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V/AIDS 성소수자 미술전시 Zaps for PL을 평가하며
Zaps for PL 전시작품 中
평가에 앞선 변(辨)
전시가 끝났다. ‘달관의 경지’ 프로젝트는 이로서 공식적인 프로그램을 모두 마쳤고, 전시팀은 잡다한 실무들을 마무리 짓고 있다.
지난주엔 전시평가에 대한 글을 청탁받았다. 기획자에게 평가라니. 기획한 전시를 직접 평가해달라는 부탁은 들어오지 않기를 바랐는데. 이는 ‘소중하게 다뤄온 전시를 어떻게 평가해!’ 라는 원망이 아니다. 오히려 준비과정 전반을 봐온 까닭에 어디부터 어디까지 평가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에 가깝다. 함께 준비한 누구에게라도 감정적인 자극을 피하면서 냉정함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 평가자의 자세일 것인데, 나는 너무 깊이 전시에 간여해왔기에 평가하기 더욱 어려운 위치에 있는 것이다. 잔인한 동인련.
어쨌든 여기서는 한껏 고무된 전시서문과는 다른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겠다. 평가는 냉정함을 잃지 않아야 하겠지만, 혹여 목적을 넘어서는 감정이 나올지도 모르니 평가 내내 줄타기를 해야 할 것만 같다. 하지만 함께 전시준비에 참여한 일원으로서 나의 평가는 또 다른 변명과 고백의 성격을 놓지 않을 것이다. 말하자면 이 글은 전시비평이 아닌, 전시준비평가가 될 것이다.
부족, 부족, 부족
평가의 운을 떼면, 준비부터 조급했던 프로젝트였다. 사실 선전전 정도에 익숙한 동인련의 사정을 미뤄볼 때, 미술전시는 경험적으로 부족함이 따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프로젝트 성격상 예상 외 비용이 많이 드는 경제적 부담도 무시할 수 없다. 동인련이 특정 재단의 후원을 받아가며 사업을 해야 하는지부터 논의가 부족한 상태에서 당장 필요한 지원양식을 작성해야 했고 기획된 날짜에 맞춰 일을 진척해야 했던 과정에는 다소 성급함이 있었다.
그 와중에 마침 활동에 관심이 있던 미술전공 친구가 동인련에 소개되고, 프로젝트에의 일조를 권유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작가로서 프로젝트를 주도하는 분위기가 조성된 것 같다.
하지만 작가를 세워야 할지 여부는 사전에 논의되지 않았다. 사전에 필요했던 논의들은 구렁이 담 넘듯,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진행하면 될 것이라는 막연한 합의로 봉합되었다. 이는 작가로서 프로젝트에 일임하게 될 경우 프로젝트가 공동작업이 될 것인가, 아니면 작가 단독 작업인가에 관해 평가할 수 있는 여건상의 명료함을 저해한다. 더구나 프로젝트 초반 논의의 결여 속에서 막연한 희망의 분위기에 안주했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미술전시라는 생소한 작업에 익숙지 않아 ‘기대’의 상당부분은 작가와 기획자에 대한 ‘의존’으로 오해되었고, 전시팀과 작가 사이의 논의는 깊어질 수 없었다.
기본적인 초반논의의 결여는 이후 서로 간 동상이몽처럼 작업준비에 혼란을 가중시켰다. 한편에서 공동작업으로 인식하던 것들이 다른 편에서는 작가 단독 작업에 주는 주변적 도움으로 굴절되어 받아들여졌다. 전시팀이 작업에 얼마만큼 개입할 수 있는지, 작가는 작업에 전시팀의 피드백을 어느 정도만큼이나 수렴해야 하는지가 논의되지 않은 지점은 불화의 조건을 조성할 수밖에 없었다.
급조된 일사천리의 실무
그 와중에 공간이 마련되고, 글쓰기 공모전을 마쳤다. 이제 부족한 논의를 해야 할 시간, 하지만 알다시피 동인련은 바쁜 단체이다. 여름동안 HIV/AIDS인권팀은 ICAAP(제10차 아시아태평양에이즈대회) 준비에 총력을 쏟는 분위기였고, 전시준비는 불가피하게 뒤로 미뤄져야 했다. 준비가 미흡해지는 가운데 아이디어를 나누고 진전시킬 시간적 여유가 부재했던 점은 이후 돌발적인 상황들을 출몰케 했다. 작가와 소통이 소원해지는 동안 작업비용이 배 이상으로 뛰고 출판 등에 있어 예기치 않게 실무가 엉켜버렸던 것이다.
ICAAP 이후 인권팀은 전시 실무에 비중을 두었다. 두 달이 조금 부족하게 남은 기간 동안 팀원들은 작업스케치를 피드백하고 실무를 하나하나 풀어갔다. 작가가 작업에 몰두하는 동안 팀원들은 도록 제작 및 후원과 홍보에 심혈을 기울였다. 텀블벅이라는 소셜펀딩업체와 관계하고 목표금액을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은 의도치 않은 성과였다.
표면상 준비가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작가와 전시팀 간의 분업은 쉽게 결합하기 어려웠다. 작가가 전시를 준비하는 동안 전시팀이 작업 전반에 할 수 있었던 건 작가를 향한 몇 마디의 의견전달과 응원 정도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작업이 작가에게 맡겨진 상황에서 팀원들은 작가를 믿고 의존해야만 했던 것이다.
당황스런 상황의 연속, 평가 상 예견된 모호함
그렇게 오픈 당일. 팀원들은 또 다시 돌발 상황에 직면해야 했다. 전시준비가 미처 완성되지 않았던 것이다. 오만 심정이 교차하는 분위기 속에서 누군가는 ‘프리뷰 파티’ 로 바꿔야지 않겠냐며 농담을 던졌지만, 자조적인 농담이라기엔 자못 심각하게 들렸다.
당황스러운 상황 속에서 유연한 대처가 필요했다. 설치는 작가가, 행사는 전시팀이 맡는 것처럼 암묵적 합의가 이뤄진 상황에서 팀원들이 정돈되지 않은 전시장에 투입된다면 오히려 방해만 될 터. 거기다 찾아온 관객들에게 사과의 말을 전하는 상황이 오더라도 오프닝 파티는 진행되어야 한다. 하여 최소한의 팀원만 전시장 정리를 돕고 나머지는 오프닝파티를 준비했다. 다행히 오픈당일 관객들은 전시를 볼 수 있었고 행사는 성공적이었다.
서둘러 정리된 터라 전시공간은 전시스케치와 달리 미완성처럼 보였다. 그런데 전시는 끝날 때 까지 미완성으로 남겨졌다. 설치하기로 한 몇몇 인테리어들이 설치되지 않았고, 전시장에 비치하기로 했던 텍스트는 보이지 않았다. 전시가 종료되고 팀 내 평가에서 장소연출의 미완성이 작가의 의도였음을 들을 수 있었다. 스케치대로 설치할 경우 과잉되어 보일 수 있다는 것이 그 답변이었다.
설치 중에 판단한 작가의 의도라고 하더라도, 전시준비를 함께 해온 팀원들에게 전시공간은 ‘미완성’ 으로 읽혀질 수밖에 없다. 의도적 미완성이라는 대답에 팀원들은 작가의 독단이라 혐의를 제기했고 작가는 이에 응하면서도 작가의 자율적 의도라는 입장을 놓지 않았다.
하지만 작가의 의도로 끝날 문제인지, 작가의 독단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전시팀과 작가 사이의 역할분담이 불분명하게 지속되었던 점이, 더불어 전시팀과 작가 사이의 관계가 모호하게 방치해두었던 점이 이후 평가할 수 있는 위치를 모호하게 만들어버린 셈이다. 이는 팀원과 작가 스스로로 하여금 ‘의도’와 ‘독단’ 사이의 뉘앙스를 엄밀히 따질 수 있는 평가의 여지 또한 상실케 했다.
미완성의 의도는 사전에 연출된 것인가, 혹은 준비기간의 부족으로 급조된 계산인가. 이제 미완성의 연출에 대한 논의는 준비평가가 아닌, 미술비평의 영역에서 다뤄져야할 문제이다. 과연 공간의 미완성은 하위문화 속 낙인의 과정을 어떻게 시각화하고 있으며,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부여하고 있는가. 최소한 미완성의 효과가 관객의 감응으로 전달되어 사회맥락 속에 녹아들었는가. 물론 전시준비를 평가하는 이 자리에서 굳이 전시를 분석하고 비평적 질문들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전시에 대한 의미부여는 당연히 관객들의 몫이고, 우리는 겸허히 수용해야만 한다.
전시팀이 당황해야 했던 또 하나의 지점은 작가가 팀 내 피드백을 수용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사전 전시회의에서 팀원들은 작가에게 텍스트를 바탕으로 좀 더 질병의 이슈를 구체화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 과정에서 몇 가지 소재들이 지적되었지만, 가시화된 작업을 접하면서 최종적으로 전시팀의 의견이 기각되었음을 확인했다.
작업의 주체가 누구인지에 대한 정교한 논의가 부재했던 상황에서 작가는 당장의 작업을 자신의 것으로 가져갈 수밖에 없었다. 최종적으로는 작업 자체가 작가의 자율성에 일임되었기에, 팀원들의 아이디어와 피드백이 최종적인 옵션에 지날 수밖에 없다는 점은 피할 수 없는 결과였다.
이 역시 ‘작가의 독단인가, 아니면 작가의 자율적인 선택으로 읽어야 하는가.’ 라는, 팀원과 작가 사이 관계의 모호한 범주 안에 얽혀 있다. 팀원으로서 나는 전시를 올곧이 평가할 수 없다. 더불어 팀원으로서 전시평가를 명백히 할 수 없는 모호한 지점에는 사전에 논의가 부족했던 점을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생산적 결론
새로운 성격의 활동이었기에 프로젝트는 준비과정 중에 많은 이야기가 오가야 했다. 한편으로는 ‘좋은 게 좋은 것’ 이라는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미개척의 장을 활동의 관성으로 봉합한 건 아닌가, 라는 생각도 든다.
물론 준비과정 중에는 활동의 관성을 ‘관록’으로 읽어야 하는 부분도 있었다. 당장 필요한 시점에 뚝딱 홍보글을 만들어 내거나 후원을 조직했던 점, 나아가 막막했던 전시오프닝과 파티를 성공적으로 이끌어갈 수 있었던 데에는 오히려 활동가들의 역량을 확인할 수 있다고 말해야 한다. 여기서 활동가들은 활동 뿐 아니라 노는 것도 열성적이었음을 몸소 보여줬다.
더불어 활동의 지평을 넓히는 과정에서 복합문화공간 꿀을 알게 되고, 텀블벅을 접하게 된 것은 적지 않은 수확으로 평가하고 싶다.
사회제반의 이슈들 속에서 동인련의 ‘촉’ 은, 그 활동의 지향점은 다양한 매체를 통해 제 형식과 얼굴로 발현된다. 그렇게 활동의 기록은 켜켜이 쌓이며 역사가 되고, 단체의 정체성을 구성한다. 그렇게 이번 프로젝트 역시 LGBT커뮤니티가 당면한 질병의 맥락 속에서 불을 밝혔다고 평가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다만 과정상의 준비부족과 불화의 관계가 전시자체 불완전성으로 드러나고 있다는 점은 여전히 아쉽다.
최근 제 형식을 문화전반으로 넓혀가는 활동의 장은 성소수자로서 개별적인 일상과 커뮤니티의 장을, 더불어 사회운동 사이 공명을 증폭한다. 유난히도 올해 LGBT커뮤니티 내부에서는 문화예술의 콘텐츠들이 많이 생산되었다. 이번 프로젝트 역시 그 중 하나일 것이다.
혹자는 전시의 문제를 미술계의 한계로 해석하기도 한다. 미술의 형식이 운동으로 번역되는 데 한계를 갖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술은 사회로부터 동떨어진 ‘미술계’라는 단어에 앞서 그 자체 지배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감각을 드러내는 과정이자 누군가의 삶을 형상으로 기록하는 행위로서, 그 자체 문화인류학적인 성격을 갖는다. 그 속에서 이번 프로젝트는 활동이 문화가 되고, 예술의 기록으로 남을 수 있음을, 혹은 예술이 사회 내부에 기입되는 방식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전례이다. 하지만 이번 프로젝트를 앞으로 전개될 새로운 활동들의 발판으로 삼는 데 의의를 두는 것에 만족해선 안 될 것이다. 우리에게는 좀 더 치밀한 논의와 상상력이 절실하다. 소수자 공간과 호흡을 같이 할 수 있는 운동의 형식을 기대한다.
웅_ 동성애자인권연대 HIV/AIDS인권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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