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월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웹진기획팀)

 

 

 

여성이자 성소수자로 살기에 불편한 점을 열거해보라면 1박 2일 동안도 떠들 수 있지만, 그 중에도 큰 불편을 느끼는 때가 산부인과를 방문할 때이다. 진료를 시작하기 전 차트를 작성할 때, 초경을 몇 살에 했는지, 생리는 규칙적으로 하는지 등의 질문에 답하고 나면 마지막으로 간호사가 조심스럽게 묻는다. “성관계 경험은 있으신가요?”


이때부터 머릿속으로는 그 질문에 따르는 온갖 질문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검진에 꼭 필요한 질문인지, 이 질문의 의도가 무엇인지, 임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지를 알기 위해 하는 질문인지 아니면 질주름이 남아있는지를 판단하려 하는 것인지, ‘성관계’는 도대체 뭘 말하는 거지? 남성 성기가 내 성기에 들어왔던 적이 있냐고 묻는 건가? 손가락은? 오랄섹스는? 항문섹스는? 딜도는? 바이브레이터는? 했는데 안 해 봤다고 대답하면 큰일나나? 까지 생각하느라 잠깐 시간을 지체하고 나면 어느새 내 입에서는 우물쭈물 “아니요”라는 대답이 나온 이후다. 이렇게 나름의 수모(?)를 당하고 나면, 내가 대단한 성병에 걸릴 것도 아니고 임신을 할 것도 아닌데 굳이 산부인과 진료를 받아야 하나, 라는 회의감이 찾아온다.

 

 

산부인과 검진을 받을 때마다 이런 불편함을 느껴왔기에. 7월 22일 행성인 여성모임이 <성소수자 여성과 건강>이라는 주제로 진행된다고 했을 때 꼭 참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여성모임은 다른 모임과 달리 행성인 회원이 아닌 여성 성소수자도 참여할 수 있는 모임이어서, 해당 주제에 관심이 있는 비회원들도 이 주제에 대한 지식을 얻어갈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녹색병원과 살림의원에서 산부인과 진료를 보시는 윤정원 선생님의 강의를 듣고, 이후 참가자들이 질문을 하며 진행되었다. 원래는 트랜스우먼의 건강에 관련된 파트가 준비되어 있었지만, 아쉽게도 참가자 가운데 트랜스우먼이 없어 해당 파트는 제외하고 강의를 들었다. 윤정원 선생님께서는 ‘이성과 성관계를 하지 않는 여성이 이라도 자궁경부암에 걸릴 확률이 없는 것은 아니며(HPV바이러스는 손가락만으로도 전염된다), 유방암은 오히려 이성과 성관계를 하지 않는 여성들에게서 나타날 확률이 더 높다’는 설명으로 성소수자 여성 역시 산부인과 검진을 받아야 함을 강조하셨고, ‘이성애자 여성보다 레즈비언이, 레즈비언보다 바이섹슈얼 여성이 우울증 등 정신질환을 겪을 확률이 높다’는 통계로 육체적 질환 뿐 아니라 정신적 질환에 대해서도 관심을 환기하셨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성 정체성, 성 지향성과 정신건강이 연관이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으니 의사의 세심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시기도 했다. 실제로 정신과 상담을 받는 주변 친구들 가운데, ‘내가 커밍아웃을 하면 나의 모든 문제들의 근원을 정체성 문제라고 진단할까 봐 의사에게 커밍아웃을 하지 못했다’고 말하는 친구들이 있었기에 납득이 가는 설명이었다. 또한 '저는 출산계획도 없는데 꼭 매달 생리를 해야 하나요? 생리를 멈출 방법은 없나요?‘ 라는, 성소수자 여성이라면 한 번쯤은 답을 듣고 싶었을 질문에 대해서도 현실적으로 가능한 방안들과 장·단점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셨다.

 

 

윤정원 선생님은 꼭 성소수자 여성이 아니라도 산부인과 진료를 하며 경험한 사례들을 이야기해 주셨는데, 지금보다도 산부인과나 여성의 몸에 대한 지식이 없었던 세대의 분들은 냄새가 나쁘다며 락스로 외음부를 닦는 등 건강에 치명적인 행동들을 젊은 시절부터 해 온 경우도 있다고 하셨다. 과거보다야 나아졌지만, 지금까지도 산부인과는 많은 여성들에게 터부시되고 있다. 산부인과에서 다뤄야 할 지식이나 처방 등은 인터넷이나 가족 등 비전문가에게 얻어야 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산부인과 진료를 받을 때도 검진을 주저하거나 ‘처녀막(질주름)이 파열된다’며 굳이 더 어려운 검진 방식을 택하기도 한다. 몇몇 주요 질환들을 제외하고 산부인과 검진은 보험처리도 잘 안 된다. 하물며 성소수자 여성에게 산부인과는 멀게만 느껴지는 공간일 것이다. 이런 현상이 도대체 언제쯤 해소될지, 시스젠더 이성애자 여성들이 산부인과를 편하게 방문하게 되는 것만도 너무 긴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지, 사실 다소 회의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윤정원 선생님은 미국에서 발매된 <The Fenway Guide>라는 책 가운데 ‘스스로의 성 정체성과 지향성, 파트너의 성 정체성과 지향성, 성관계의 형태’를 진료 시 묻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 부분을 보여 주시며, 의학계의 LGBTQIA 연구가 진보하고 있음을 알려 주셨다. 한국에서는 요원한 일인 것만 같지만, 활동가들과 의료인 중 이 문제에 꾸준히 관심을 가지는 이들이 존재한다면 언젠가는 산부인과에 가서 ‘파트너가 매니큐어를 제대로 안 지우고 섹스를 한 이후로 외음부가 가려워요’라는 내용으로 진료를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댓글을 남겨주세요

Name *

Password *

Link (Your Homepage or Blog)

Comment

Secret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