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웹진기획팀)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사회적 약자의 자리에 놓인다. 여성이기에, 장애를 가졌기에,  빈곤하기에, 성소수자이기에 차별을 받는다. 성별, 장애(신체조건), 병력, 외모, 나이, 출신 국가, 출신민족, 인종, 피부색, 언어, 출신지역, 혼인 여부, 임신 또는 출산, 가족 형태 및 가족 상황, 종교,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 범죄 전력, 보호 처분, 성적 지향, 학력, 사회적 신분 등 차별금지법에서 차별을 금지하고자 하는 항목만 보아도 권력이 얼마나 다양한 구조로 작동하고 사람들을 그 영향 하에 있게 하는지 알 수 있다. 게다가 교차적이고 복합적인 서사를 갖기도 한다. 저학력 빈곤층 한부모 가정, 장애인 여성, 난민이면서 성소수자인 경우와 같이 말이다. 
 
부조리한 사회적 구조와 그에 수반된 관계에서의 상호 작용은 차이에 위계를 양산해왔다. 사회는 '성별', '나이', '장애'와 같이 차등을 두어 더 착취할 수 있는 범주의 사람들을 두어 착취 구조를 공고히 만들었다. 또한 그 구조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존재로 몰아 혐오를 양산하여 다른 사람들이 선동되지 않게 해왔다. 그 결과 더 착취 받는 사람들이 덜 착취 받는 사람들에게 분노를 향하게 되거나 장애, 질병을 가졌거나 빈곤한 사람을 ‘내 세금을 갉아먹는 존재’로 여기는 등 구조에 의해 배제되고 소외받는 존재들이 서로에게  손쉽게 혐오를 쏟거나 탓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 구조와 맞서 싸우고자 하는 사람들도 당연히 존재한다. 노동, 인권, 여성, 빈곤 등 사회 운동에 복무하는 많은 사람들이 분명 존재하지 않는가? 그러나 부당한 구조에 맞서 싸우고자 하는 이들 역시 편견이나 사회적 혐오를 주입 받는데서 자유롭지 않다. 개인이 의식적으로 구조와 거리를 두는 시도를 하더라도, 자신과 관계 맺는 이들에게 나이든 성별이든 장애든 권력의 영향을 줄 가능성을 가진 존재가 되기 때문이며, 부당함을 덜 겪어온 부분에서 누구나 무지와 무감각의 과정을 거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카롤린 엠케는 <혐오사회>에서 미움받는 존재는 모호하다고 했다. 정확한 것은 섬세함을 요구하고 서로 모순적인 다양한 특성과 성향을 지닌 각각의 개인을 개별적인 인간 존재로 인정하는 세밀한 구별을 전제하기 때문에 온전히 미워하기가 쉽지 않다. 집단적인 증오와 멸시 성향이 생겨나려면 사회적으로 증오와 멸시를 당하는 이들이 오히려 사회에 피해나 위협이나 위험을 가한다고 주장하는 이데올로기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누가 생산하는가? 또한 누가 협소한 서사를 전체의 표상으로 만드는가? 이러한 질문의 답은 혐오를 생산, 방관, 공모하여 누가 이득을 취하는지를 통해서 나온다. 정치인과 기업가, 법률가, 교육자, 방송 ∙ 언론인, 종교 지도자들이다. 얼마 전 HIV/AIDS에 감염된 여중생, 지적 장애 여성 사건 보도에서 ‘에이즈녀’로 낙인찍으며 질병 전파 가능성을 부각시키고 가해의 책임만을 물었다. 감염인이라는 이유로 무조건의 범죄자로 만드는 보도는 감염인들을 더 음지로 내몰 뿐 문제해결을 위해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일련의 언론의 태도는 낙인을 강화하고 에이즈 예방은커녕 불안감만 가중시킬 뿐이었다. 여기에는 경찰, 정부와 질병관리본부와 같은 공공기관의 묵인이 있음은 물론이다.
 
이에 맞서 싸우기 위해 정상성 규범에서 벗어나는 사람들을 배제하는 구조를 재편하고자 하는 것을 운동의 목적으로 삼는다면, 이러한 구조를 어떻게 해체하고 권력을 재배치 할 수 있는지의 질문이 나올 수 밖에 없다. 우리는 다양한 교차적 약자성을 가진 사람들이다. 나와 다른 약자성을 배제하고 혐오하는 순간 자신이 우리라고 이야기 했던 사람들 중 일부을 소외시키고 배제할 가능성은 너무나 많다. 우리는 서로가 불완전한 성원권을 가진 사람으로 존재하도록 매순간 기여한다는 점에서 서로에게 책임이 있는 연결된 존재들이다.   그렇기에 내외부적으로 서로 마주하며 각자의 서사를 받아들이는 과정 없이는 운동이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 그동안 미디어, 교육, 가정 교육, 제도 등 여러 얼굴로 주입되었던 모호함을 구체화 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 차이를 가진 사람들이 평등하게 함께할 수 있을까? 무조건적으로 함께 있는다고 해서 연대가 가능해지는 것은 아니다. 과거 성소수자 운동만 보더라도 과거 7~80년대 동성애자 해방전선에서 함께 활동하다가 단체 내 성차별 문제에 분노한 레즈비언들이 나간 역사가 있다. 그 결과 그 단체의 게이들에게 성차별적 생각을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하기가 더 어려워졌고 힘을 합쳐 여성 차별과 동성애 혐오에 맞서 강력하고 단결된 운동을 건설하기 더 힘들어졌다. 또한 분리되어 나간 레즈비언 페미니즘 조직도 여성들 사이에 존재하는 계급, 인종 등 다양한 차이에 의해 다시금 분열 되었다.
 
마주하는 과정에서 다른 소수자성의 정치들을 부문운동으로 집어 삼켜 포섭, 이용 된다는 느낌을 받게 하거나, 나중의 영역으로 배제하거나 또는 그저 ‘네가 관심 가져 주었으니 나도 한번’ 식의 품앗이 연결을 넘어서려면, 조디 딘이 <낯선 자들의 연대: 정체성 정치 이후의 페미니즘>에서 말하는 ‘반성적 연대’는 만남의 기본 태도이지 않을까 싶다. 조디 딘은 우리는 서로 다른 시간적 공간적 상황에 놓여 서로 다른 욕망을 갖는 각자의 제3자다. 이 제3자는 서로 다른 가치 규범을 갖기에 서로의 이방인이지만 대화하려는 의지를 갖기에 내부인이다. 즉 우리라는 공동체의 구성원은 각자 서로의 내부인이자 외부인이다. 서로의 다름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주제화하려한다는 점에서 서로 연대한다.


반성적 연대는 우리가 타자를 ‘있는 그대로’ 완벽하게 인정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 대신 반성적 연대는 우리가 타자에게 그 자신일 수 있는 공간을 주는 것을 포함한다. (중략) 우리는 그녀의 차이의 정도를 존중하고 그녀와 함께할 수 있을 정도로 믿을 뿐이다.

조디 딘 <낯선 자들의 연대: 정체성 정치 이후의 페미니즘>


나와 만나는 제3자의 목소리를 주제화 한다는 것은 태도를 넘어 운동 의제를 구성해나가는 데에도 꼭 필요하다. ‘낙태죄 폐지’ 운동을 할 때, 낙태죄가 가지는 사회적 통제의 근간을 ‘자궁으로 환원되는 생물학적 여성의 몸’과 ‘임신중단 결정권’ 차원만이 아니라 우생학과 인구관리, 성적 통제의 차원에서 함께 접근한다면 낙태죄 폐지 운동의 당사자는 ‘임신/출산이 가능한 몸을 지닌 특정 연령대의 시스젠더 이성애자 비장애인 여성들’만이 아니라 장애, 질병, 연령, 노동조건, 이주상태, 성별정체성, 성적지향 등 다양한 조건들로 인해 임신/출산이나 임신중지를 통제 당하는 사람들 모두가 될 수 있다. 노동과 관련된 의제들 역시 (중략) 노동시간과 임금, 혼인/혈연 중심 가족 기반 복지 체계 관련 의제들을 재설정한다면 연대의 방식과 주체 범주 자체가 달라질 수 있다.’는 나영님의 말처럼 말이다. 행성인이 ‘무지개 행동’ 뿐 아니라  '차별금지법제정연대'나 ‘소수자난민인권네트워크’ 와 같이 더 다양한 소수자들과 함께 하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단번에 서로의 서사를 받아들이고 서로를 모호함의 영역에서 구출해낼 수 없다. 한 순간에 온전히 환대하고 환대 받는 사회가 달성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운동이란 타자와 만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변증됨에도 동일성을 획득할 수 없는 아도르노식 부정 변증처럼 진행 될 수밖에 없는 것이지 않을까? 그 과정이 얼마나 소란스럽고 피곤할지는 자명하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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