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벽돌’을 차근차근 준비하다.
청소년 성소수자 인권을 증진시키는 활동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오랜 시간 해 왔다. 하지만 청소년 커뮤니티를 만날 기회가 거의 없었고, 동인련엔 청소년 회원들도 부족해 실제적인 청소년 활동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리고 성인 게이 중심의 단체 분위기는 청소년 회원들을 받아들이기에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처음엔 그랬다. 2009년 1월7일. 우리는 큰 기대를 걸지 않고 작은 활동이라도 시작해보자는 마음으로 오랫동안 중단되었던 청소년 모임을 다시 가졌다. 이 자리를 통해 청소년들이 생각하는 동인련 활동의 문제점(어렵다. 따분하다. 거리감이 든다. 운동권이다. 등)에 대해 들을 수 있었고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청소년 활동이 자연스럽게 제안되었다. 솔직히 어떤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준비하던지 간에 성공할 거라고 자신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북적 북적거리는 프로그램보다 동인련에 단 한 명 있던 청소년 회원의 친구를 만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2009년 가장 눈에 띄었던 ‘청소년이반, 인권활동을 위한 첫걸음 세미나’와 ‘무지개학교 놀토반’이 바로 이 자리에서 기획되었다.
1. 청소년 이반, 인권활동을 위한 첫걸음 세미나
‘청소년이반, 인권활동을 위한 첫걸음 세미나’는 2009년 1월 17일부터 2월7일, 4주 동안 진행된 프로그램이다. 청소년들이 평소 어려워했던 기존의 세미나 방식을 탈피하고 인권교육 현장에서 사용되고 있는 참여형 프로그램 형식을 도입하여 쉽고 재밌게 접근하고자 했다. ‘커밍아웃과 삶’ ‘알쏭달쏭 인권활동에서 만나는 용어 알아보기’ ‘학교와 청소년 인권’ ‘성과 인간관계’ 로 구성된 프로그램에 매회 10명 안팎의 청소년들이 참여했다. 프로그램마다 참여한 청소년들의 에너지는 상상을 넘어섰다. 질문과 토론도 없이 힘없이 끝나버리는 포럼과 달리 청소년들은 대답을 틈도 주지 않고 끊임없이 질문을 해댔다. 서로의 관심사를 넘나들었고, 잠깐 눈을 판 사이엔 단체로 일어나 음악을 틀어놓고 춤을 추기 일쑤였다. 그야말로 정신을 쏙 빼놓는 시간들의 연속이었다. 개인적으로는 프로그램 내용을 쉽게 소개하기 위해서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 그리고 성인들에게 익숙해진 말투부터 행동까지 모두 청소년들의 눈높이에 맞춰야 했다. 과정은 힘들었지만 세미나 결과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무엇보다 세미나에 참여한 청소년들의 만족도가 높았다. 세미나를 통해 많은 청소년 성소수자들을 모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그 외 동인련 활동에 눈에 띄는 몇 가지 변화가 생겼다. 청소년 활동의 비중을 높여가면서 홈페이지에는 처음으로 별도의 청소년 활동 웹페이지가 만들어졌고, 웹진에 ‘청소년이야기’ 코너가 신설되었다. 청소년들의 세상을 만들기 위한 주춧돌을 놓게 된 것이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있다. 2005~6년도에 시도된 예비교사와 함께하는 동성애 워크숍 교안을 보완하려고 기획했지만 잘 되지는 못했다. 그리고 무지개학교 놀토반 프로그램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다보니 동인련에 새롭게 가입한 청소년 회원들이 청소년 자긍심팀에서 활동할 수 있는 충분한 기회를 만들지 못했던 것이다.
2. 무지개학교 놀토반
‘교과서와 선생님도 없는 청소년 성소수자들만의 진짜 자율학습을 표방한 무지개학교 놀토반’은 2009년 처음으로 시도된 청소년 프로그램이다. 놀토반은 청소년들이 학교에 가지 않는 둘째주 토요일에 열렸다. 청소년 성소수자들의 자긍심을 높이고 자율적인 활동을 보장해주고자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준비하는 모든 활동들을 청소년들이 직접 담당했다. 나를 포함해 3명의 성인 회원들이 무지개학교 놀토반 기획회의에 참여했지만 회의가 원활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견인해 줬을 뿐이다. 처음에는 솔직히 퀴어 영화를 접할 기회가 없는 청소년들과 편안하게 사무실에 앉아 영화나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예상을 뒤엎고 20명이 넘는 청소년들이 온라인 홍보물만 보고 찾아왔다. 첫 모임 이후, 더 의미 있는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찾아야 한다는 부담감도 생겼다. 3월 무지개학교 놀토반은 화이트데이에 열렸는데 ‘풋풋하고 달달한 러브 로맨스’라는 주제답게 하이틴 성장영화를 함께 보고 ‘앰아이블루’ 라는 소설을 낭독하는 시간을 가졌다. 2009년 진행된 청소년 프로그램 가운데 가장 많은 청소년들이 찾은 날이다. 그 외 조 별로 시나리오(키워드)에 맞춰 상황극을 만들거나 동화를 퀴어 버전으로 각색해보는 프로그램도 있었다. 성소수자 정치인이 되어 공약을 직접 만들어보기도 하였고 간식을 만들어 먹거나 소풍을 함께 가기도 하였다. 아직도 여운이 남는 마지막 프로그램에는 2010년을 맞아 각자 소망하는 내용을 적고 쿠키를 디자인 해 크리스마스트리에 직접 전시하였다.
총 여덟 번의 프로그램이 진행되었다. 프로그램만큼이나 다양한 청소년 성소수자들이 1년 동안 무지개학교 놀토반을 찾아왔다. 참가자는 연인원 100명이 넘는다. 인원이 많았던 만큼 부족한 점도 있었다. 참가한 청소년들과 진지한 대화를 나누지 못하다보니 한번 오고 오지 않는 경우가 많았고 청소년 회원이 늘어나면서 기존의 성인 회원들과 어울리는 자리에서 문화적인 갈등들이 드러나기도 했다. 성인들은 청소년들과 대화하기를 어려워했고 청소년들도 마찬가지였다. 함께 술을 마시는 경우에도 음주, 흡연을 하는 청소년들을 바라보는 시선들이 제각각 달랐다. 가장 아쉬웠던 점은 준비한 프로그램만을 쫓다보니 청소년 성소수자들과 진지하게 토론할 기회를 많이 놓쳤다는 점이다. 청소년 성매매 문제나 기독교계 한나라당 의원이 학교에서 청소년 동성애 상담이 늘어난다고 호들갑떠는 언론기사가 나왔을 때 청소년 성소수자들의 목소리를 담은 시기적절한 반박을 하지 못한 점도 아쉽다.
아쉬운 점은 있었지만 누가 뭐라해도 ‘무지개학교 놀토반’은 매우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처음에는 청소년들과 퀴어영화나 함께 볼까? 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모임이었지만 1년 동안 다양한 프로그램이 시도되면서 청소년 성소수자들이 새로운 친구를 만나고 어울릴 수 있는 통로로 자리 잡게 되었다. 또한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열린 기획회의를 지향하면서 청소년들이 ‘인권활동’의 의미를 자연스럽게 체득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2010년에도 무지개학교 놀토반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2009년처럼 매월 진행되지는 않겠지만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별로 한 번씩 큰 규모로 치러질 예정이다. 준비기간이 짧고, 새롭게 참여한 청소년들과 어울리고 친해질 시간이 부족했다는 평가를 보완하고자 시기를 조정하였다. 그 외 안정된 장소에서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보다 더 많은 배움의 순간들을 공유하기 위해 노력할 계획이다. 2010년 새롭게 시도할 무지개학교 놀토반 시즌2가 어떤 모습을 갖게 될지 모르지만 ‘교과서도 없고, 선생님도 없는’ 진짜 자율학습의 참모습을 청소년 성소수자 스스로 어떻게 만들어나갈지 기대가 된다.
2010년. 청소년 성소수자들의 새로운 도전과 함께
지난 10월, 11월 두 번의 워크숍을 통해 동성애자인권연대 청소년 회원들은 2010년 활동계획에 대해 논의했다. 2009년을 시작할 때만해도 1명에 불과했던 청소년 회원이 10명 이상 늘어난 성과를 바탕으로 좀 더 짜임새있고 계획적인 활동들이 제안되었다. 우선 무지개학교 놀토반을 계절별로 개최하고 5월에 진행한 청소년 성소수자 인권증진 캠페인을 2010년에도 계속 진행하자고 결정했다.
성정체성을 깨닫기 전 후의 모든 경험(학교, 가족, 친구, 사랑 등)들을 기록해보자는 인터뷰 프로젝트도 제안되었다. 청소년 성소수자들과 연관된 국내자료는 매우 부족하다. 특히 청소년 성소수자들이 청소년 성소수자들을 인터뷰한 내용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터뷰라는 형식이 비록 구태의연해 보일지 몰라도 청소년 성소수자 운동을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청소년 성소수자들의 삶의 현실을 직접 듣고 무엇이 문제인지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 목표는 50명. 2010년에 완성이 안 되더라도 청소년 성소수자들의 경험을 그대로 투영시킨 이 자료는 큰 힘이 되어 돌아올 거라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교사들을 만나기 위한 활동도 해보자는 의견도 있었다. 1년에 한번 열리는 전국교사대회에 직접 참가해 학교에서 경험하는 청소년 성소수자들의 차별을 이야기하기로 했고 성소수자 교사들이 청소년자긍심팀에 함께 할 수 있도록 대대적인 모집활동도 펼쳐보자는 의견도 있었다. 교사들을 대상으로 청소년 성소수자와 관련된 교육이 진행될 수 있도록 교육내용을 준비해보고 직접 교육을 나가보기로 했다.
무지개학교 놀토반이나 거리캠페인을 1년, 2년 한다고 청소년 성소수자들의 삶이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지금 청소년 자긍심팀 활동을 함께 하는 청소년들이 성인이 된 뒤에도 별 다른 변화 없이 그대로일지 모른다. 이중의 억압에 놓여있는 상황이다 보니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또래친구 관계에서도 심지어 성소수자 커뮤니티 내에서도 외면 받을지 모른다. 청소년 활동은 긴 안목과 깊은 숨고르기가 필요하다. 100미터 달리기가 아니라 마라톤에 가깝다. 2009년 한해, 기초를 다기지 위한 주춧돌을 준비한 시기였다면, 2010년부터는 그 위에 우리들의 큰 꿈과 희망을 정성스레 쌓아가야 한다. 2010년 청소년 회원들의 열정적인 활동과 동인련 성인 회원들, 그리고 성소수자 커뮤니티의 끝없는 지지가 있기를 바란다.
정욜_ 동성애자인권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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