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차하는 관점과 질문들이 드러내는 진정성- 글쓰기공모전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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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글쓰기 공모전은 미술전시와 함께 한 축을 이루는 행사이다. 하지만 프로젝트 날짜에 맞춰 실무를 진행하는 데 있어 글쓰기 선정작들에 대한 비평에 대한 시간을 계산에 두지 못했다. 전시파티의 프로그램으로 토킹보드를 통해 작품들의 시의성과 의미를 이야기해보려고 했지만, 저녁 파티 홍보에 집중되다 보니 그마저 부득이하게 취소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텍스트가 실린 도록이 나왔지만 글들은 제 의미들을 짚어내지 못한 채로, 소화되지 못한 채로 남겨져야만 했다. 하기에 글쓰기공모전은 필히 짚고 넘어가야 했다. 시간과 지면의 관계상 선정된 텍스트들을 심도 있게 다루기보다는, 아쉽게나마 행사의 의미와 평가를 거칠게라도 벼려보고자 한다.
이분법 너머를 지향했던 취지
글쓰기공모전은 커뮤니티 내부의 HIV/AIDS이슈를 부각시킴으로써 질병당사자들의 이야기를 언어로 만들어보자는 취지를 갖는다. 기존에 수기에 그쳤던 이야기들을 좀 더 오픈된 공간으로 열어놓자는 것이다. 하지만 소수자 언어를 가시화한다는 취지는 단순히 이해할 경우 일방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 단지 감염여부만으로 당사자와 비당사자를 나누고 한쪽이 다른 한쪽에게 이야기를 강요하는 형식을 반복할 가능성이 짙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배제된 존재’ 로 부르는 것, 일방적으로 자기고백을 강요함으로써 ‘듣기의 윤리’ 를 운운하는 것은 기만적인 자의식, 다시 말해 폭력적인 ‘미덕’ 에 지나지 않는다. 감염인과 비감염인이라는 이분법 위에 ‘친절한 지배자’ 의 위선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전시팀은 단순히 감염인과 비감염인을 나눠 한 쪽에 집중하는 것 보다는, 되도록 이슈를 중심으로 산재된 다양한 관점의 이야기들을 모아보고자 했다. 서사의 스펙트럼을 넓혀보자는 것이다.
다수결 심사: 읽기의 과정으로서 심사, 인권팀을 비추는 텍스트
탈-이분법적 프레임은 심사를 주관하는 인권팀에게도 해당된다. 심사위원의 역할을 자임하기는 했지만 팀원들이 전문 심사위원은 아닐 터, 자못 전문성을 결여하고 있는 이벤트의 성격은 ‘문학상’ 이나 ‘백일장’ 보다는 ‘글쓰기공모전’ 이라는 이름이 어울렸다. 어쩌면 팀원들의 심사활동은 평가보다 ‘공감’에 가까웠다고 말하는 게 보다 실제에 가까울 수 있다.
그렇게 진행된 심사과정은 형식적인 평가보다는 ‘공감’ 에 가까웠다. 성소수자로서, HIV/AIDS인권팀원으로서 팀원들은 글을 읽어가며 개별적인 경험과 지각을 투영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심사자들은 평가자임과 동시에 같은 사회를 살아가는 독자로서 질병의 이슈를 대해야 했다. 더불어 삶의 조건들에 공감하는 위치에서 응모된 글들을 대했다. 전문적인 기술을 따지는 자리가 아니었기에 선정의 과정은 자연스레 텍스트들이 얼마만큼 팀원 각자의 공감을 얻어낼 수 있는가가 중요했다.
다만 응모된 작품들 중 열편을 선별해야 했기에 몇 가지 기준은 정해야 했다. 일차적으로 형식상의 문학성을 지닌 텍스트 보다는 시의적절한 글, 덧붙여 텍스트가 질병에 관련된 사회적 배경과 자신의 경험을 언어로 만들어내는 시도들을 평가했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순위를 두지는 않았다. 대신 응모작 중 가장 많은 표를 받은 열편의 작품을 선정하는 것에 합의했다. 물론 시청률이 작품성을 대신하지는 않듯이, 심사에서 선정되었다는 점이 해당 작품들의 문학적 우수성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이는 선정작 자체에 문학성이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렇다고 선정되지 못한 텍스트들이 떨어진다고 할 수도 없다.
하여 선정여부는 다수의 공감정도에 의해 그 희비가 가려졌다. ‘다수의 공감’ 이라는 기준은 심사위원으로서 전문성의 결여를 고백하는 겸손일 수 있지만, 다수제일주의의 측면에서 본다면 무지를 드러낸 팀원들이 선택한 또 다른 무지일 수 있다. 하지만 다수결심사가 현재 인권팀이 갖고 있는 관점의 지표로 삼을 수 있을 거라는 해석도 가능할 것이다. 텍스트 내부에 어떤 소재와 이슈들에 회원들이 관심을 갖는가의 문제는 텍스트 자체에 대한 평가 뿐 아니라 현재 인권팀이 갖는 관심과 지향점들을 보여주는 것이다.
고백적 자의식의 양가적 의미: 폐쇄적인 자아와 고통의 전유
일방적 고백을 지양했던 의도에서 성소수자들에게 열어놓은 응모조건 덕분이었는지, 응모된 이야기들은 복잡하게 얽히는 모습을 보인다. 먼저 감염인의 자기고백, 이는 기존에 존재했던 감염인 수기의 양식 위에 있다. 그런가 하면 HIV/AIDS활동의 근본적인 의미를 묻는, 혹은 질병의 편견을 꼬집는 비평, 에세이 형식의 텍스트들이 있었다.
무엇보다 텍스트상 필자가 감염인인지 비감염인인지 알 수 없는 듯 보이는 글들이 수 편 있었다는 점은 이번 공모전에 두드러진 현상이다. 이는 마치 화자들이 자신을 감염인처럼, 혹은 비감염인처럼 연출된 관점으로 서로를 교차시키는 것처럼 느껴졌는데, 이는 자신의 감염여부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던 이전의 ‘에이즈 수기’ 형식의 글들과는 확연히 드러나는 차이였다.
자기고백체의 텍스트는 질병의 의미가 사회의 위계 안에 점철된 현실의 면면을 보여주면서 자신의 존재를 호소한다. 특히 자기고백은 쉽게 이야기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발화한다는 조건을 전제로 한다. 하여 많은 수기에서 보이는 고백체의 구절들은 대개 의식적인 여과과정을 거치는데, 대개는 소외와 사회의 고립으로부터 생기는 외로움과 분노에서 시작한다. 그렇게 연결되는 고백의 흐름은 자기 고통을 자의식적으로 전유함으로써 마무리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때의 자의식을 폐쇄적인 나르시시즘적 환상으로만 해석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외려 ‘자의식’은 자신의 입지가 금기시된 채 말할 수 있는 권한을 박탈당한 상태에서, 자신의 언어를 만들어낼 수 있는 최소한의 모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자의식은 나 자신을 겨냥하고 있는 사회적 타락의 기호들을 자신의 것으로 치환한다. 이른바 ‘그래, 내가 이 바닥의 쌍년이다. 근데 뭐!’ 식의 전유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전유의 의식 아래 혐오적으로 재현되던 질병이미지는 미적 오브제로 치환된다. HIV/AIDS와 관련하여 죽음을 의미하는 표상, 오염과 타락의 징후를 의미하는 카포시육종은 삶의 표상들을 넘어서고자 하는 ‘날개’의 무늬로 거듭난다.(경태) 하지만 그 역시 혐오의 언어에 대한 미적 이상화는 아닐까? 으레 자아가 혐오적 존재로 호명되고 사회적 소외에 포위될 경우, 그는 예의 혐오적 의미들이 집중하는 자신에게 고착된다. 그렇게 동성애자로서 나는 이성애언어 내부로부터 금기의 대상으로 찍히면서도 동시에 아름다운 ‘꽃’의 존재로 거듭나기도 한다는 것이다.(이세카)
동성애를 성도착의 일종으로 분석해온 역사 속에서 성소수자들은 혐오적으로 재현되거나 금기시되고, 한편에서는 금기의 경계에 접하며 고정된 규범을 벗어나는 새로운 양식에 주목하면서 아름다움의 대상으로 찬미되기도 했다. 사회 속에서 성소수자로 호명된 이들은 ‘소수자’ 로 구성되어온 틀 안에서 자기 인격과 감성을 주조해왔다. 가령 성소수자로 호명되는 과정에서 자아는 자신의 성정체성이 혐오로 채색되어 있음을 의식한다. 하여 그것을 자의식적 수사로 치환하고 지배적인 체제와 금기시되는 정체성 사이의 틈을 아름다움의 기호로, 혹은 이상적인 사랑으로 채워 넣는다. 그런 점에서 언어는 자신을 숨기고자 하는 ‘가면’이 되기도 한다. 자의식의 차원에서 가면으로서 언어는 다분히 차별과 억압의 사회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인 것이다.
관점의 치환과 공감의 가능성
하지만 아름다움의 언어, 가면의 언어로 구성되는 자의식은 단지 ‘생지옥 같은 현실에 믿을 건 오직 나 밖에 없다’ 는 자기 신화로 점철될 수 없다. 나를 통해 발화되는 언어는 단지 나에게로만 향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비틀거리는’ 자아는 언어를 통해 존재하고, 언어를 통해 자기 경계 너머를 노정한다. 나는 나를 말함으로써 존재할 수 있지만, 말에 의해 다른 사람과 연동한다. 즉 언어는 (자)의식을 넘어선다.
언어는 본래의 의미를 변주하며 고통을 아름다움의 언어로 전유할 뿐 아니라, 그 아름다움의 양식을 이야기의 형식으로, 혹은 감각적 기호를 통해 공감한다. 나아가 언어는 나의 입에서 만들어짐에도 온전히 나일 수 없기에 가면으로서 존재한다. 가면으로 연출되는 언어는 감염인 화자에게 비감염인처럼 말할 수 있는 자유를 부여하는가 하면 반대로 감염인이 아님에도 감염인의 입을 빌어 이야기할 수 있게 해준다.
공격의 대상으로 상처를 가진 화자들은 언어를 매개로 경험을 공유한다. 독자들이 병원에서 호명되는 즉시 느끼게 되는 부끄러움을,(Jeff) 피폐한 생활로 연명하는 좌절(유리동물원)의 행간에 새겨진 아픔을 느끼게 되는 것은 여기에 있다. 아픔을 예방하기 위해 몸을 망가뜨리는 독한 의약품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역설(영진)처럼, 언어는 나를 존재하게 만드는 통로임과 동시에 나의 견고한 경계를 부순다. 자기고백 속 화자는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기위해 끊임없이 이야기하지만 그 이야기는 자신의 범주를 벗어나 사람들의 가슴에 닿는다.
더불어 가면으로서 언어는 타인의 언어를 전유하여 이야기할 수 있도록 한다. 감염인은 비감염인이 되거나, 비감염인의 관점을 감염인이 다시금 전유한다. 관점의 교차는 감염인/비감염인의 이분법을 교란시킨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감염인과 비감염인 사이의 구분이 사라진다는 해석상의 비약이 아니다. 혹은 반대로 타인의 언어를 훔쳐 그 리듬과 단어들을 반복함으로써 타인을 ‘흉내’내는 가면의 ‘위선’으로만 해석될 수도 없다. 가면의 언어는 근본적으로 서로를 인용하고 전유하는 지난한 행위로서 둘 사이에 일어나는 전복과 흉내의 다양한 관계가 질병의 위계적 의미를 가로지르며 경합하는 지점을 제공한다.
텍스트 사이 긴장관계
질병의 의미는 무겁게 구성되지만, 언어에 무게를 싣는 정도는 화자의 의도여하에 달려 있다. 화자의 이야기는 언어를 통해 제 힘을 구성하지만 글의 무게는 저마다 다르다. 특히 이번 공모전에는 질병의 낙인을 아름다움으로 채색하거나, 세상의 비극을 공유하는 것으로부터 연대를 찾는 등 저마다 노정하는 다른 지점들을 보여줬다. 아마도 글에 쏟은 감정이나 집중도의 차이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텍스트들은 각각의 문체를 구사하며 서로 간 긴장관계를 유지한다.
가령 감염인의 맥락에 파고들어 불편한 지점을 드러내고자 했던 글쓰기(노랑사, 이세카)는 풋풋한 사랑을 통해 감염인과의 관계가능성을 보여준 팬픽(나비무덤)과는 확연히 다른 무게감을 보인다. 무거운 질병의 맥락 속에서 사회의 위선을 부정적으로 드러내는 것과, 이를 가벼움으로 치환하는 시도들은 서로 반대적인 지향점 속에서 차별의 ‘폭로’ 이후를 기술한다.
한편 ‘주류언어’로부터 매몰될 수 있는 당사자언어에 귀 기울여야 한다는 비평(서리)에서 유지하고 있는 주류/비주류의 이분법은, 비당사자로서 ‘왜 소수자운동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해와)으로 연결된다. 하지만 ‘왜’ 라는 질문은 ‘나’로 동질화된 자아를 내가 ‘아닌’ 타자로부터 분리한 상태에서 관계의 명분을 찾는다는 해석상의 위험이 있다. 여기에는 당사자로서 ‘소수자언어’가 ‘지배언어’로부터 오염되지 않은 채 존재한다는 암시가 있다. 하지만 소수자로 호명되는 것 자체가 주류언어에 편입되고 오염된 것이라면, 그 자체가 지배담론에 여과되고 낙인찍히고 변형된 것이라면, ‘왜 나는 너의 삶과 공유해야 하는가’의 문제는 최종적으로 ‘어떻게’의 문제로 다시 던져져야 할 것이다. 어떻게 나는 당신의 삶에 공감할 수 있을까? 우리는 어떻게 운동의 형식을 만들어야 할 것인가? 말하자면 ‘왜’ 의 대답이 본질적 명분을 나타낸다면 ‘어떻게’의 질문은 현실적인 형식을 구성한다. 정확히 말해 ‘왜’의 문제는 ‘어떻게’를 거쳐 지속적으로 던져져야 한다. 본질적 명분에만 파고들 경우 회의주의에 빠질 것이고, 형식의 문제에 몰두한다면 공허한 외침만 남게 된다.
글쓴이와 독자가 공유하게 될 고민들은 텍스트의 양식 아래 나타난다. 그리고 그 양식 아래 혐오는 아름다움으로, 비감염인은 감염인과 교차한다. 이렇게 의미와 관점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자기고백의 시도들은 지배적인 언어의 세계 속에서 협소하게 몰린 자신의 벽을 허물며 무지를 자각하는 매질이 되고, 아픔의 조건을 되물을 수 있는 소수자언어의 동력이 된다.(서리, 여기서 화자들은 ‘왜’ 뿐 아니라 ‘어떻게’의 문제도 묵인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같은 사회에 살지만 다른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이웃의 글을 읽는 것, 더불어 그 관점을 빌어 글을 쓰는 행위는 논리적 교란을 유도하거나, 논리적인 평가만으로 취득할 수 없는 공감대를 형성한다.
結
다양한 면면들을 보여준 텍스트들을 대하는 자세에 있어 글쓰기공모전은 구멍이 많았던 행사였다. 앞서 이야기했던 구체적인 심사에 무게를 두지 않은 것은 공모전의 빈틈을 완충하기 위한 차선이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행사상의 부족함을 무지와 무의미로 해석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현재성과 경험이 언어로 아로새겨 있는 텍스트에 대한 팀원들 각자의 공감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슈를 통해 현실을 인식하고 활동의 지도를 그리는 것과 화자의 경험과 주관이 반영된 글을 통해 현실을 공감하는 것 사이에는 깊이상의 차이가 있다. 공모전의 엉성함 속에서도 작품들은 화두를 던지며 질병의 위계의 틈 속에서 빛을 발한다. 적어도 HIV/AIDS글쓰기의 드라마틱한 효과를 발견한 점은 이번 공모전의 성과로 평가할 수 있겠다.
웅_ 동성애자인권연대 HIV/AIDS인권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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