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사랑은 너무 써
-영화<알이씨>를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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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3월, 부산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좋아하는 밴드가 부산에서 공연을 했기 때문이었다. 기차를 타고 싶었지만 그럴만한 돈이 없었다. 풍경은 보이지 않았다. “엄청난 빠순이가 된 기분이야”라고 그녀가 말했다. 나는 말없이 웃었다. 만들어진지 얼마 안 된 밴드의 공연을 보러 간다는 것은 핑계였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부산을 보고 싶었다. 아니, 그녀와 함께 어딘가에 가고 싶었다. 그뿐이었다.
눈이 건조하고, 입술이 도톰한 그녀는 경상도 어디 출신이어서 그런지, 말끝을 이상하게 흐렸는데, 그때마다 나는 그녀의 눈을 보았다. 렌즈를 끼는 그녀의 눈은 언제 어디서든 반짝거렸다. 손끝이 저릿저릿했다. 하지만 말하지 않았다. 말할 수가 없었다. 가끔, 너무 자주 흔들리는 그 눈이 또 다시 흔들리다가, 다시는 나를 만나지 않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손가락이 기다랗고 하얀, 손톱에는 메니큐어가 여기저기 벗겨진, 그녀는 그 손으로 파마한 단발머리를 쓸어내렸다가, 핸드백을 만지작거렸다가, 입술을 매만지고, 얼굴을 매만졌다. 그 손이, 나의 얼굴과 눈을, 입술을 만지는 상상을 했다. 쓸쓸해졌다. 절대 그럴 리는 없었을 테니까.
부산에서 그녀가 처음 웃었던 것은, 진심으로 웃었던 순간은 바닷가에서였다. 아침을 먹고, 바닷가에서 조개를 줍다가, 파도를 따라서 걸으며 환호성을 질렀다. 그녀 몰래, 파도소리에 섞인 목소리를 녹음했다. 그 순간, 내 눈이 너로 인해 번식한다는, 한 시인의 시를 중얼거렸다.
그리고 우리는 연락을 하지 않았다. 연락을 할 구실도 없었다. 그녀는 오랜 백수생활을 끝내고 회사로 들어갔고, 나는 다시 정처 없는 백수생활을 시작했고, 그녀는 남자친구를 사귀고, 결혼을 한다고 했다. 그녀의 결혼소식을 듣는 순간, 부산을 떠올렸다. 녹음파일을 들었다. 고작해야 일분도 되지 않는 시간이 오랫동안 스쳐갔다. 고백도 하지 못했던 마음은 사라졌다.
난 아직도 그녀의 손을 잡지 못 한 것을, 밤새 낮게 코를 골면서 자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기만 했다는 것을,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후회할 수 없다. 적어도 그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 영화는 <알이씨>였다.
그건 잘못된 선택이었다. 그건 슬픔의 문제가 아니었다. 한 번도 마주친 적도, 어떠한 생의 이야기도 나눈 적 없는 둘의 이야기를 보면서 내내 울었다. 눈물이 주르륵 흘러서, 옆자리에 앉은 친구에게 우는 내색을 하지 않으려고 작게 숨을 쉬었고, 눈치 채지 않게 코를 풀었다. 영화를 보면서, 그녀와 보낸 부산을 떠올린다는 것도, 그녀의 낮은 숨소리를 떠올린다는 것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처음으로, 그 마음을 후회했다. 그녀에게 말하지 못한, 내 생각을 후회했다.
우리는 헤어질 수밖에 없는 인간들인데, 누가 누구와 연애를 하더라도 헤어지는 것인데, 케이크에 꽂힌 촛불만큼이나 흔들리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위태로웠다.
사랑은 너무 짧았다. 사랑을 하는 순간에도 너무 슬펐다. 자고 있는 사람의 숨소리에서도 어디론가 도망가 버릴 것만 같은 불안함,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친구라고 소개해야하는 먹먹함, 가짜 남자친구를, 여자 친구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 누군가에게 연인과 함께 있는 것을 들키면 안 되는 조마조마함. 가지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슬픔.
더 이상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영준과 준석이 다시 만났으면, 다시 시작했으면, 마지막 바닷가에서 장면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이길 바라는 것처럼, 세상이 바뀌었으면 좋겠다. 울면서, 한 시간 남짓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난 생각했다. 그 뿐이었다.
재경_ 동성애자인권연대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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