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기용(『우리는 폴리아모리 한다』 공동저자)
이 스케치를 쓰는 나는 폴리아모리 세션에서 “성소수자 인권과 폴리아모리가 만나는 이유”에 대해서 발표를 했었다. 사실 성소수자 인권포럼 세션에 대한 스케치는 패널로 참석한 사람보다 객석에 있던 사람이 정리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하고, 더 많은 후기와 피드백을 듣고 싶었던 나로서는 아쉬움이 있다. 그래도 성소수자 인권포럼에서 처음 폴리아모리가 다뤄진 것인 만큼, 비록 패널이었지만 남기고 싶은 흥미로운 장면과 순간들이 있다.
우선 세션은 사회자인 콘딕(울산성소수자모임 THISWAY의 폴리아모리)의 의도대로 구글설문지 링크를 열어놓고 패널들이 발표하는 동안 관객들이 질문들을 보내는 형식으로 진행했다. 세션 초반에 이 방식을 콘딕이 설명하는 동안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관객 수를 세어보았는데, 처음엔 50명 정도의 인원이 모였었다. 폴리아모리에 대한 관심 굉장히 많은 것으로 느꼈었는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오진 않았구나 생각하면서 내심 실망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물론 끝 무렵에 센 인원을 듣고 다시 놀라지 않을 수 없었지만.
발표는 대략 이런 흐름이었다. 우선 자신이 폴리아모리로 살아가게 된 이야기, 성소수자와 비슷하게 찍히는 음란함이라는 낙인, 폴리아모리를 만나는 모노아모리의 이야기, 그리고 성소수자 인권포럼에서 폴리아모리를 함께 이야기하는 이유.
자신의 사례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시작해주신 것은 인문학카페36’5도의 지민님이셨다. 지민님은 폴리아모리 애인과 만나게 된 이야기를 나눠주시면서, 처음에는 너무 힘들었다고 토로하셨다. 그러나 점차 익숙해지고 애인의 또 다른 애인을 직접 만나고 대화하게 되면서 감정이 달라지기 시작하셨다고. 이런 변화로 본인도 점차 폴리아모리한 관계에 적응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하셨다. 우연한 문제로 애인과 애인의 애인과 자신이 한 집에서 머물고 생활하게 됐던 일이 결정적이었다는데, 얘기를 들으면서 나한테도 그런 상황이 찾아오면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폴리아모리가 퀴어 안의 또 다른 퀴어가 아닌가 생각하신다면서, 퀴어라는 범주가 더 확장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문제의식을 남겨주시기도 하셨다.
지민님은 최근 아주 문제가 되고 있는 한동대학교 학생 징계 사건의 당사자이기도 하다. 지민님을 포함한 학생들과 교수들이 학교에서 페미니즘 강연을 열었고, 그 안에 성소수자나 폴리아모리의 삶에 대해 증언한 내용이 있던 것을 학교에서 문제 삼았다. 이것을 특별지도라는 이름으로 학교에서 학생들을 탄압하기 시작했고, 결국 징계위까지 열려 지민님을 무기정학을 처분을 받으셨다. 포럼 패널을 하실 때까지만 해도 아직 최종 징계가 결정된 상황은 아니었지만, 지민님은 이 날도 혹시 부당한 일을 당하게 된다면 연대해주실 것을 요청하시기도 하셨다.
다음으로 예진님은 논모노 성적지향의 사람들이 받는 낙인과 폴리아모리가 받는 낙인의 공통된 점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셨다. 가령 바이라면 남자와 여자 둘 다 만나는 사람, 더 나아가 남자와 여자 가리지 않는 색마고 문란하다는 공격받는다. 한 편 폴리아모리도 난교를 한다던가 여러 사람을 만나서 문란하다는 비난이 자연스럽게 따라오고, 비독점적 관계를 반드시 유성애적인 시선으로, 그리고 잘못된 성적 낙인에 근거하여 바라본다는 점에서 아주 유사하다. 예진님은 자신이 폴리아모리라고 말했을 때 받았던 많은 부당한 비난에 대해서 과연 문란함이 뭔지, 누가 문란함을 규정짓고 왜 무엇을 공격하는 것인지 역으로 물어야 한다고 주장하셨다.
개인적으로 가장 기대한 모노아모리 발표, 한별님의 차례가 돌아왔다. 폴리아모리로서 살아가는 나에게 있어서도 이 발표 내용과 팁은 매우 소중한 것이었기 때문에. 한별님은 자신이 만났던 폴리아모리 사례를 소개해주셨다. 상대방은 연애경험도 많고, 무엇보다 다자연애 경험이 많았기 때문에 처음에 자신은 좀 위축됐다고 했다. 연애경험도 전무했을 뿐만 아니라, 다자연애 대한 실천적인 이해도도 떨어졌기 때문이다. 처음엔 상대가 다른 사람을 만나기만 해도 “저 사람과 있는 게 나와 있을 때보다 더 재밌으면 어떡하지?”,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친구 누구 만나서 뭘 했을까?” 이런 의구심과 불안함이 자신을 쫓아다녔고 했다. 물론 이 과정은 아주 고통스럽다.
이럴 때 상대는 “너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그대신 너가 하고 싶지 않다면 아무 것도 하지마”, “네가 행복하다면, 네가 다른 사람과 어떤 관계를 가지든 나도 행복해.” 라는 말을 해주었다고 했다. 여기서 한별님은 상대가 자신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가질 수 있는 여러 감정들을 긍정해주고 나아가 사랑해주고 있음이 느껴졌다고 했다. 오히려 상대를 가볍게 생각한 것은 자신이었다고. 대신 돌이켜봤을 때 한별님 자신은 상대를 독점적으로 질투하지 않거나 규제하지 않고 관계를 지속하는 건 어렵고, 상대가 자신이 아닌 사람과 스킨쉽하거나 연애하는 모습을 보면 괴롭다고 생각해서 스스로를 모노아모리라고 인지하게 되었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내 발표는 앞서 이야기되었던 폴리아모리의 다양한 삶들이 성소수자 인권과 만나 이야기 되어야 하는 이유에 대한 것이었다. 발표에서는 폴리아모리는 성소수자인가? 폴리아모리의 정확한 정의는 무엇인가? 무엇이 폴리아모리이고 무엇은 아닌가? 하는 질문들은 폴리아모리라는 개념을 욕망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인식 전환의 지표-도구로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존재하는 실체로서 폴리아모리의 자격과 가능성을 세우는 이야기로 흘러갈 위험이 많은 프레임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워마드가 저지른 실수들을 답습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폴리아모리 욕망을 드러내어 틀 짓고 균열을 내어야 하는 대상은 우리 개개인의 삶의 형식이 아니라 지배적이고 억압적인 성규범이고, 바로 이 지점에서 성소수자와 폴리아모리가 공명한다. 따라서 폴리아모리라는 개념은 모노아모리나 모노가미가 잘못됐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 제안되는 개념이 아니며, 앞으로도 성소수자 인권 담론과 함께 가부장적이고 남성중심주의적인 성규범에 균열을 내고 탈피하여 새로운 삶을 구축하기 위해 쓰여야 한다는 것이 내 주장이었다. 이성애중심주의적인 폴리아모리 논의가 주류인 일부 해외 상황과 달리 한국은 성소수자 커뮤니티가 선제적으로 수용하는 측면이 있어 전략적으로 유리하다는 점도 덧붙였다.
각자의 발표를 맞치고 난 뒤 정신을 차리고 인원 수를 세어보는데 대략 130명이 넘은 숫자의 관객들이 앉아 있었다(나중에 알고보니 150명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질문은 무려 100개가 넘게 왔다고 들었다. 새삼 폴리아모리가 화제인 것은 맞나보구나 느낄 수 있었다. 강의실이 300명 규모였는데 절반 정도가 사람들로 꽉 찼었으니 대략 맞는 거 같다.
질의응답은 아주 다채롭게 나왔으나 세션 사회자와 패널끼리 예상한대로 성소수자와 폴리아모리가 교차하는 지점에 대한 것보다는 자신도 폴리아모리인지, 모노아모리와 폴리아모리가 연애할 때 어떻게 해야 할지, 폴리아모리로서 살아가려면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초점을 맞춰졌다. 질문들이 워낙 많아서 답변을 다 기록할 수는 없겠지만, 인상적이었던 것 몇 가지는 이렇다. 한별님은 폴리아모리 애인에게 다른 사람을 데이트 하고 있고 질투가 느껴질 때엔 자신의 애인이 곧 죽는다는 생각을 한다고 한다. 그러면 죽기 전이니 뭐라도 자신이 행복한 일을 해야 좋은 것이라고 본인도 받아들일 수 있는 효과가 있었다고. 반면 예진님은 폴리아모리 상대가 반드시 다른 사람과 만나면 섹스를 하거나 유성애적 관계를 할 것이라는 편견을 버렸으면 좋겠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지민님은 모노아모리 상대의 이야기에 경청하고 감정에 대한 솔직하게 대화 나누고 타협적인 방안들과 약속들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고 강조하시면서도, 실체 없는 불안함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내 애인이 만나는 애인을 직접 보거나 그 사람이 갖는 여러 경험을 자신이 옆에서 직접 체험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고 하셨다. 가령 지민님도 처음엔 어려웠지만, 애인의 애인을 실물로 보고나서부터 생각이 달라졌다.
그래도 아예 성소수자와 폴리아모리의 교차에 대해 질문이 나오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흥미로웠던 것은 폴리아모리가 퀴어(성소수자라는 단어와도 다른 결일 수 있는)인 거 같은가 하는 질문에 정확히 반반으로 의견이 갈렸다. 질문 중에서는 시스젠더 헤테로가 폴리아모리면 성소수자/퀴어인가 하는 질문도 나오기도 했다. 이에 대해 나는 무엇이 이것이고 아니고를 구별하기보다 성소수자, 퀴어, 폴리아모리 이런 개념들이 어떤 억압으로부터 나오게 되었는지를 더 생각하고 변화를 유인하고 실천해야 한다는 답변을 했었던 거 같다. 폴리아모리만 떼어서 보고 LGBTAIQ+ 따로 떼어서 보고 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언론이 의외로 해외의 헤테로 폴리아모리 관계는 소개할 수 있지만, 게이 폴리아모리 관계는 당당히 소개하기는 어려워하는 이런 현실들을 생각해보면 쉽다. 우린 함께 이야기되어야 한다.
질의응답 중간에 폴리아모리가 무엇인지 개괄부터 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이 들어오기도 했지만, 나는 이 세션 전반의 대화가 폴리아모리에 대한 단상들을 모아가는 과정이었다고 생각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연구포럼 세션이 아니라, 조금 더 대중적인 인권포럼 세션에서는 아무래도 구체적인 경험과 단상을 나누는 것으로도 충분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세션이 끝나고 나서는, 역시 폴리아모리와 모노아모리에 대한 팟캐스트가 필요하지 않나, 그리고 성소수자 부모모임처럼 모노아모리의 감정 단계라도 만들어서 폴리/모노아모리 자조모임이라도 만들어야 하는 것이 아닌지 하는 재밌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내가 그럴 계획이 있다는 것은 전혀 아니다) 내년에도 폴리아모리 세션이 열릴까? (그것도 그때 기획단에게 맡기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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