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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V AIDS

[HIV/AIDS 인권 주간 특집] 편지- 우리 함께, 각자의 자리에서, 앞을 향해

by 행성인 2024. 11. 24.

코코넛 (행성인 HIV/AIDS인권팀)

 

 

 

사랑하는 친구에게,

 

잘 지내고 있나요? 날짜로만 치면 한가을인데 왜 이렇게 덥냐면서 반팔을 입고 다닐 때가 어제 같은데, 몇 주 만에 날씨가 급격히 변해서 이제는 다들 긴팔에 패딩까지 꺼내 입고 있어요. 저는 늦가을 감기를 호되게 맛보는 중인데, 부디 당신은 건강 잘 챙기기 바랍니다.

 

아직 12월도 되지 않았는데 한 해를 되돌아본다고 하기도 뭣하지만, 아무튼 제가 느낀 2024년은 쉽지만은 않은 한 해였어요. 개인적으로도 그랬지만, 그건 뭐 나중에 따로 만나 이야기하기로 하죠. 제가 1년 중 상당히 많은 시간을, 어쩌면 생계를 위해 일하는 시간을 제외하면 가장 많은 시간을 쏟은 성소수자 인권운동의 측면에서 봐도 그럴지 몰라요. 동성혼 관계인 부부의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 인정에 대한 판결이 대법원에서 나기도 했고, 10월에는 대규모의 혼인평등소송이 시작되어 혼인평등 운동은 점점 가속도를 올리고 있는 것 같지만, 혼인평등 운동 말고도 제가 정말 신경을 많이 쓴 HIV/AIDS 감염인 인권운동의 면에서는, 글쎄요, 즐거운 한 해였다고 말할 수 있을까 모르겠어요. 우리 모두에게 좋은 일만 있던 한 해는 아니었잖아요.

 

일단 국가인권위원장에 안창호라는, 정말 혐오와 차별로 똘똘 뭉쳐서 인권과는 지구와 달 사이보다도 거리가 먼 사람이 취임하게 되었죠. 그자가 취임 전 청문회에서 했던 수많은 명언들은 절대 잊지 못할 거예요. 그는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공산주의 혁명으로 이어질 수 있으며, 에이즈와 같은 질병의 확산을 불러온다고 말했죠. 설마 그자가 정말로 인권위원장으로 취임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사람은 없겠지만, 그의 취임 소식이 뉴스에 보도되었을 때의 감정을 아직도 잊지 못해요. 성소수자와 HIV 감염인들의 인권을 위해 가장 힘써야 할 기관의 수장에 혐오자가 들어왔다는 소식은 우리 모두에게 힘든 시간을 예고했어요. HIV/AIDS 인권운동도 마찬가지에요. 그가 감염인들의 인권에 신경쓰지 않으리라는 것은 모두가 알 수 있어요. 오히려 성소수자와 감염인들을 검열하고, 혐오하고, 그들을 위한 결정을 내리지 않겠죠. 그가 인권위원장에 취임했을 때의 참담했던 심정을 기억하며, 이렇게 힘들 때일수록 서로 잘 버티면서 이겨낼 수 있으면 좋겠어요. 물론 너무 어려운 시간이겠지만.

 

한편 작년 11(벌써 1년 전이네요)에는 재미있는 책이 나왔어요. 서보경 교수의 『휘말린 날들』이라는 책이죠. 이 책이 나오고 나서 휘말렸다는 단어를 진짜 백만 번은 들은 것 같아요. HIV/AIDS 감염과 커뮤니티 운동의 역사를 되짚어보며, 감염인들이 수동적으로 감염된 사람들이라는 관점에 의문을 제기하고 제도권과 사회, 그리고 초국적 제약회사들이 감염인들을 대상으로 어떤 태도를 보였는지 논의하는 책이에요. 서보경 교수는 이 책이 나오고 나서 여러 행사에서 북토크를 했고, 제가 활동하는 행성인도 방문한 적이 있죠. 올해 초에 제가 이 책에 대한 서평 겸 감상을 행성인 웹진에 썼는데 혹시 읽어보셨나요? 아무튼, 휘말린 날들이라는 책을 올해 초에 접하게 되면서 행성인 활동을 하는 데 필요한 지식도 얻을 수 있었고, 감염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접해서 좋았어요.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을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올해 활동을 하면서 여기저기서 이 책에 대한 이야기나, '휘말리다'라는 단어를 듣게 되어 신기했네요.

 

한편 올해 3월에는 질병관리청에서 제 2차 후천성면역결핍증 예방관리대책을 발표했어요. 프렙 처방 대상을 원하는 사람으로 확대한 것은 긍정적인 변화 같아요. 그런데 실질적으로 이것이 잘 이루어지고 있는지 모니터링하는 것은 분명 필요한 일이죠. 또한 프렙 처방 가능 대상을 확대했다고 해도, 결국 아직까지 존재하는 전파매개행위죄 등과 같은 사회적, 구조적 낙인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HIV/AIDS 인권활동가 네트워크의 성명문처럼, 감염인의 인권 증진이 예방의 지름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해요. 앞으로 정부와 제도권 사회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 계속 지켜보고 대응을 이어가야 할 것 같아요.

 

인권위원장이니 질병관리청이니, 너무 무거운 얘기만 한 것 같은데, 조금 가벼운 이야기로 넘어가 볼까요? 〈대도시의 사랑법을 보셨나요? 소설을 원작으로 해서 서로 다른 제작사에서 각자 드라마와 영화를 제작하여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공개했는데, 저는 원작 소설과 영화, 드라마 모두 정말 재미있게 봤어요. 특히 드라마에서 주인공을 연기한 배우 남윤수에게 홀딱 반해서 초반에는 드라마 내용에 집중이 안 될 정도였어요. 제가 〈대도시의 사랑법〉 얘기를 왜 꺼냈냐면, 이렇게 게이들의 삶을 비교적 솔직하게 그려낸 매체가 많은 관심을 받는 것도 정말 좋은 일이지만, 원작 소설과 드라마에 나온 한 가지 장면 때문이에요. 지금부터는 '대도시의 사랑법'에 대한 스포일러가 등장하기 때문에, 스포일러를 원하지 않는다면 이 문단을 읽지 않기 바랍니다. 소설과 드라마에서 주인공 '' HIV 감염인으로 묘사됩니다. 영이 20대 초반에 감염 사실을 알고 나서 친구들을 만났을 때, 친구들이 감염인에 대해 보이는 혐오적인 언행을 보고 친구들에게 감염 사실을 감추기로 하는 장면이 나와요. 그러고 나서 영은 그 친구들과 함께 몇 년동안 계속 가까운 친구로 지내죠. 저는 소설과 드라마를 감상했을 때 이게 제일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이었어요. 감염 여부를 떠나서, 저는 이렇게 특정 집단에 대해 혐오적인 언행을 보이는 사람들과는 친한 친구로 지낼 수 없을 것 같거든요. 물론 이 대목을 넣은 박상영 작가의 의도가 있겠죠? 뭐 아무튼, 성소수자의 삶이나, 심지어 HIV/AIDS마저도 이렇게 많은 관심을 받는 매체에 올라가서 OTT 순위 상위권에 오를 수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겠죠? 앞으로 더 많은 우리의 이야기가 주요 매체에 올라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가장 할 말이 많은 이야기를 마지막에 남겨 놓았어요. 매년 빠지지 않고 찾아오는 주제이죠. 초국적 제약회사 이야기에요. 올해 그 어떤 활동을 하고 어떤 단체를 만나고 어떤 이야기를 듣더라도, 제약회사들의 이름은 결코 빠지지 않았어요. 그만큼 제약회사들은 이미 성소수자들의 삶에 깊이 침투하고 있다는 뜻인 것 같네요. 올해 6월에 열린 서울퀴어문화축제가 기억납니다. 축제가 열리기 몇 주 전부터 핑크워싱을 일삼는 초국적 제약회사들과 미국, 영국, 독일의 대사관에 대하여 여러 활동가들이 갑론을박을 펼쳤어요. 저는 행성인의 HIV/AIDS 인권팀의 일원으로, 우리 팀이 이에 대해 어떠한 규탄 행위라도 펼쳐야 한다는 주장을 강하게 피력했죠. 이런 주제에 대해 솔직히 말할 수 있는 단체가 몇 되지 않는데, 그 중 하나가 행성인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결국 축제를 며칠 남겨 놓지 않고 급하게 대사관들과 제약회사들에 대항한 규탄 행위가 조직되어 꽤 많은 단체의 활동가들과 함께 축제 현장에서 규탄 행위를 이어가고, 핑크워싱을 규탄하는 현수막을 들고 행진할 수 있었어요. 이 행위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와 닿았는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할 일을 했다는 느낌은 있었네요. 축제 현장에 설치된 화장실에 대문짝만하게 박힌 제약회사의 이름을 보고 느꼈던 막막함이 아직도 잊히지 않습니다. 퀴퍼 당일의 제 감상과 경험에 대해서도 제가 올해 웹진에 기고한 글이 있으니, 시간이 된다면 읽어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제 성소수자 인권활동을 한다면 제약회사가 후원하는 단체, 제약회사가 펼치는 활동은 마주쳐야만 하는 무언가가 되었어요. 제약회사가 후원을 받는 단체라고 해서 잘못하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제약회사의 핑크워싱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겠지요. 제가 앞으로도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길, 그런 목소리를 내는 활동을 하는 사람이 될 수 있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렇기에 제가 행성인의 HIV/AIDS 인권팀에 계속 머물러 있겠죠.

 

가벼운 얘기도, 무거운 얘기도 하면서 한 해를 돌아보니까, 정말 이런저런 일이 많던 쉽지 않던 한 해였다는 게 새삼 느껴지네요. 앞으로도 HIV/AIDS 인권운동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쉽지 않은 때일수록 더더욱 우리 함께, 각자의 자리에서, 앞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나날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올 한 해 제 옆에 있어 주어서 고마워요. 우리 앞에 펼쳐질 시간들에도 계속 함께 투쟁할 수 있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2024 11월의 추운 밤에, 코코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