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근(‘버스를 타라’ 감독)
물포가 쏟아지는 밤이었다. 경찰은 무차별로 최루액을 뿌려대고 희망버스 승객들은 억수같은 비를 맞으면서 차벽을 넘을 모래주머니를 부지런히도 쌓았었다. 그 괴로운 장면 저 멀리 무지개 깃발이 보였다. 깃발은 경찰의 조명을 받으며 꽤나 당당히도 넘실거렸던 것 같다. 결국 긴 시간 쌓은 모래주머니를 디디고 차벽을 넘지 못했지만.
2차 희망버스를 편집하면서 내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장면은 어쩌면 함께하는 사람들의 절실한 얼굴들 그리고 수많은 깃발들이었던 같다. 그 무수한 깃발 중에 유독 궁금한 것이 있었다. 반전집회, 노동자 대회 등 수많은 자리 어디서나 보였던, 이제야 궁금해 하는 것이 미안할 만큼 꽤나 자주 눈에 띈 무지개 한가득한 직사각형. 동인련의 깃발임을 안지는 그로부터 한참 뒤였다.
<버스를 타라>는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투쟁'과 함께한 희망버스 승객들의 '연대'를 다룬 다큐멘터리이다. 한진중공업은 내게 꽤나 아픈 이름이다. 2003년, 나는 부산지역 사회단체에서 상근자로 활동하고 있었다. 아는 선배가 당시 한진중공업 지회장이던 김주익 열사의 고공농성을 촬영해 온라인에 퍼트리면 어떻겠냐고 주문했었다. 사안도 잘 모르거니와 게으른 탓에 어영부영 촬영을 미뤘었다. 그리고 일주일 후, 김주익 열사는 85호 크레인에서 목을 매었고 곽재규 열사가 크레인 아래 도크바닥으로 뛰어내렸다. 죄책감이 밀려왔다. 어쩌면 그 외로운 투쟁에 조금이나마 힘이 되는 방법이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2010년 한진중공업 사측은 다시금 정리해고안을 발표한다. 똑같은 잘못을 두 번 반복하지 않기 위해 나는 그리고 함께하는 부산 지역 미디어활동가들은 한진중공업으로 카메라를 돌렸다.
우리는 김진숙 지도위원의 309일 고공농성을 가슴 졸이며 지켜보았고 행정대집행 이후 길바닥에 쫓겨난 노동자와 함께 먹고 잤다. 노동자들이 끈질기게 싸우는 모습과 희망버스 승객들의 목소리를 잘 전달하기 위해 한진중공업의 생활과 희망버스 행사를 정리하는 영상을 만들어 온라인에 올렸다. 부산서 한진중공업의 투쟁을 중심으로 촬영하던 우리는 전국 각지에서 오는 승객들에 대한 궁금함이 많았다. 도대체 누구기에 이 먼 길을 이토록 뜨겁게(?) 연대하기 위해 내려오는가. 희망버스는 한진중공업 행님들 못지않게 지역에서 활동하는 미디어 활동가들에게도 매번 기대되는 행사였다.
마침내 반짝이던 승객들의 얼굴을 마주했을 때 우리는 노동자, 시민단체, 정당 등 조직된 사람들 이외에도 꽤나 많은 사람들이 희망버스에 올랐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소위 일반시민들 그리고 장애인, 외국인 노동자 더불어 성소수자까지 다양한 빛깔이 희망버스에는 공존했다. 그리고 어우러졌다. 한진중공업 행님들이 무지개 깃발과 휠체어, 다소 어눌한 한국말의 연대를 기꺼워하고 인식하게 된 것도 그즈음이라 생각된다. 작은 변화들이 희망버스를 함께 겪으며 여기저기 움트는 듯 보였다. <버스를 타라>에서 그 다양한 빛깔의 어우러짐을 조금이라도 담으려 노력했었다. 동인련 활동가 장병권 사무국장과의 인터뷰는 그런 까닭에서 출발했다.
"…이후에도 그런 버스가 생겨난다면, 그리고 성소수자들이 그런(희망) 버스를 만든다면 많은 사람들이 탔으면 좋겠어요."
<버스를 타라>에서 장병권 사무국장과 한 마지막 인터뷰 내용이다. 무지개 깃발의 정체(?)를 안 뒤에 내게 그들은 존재만으로도 든든한 희망버스의 힘이었다. 화면에 다 담지는 못했지만 곁에서 봤을 때 그들은 투쟁과 선전을 누구보다 열심히 준비했고 제대로 노는 모습을 보였다. 때론 눈물겨워하고 때론 광란을 즐기며 희망버스를 축제로 만들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축제 안에서 그들은 또 다른 투쟁을 하고 있던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희망버스의 다양한 빛깔로만 존재하는 구색 맞추기가 아니라 여기 다른 사람이 있다고 말하는 투쟁. 내게 희망버스가 특별했던 이유 중 하나도 바로 거기에 있었다.
그런 희망버스와 한진중공업 행님들의 투쟁으로 결국 2011년 11월 10일, 작은 승리를 이뤘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과제가 남았다. 한진중공업은 700명 노조원 중에 400명 가까이 사측이 만든 새노조에 가입했고 복직대상자 90여명은 생계비 지원문제로 여전히 사측과 싸우고 있다. 또한 2012년 11월 10일 오더라도 복직을 할 수 없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린다. 그러나 그들은 끝까지 싸울 것이다. 희망버스가 퍼트리고 간 그 끈질긴 힘을 가지고.
답은 정해졌다. 여전히 투쟁하는 사업장에 이주노동자에게 억압받는 장애인에게 그리고 성소수자에게 우리는 버스를 타고 가야한다. 200여대의 버스가 아니어도 좋다. 작은 봉고 1대 라도 좋다. '버스를 타라.'
그래서 나는, '이후에 그런 버스가 생겨난다면, 그리고 성소수자들이 희망버스를 만든다면' 너무나도 기꺼이 버스에 올라야겠다.
다큐멘터리<버스를 타라>
제 작 : plogtv / 제작연도 : 2011.11 / 장 르 : 다큐 | 한국 / HDV 상영시간 : 70분 - 2012 인디다큐페스티발 '올해의 다큐멘터리상' 수상 - 2012 서울인권영화제 개막작
연 출 : 김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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