정하는 사회로부터 삶을 부여잡는 이들로부터 언어를 붙일 수 없을 만큼 아득함을 느낀다. 하지만 인권은 사람이 살기 위한 사회의 기본값이기도 하다. 지금 없지만 당장 필요하고, 그렇기에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들을 거스르고 헤쳐가야 하는 것. 인권운동은 사회의 경계에 머무름과 동시에, 사람에 대해 정의내리고 구분하는 질서의 판을 흔드는 몸짓이다.

 

매 순간이 싸움의 시간이었다. 더러는 서로의 호흡을 맞추며 고통을 나눴고, 공동의 언어가 꿈틀거리며 체제의 문을 두드리기도 했다. 더구나 행성인은 회원들이 함께 운동을 만들어가는 단체이기에, 서로의 얼굴을 읽고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손잡아야 하는 과정이 결과만큼이나 중요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갈 수 없는 활동에 답답해지고 당신의 고통과 원망이 가시가 되어 찌를지라도 손을 놓으면 고립된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우리'는 불화와 실패를 반복하면서도 아픔을 안고 꾸역꾸역 무언가를 기획하고 기록하고 함께 나누며 불완전함을 걸음의 동력으로 삼는다.

 

하지만 높아지는 분노를 달래고 위안 받을 길은 많지 않았다. 활동가들 사이에는 소진이라는 단어가 유통되었다. 다들 바쁘고 신경을 곤두세우며, 지쳐있었다. 최근 들어 활동가 복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활동가의 건강권이라는 단어도 유통되었다.

 

2

회의와 우울은 언제부턴가 활동의 뼈와 살이 되었다. 절망이 계속되면 절실함은 모래처럼 손아귀를 빠져나간다. 활동가에 적합한 사람인지에 대한 물음이 군살처럼 박혀 걸음을 방해했다. 거리에서 외치는 삶은 여전히 익숙지 않다. 원치 않지만 꼭 해야 하는 활동들이 생애를 채워간다. 매 순간 찾아오는 두려움은 피로로 찾아온다.

 

즉각적인 대응을 필요로 하는 인권침해와 반인권적 사건들이 난무했다. '우리'의 목소리는 온전히 개인의 언어가 아니다. 비평과 산문에 익숙한 긴 호흡의 문장은 간명한 성명서로 기계처럼 찍혀 나왔다. 단체에 직위를 갖고 있는 활동가로서 나의 언어는 단체의 문장이라는 무게에 눌려 표현에 제동을 걸기도 한다. 호흡과 언어가 목적에 맞춰 구겨지고 잘려나간다. 공동의 노력이 필요한 작업이기에 공공의 목적 아래 나의 사유를 양보해야할 때가 있다. 문장은 건조하다. 성명문은 글의 형식적 아름다움을 추구하기보다 즉각적인 대응을, 목적에 맞는 기술과 클라이언트의 욕구에 맞춰야 하는 디자인에 가까운 직조법이다. 활동도 마찬가지일 터, 힘이 세지 않은 성소수자 인권운동은 적은 자원으로 가장 효과적인 행동이 무엇일지 계산해야 한다. 종종 자괴감이 몰려온다. (하지만 알고 있다. 반복되는 언어에 매몰되는 것 같지만, 빠른 공동의 대응을 필요로 하는 건조한 문장 속에서도 번뜩이는 단어가 발견된다는 것을.) 당장 필요한 언어를 찾다 호흡이 불일치하는 순간이면 사명감 위로 소외가 잠식한다. 감정을 주체하기는커녕 정신줄부터 잡는다. 활동하는 내내 팔자에 없는 경험을 한다는 생각을 하루에 골백번 한다. 누르고 누르다 토사물처럼 입 안에서 겨우 나온 단어는 환멸이었다. 차마 뱉지 않은 단어조각을 입안에 굴리며 다시 명치 아래로 눌러 담는다.

 

내가 가는 길이 곧 활동이고, 이전에 없던 활동가 모델을 만드는 거라고 정신승리하며 목구멍의 질문을 쓰게 삼키지만, 뒷맛이 깔끔할 리 없다. 공동체에서 활동한다고 말하기에는 관계 지향적이지 못하다. 본인의 신변도 챙기지 못하면서 서로를 챙기자는 이야기는 간혹 부끄러움을 남긴다. 고민을 함께 나눌 동료가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계속 무덤을 파고 있지만, 당분간은 동료들로부터 떨어져있고 싶었다.

 

은둔의 유혹이 컸다. 모든 걸 내려놓고 이름도 흔적도 지우고 싶었다.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인스타그램의 예쁜 사진들만 보고 싶었다. 가당치도 않게 카페놀이와 소비의 아름다움에 현혹되어 소일하고 싶었다. 존재 자체가 부정되는 세상에서 은둔은 도피의 다른 이름으로 유통된다. 고통을 숨긴 삶은 가식이고 위선이라는 문장을 적지만, 금세 반발이 솟는다. 그게 어때서.

 

하지만 막상 시간이 생기면 별 것 없이 흘려보낸다. 세상을 환멸하면서 은둔할 수 있을까도 자신이 없다. 나를 관조하는 감각을 잃은 걸까. 나는 나 자신으로부터도 떨어져 있어야 했다.

 

3

5월 한 달 안식월을 가졌다. 마침 숨 돌릴 타이밍을 찾던 터였다. 하지만 따로 떨어져나가면 아주 도망갈 것 같았다. 나를 믿을 수 없다. 멀지 않은 거리를 두고 쉼을 갖는 시간을 계획했다. 여러분의 노고는 제게 쉼이 된다는 농담과 함께. 그 와중에 활동에 대한 감이 떨어질까 싶어 SNS는 끊지 않았다.

 

부업처럼 간간이 들어온 글을 쓰고, 시간에 쫓겨 뒤로 넘겨두었던 책과 전시를 찾았다. 미세먼지만 피해도 좋겠다는 생각에 가까운 일본을 도피처 삼았다. 온전한 쉼을 계획한 건 아니다. 시부야의 스크렘블 교차로와 가부키초의 현란한 네온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신주쿠 니초메 골목마다 불을 켠 작은 업소들은 외지인을 경계하듯 매혹적으로 반짝인다. 교토의 사찰과 불상, 정원에 위안을 기대했지만, 감동도 잠시, 여행객들의 군집을 헤치며 반복적인 양식의 불상들을 비교하고 찾아다니는데 소진했다. 쉼과 안식보다는 정신없는 풍경으로 분산된 경험들이 이어졌다. 다만 사방에서 들어오는 풍경에 일일이 대응하지 않고 흘려보내는 것이 마음 편했다. 감각들이 온전히 나를 향했다. 내일에 대한 두려움 없이 이 순간을 즐기고 있다는 건 오랜만에 가진 감상이다.

 

신주쿠 니초메를 찬찬히 돌아봤다. 낡은 건물의 아케이드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성소수자 업소들이 종로 골목의 오랜 풍경과 비슷했다. HIV/AIDS 게이 커뮤니티 센터 AKTA에서는 2013년 영면한 일본 게이 포르노스타 마사키 코우의 사진전을 하고 있다.

 

 

5월 한 달 한국에서는 정권이 바뀌고 세월호 미수습자들이 하나둘 돌아와 자기 이름을 찾았다. 5.18추모식에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 제창되었다. 문재인대통령은 ‘다시는 국가에 대한 원통함을 느끼지 않도록’ 하겠다는 의지를 다잡았다. 하지만 일주일 지난 24일 국군재판소는 육군 참모총장의 지시로 색출‧구속된 A 대위에게 동성애자라는 이유만으로 범죄자 판결을 내렸다. 국내 유일 동성애자 처벌법으로 부르는 군형법92조의6이 폐지안 발의를 하루 앞둔 날이었다. 같은 날 대만 헌법재판소는 아시아 최초로 동성결혼 법제화를 판결했다. 한국의 성소수자들은 장준규 육군참모총장의 면전에 찾아가 자신의 존재를 부르짖었다.

 

4

의무는 강제적이지만 평등하게 부과하지 않는다. 이 나라는 강제적으로 비국민과 국민을 구분할 뿐 아니라, 국민 내부에도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과 차별을 둔다. 근거 없는 기준을 적용하여 층을 나누고 차별하는 전략은 국가가 정상을 정상으로 부르기 위한 촘촘한 전략이다.

 

성소수자는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 사회 테두리의 연안에 매달려 있다. 국가는 성소수자를 정상시민들을 보호하기 위한 구성적인 타자로 삼고 조건에 따라 포섭하거나 층위를 두어 관리하거나 처벌한다. ‘동성애는 인정할 수 없지만 차별은 반대한다’는 위선적인 언설은 처절한 현실로 다가온다. 사회구성원으로 인정하지 않지만, 부정하지도 않는다는 정상성의 기만. 관용의 위선과 인권의 유보 사이에 사투를 벌인 이들의 이름은 성소수자이고 이주민이며 장애인이자 여성이고 HIV/AIDS 감염인이고 비정규직 노동자다. 우리는 광화문에서, 밀양과 강정에서, 고공이든 길바닥이든 후미진 곳으로 밀려날지라도 장소를 가리지 않고 싸웠다.

 

적어도 새 정부는 인권에 대한 의미를 알고 있는 이들이라는 기대가 있기에, 희망은 여느 때보다 크다. 하지만 희망의 크기만큼 차별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달성 가능한 쉬운 변화의 한편에는 애써 은폐하고 삭제하는 사안들이 있다. 변화 자체가 부정되던 과거와는 다른 풍경에서 성소수자는 차별을 맞이하고 있다. 명백한 배제가 굳이 찬반의 논쟁이 되고, 촌각을 다투는 인권이 나중에 이야기하자는 여유로 나오는 것은 개인의 의견에 앞서 구조가 되어버린 한국의 후퇴한 인권상황을 보여준다.

 

인권의 그늘 아래 시민들은 인권을 요구하는 더 많은 이들을 발견하고 만난다. 어느 때보다 인권운동의 목소리가 높아지겠지만, 그만큼 내부의 논쟁, 내부와 외부의 경계를 가르는 기준에 대한 논쟁들 역시 피할 수 없다. 인권과 변화를 운운하는 위선을 벗겨내고 싸우며 설득해야한다. 나의 정체성이 공격당하지 않기 위해 중무장하거나 특정한 잣대에 언어를 단죄하기보다, 언어의 구조를 비껴나고 미끄러지며 결국 가장자리로 밀려나거나 삭제되기 쉬운 몸의 울림을 살피며 나의 정체성에 질문한다. 방향성 있는 운동과 기동력 있는 활동의 한편으로 보이지 않는 목소리를 읽는 섬세한 감각이 필요함을, 더불어 타인의 고통이 직조한 삶에 조응하며 사회적 소수자들을 정치세력화할 수 있는 기술이 절실함을 깨닫는다.

 

여기서 나의 내밀한 고민이 개입한다. 환멸이 솟구치는 지금 여기 나의 의미를 묻는다. 전업활동가로서 어떤 역할을 가져야할 것인가.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하지 못하는 것은 무엇일까. 당장 이런 고민은 소모적일까. 피치 높여 싸워야 할 때, 내가 자리에 맞는 사람인지 고민한다는 것이 사치스럽다는 생각도 든다. 전업으로서 활동을 피한다면 현실도피가 아닐지, 고민의 수위가 동료들에게 부담과 피로를 주지 않을지도 걱정된다. 이 글은 안식월의 후기를 빌어 정리하는 고민들의 타래이다.

 

5

예상한 바지만, 한국의 반인권적 현실은 잠시간의 쉼마저 기만으로 느끼게 만든다. 그럼에도 쉼이 가능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고 빈자리 채우며 열일 해준 행성인 동료들에게, (나에게만) 짧은 한 달 동안 긴 싸움을 이끌고 참여해온 이들에 감사와 존경을 갖는다. 거리를 두고 고민을 정리할 수 있는 빈 시간에 일단-쉬고 기금을 지원해준 인권재단 사람과 후원자여러분들께도 감사한다. 앞으로 더 열심히 하겠다는 다짐은 자신이 없어서 못하겠다. 결국 나는 활동하는 동안에도 회의를 멈추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기약 없는 부정으로 소일하고 싶지는 않다. 적어도 활동의 리듬을 찾고 싶다는 바람이 있다. 적어도 나를 객관화할 수 있는 한 달이었다. 누구를 만나야 할지, 누구와 어떤 고민을 나눠야 하는지도 정리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이후의 시간들이 염세와 냉소로 증발되지 않으면 좋겠다. 고민에 매몰되지 않고, 당신과 나의 거리를 조율하며 우리의 갈 길을 만들어내면 좋겠다. 그것이 연대이든 불화이든, 다른 무엇으로 부르건 우리는 멀리 있지 않음을 계속 확인할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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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모리
    2017.06.07 13:42 신고 [Edit/Del] [Reply]
    잘 읽었어요. 소중한 웅의 고민들.
  2. 웅빠
    2017.06.10 00:31 신고 [Edit/Del] [Reply]
    캬 취한다 웅의 필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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