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의 말 2024년 한 해 동안 '상임활동가의 사정' 연재를 시작합니다. 행성인 네 명의 상임활동가들은 종횡무진하며 단체 안팎에서 활동을 하는데요, 한 달 동안 어떤 활동을 해왔는지, 무엇을 보고 어떤 것들을 고민하고 있는지 함께 만나봅시다. |
지오
2월 1일부터 3일까지 체제전환운동 포럼이 열렸습니다. 행성인도 공동주최로 참여했는데요. 저는 체제전환 운동에 초기 논의부터 함께 하며 포럼을 같이 준비했습니다.
체제전환 운동은 작년부터 논의가 이어져 왔습니다. 현 시대에 답답함을 느끼는 활동가들이 모여 문제를 짚는 것에서부터 시작했어요. 모인 이들은 제각기 다른 영역에서 활동해왔지만 서로 비슷한 문제의식들을 공유했어요. 저 역시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을 하면서 인권마저 시장논리에 갇혀버리는 상황이라던가 양당 정치의 벽, 각개전투하는 운동의 현 상황에 답답함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다양한 문제의식들은 자본을 지목했습니다. 현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서는 전망을 밝혀야 한다는 데 이견은 없었어요. 그런데 그 전망은 어디에 있나요.. 사회운동이 대안을 내지 못하고 있다는 반성은 대안을 제시해야한다는 답으로 쉽게 이어지지만, 그래서 어떤 대안인가 혹은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물음 앞에는 잦은 한숨과 깊은 침묵에 압도당하고는 했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이 모여 작당을 시작하니 뭐라도 만들어지긴 하더라고요. 비슷한 문제의식을 보다 넓게 나누며 새로운 동료들을 만나기 위해 포럼을 개최하여 연인원 700여명이 참여하는 행사로 성황리에 잘 마쳤고, 지금은 체제전환운동 정치대회를 한참 준비 중에 있습니다. 정치대회는 체제전환의 방향으로 사회운동이 새로운 연합질서를 구축하기 위한 준비를 결의하는 자리가 될 거예요.
체제전환이 뭐냐고 물으면 여전히 막연합니다. 활동가들도 저마다 생각이 다를 거에요. 저는 체제전환이 곧 사회주의를 향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자본이 초래한 위기 앞에 있는 것은 맞지만 그래서 곧 사회주의라거나 자본주의 타도라기엔 망설여져요. 저는 다른 상상이 들어서야할 때라고 믿습니다. 앞서 싸운 이들이 이미 이름붙인 무엇일 수도 있고, 전혀 새로운 무엇일 수도 있지만 지금으로선 알 수없는 어떤 것이리라 생각해요. 지금 여기서 같이 싸우는 주체들이 만들어낼 무엇이겠지요. 그것이 무엇이냐 보다 다르게 살기 위해 함께 시도하고 도전하는 현재에 집중하고 싶어요. 어쩌면 전망은 그런 현재의 축적이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
그 과정에 성소수자들이 빠질 수 없죠. 성소수자 운동이야 말로 체제를 바꿔낼 운동 아니겠어요? 정치대회 이후에 행성인 회원 여러분들께 경과도 공유하고 토론할 시간도 마련하고 싶어요. 저를 만나면 먼저 물어봐주셔도 좋아요.
활동은 상상력이라는 말을 믿어요. 현실은 상상의 틈을 쉬 내어주지 않지만, 그래서 때로는 피곤하고 막연함에 쉽게 조급해지기도 하지만, 알 수 없는 길을 같이 가는 사람들에 기대어 상상해보려 합니다. 여러분의 상상은 어디에 닿아 있는지 궁금해요. 서로 궁금해하면서 알아가면서 함께 가요.
체제전환운동이 궁금하신 분들은 아래 홈페이지 링크를 첨부하니 살펴보셔도 좋겠어요. 포럼 자료집과 다시보기가 제공되고 있으며, 정치대회에 대해서도 자세히 확인할 수 있답니다.
홈페이지: https://gosystemchange.kr
오소리
활동가의 #헌신에 대하여
문득 ‘희생’의 사전적 정의가 궁금해져 찾아보았다. ‘다른 사람이나 어떤 목적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 재산, 명예, 이익 따위를 바치거나 버림. 또는 그것을 빼앗김.’
어렸을 적(혹은 커서도 생각나면 종종) 즐겨하던 게임 ‘창세기전’의 대사가 떠올랐다.
엠블라 : 가식적인 것보단 낫다고 생각하는 데요. 난 남을 돕자는 말에 거부반응을 보이는 이기주의자는 아니지만... 최소한의 이기도 갖지 않은 채 무모한 행동을 하는 자들은 좋아하지 않아요.
살라딘 : ...희생 말인가.
엠블라 : 그게 얼마나 무의미한 건지 잘 아니까요... 자신의 모든 걸 버려 보답 받지 못 할 일을 하다니... 게다가 만약 당신이 죽기라도 했다면 아마도 난 원치 않는 죄책감이란 덤까지 뒤집어 써야 했겠죠.
살라딘 : 닮았지만... 정말 다르군... 그래, 다른 사람의 목숨으로 살아남은 자는 평생 죄책감이란 고통에 시달리지. 어차피 당신을 구했을 때 인정 받길 바란 건 아니었소. 내가 구하고 싶었던 건 당신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희생의 숭고한 의미를 함부로 평가절하하지 마시오.
게임 속 대사이다 보니 죽음으로서의 희생을 다루지만, 죽음보다는 조금 더 가벼운 의미의 희생은 우리 일상에도 흔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국가의 번영을 위해, 가족의 생계를 위해, 직장의 번창을 위해, 그리고 단체의 발전을 위해.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는 때로 이를 헌신이라 부르기도 한다. 어떤 것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있는 힘을 다한다는 점에서는 희생이나 헌신이나 같다고 할 수 있겠다.
게임 속에서 엠블라는 희생이 어떠한 이기도 없는 행동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희생에는 그 대상이 잘되길 바란다는 오로지 하나의 이기가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희생 혹은 헌신은 숭고하다고 생각한다. 다른 대가를 바라지 않고 오롯이 무언가를 위해서만 자신의 어떤 것을 내어준다는 것은, 그 무언가에 대한 철저한 사랑 없이는 불가능하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순수한 사랑은 그 자체로 숭고하다.
활동가들은 박봉 혹은 아예 무급이더라도 자신이 몸 담은 단체가 잘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단체에 헌신한다. 때로 누군가는 활동가들에게 헌신만을 바라지 말라고 한다. 적절한 노동의 대가가 뒤따라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동의하는 바이다. 하지만 적절한 헌신 역시 필요하다. 단체에 대한 사랑 없이 활동을 지속할 수 있을까. 그것이 애증일지라도.
하지만 때로 사랑이 지독하면 중독이 된다. 단체의 완벽을 추구하게 되고 강박적인 생각에 사로잡힌다. 개인적인 삶을 소홀히 하게 되고 자신을 단체와 동일시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단체에 대한 비판을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이게 되고, 상처 입게 된다. 활동가들은 사랑과 중독 사이에서 끊임없이 줄타기를 하며 흔들린다. 단체와 함께한 세월이 오래될 수록 더욱 그렇다.
2018년, 행성인이 비상체제로 전환할 즈음, 행성인은 수많은 비판에 맞닥뜨렸다. 잘한 점은 봐주지 않고 못한 점만 비추는 것 같아 서운하고 속상했다. 행성인의 잘못은 컸지만 오해에서 비롯된 비판도 있었다. 쌓여가는 오해가 억울하기만 했다. 내가 단체에 헌신해왔던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것 같았다. 단체에 대한 헌신이 클수록, 단체에 대한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단체를 향한 비판들을 마주하며 나를 향한 비판인 듯 받아들이며 괴로워했다. 마치 모두가 내게 손가락질하는 것 같았다. 상처는 깊어져만 갔다.
마음은 힘들었지만, 외부 활동을 멈추니 생각할 시간이 많아졌다. 조직문화점검을 해 나가며 단체에 켜켜이 쌓여 있던 문제들을 직면하고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갔다. 성과와 조직 확장에 급급했던 지난 활동들은 활동가들에게 과중한 역할과 피로를 유발시켰고,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만 집중할 뿐 성찰할 기회는 없었다는 걸 알게 됐다. 행성인은 그렇게 점검하고 성찰하며 비상체제를 종료하고 2019년 활동을 재개했다.
나는 지금에 와서도 때로는 단체에 대한 비판이 있을 때 고스란히 받아들이기 어렵고, 알아주지 않는 것 같아 서운할 때가 있기도 하다. 개인적인 성격상 여전히 완벽을 추구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제는 알게 됐다. 사람들이 단체에 바라는 건 쇄신된 단체의 모습일 뿐, 나의 헌신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는 것을. 계획은 계획일 뿐 무엇이든 완벽할 순 없고, 겉으로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는 것을. 그래서 그저 내가 맡은 역할을 꾸준히 수행해 나가며 행동으로 보여주고 바로잡으면 된다는 것을. (물론, 그를 위해 부단히도 노력했다는 전제 하에. 노력도 하지 않고 ‘계획은 계획일 뿐’ 이라고 말하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
나는 여전히 사랑과 중독 사이에서 아슬아슬 줄타기를 하고 있다. 단체에 애정을 가지고 헌신하는 한 편, 때로는 상처받기도 한다. 어느 순간에는 모든 게 지긋지긋하기도 하다. 그럼에도 단체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계속 나아갈 뿐이다. 헌신은 결코 헛되지 않으니까.
웅
알 사람들은 다 알지만 나에겐 활동가 외에 미술과 시각문화를 비평하는 평론가 직함이 하나 더 있다. 운영위원장 임기가 끝난 이후에는 운동판보다는 미술계의 무대나 공적인 자리에 초대받는 일이 곧잘 있다. 그렇다 해도 부캐인 미술평론가로 호출되어 지면이나 자리가 주어져 동향을 조망하거나 현실을 진단하게 될 때면 어김없이 활동가 끼가 발동한다. (이걸 끼라고 표현하는게 맞는지 모르겠다)
지난해 12월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이연숙(리타) 평론가의 초대로 이진실 평론가와 함께 <2023년 한국 현대미술비평 집담회 1부: 송년회: 올해 우리가 본 것들>에 참여했다. 한 해동안 미술계에 인상적인 이슈들을 이야기해보자는 것이었는데, 내가 처음 꺼낸 화두는 장애 예술에 대한 사안이었다. 윤석열과 김건희의 장애예술사랑은 익히 들어왔다. 말이 말인지라 최근 장애 예술에 대한 법안과 지원책이 쏟아졌다.(대담을 하면서 예시를 들었다) 하지만 여러분은 이러한 소식보다는 장애예산 확보와 이동권투쟁을 위해 장소를 불사하고 찾아가 점거하고 목소리 높이는 장애인들을 좀 더 선명하게 기억할 것이다.
장애인 예술가들을 모아 전시한 자리에 대통령 내외와 지자체 시장들이 사람 좋은 웃음을 띄는 모습과 경찰과 공무원이 비아냥거리며 공권력을 휘두르는 장애인의 투쟁현장은 쉽게 대치하기 쉽지만, 사실 장애 예술에 대한 법안과 지원책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장애인에 대한 미술지원 또는 국공립 미술관의 의무적인 작품구입과 전시라는 구색맞추기에 그치며 ‘장애’ 예술이라는 프레임을 벗어나지 않는다.
상황은 많이 다를지 몰라도 장애예술에 대한 지원소식에 ‘장애’ 대신 ‘이주’나 ‘퀴어’를 가져다 붙여도 어색하게 읽히지는 않을 것이다. 인권이 규범적인 다양성 담론으로 수렴할 때, 초점은 권리를 요구하는 당사자가 아니라 ‘지원’하는 주체의 선의에 맞춰지고 당사자는 시혜와 혐오의 대상으로, 그러니까 '소수자'라는 정체성에 갇히기 쉽다.
어떤 성원권을 가질 것인가의 질문은, 사회가 상정한 시민의 기준은 무엇이며 기준을 만드는 사회의 제도와 인프라, 패러다임을 어떻게 바꿔나갈 것인가(...체제전환!)의 질문을 배제할 수 없다. 누구도 배제할 수 없다는 문장은, 누구도 변화의 주체가 아닐 이유는 없다는 뜻을 품는다.
조금 화제를 돌려서, 성소수자인권포럼의 HIV/AIDS 세션에서는 '감염인이 섹스할 때 상대에게 감염사실을 알려야 하는가' 묻는 다소 민감한 화두를 던졌다. 기획하면서 이 이야기는 당장 논리가 있어도 금방 동의를 구할 수는 없을 것이니 토론보다는 토크쇼로 무게를 덜어보자고 중지를 모았다. 기억에 남는 건 세션이 끝나고 나서였다. 친구 따라 애인 따라 세션에 참여한 이들이 앞에서는 잘 들었다고 격려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같이 온 동료에게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꺼내더라는 것이다. 너무 당연하다. 민감한 논의인 만큼 열어놓고 편하게 얘기하자고 했지만, 어쨋든 여기는 활동가 세상 ‘인권포럼’이고, 익숙하지 않은 자리와 주제에서 쉽게 입을 떼기는 어려웠을 테니까. 시쳇말로 ‘운동 방언’이라고 부르는 경직된 문법을 풀어내야 한다는 숙제를 안은 자리였다. 그럼에도 일요일 아침부터 와서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들었던 건 어떤 마음이었을지 헤아려보게 된다. 같이 답을 찾으면 좋겠다.
감상을 나누면서 몇몇 동료들은 ‘다 알던 얘기던데?’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새로울 것 없이 반복하는 이야기가 다른 편에서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현실. 여기서도 운동의 언어는 미끄러진다. 익히 들어 고루하거나, 여전히 낯설고 거북하거나. 설령 그것이 한순간 생겨난 대항담론이 아니며 지속적으로 현장에 귀기울이고 공부하고 토론하며 얻어낸 노고가 있음을 알지만, 나로서 동료들에게 할 수 있는 얘기란, 이미 다 안다고 믿고 있을지라도 상대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들려주는 것이 오늘의 숙제입니다 '변화의 주체' 여러분…일단 나부터 경각심을 갖기로 한다.
호림
작년 12월부터 해외 출장이 이어지고 있다. 12월에는 방콕으로 아시아 12개 나라의 혼인평등 활동가들과 함께하는 아시아 혼인평등 전략회의에 다녀왔고, 2월에는 싱가포르로 미국 기반의 국제성소수자단체인 아웃라이트OutRight의 구성원들과 아시아 지역 파트너들이 각국의 성소수자 운동 현황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아웃라이트 아시아 포럼에 다녀왔다. 3월에는 모두의결혼 동료들과 함께 일본의 혼인평등소송 선고를 견학하러 도쿄에 다녀올 예정이다. 무지개행동 집행위원으로 대만, 일본의 성소수자 활동가들과 함께하는 ‘동아시아 평등과 반차별 동맹’ 프로젝트의 담당자를 맡기도 해서 당분간 해외 출장이 잦을 것 같다.
다른 나라의 성소수자 활동가들을 만나는 일은 언제나 한국의 정치와 사회, 문화, 그리고 그 안에서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새로운 시각으로 돌아보게 한다. 특히 아시아 지역의 각국 활동가들을 만났을 때 더욱 그렇다. 넓은 관점에서 보면 아시아(아시아는 아주 넓은 땅이고 내가 보통 만나게 되는 이들의 나라는 동서로는 일본에서 인도까지, 남북으로는 인도네시아에서 몽골까지 정도다.)가 공유하는 사회문화적 유사점이 있지만, 지역 내부를 들여다 보면 각 나라의 정치, 경제, 문화적 맥락은 너무나 다양하며 각자 서로 다른 종류와 정도의 어려움을 마주하고 있다. 성소수자 의제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높지만 국가의 정치경제적 상황이 불안정해 변화를 모색하기 어려운 나라가 있는가 하면, 한국처럼 안정적인 민주주의가 정착했음에도 보수 기독교의 정치적 영향력이나 성소수자의 낮은 사회적 가시성으로 인해 실질적인 권리 진전의 어려움을 겪는 나라도 있다. 한국이라는 나라의 조건과 상황만을 생각할 때에는 무의식적으로 서구 국가들의 상황과 우리의 상황을 비교하며 비관하게 되는 순간이 종종 있다. 하지만 아시아 각국의 활동가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경험은 우리가 마주한 어려움과 가능성 모두를 좀더 구체적으로 바라보며 가능한 변화의 경로에 대해서도 좀더 객관적으로 그려 보게 된다.
특히 권위주의적 정치 체제 하에서도 끊임없이 돌파구를 모색하며 새로운 방안을 시도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활동가들의 노력과 커뮤니티의 창의성과 회복탄력성에 깊은 감명을 받는다. 집회와 시위의 자유가 제한 된 현실에서 ‘행진은 걷는 것이니 함께 자전거를 타는 것은 시위가 아니지 않냐’며 자전거를 타는 행진을 했다는 베트남의 이야기, 동성애 처벌법 폐지에 뒤따른 헌법 개정으로 ‘혼인은 남녀 간의 결합’으로 명시되고, 혼인제도를 바꾸기 위한 사법적 시도와 운동이 심각하게 제한된 상황에서도 혼인평등 운동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싱가포르의 이야기… 각자 마주한 어려움을 그저 어려움으로 남겨두거나 핑계삼지 않으며 분투하는 모습들을 보며, 나도 우리가 마주한 어려움을 새로운 감각으로 마주할 힘을 얻는다.
이번에는 오랜만에 만난 중국 활동가에게 “질투가 난다”는 말을 들어 마음이 복잡하기도 했다. 불과 7-8년 전, 중국의 성소수자 운동이 급격히 가시화 되던 시기에 중국 활동가들에게 보였던 희망적 에너지는 폭압적인 정부의 탄압 이후 찾기 어려워졌다. 단체들이 문을 닫고, 많은 이들이 다른 나라로 떠나거나 숨어든 상황. 그 시간을 겪어내고 있는 사람의 “질투가 난다”는 선명한 말 앞에 되돌려 줄 말을 찾지 못했다. 그럼에도 자신의 삶의 터전 위에서 변화의 가능성을 믿으며 살아가고 있는 이들을 떠올리며, 부디 우리가 너무 늦지 않은 미래에 함께 지역적 변화를 추동할 힘을 가질 수 있길 바라는 마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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