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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소식/퀴어퍼레이드

그대는 그대의 자유를 위해 무엇을 했는가

by 행성인 2012. 5. 24.

 

모리(동인련 웹진기획팀)

 

1785년 공리주의의 창시자 제레미 벤담이 영국에서 최초로 동성애 합법화를 주장

1791년 프랑스 혁명후 새로 채택한 형법에서 동성애를 범죄 목록에서 제외. 프랑스는 상호합의된 동성애를 합법화한 첫번째 서유럽 국가가 되다.

1800년대 초. 레즈비언에 대한 최초의 연구가 책으로 출판되다.

1828년 “자연에 거스르는 죄”라는 문구가 미국 형사법전에서 처음 쓰이다.

1867년 8월 29일. 칼 하인리히 울리히(Karl Heinrich Ulrich)가 독일 법조인 회의(Congress of German Jurists)에서 공개적으로 반동성애법의 폐지를 촉구하다.

1869년 동성애(homosexuality)라는 단어가 출판물에 처음 나타나다.

1870년 동성애 관계를 다룬 첫 미국 소설 「Joseph and His Friend: A Story of Pennsylvania」가 출판되다.

1871년 독일에서 형법 ‘Paragraph 175’에 의해 동성애가 범죄가 되다.

1892년 “bisexual”과 “heterosexual”이라는 단어가 지금과 같은 의미로 처음 쓰이다.

1895년 오스카 와일드가 외설죄로 감옥에서 2년 간의 중노동을 선고받다.

1897년 독일 의사 마그누스 히르쉬펠트(Magnus Hirschfeld)가 과학적 인도주의 위원회(Scientific-Humanitarian Committee)를 설립하고 “Paragraph 175”를 폐지하는 캠페인을 벌이다.

1910년 미국의 엠마 골드먼(Emma Goldman)이 공개적으로 동성애자 인권을 옹호한 최초의 사람이 되다.

1919년 독일 의사 Magnus Hirschfeld가 ‘성연구소(Institute for Sex Research)’를 설립하다. 독립적인 연구기관이자 상담소였던 성연구소에는 수천권의 책이 소장되어 있었는데, 1933년 나치에 의해 모두 불태워졌다.

1919년 최초의 퀴어영화라 할 수 있는 <Different From the Others>가 개봉하다.

1924년 미국의 첫 동성애자 인권단체 ‘The Society for Human Rights’가 설립되었으나 몇달 후 경찰의 압력으로 해산됐다.

1926년 <<The New York Times>>가 “homosexuality”라는 단어를 사용한 첫 주요 인쇄매체가 되다.

1928년 레드클리프홀(Radclyffe Hall)의 『고독의 우물』(The Well Of Loneliness)가 영국과 미국에서 발행되다. 이 책은 많은 법적 논쟁과 함께 대중들에게 동성애라는 화두를 던져주었다.

1931년 여러 레즈비언 영화 중 하나인 <Mädchen in Uniform>이 처음으로 개봉하다.

1936년 미국에서 첫 레즈비언 바인 Mona’s 440 Club이 오픈하다.

1937년 나치의 집단수용소에서 분홍색 삼각형이 남성 동성애자의 표식으로 처음 사용되다.

1946년 네덜란드에서 현재까지 가장 오래된 LGBT 단체인 “COC(Center for Culture and Recreation)”가 설립되다.

1947년 리사 벤(Lisa Ben)이 북미에서의 첫 레즈비언 서적 『Vice Versa』를 출판하다.

1950년 미국에서 처음으로 오랬동안 유지된 동성애자 단체인 “The Mattachine Society” 가 LA에서 설립되다.

1952년 크리스틴 죠겐슨(Christine Jorgensen)이 처음으로 성전환 수술을 받은 사람으로 알려지다.

1954년 수학과 컴퓨터의 천재였던 앨런 튜링(Alan Turing)이 동성애의 죄목으로 2년의 수감 생활 혹은 화학적 거세를 선택하게 된 18개월 후 독극물을 먹고 자살하다.

1955년 미국의 첫 레즈비언 정치/사회 단체인 “빌리티스의 딸들”(Daugters of Bilitis(DOB))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설립되다. DOB는 동성애에 관한 공개 포럼 개최, 혼자 살거나 결혼한 레즈비언 지원, 연구 활동에 참여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1964년 캐나다의 첫 동성애자 단체 ASK가 설립하고, 첫 동성애 잡지 <<ASK Newsletter>>와 <<Gay>>가 출판되다.

1964년 레즈비언 잡지 <<The Ladder>>의 표지에 처음으로 레즈비언의 사진이 등장하다.

1967년 “homophobia”의 어원일 것으로 추정되는 단어 “homoerotophobia”가 처음 사용되다.

1967년 동성애에 관한 책을 파는 첫 서점인 The Oscar Wilde Bookshop이 뉴욕에 오픈하다.

1967년 미국의 첫 동성애자 학생단체가 콜럼비아 대학에서 만들어지다.

1969년 뉴욕에서 스톤월 항쟁(The Stonewall riot)이 일어나다

1969년 DOB의 호주지부가 멜버른에 세워지면서 호주의 첫 동성애자 인권단체가 되다.

1972년 “동성애자들의 부모, 가족, 친구들”(PFLAG(Parents, Families and Friends of Lesbians and Gays)) 만들어지다.

1972년 낸시 웨슬러(Nancy Wechesler)가 커밍아웃한 첫 미국 행정관이 되다.

1973년 미국 정신의학회가 정신질환목록에서 동성애를 삭제하다.

1974년 첫 양성애자 지원 모임인 “The Bisexual Forum”이 만들어지다.

1976년 호주에서 Gay Teachers Group이 만들어지다.

1977년 하비 밀크(Harvey Milk)가 샌프란시스코 시정감독관이 되면서 미국에서 커밍아웃한 다섯 번째 행정관이 되다.

1977년 캐나다의 퀘벡이 성적지향을 근거로한 차별을 금지한 최초의 도시가 되다.

1978년 시드니의 게이 레즈비언 축제 마디그라(Mardi Gras)가 처음 열리다. 게이 프라이드의 상징으로 무지개색 깃발이 처음 사용되다.

1978년 하비 밀크를 죽인 댄 화이트(Dan White)가 솜방망이 처벌을 받은 것에 분노한 동성애자들이 폭동(The White Night riot)을 일으키다. 이 때의 폭력사태로 샌프란시스코 시는 수십만 달러의 손해를 입었지만 동성애자 단체들은 사과를 거부했다.

1979년 스웨덴이 동성애를 질병 목록에서 삭제한 최초의 국가가 되다.

1981년 노르웨이가 동성애자를 향한 차별을 금지한 최초의 국가가 되다.

1981년 AIDS가 처음 보고되다.

1982년 미국 켈리포니아 주 라구나 비치시(Laguna Beach)에서 커밍아웃한 첫 시장이 선출되다.

1982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첫 게이 올림픽(Gay Games)이 개최되다.

1985년 프랑스가 고용과 공공서비스에서 동성애자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다.

1988년 스웨덴이 동성애자의 사회사업, 세금, 유산을 보호하는 최초의 국가가 되다.

1989년 덴마크가 시민동반자법(civil union)을 시작한 최초의 국가가 되다.

1991년 붉은 리본이 HIV/AIDS 캠페인의 상징으로 처음 사용되다.

1991년 레즈비언의 키스가 처음으로 NBC TV프로그램 ‘L.A law' 방영되다.

1992년 세계보건기구(WHO)에서 동성애를 질병 목록에서 삭제하다.

1993년 미국에서 군대 내 동성애자 차별 정책, DADT(Don’t ask, don’t tell)를 시작하다.

1993년 한국에서 최초의 동성애자 인권단체 “초동회”가 발족하다.

1994년 캐나다가 본국에서 동성애자로서의 삶이 위협이 되는 사람에게 난민의 자격을 인정하다.

1994년 한국레즈비언상담소의 전신 끼리끼리가 발족하다.

1997년 Ellen DeGeneres가 TV에서 커밍아웃. 그녀가 출연하는 극중에서도 커밍아웃함으로써 커밍아웃한 레즈비언 역할을 맡은 첫 번째 레즈비언 배우가 되다.

1997년 한국에서 “동성애자인권연대”의 전신 “대학동성애자인권연합”이 출범하다.

2001년 중국에서 동성애가 질병 목록에서 삭제되다.

2005년 이란에서 두 명의 십대 남성 동성애자 마흐무드 아스가리(Mahmoud Asgari)와 아야즈 마호니(Ayaz Marhoni)가 처형당하다.

2006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처음으로 무력충돌 없이 게이 퍼레이드가 진행되다.

2007년 터키 이스탄불에서 이슬람 국가 최초로 게이 퍼레이드가 열리다.

2008년 오레곤주 Silverton에서 미국 최초의 트랜스젠더 시장이 선출되다.

2009년 아이슬란드에서 동성애자 요한나 시거다도더(Jóhanna Sigurðardóttir)가 총리로 선출.

2010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최초로 합법적인 게이 퍼레이드가 열리다.

2010년 FTM(Female To Male) 트랜스젠더인 Thomas Beatie가 “아이를 낳은 최초의 남성”이 되다.

2011년 벨기에의 수상 엘리오 디 루포(Elio Di Rupo)가 최초의 남성 동성애자 정부수반이 되다.

2012년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이 동성 결혼을 지지하다.

(출처: http://en.wikipedia.org/wiki/Timeline_of_LGBT_history)

 


처음 내가 동성애자임을 깨닫게 됐을 때 내 인생은 불행하고 절망적일 거라고 생각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도 하지 못하고, 평범한 가정조차 가질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은 몇 년간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나에게 ‘최고의 행복’은 허락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해서 차선책을 선택하고 싶진 않았다. 이성애자가 되려고 노력하고 싶지도 않았고 이성애자처럼 살면서 나 자신을 숨기고 다른 사람을 속이면서 행복해 보이는 삶을 살고 싶진 않았다. 그것은 행복한 삶이 아니었다. 또한 동성애자로서의 삶이 아닌 이성애자로서의 삶을 ‘선택’한 책임은 오롯이 나에게 돌아올 것이 자명했다. 절대로 ‘최고의 행복’은 누릴 수 없을 삶을 내 손으로 선택하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나는 무모하지만 차선책은 잊고 엉망진창이고, 어디서부터 고쳐 나가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는 최선책을 선택했다. 혼자서 끙끙대며 동성애와 성소수자에 대해 공부하고, 어디부터 잘못됐는지 미친듯이 생각했다. 나는 급했다. ‘최고의 행복’을 위해서는 빨리 동성결혼을 합법화시켜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지금 생각해보니 이건 좀 귀여운 듯).

 

그렇게 블로그도 하고 사람들과 얘기도 하다 보니 생각보다 미래가 어둡지만은 않았다. 고칠 수 있는 부분도 많고,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도 많았다. 미국의 어떤 주에서는 동성결혼이 합법화되고 있었고, 내가 다니는 대학에는 성소수자 차별을 규탄하는 자보가 붙었다.

 

내가 볼 수 있었던 세상에는 동성애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성소수자는 불행하고, 시간이 지나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을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시간의 한 단면밖엔 볼 수 없었다.

 

이제 나는 성소수자 운동의 기나긴 역사의 중심에 서 있다. 그곳에서 이 운동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지켜보고 있고, 다른 나라에서 흘러갔던 성소수자 운동의 역사를 보고 있다. 이것은 내게 커다란 안도감이다. 이 삶이 더 나아질 거라는, ‘최고의 행복’을 누릴 수 있을거라는 안도감이다.

 

역사는 많은 말을 해주지만 그 중 내 마음에 가장 깊이 박히는 말은 이것이다.

“Freedom is not free.”(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내가 누리는 자유는 오래전 다른 누군가가 흘린 땀이었을 것이다.

 

이제 한 가지 질문이 머릿속에 남는다.

 

그럼 나는 나의 자유를 위해 무엇을 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