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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러디, 놀이의 즐거움과 정치적 구호의 교차가능성-G20 홍보물 낙서와 동성애 패러디물을 중심으로

by 행성인 2011. 8. 5.

패러디, 놀이의 즐거움과 정치적 구호의 교차가능성
- G20 홍보물 낙서와 동성애 패러디물을 중심으로


특정 대상을 패러디하는 즐거움, 패러디가 패러디를 낳는 반복현상을 한국사회에서 설명하기 위해서는 얼마간의 보충설명이 필요하다. 말하자면 한국에서 패러디는 속도전이고 스펙터클이다. 이곳에서 패러디는 사건이 되고, 사건이 일어난 현실은 다시 패러디된다. 패러디의 미로 속에서 사건의 해결 또한 패러디되고, 이는 또 다른 사건을 낳는 이상한 순환. 패러디가 만들어낸 새로운 현실에 경찰이 개입하고, 언론에 사법기관까지 패러디 대상이자 주체가 된다고 하면 한국은 패러디 왕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터, 이제 정치권과 대중들이 너나 할 것 없이 패러디에 당혹스러워하면서도 기꺼이 패러디의 조류에 동참한다. 패러디의 과잉, 이만큼 패러디가 홍수를 이루던 시절이 있었을까. 패러디는 합성사진으로, 동영상으로, 유행어로, 믹스된 음악의 형식 등 다양한 얼굴로 생산된다. 유희적인 재현의 과잉 속에서 정치적 구호와 존재의 양식은 유희적 표상의 바다로 수렴된다. 현실과 허구를 가로지르는 패러디의 막장드라마는 사회의 위계구조와 불화하면서도 끊임없이 위계질서를 확인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정치의 패러디, 패러디의 정치화: G20 패러디의 예


기본적으로 패러디는 원본에 대한 모방을 전제로 한다. 여기에는 이렇다 할 정해진 역학관계가 존재하지는 않지만, 대개 우리가 주변에서 볼 수 있는 패러디의 예들은 사회적 위계의 수직구조를 수평으로 방향 전환하는 것들이 많다. 가령 “G20기간 동안 (○○○)을 자제해 주세요.” 라는 캠페인 문구가 “G20기간 동안 (대변)을 자제해 주세요.”, “G20기간 동안 (방귀)를 자제해 주세요.”라는 리플들로 변주되며 소위 ‘자제 드립’으로 조롱당한 예처럼, 위계의 구조를 전유하는 패러디는 권위 있는 존재를 탈권위화하는 효과를 노린다.




그 중에서도 G20 정상회담 포스터에 그린 ‘벽서사건’은 흔한 정치인 풍자의 예일 것이다. 사실 특정 정치인이나 대통령의 얼굴을 다른 대상으로 형상화한 예는 장구한 역사를 갖는 패러디 방식 중 하나다. 소위 권위자 패러디 모델은 직접적인 소통을 거부하는 적대적 상대, 권위적인 상대를 재밌게 형상화함으로써 만족하거나 즐길 수 있는 수평적 구조를 제안한다.


하지만 권위자 패러디는 패러디 당사자의 지지율에 심각하게 의존적이라는 점, 대부분 그들의 관상을 패러디하는 것이기에 금방 내성이 생긴다는 단점이 있다. 더구나 이처럼 전형적인 패러디 방식은 유행을 타고 끊임없이 모방되기 마련이다. 이는 프레드릭 제임슨이 ‘원본 없는 모방’, ‘중성적인 모방’으로 설명한 패스티쉬(pastiche)의 개념에 가까울 정도로 확산된다.[각주:1] 모방이 모방을 낳듯, 이미지는 끊임없이 반복된다. 모방이 원본이 되고, 어느 것이 원본인지 모방인지 판별할 수 없는 상황. 지루한 이미지의 생산은 패러디의 의미효과를 단축시킨다.


표현의 자유 아래 패러디의 직접적인 효과가 미미해지고, 나아가 모방의 과잉으로 패스티쉬에 가까운 무의미한 소비에 그치는 것처럼 재현의 과잉은 역으로 의미효과를 증발시킨다. 그럼에도 놀라운 것은 해당 제작자에게 ‘공공손괴’를 들어 고소하고 책임을 묻는 윗선의 ‘적극적인’ 대처였다. 홍보물에 쥐를 그린 이유로, 밤에 돌아다닌 이유로, ‘부잣집 잔치에 재를 뿌리’고 ‘청사초롱의 꿈’을 강탈한 죄로 검찰은 사소한 패러디놀이에 공공손괴혐의라는 폭처법을 적용하고 졸지에 벽보패러디놀이를 공안범죄로 ‘승격’시켰다. 웃자고 던진 농담 같은 조롱에 죽자고 달려든 검․경찰의 대처는 그것이 부정적일지라도 사소한 행위에 커다란 의미부여를 해주었고 전형성 아래 소비되고 말았을 패스티쉬적 이미지를 패러디의 정치적 효과로 상승시켜 주었다. 온․오프라인을 막론하고 다시금 불붙은 패러디의 속도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너도 나도 모방을 거듭하면서 패러디가 양적으로 과잉되는 현상은 ‘우리가 모두 공범자’라는 다수의 지지로서 작자의 신원을 어느 정도 보장해주기까지 했다.


여전히 한국사회에서 위계의 조롱은 즐거움이고 모험으로 채색된다. ‘도둑이 제 발 절인다.’ 고 했던가. 단순한 낙서에 난리법석의 대처를 보여준 것은 사회의 경직성을 스스로 폭로한 것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어 보인다. 위계질서를 열정적으로 신화화하는 한국사회의 수직적 구조는 무의미한 모방의 반복에 새로운 의미를 불어넣는다. 더불어 조롱의 구실을 끊임없이 제공하면서 패러디 행위를 동기 부여한다.


G20 패러디 이슈에 관해 모 시사 잡지에서 한 영화평론가는 ‘쥐 벽서’를 두고 ‘장난감 총이었지만, 정부는 진짜 총으로 대접했고, 이제 그 총성은 폭죽놀이가 되어 쥐불처럼 터진다.’ [각주:2]고 말하며 벽보사건 이후 패러디와 현실을 가로지르는 드라마를 묘사했다. 이미지가 우후죽순으로 배포되고, 이미지를 활용해 벌금 모으기 캠페인을 벌이고, 이미지를 활용해 일인시위를 하기도 하는 상황들을 기술하면서 그녀는 이후의 전개를 고무적으로 관망하는 듯하다. 분명 G20 ‘쥐 벽서’ 사건은 고양된 패러디의 효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우리는 일련의 캠페인과 실천들에 패러디적 놀이의 성격이 내포되어 있음을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패러디의 단순한 유희적 행위가 초래한 비판적 효과를 비판적인 정치행동으로 확대하는 것은 재고할 여지가 남는다. 과연 쥐의 스펙터클한 출몰은, 작금의 넘쳐나는 비판적 패러디행위들은 놀이일까, 정치운동일까? 혹은 놀이 같은 정치일까, 정치화된 놀이일까?


이는 다시금 놀이와 정치적 행동 사이의 거리문제로 소급된다. 이 경우 우리의 질문은 다음과 같이 구체화될 것이다. 패러디와 현실을 가로지르는 드라마 속에서 패러디적 유희는 어떻게 정치적으로 현실화될 수 있을까. 아니, 패러디에 꼭 정치적 구호를 부여할 의무라도 있는 것인가. 패러디 행위들은 곧장 비판의식의 생산적 실천으로 해석될 수 있을까. 비판적인 실천들 또한 패러디된다면 놀이로 소비되는 것이 아닐까. 지금 우리는 패러디왕국에서 정치가 패러디되고, 패러디가 운동을 낳으며, 다시금 운동이 패러디되는 패러디 바다의 한복판에 있다.


놀이로서 패러디가 갖는 해석 다양성: 동성애 패러디의 예

출처 : 엉덩국블로그



종종 패러디가 갖는 조롱과 비판의 성격 속에서 과도한 정치적 수사를 입고 새로운 정치운동의 미래를 섣불리 기대하는 해석들을 종종 본다. 하지만 패러디 행위자들이 모두 사회운동의 의도가 있는 것도 아닐 터, 사회운동의 발전을 위해서라도 패러디는 일련의 정치적 조직보다는 개인적 놀이의 성격으로, 일상의 깨알 같은 수행의 일례로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공론의 장뿐만 아니라 사적인 온라인 공간마저 패러디가 명예훼손으로 법제화되는 한국의 환경은 패러디행위를 익명의 장으로 몰아넣도록 유발한다. 행위주체의 익명성마저 온라인실명제 아래 제한되는 상황에서 패러디의 양상은 사뭇 다르게 나타난다. 인터넷실명제 아래 행위자의 정체가 노출되는 환경 속에서 최근의 패러디는 오히려 패러디되는 대상의 익명화와 추상화로, 행위대상의 ‘주어 없는’ 패러디가 득세하는 것이다.


가령, 누리꾼들을 통해 이슈가 되고 있는 ‘엉덩국블로그’[각주:3]의 만화는 구체적인 패러디 대상 없이 추상적인 ‘동성애’를 패러디하면서 동성애에 관련된 현실적 인식을 재구성한다. 블로그에 게재된 만화들 중에서도 <성정체성을 깨달은 아이>의 경우 ‘찰지구나’, ‘들어올 때는 네 마음대로였지만 나갈 때는 아니란다.’, ‘게이의 멋짐을 모르는 당신이 불쌍해’ 등의 유행어와 패러디를 낳기도 했다. ‘찰지구나’ 등의 유행어들은 실제로 동성애자커뮤니티에서도 유행을 타면서 종종 사용되고 있으며, 배경이 되는 ‘홍콩행 게이바’는 실제 홍콩 게이바의 사진들과 비교되기도 했다.


근래에도 한국 사회에서는 동성애, 특히 남성 동성애자를 둘러싼 패러디가 끊이지 않았다. 주로 누리꾼에 의해 수행되는 동성애 패러디소재는 고자시리즈(‘내가 고자라니!’)를 비롯하여 국내 커밍아웃한 게이 연예인의 특유한 눈매를 빗댄 ‘매의 눈’, 빌리 해링턴(Billy Herrington), 반 다크홀름(Van Darkholme) 등 게이 포르노스타배우들에 이르기까지 목록을 더해가고 있다.


물론 근래에 동성애 패러디물이 늘어난 데에는 한국사회에서 동성애 담론과 운동이 활성화되고 커뮤니티가 가시화된 효과이기도 하다. 하지만 패러디물의 과잉이 패러디 대상과의 친화성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 동성애자들에게도 낯선 용어와 배경들이 전면에 등장하면서 패러디물들은 ‘가까이 있지만 낯선 대상’으로서 동성애를 타자화하기 때문이다. 패러디를 수행하는 자신들도 동성애라는 낯선 대상을 다루는 데 서투름을 인정한다. 하여 소위 ‘병 맛’으로 불리는 엉성한 형식들을 차용하는데, 투박한 필체와 단편적인 문장들, 엉뚱한 내용전개의 작품구성은 실제 동성애자와 패러디제작자 사이에 놓인 거리를 입증한다. 눈앞에는 현실의 동성애와 다른 모습의 동성애 스테레오타입의 향연이 펼쳐진다. 패러디물을 보면서 웃고 즐기는 동안 머릿속에는 게이남성에 대한 일련의 편견들이 각인되고 재확인된다. 다시 말해 한국의 동성애 패러디물은 ‘동성애’를 이질적으로 형식화한다. 이미지는 새로워졌지만 기존 의미체계에서 타자로 각인되었던 동성애자들은 재차 패러디 대상으로 박제되는 것이다. 이처럼 낯선 대상을 희화화 하는 방식은 권위자 패러디 유형과 공통적이지만, 낯선 대상을 재-타자화 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의미구조를 강화하기도 한다.


하지만 대상에 대한 혐오적 시선을 즉각적으로 가시화하지 않는 이상 패러디 자체에 당장 시비를 따지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패러디물을 통해 동성애가 대중적으로 친근한 거리를 갖게 되었을지 모르더라도, 실제 동성애자의 존재는 패러디 속에서 탈-현실화 되는 효과를 유발하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대상으로서 동성애를 희화화하는 패러디의 유형은 분명 동성애혐오의 논리만으로 재단할 수만은 없는 미적 층위의 문제이다. 하지만 재현의 놀이 한편에서 ‘며느리가 남자라니 웬 말이냐.’라고 눈에 불을 켜고 공격하는 동성애 반대광고는 물론 군대 내 동성애를 계간으로 보는 국내의 배제 정책, 차별금지법안에 성적 지향이 삭제되는 동시대 현안들을 고려한다면 동성애 패러디의 현상들은 그저 웃고 즐길 수만은 없는 문제다.[각주:4]


패러디는 대상을 탈현실화한다. 그것은 위계를 해체하는 효과를 유발할 수 있고, 주변적인 존재들, 소수자의 존재를 희화화하는 방식이 될 수도 있다. 원본에 의존적이면서도 새로운 의미효과의 이미지들을 생산하는 패러디는 당연시되어온 원본 존재의 자연성에 의문부호를 붙이고, 더불어 원본과 위계를 확인함으로써 상하구조를 재확인하는 효과를 갖는다. 한편으로 우리는 패러디가 원본과 기존질서에 의존하여 주변적 존재, 소수자의 존재를 희화화하면서도 지배적 의미구조를 해체하는 이중적 효과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패러디에 본질적인 ‘놀이’라는 미적 모호성은 이들 대립적 효과를 흐려놓는다. 패러디는 하나의 놀이방식으로서 우리의 기대를 넘어설 만큼 폭넓은 이미지들을 생산하고 다양한 해석가능성의 길을 열어놓고 있다. 하지만 놀이의 단발적 성격은 기존의 가치체계를 조롱하면서도 급진적으로 전복시키는 데 있어 머무름이 있다. 일종의 유행처럼 특정 이슈에 대한 패러디의 일시성은 그 자체로 정치적인 조직을 기대하기 어렵게 하며, 오히려 그것이 갖는 단발성은 가치체계의 경계를 확인하는 데 그치는 한정적인 효과에 머무르기 쉽다. 그렇다면 패러디의 매트릭스, 존재의 패러디는 회의적으로만 봐야하는 것일까. 더 이상 패러디를 통해 정치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없는 것일까.


존재양식으로서 패러디: 성적 소수자의 예


패러디가 유희적 소비물로서만 취급되지 않고 존재를 양식화했던 구체적인 사례들은 흥미롭게도 패러디계의 뜨거운 감자랄 수 있는 성적 소수자들에게서 찾을 수 있다. 이들이야말로 이성애주의적 제도 아래 패러디의 방식을 통해 자신들의 삶을 양식화해온 산증인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이성애가족의 포지션을 탑과 바텀, 부치와 팸의 구분으로 패러디한 게이/레즈비언 커뮤니티의 성향구분이 존재한다면, 다른 한편에는 성별이분법의 구분을 횡단하는 트랜스젠더/섹슈얼 또한 존재한다.


굳이 추상적인 성정체성을 들이대지 않더라도 일상에서 동성애자들은 이성애자의 가면을 쓰고 ‘이성애 놀이’를 하거나 심지어는 게이 남성과 레즈비언 여성 사이에서 계약결혼을 함으로써 이성애적 결혼제도를 패러디한다.


물론 이것은 단순한 놀이가 아니며, 동성애자로서 삶이 보장되지 않는 한국사회에서 가면적인 삶으로서 패러디를 강요받는 경우로 해석해야할 것이다. 하지만 삶의 양식이 사회적으로 강요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수행으로 가시화되는 데 있어서는 제도적 위계를 폭로하는 효과를 갖는다. 주디스 버틀러의 언어를 빌린다면, 이들은 패러디의 형식을 통해 젠더를 모방하면서, 혹은 이성애적 제도를 몸의 표면에 새기면서 은연중에 지배양식의 우연성과 모방적 구조를 드러내는 것이다.[각주:5]


사회의 위계를 접하는 놀이 방식의 측면에서 패러디의 존재양식은 미적 측면과 정치적 측면을 서로 교차시킨다. 그렇다면 우리는 일시적인 정치의 패러디를 넘어 패러디의 정치화 또한 고려할 수 있지 않을까? ‘잉여’로 자신을 칭하는 누리꾼들의 미적인 발화를 우리는 어떻게 다시 정치적으로 전유하고 패러디할 수 있을까? 동성애혐오광고와 더불어 동성애 패러디 만화 사이에서, 혹은 단순한 쥐 그림과 정치적 비판의도의 결합여부가 모호한 미적 표상의 바다에서 우리는 이들 패러디물을 혐오적 재현이라고, 혹은 반대로 정치적 비판의 미래라고 섣불리 단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패러디적 유희와 정치적 의미화 사이의 언어를 어떻게 관계 맺을 수 있을까?


의식적 거리두기를 통한 각성과 정치적 제휴가능성


패러디는 대상을 탈-현실화하는 동시에 탈-현실화된 이미지를 새로운 현실의 국면으로 구축하는 계기가 된다. 패스티쉬적 이미지의 과잉소비 속에 감춰진 위계의 신화와 원본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것, 더불어 존재양식의 생산적인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이야말로 패러디를 통해 기대할 수 있는 효과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건 미적․정치적 효과들이 제휴할 수 있는 가능성의 모색이 될 것이다. 이를 좀 더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패러디의 효과들을 모두 살피기보다 패러디가 유지하는 모방의 ‘거리’를, 패러디의 효과를 생산하는 ‘거리’를 유념해둘 필요가 있다.


패러디가 원본을 조롱하고 웃음을 유발하며 비판적 의미를 드러낼 수 있는 것은 바로 원본과의 거리를 전제하기에 가능했다. 원본과 모사물의 거리는 곧 현실과 표상의 거리이고 존재와 편견 사이의 거리이며 위계와 변이들 간의 거리이다. 하지만 패러디행위가 의식적인 것이라면 원본은 패러디 행위가 수행되기에 앞서 의식적으로 재구성되는 과정을 거친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렇기에 패러디 대상으로서 원본은 자연적으로 고정될 수 없는 것일 터, 원본이 의식 체계 안에서 생산된 것이라는 주장은 곧 원본의 의미체계가 이미 허구적임을 폭로하고 탈-현실화될 수 있음을 내포한다.


지배적인 의미체계를 모방하는 과정에서 대상과 모방물 사이의 거리는 곧 위계적 의미체계의 분열을 의미한다. 또한 이 거리는 원본과 모방물 사이의 적대성과 친화성 사이에서 지속적으로 의미체계를 재구성한다. 의미체계의 분열과 재구성은 패러디를 끊임없이 반복케 한다. 가령 정부가 특정 동물을 표현하는 데 민감하고, ‘게이의 멋짐을 알지 못해 불쌍한 것’에 정작 당사자 게이들이 코웃음 치면서도 적당히 패러디된 언어를 전유할 수 있는 동력은 바로 지배적인 의미구조와의 의식적인 틈새로서 ‘거리’를 유발하는 반복적 패러디의 효과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원본을 사회적 위계와 관습 등 외부에 있는 대상들로 한정짓는 것은 패러디에 대한 표면적 독해가 될 것이다. 패러디는 단지 비판적 놀이와 예술의 수단으로 한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가장 내밀한 지점에서 패러디는 우리의 일상 속에 온갖 잡다한 상황들을 대상으로 수행된다. 더욱이 일상의 패러디는 개그프로의 소재를 넘어서는 깊이를 갖는다. 우리는 너나할 것 없이 자신의 처지와 슬픔을, 나아가 사회적 위계로부터의 박탈감과 고통을 풍자한다. 스스로를 패러디함으로써 행위자들은 고립되고 위축된 상황으로부터 새로운 국면으로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는 삶의 동력을 찾는다. 스스로 삶의 고통을 패러디하면서 이들은 사회적 낙인과 트라우마를 웃음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 언중유골. 우리의 웃음은 가볍지만 가볍지 않다. 삶의 고통은 패러디를 통해 여과된 가벼운 인사말로 당신에게 말을 건다. 자조적인 농담은 형식상 패러디 과정을 거치지만, 그들의 발화 속에는 삶의 고통과 상실이 함축되어 있다. 동시에 일상의 가벼운 농담으로 발화될지라도 패러디 행위는 당사자로 하여금 소외와 배제로부터의 침잠 속에서 한 걸음 디딜 수 있는 근력을 자극한다.


패러디는 거리를 내고 그 안에서 의식적 각성을 수행한다. 일상의 의식, 벤야민의 언어를 빌어 ‘범속한 각성’의 의식으로 불러도 무방하다면 패러디는 행위주체를 강화하는 일종의 반성적 방식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행위자는 원본대상과 재현이미지 사이에 거리를 내고 수행적 의도로서 다른 방식의 사유를 개입시킨다. 패러디 자체를 즐기면서도 새로운 이미지를 생산하는 데 두는 사유의 거리는, 새로운 재미를 생산하기 위한 거리가 될 수 있으며 그 재미에 현실을 개입시키고 비판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전략적 거리가 될 수도 있다.


삶의 의식적 무기로서 패러디


패러디는 원본으로서 대상에 어떤 분노와 경멸이 있을지라도 웃음을 통해 친화적인 모습을 잃지 않으면서 원본의 틈을 파고든다. 더불어 패러디는 어떤 무거운 의미체계와 아픔일지라도 놀이의 형식을 통해 서로의 공감을 연결한다. 지배적 위계를 해학적으로 비판하고, 고립된 고통을 자조적으로 극복하는 시도로서 패러디는 ‘우리’를 결집시키는 계기로 작동한다. 말하자면 패러디는 지배적인 의미체계와 그로부터 겪는 고통을 웃음의 언어로 공유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의미심장한 놀이인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다소 거칠게나마 패러디적 놀이와 정치적 전략 사이에서 제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아보았다. 놀이의 형식을 갖지만, 우리의 삶을 관통하는 패러디 행위야말로 구성원들로부터 소수자 운동을 조직하는 것을 기대할 수 있는 기본적인 한 걸음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소수자운동 역시 판에 박힌 구호와 투쟁양식과는 거리를 갖게 될 것이다. 패러디의 힘은 경직된 상황으로부터 생산적인 면모들을 발견하고 양식화할 수 있는 힘, 놀이를 통해 다양한 언어와 이미지들을 만들어낼 수 있는 동력에 있다. 다시 말해 구성된 위계체계에 대한 각성을 통해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이들과 존재양식 간의 친화성을 개발하는 것이 패러디의 미덕일 터, 패러디행위는 팍팍한 의미구조 속에 살아가는 구성원 주체들이 스스로를 강화하고 친화적으로 관계 맺을 수 있는 삶의 의식적인 무기인 셈이다.


웅_ 동성애자인권연대 회원

* 이 글은 격월간 인권잡지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 7~8월호에도 함께 게재되었습니다.  



  1. 그는 자신의 논문 「포스트모더니즘과 소비사회」에서 패러디parody와 구분하기 위한 개념으로 패스티쉬를 사용한다. 말하자면 모든 패러디가 이면에 위대한 기준이나 원본이 전제되는 것과 달리, 패스티쉬는 조롱할 수 있는 기준으로서 모든 언어적 규범의 가능성 자체가 사라지고 단지 스타일상의 다양함과 이질성만 남게 될 경우 발생하는 중성적 모방, 모방의 과잉, 스타일의 반복인 것이다. 프레드릭 제임슨, 할 포스터 편, 윤호병 외 옮김,「포스트모더니즘과 소비사회」,『반미학』, 현대미학사, 1993, pp. 176-197. [본문으로]
  2. 황진미, 「올여름 쥐들의 출몰을 기대하시라: G20 포스터에 쥐 그림 그려 기소된 박정수씨의 아내 황진미 영화평론가가 전하는 ‘쥐벽서’ 사건수사의 엽기적 전말」, 『한겨레 21』 862호, 2011, 5, 30, pp.84-85. [본문으로]
  3. 엉덩국블로그 http://blog.naver.com/undernation/ [본문으로]
  4. 지난 4월 동성애자인권연대(이하 동인련)을 비롯한 몇몇 성적 소수자단체의 사이트들이 해킹당하고 동인련의 경우 호모포비아적인 이미지로 사이트 메인창이 변경된 사례가 있었다. 흥미롭게도 이 시기는 ‘덩국**’이라는 닉네임을 가진 회원이 한시적으로 동인련 게시판에 동성애 패러디물들을 올려놓았던 시점과 동일하다. [본문으로]
  5. 주디스 버틀러, 조현준 옮김,『젠더 트러블』, p. 343 참조.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