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월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웹진기획팀)


아주 어릴 때부터 나는 남자가 되고 싶었다. 아니, 내가 남자가 되고 싶어 한다고 생각했다. ‘멋있어’보이고 싶었고, 영화를 보면 항상 남성 캐릭터에 감정이입을 했으며 내게 선택권이 생긴 이후로는 항상 남자 옷을 입었고 머리를 짧게 잘랐다. 2차 성징이 나타난 후에도 나는 내 몸과 별로 괴리감이 느껴지지 않았고, 동성친구들과 함께 있는 것에 더 편안함을 느꼈다. 뭔가 애매하게 내가 여자가 아닌 것 같은데 여자인, 아니면 여자인 것 같은데 여자가 아닌 듯한 느낌을 안고 살다가 페미니즘을 만났다. 페미니즘은 내가 왜 스스로가 여자가 아니라고 느꼈는지-사회에서 재생산하는 여성상에 내가 맞지 않는다는 생각 때문에-, 그리고 사회에서 내게 보여준 여성상이 얼만큼 허구인지를 알게 해 주었고, 그 이후로 나는 나의 구원자인 페미니즘에게 내 자아를 상당부분 의탁했다.

왜 레즈비언을 상징하는 이미지의 여성들은 머리가 긴 것일까?

 

 

그러나 내가 20대 초반에 처음으로 만난 오픈리 레즈비언은 소위 말하는 ‘가부장 부치’ 였다. 본인도 여성이면서, 심지어 성소수자이면서 가부장제와 여성혐오 등 ‘주류 남성 사회’의 폐단을 내면화하는 것이 웃기다고 생각했다. 이 시기에, 내 자아의 많은 부분은 페미니즘이라는 사상 혹은 학문과 동일시되어 있었기에, ‘부치’라는 사람들에 대한 개인적 회의감을 그들의 행동이 ‘반 페미니즘적’이지 않은가, 하는 위험한 결론으로까지 끌고 가기도 했다. 그래서 누가 나를 ‘부치’라고 부르면, 나는 ‘그렇게 제대로 된 정의도 없는 단어로 나를 지칭하지 말라’고 이야기하곤 했었다.

 

그에 대한 인간적 실망은 내가 단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레즈비언 커뮤니티와 그들의 연애 양상에까지 확장 적용되었다. 그러나 나 역시도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항상 남성의 역할을 연기하고 있었다. 로맨틱한 관계를 일종의 역할놀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때로는 의식적이었지만 때로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상대방을 위해서 문을 열어 주거나, 겉옷을 벗어 주거나, 무거운 짐을 들기를 자처하거나, 내 주거지가 더 멀더라도 상대방을 데려다 주고 집으로 향했다. 내가 앉는 자세가, 매일 입는 옷들이, 말투나 목소리가, 심지어 가방을 메는 방식이 ‘남성성’을 모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애를 하며 내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너무 ‘남성적’이지 않은지를, 이성애 연애의 행동패턴을 재현하고 있지는 않은지 일일이 따지자니 너무 피곤했다. 어쩌면 안 하느니만 못한 연애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와 연애를 하던 친구들이 ‘동성애자가 아니기 때문(나는 기존에 남성하고만 연애를 하던 바이섹슈얼 여성들만 만났었다)’에 내가 ‘제대로 된 레즈비언 연애의 방법’을 학습할 수 있을 리가 없다는 구차한 변명을 스스로에게 들려주기도 했다. (아무리 ‘진짜 레즈비언’끼리 연애를 한다고 해도 이성애 연애의 양상을 답습하는 이들이 많다는 사실을 꽤 늦게야 알게 되었지만 말이다. ) ‘사회에서 유일하게 재현되는 연애의 형태는 이성애 연애이기 때문에 동성간의 연애 역시 이성애 연애의 패턴을 따라갈 수밖에 없고, 때문에 동성에게 사랑받기 위해서는 이성성을 습득해야 한다고 학습되었기 때문’ 이라는 설명도 내게는 충분치 못하게 느껴졌다. 내가 스스로의 ‘남성성’을 검열하기 시작하면서 제약을 받은 내 행동들은 로맨틱한 상황들 뿐 아니라 모든 일상의 영역에 있었기 때문이다. 다소 게으른 설명인 것 같고, 내 의문을 해소해주지도 못할뿐더러 현상을 지나치게 국소화시키는 것 같았다.

 

타이밍은 기가 막히게 맞물려 넷페미의 시대가 열렸고, 나의 페미니스트 동지들은 한국의 찌질하기 짝이 없는 식민지 남성성과 그들이 여성을 대상화하는 방식을 미러링하고 조롱하기 시작했다. 새로이 얻은 언어들 속에서 유영하는 나의 동지들은 한때였지만 자유로워 보였다. 그러나 나는 그 자유에 참여할 수가 없었다. 넷페미 진영에서 한국식 가부장제가 여성을 일상적으로 성적 대상화하는 현상을 고발하고 조롱할 때 나는 분명 그들과 함께 싸웠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여태까지 여성을 대상화해온 방식이 가부장제의 남성성과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그렇다면 과연 ‘빻은 사람’ 일지도 모를 내가, 내 빻음의 원본인 가부장제의 남성성을 마냥 비난할 수 있는가를 누구에게든 묻고 싶었다.

 

그리고 강남역 사건 이후로 나의 자기검열은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내 주변의 모든 여성들은 공공 화장실을 두려워하게 되었고, 화장실에 들어갔을 때 인기척이 느껴지면 그 사람이 여성인지 남성인지를 가장 먼저 확인했다. “밤중에 공공 화장실에 갔는데, 처음 보는 여성분이 ‘무서우실 텐데 같이 있어 드릴까요?’라고 물었다”는 등의 감동실화가 생기기도 했다. 집단적 트라우마가 여성들을 뭉치게 했지만, 나는 이번에야말로 정말 이 ‘약자들의 공동체’에 낄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강남역 이전, 화장실은 내게도 꽤나 두렵고 불편한 공간이었다. 여자화장실에 들어가면 모두 나를 쳐다봤다. 나와 비슷하게 남성적 젠더표현을 하는 여성 친구들은 그럴 때 일부러 통화를 하며 화장실에 들어간다고 했지만, 목소리마저 낮은 내가 전화통화를 하며 화장실에 들어설 때면, 심지어 내 뒤에서 걸어오던 남성이 내가 들어가는 화장실에 따라 들어와 굉장히 많은 사람들을 당황하게 한 적도 있었다. 나는 이런 상황을 겪을 때마다, 나를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는 사람들이 꼭 내게 가해를 한다고 여기진 않았지만 어쨌든 이 사회가 나를 피해자로 만드는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화장실 한 군데를 편히 못 가는 상황이 누구에겐들 불편하고 짜증나지 않겠는가. 하지만 강남역 이후, 나는 내가 이상한 눈초리를 받아 느끼는 불편함보다 공중화장실에서 여성인지 남성인지 분간이 안 가는 사람을 마주친 다른 여성들이 느낄 불안감을 방지하는 것에 더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공중화장실에 1~2명 정도의 사람이 있으면, 밖에서 기다리다가 그 사람들이 모두 나온 후에 화장실을 사용했다.

 

그것도 별로 오래 가지는 못했다. 몇 달 안 되어 몰카 사건들이 연이어 터졌고, 남성으로 보이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여자화장실에서 혼자 걸어 나오는 것도 여성들에게 썩 편한 일이 아니게 되었다. 이쯤 되니 정말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었고, 어쩔 수 없이 치마교복을 입어야 했던 중, 고등학교 시절이 차라리 편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페미니스트가 되는 것은 불편함을 사서 감수하는 일이라고들 하지만, 거기서 말하는 불편함이 이 정도 불편함은 아닐 것 같았다. 이 정도로 불편하면서도 그놈의 짧은 머리, 남성처럼 보이는 옷을 못 버리는 나 자신에게도 짜증이 났다.

 

혹자는 ‘결국 넷페미의 운동이 성차를 강조하는 페미니즘 방향을 향하면서 젠더 이분법을 강화했고, 그래서 네가 그렇게 불편하고 괴리를 느끼는 게 아니냐’고 할지도 모른다. 틀린 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이 운동이 ‘더 올바른 것’과 ‘더 효율적인 것’ 중 후자를 선택하여 시작부터 한계를 떠안고 출발했다고 생각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더 효율적인 것’을 선택한 결과로 스트레스를 받고 괴리감을 느끼는 나도, 같은 질문을 또 한다 해도 100번 가운데 적어도 80번은 후자를 선택할 것이다.

 

어쩌면 그래서 ‘여성운동’에 들이던 품을 갑자기 줄이고 성소수자 인권운동에 갑자기 관심을 많이 쏟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이 곳에선 내가 가졌던 불편함들이 조금 사라질 것 같았다. 그런데 내가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었다. 행성인에서 활동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날, 회원들과 회의 후 뒷풀이를 하다가 담배를 피우러 나갔는데, 모여있던 4-5명 정도가 정말 누가 봐도 부치 같은 사람들뿐이었다. 성소수자 커뮤니티의 언어에 익숙한 이 곳에서는 내가 레즈비언이라고 커밍아웃을 하고 나면 모두가 나를 당연하게도 부치로 볼 터였다. 심지어 그 날은 무슨 생각이었는지 체크남방을 입고 있어서 정말 피해 갈 수도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한 회원 분이 자리를 뜨며 ‘꼭 그렇게 부치들끼리 길 한 가운데 모여 있어야겠냐’고 농담조의 핀잔을 던졌다.

 

나는 아직도 부치의 정의가 무엇인지 모르며, 앞서 언급한 대로 그 단어로 호명되는 것을 정말 싫어한다. 누가 나를 부치라고 부르면, 내 기억 속의 수많은 가부장 부치들과 내가 비슷한 사람이 되어 버리는 기분이다. 하지만 동시에, 사실 그 단어는 내가 가진 괴리-나는 왜 성별 정체성이 여자이면서 남성적 젠더표현을 하는가, 왜 여성과 연애할 때 ‘남성적’ 역할을 맡으려고 하는가 등등-들을 한 번에 정리해 줄 수 있는 단어임을 알고 있다. 또한 성소수자들끼리 모여 있을 때 이런 식으로 ‘우리끼리 통하는’ 농담 한 두 마디를 하는 것이 내게도 나름의 해방감과 소속감을 주기에, 누가 나를 부치라고 지칭할 때마다 반박하려 들고 싶지는 않다(반박하는 것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 나에 대한 지칭을 수정하는 것보다 그 순간의 소속감이 내게는 더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레즈비언을 상징하는 이미지에 왜 치마가 사용될까?

 

그리고 정말 ‘부치’가 제대로 된 정의가 없는 단어라면 그 지칭이 나를 향하는 것을 불편해할 이유도 없지 않냐는 생각도 든다. 여성성과 남성성이 이론상 허구라면 내가 허구인 여성성과 남성성 중 무엇을 어떤 식으로 취하든 내가 스스로에게 경각심을 가질 일은 아니지 않은가. 사실 개인은 어떤 운동에도 100% 동화될 수 없고 나라고 그렇게 되고 싶지도 않으니, 나도 여성운동과 성소수자 운동에서 취할 부분만 취하고 기여할 부분만 기여하면 되는 것 아닌가. 아니면 나의 상태, 욕망, 정체성, 이런 것들을 굳이 언어화하려는 시도를 멈추고 그냥 ‘나’로 살면 되는 것 아닐까?

 

어쩌면 나는 지나치게 과잉된 자기인식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21세기의 개인이 그것-과잉된 자의식-을 피할 수 없다면 그 인식을 어떤 식으로 발전시킬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도 생산적일 것이다. 모든 개인의 욕망을 표현하기에 언어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언어화되지 않은 욕망은 어쩌면 새로운 ‘퀴어함’일 수 있고 그것의 언어화를 시도하는 것 역시 ‘퀴어한’ 노력이 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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