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톤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웹진기획팀)

 

 

 

“남자가 뭐죠?”

 

“성 결정인자(sry)가 있는 사람이요.”

 

“sry가 뭐죠?”

 

“남자를 만드는 유전자요.”

 

성을 의심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위와 비슷한 무한루프에 빠져본 적이 있을 것이다. 아예 거짓이라고 까지 말하기엔 뭐하지만, 뭔가 중간에 거대한 비약이 생략된 것 같아 마음 한편이 찜찜해지는 생물학 공식들 말이다. 남자는 순전히 생물학적으로도 정의가 계속 변하고 그 경계도 너덜너덜한데, 과연 sry라는 특정 물질에 1대1 대응될 수 있는 걸까.

 

나는 성이란 순환논리로서만 존재하는 것이며, 비논리이자 토대가 없고 따라서 인과도 없다 생각한다. (그리고 성차별이 그토록 비논리적인 이유도 성이 애초에 비논리라서 그렇다 생각한다.) 따라서 성을 단단한 토대를 가진 인과 구조로 이해하려는 시도(성과학, 진화심리학 등)는 항상 성공한 만큼 실패하고 항상 빈틈이 남는다. 성은 시작부터 모순 덩어리임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을 어떻게 모순으로 인식할 수 있을까? 그 한 예시로 잠시 원론적인 얘기를 하려 한다. 근대는 신분제를 철폐 했고,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꿈을 꾸었다. 허나 이제껏 인간은 평등으로 세상을 빚어 본 적이 없었고, 사회 조직을 위해선 차별(차이)이 필요했다. 다만 이전과 다른 게 있다면, 이번엔 평등사상과 정면충돌하지 않는 세련된 차별이 요구됐다. 그래서 차별은 다음과 같이 진화했다. 만‘인’은 평등하지만 여자와 흑인은 인간이 아니라고 하든가, 인간이긴 하지만 좀 부족하다든가, 똑같은 인간이고 평등하지만 ‘자연적’으로 다른 성질을 가지고 있기에 다른 소명을 가지고 있다든가. 하여간 다 비슷한 말이다.

 

결국 저 주장들의 목적은 하나다. “남자는 신분이 높아서가 아니라, 즉 그 자체로서 이유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남성성(인간성)을 ‘가지고’ 있어서 우월하다.” 허나 남성성이 소유의 개념이라면, 다시 말해 외부에 있는 일종의 대상 같은 것이라면 모든 남자들이 소유에 성공할리도 없고, 여자들이 못 가질 이유도 없다. 그렇다면 남성성이 굳이 ‘남성’성일 이유도 없게 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외부화된 남성성은 다시 내부로 들어온다. 남성성을 육체에 고정, 즉 남체화 시키는 것이다. 정의가 이렇다면 적어도 여자는 쉽게 남성성을 가질 수 없다. 따라서 이런 말이 성립된다.

 

“여자는 신체적으로 oo하므로(남성성을 절대 가질 수 없으므로) oo할 수 없다.”

 

허나 이런 본질주의는 신분제 논리를 재소환한다. 여자는 본질적으로 남성성에 다가설 수 없고, 그렇기에 본질적으로 열등한 존재라면 이것은 신분제 논리와 뭐가 다르단 말인가? 결국 남성성 기획은 평등사상과 긴장관계에 놓이게 되며 나름의 타협을 시도해야만 했다. 남성성은 여자는 도무지 근접할 수 없는 육체성이면서, 동시에 나름 접근할 수도 있는 이성과 합리성이 되기도 한다. 즉 남성성은 가장 육체적이면서 동시에 탈육체적인 기획이 되는 것이다. 남성성은 내외부를 오간다. 이 모순적인 시나리오 자체가 바로 근대성(性)이다.

 

일상의 언설에서 이 원형적 모순은 끊임없이 발현된다. 예를 들어보자.

 

1)“남자는 생물학적으로 oo해서 oo할 수밖에 없다”
-> 성의 본질은 육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굳이 ‘남성성’이 ‘남성’성일 이유가 있을까? 남체 그 자체가 이미 남성성이라면 말이다. 즉 저렇게 따지면 이런 말도 가능하다. 모든 남자는 남자답다!

 

2)“트랜스젠더 여성은 비록 몸은 남자이나 영혼이 여자이다”
-> 이번엔 성의 본질이 영혼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아까와는 정반대로,  굳이 인간 육체를 ‘남’체나 ‘여’체로 부를 필요가 있는 걸까?

 

3)“여자의 치마 입기는 ‘치장’이다. 남자의 치마 입기는 ‘여장’이다.”
-> 같은 행동도 다르게 분화된다. 전자에선 (여)성기는 행동(여성성)의 ‘원인’으로 해석되는데, 후자에선 그럴 수 없자 행동을 의미짓는(여장) ‘결과’로 자리를 옮긴다.

 

이 예시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 사실 남성성은 모든 남자가 갖고 있어서가 아니라, 그 반대로 모든 남자가 갖지는 못하기에 남성성이라는 것이다. 즉 남성성은 자체 모순이며, 남체와 추상적 남성성의 틈새 위에서 구성된다.

 

이런 원형적 모순은 일상적인 언설뿐 아니라 정치적 행위에서도 나타난다. 요새 이런 예시로 들기 좋은 것이 워마드다. 예전에 그 곳에서 한남 레즈, 한남 부치 어쩌고 하는 일종의 고발(?)글을 본적이 있는데, 내겐 그 글보다 글에 달린 댓글이 매우 흥미로웠다.

 

“그런 애들(한남 레즈)은 사실 레즈가 아니라 트젠(ftm)임.”

 

참 아이러니하다. 그들의 가격 대상은 줄곧 남체였는데, (그래서 mtf는 인정할 수 없다는데) 이번엔 남체가 아니라 어떤 형이상학적인 남성성이 가격의 대상이 됐다. 물론 ‘레즈가 아니라 트젠’이란 말은, 남성성을 끝끝내 남체와 동일시하려는 노력이자 트랜스를 출구삼아 남성성을 여체에서 추방하려는 시도다. 허나 출구가 있으면 입구도 있는 법이다. 다시금 mtf에게는 뭐라고 할 것인가? ftm은 남성성을 가졌고, mtf는 남체를 가졌으니 ‘진정한 여성’은 ‘여체-비남성성’이라는 두 가지 조건을 다 갖춰야 한다고 할까? 하여간 흥미로운 점은 워마드 역시 가장 육체적이면서 탈육체적인 주장을 동시에 펼치고 있다는 것이며,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성이 근본적으로 모순이기 때문

이다.

 

워마드에 비판적인 이들도 별반 다르지 않은 경우가 많다. 2015년 메갈리아 게이 논쟁 이후로 널리 성행한 각종 유행어들을 짚어보자. 예를 들어 소위 ‘시헤남’(시스젠더 헤테로 남성)은 일종의 여성 혐오의 정점에 있는 존재로 여겨진다. 이는 한남과 거의 동일하게 쓰이고, 따라서 ‘여혐 시헤남’같은 말은 없다. 그건 동어반복이기 때문이다. 허나 한남 게이, 한남 부치 따위의 조합어는 많은데, 이는 마치 “우리 레즈 게이는 원래 그런 애들이 아닌데 시헤남들에게 못된 걸 배워왔어요!”하는 인상을 준다. 성소수자는 그 자체로 혐오의 주체가 될 수 없고 혐오도 모방한 존재인 걸까? 여하간 어떤 본질적이고 추상적인 남성성이 시헤남에게 투사되어있고 나머지는 그것에 수동적으로 영향을 받은, 감염된, 혹은 모방한 존재들로 그려진다. 워마드처럼 남성성을 남체 그 자체와 동일시하지는 않으나 특정 정체성을 물화시켜서 그것과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다. 즉 워마드가 육체적이면서 탈육체적인 주장을 동시에 펼치는 것처럼, 이런 주장들도 탈육체적인 남성성에서 시작해서 남성성을 물화시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 역시 근본적인 성의 모순 때문이다.

 

하여 우리의 이야기는 성이 모순이란 걸 견지한 체 풀어내질 필요가 있다. 남체 그 자체가 만악의 근원인인 것도 아니고, 반대로 그것에서 아예 순결한 추상의 남성성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사실 두 주장은 끝없이 180도 반전하면서 결국엔 같은 주장으로 수렴된다. 우리의 경험은 양자택일 될 정도로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인간의 경험은 항상 모순을 비집고 새어 나온다. 특히 우리 성소수자들은 누구보다 그것을 격렬하게 겪지 않는가? 따라서 우리가 해야할 것은 이 모순 안에서 어떤 하나를 골라 입장을 잡는 것이 아니라, 모순을 어떤 언어로 표현할 것인지 고민하는 것이며 또한 모순이 우리의 생각, 관계, 경험, 육체, 몸, 삶을 어떻게 조직하고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증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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