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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소식/퀴어퍼레이드

[재게재]사진으로 알아보는 스톤월 항쟁 이야기

by 행성인 2012. 5. 25.

정욜(동성애자인권연대 활동가)


이 글은 2009년 스톤월항쟁 40년을 맞아 맑시즘 토론에서 발표한 글로 스톤월 항쟁이 일어나기 전후의 정치적 상황과 스톤월 항쟁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6월이면 잊지 말아야 할 스톤월 항쟁. 여기서는 40년 전 성소수자들은 왜 경찰에 맞서 거리로 나왔고 어떤 과정을 거쳐 이후 변화했는지를 알아보도록 하자.


Part1. 스톤월 항쟁 이전(1) - 핑크트라이앵글

스톤월 항쟁을 이해하기 앞서 당시 사회와 그 이전 사회를 잠깐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성소수자들의 대표적인 상징 중의 하나인 핑크트라이앵글은 1930년대 이후 혁명이 패배하고 성해방 운동이 완전한 암흑기에 들어섰을 때 독일 나치가 게이들을 집단 수용소에 가둘 때 사용한 낙인의 표시다. 나치는 1928년 “남자 간 또는 여자 간의 사랑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은 우리의 적이다”라고 단언하고, 성해방운동의 성과로 만들어진 성과학연구소를 파괴하였으며 모든 자료를 불태웠다. 그리고 수만 명에 달하는 동성애자들을 집단학살과 의학실험의 대상으로 삼았다. 현재까지도 전 세계의 성소수자들은 나치즘에 희생된 성소수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전쟁반대의 대표적인 구호로서 핑크트라이앵글을 사용하고 있다. 80년대 후반에 등장한 대표적인 에이즈 운동단체 액트업은 '침묵은 곧 죽음'이라는 구호와 함께 역삼각형을 저항의 의미를 담아 분홍색 정삼각형을 사용하고 있다.

나치시대 수용소로 끌려가는 동성애자들


80년대 등장한 Act-up 핑크트라이앵글 구호 “Silence is Death!"



Part2. 스톤월 항쟁 이전(2) - 메타친 소사이어티와 빌리티스의 딸들(DOB)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냉전에 접어들면서 그동안 존재해왔던 성소수자들의 모습은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보였다. 소소한 모임들이야 있었겠지만 대표할 만한 단체가 없었다. 당시는 미국 매카시(미 상원의원, 파괴분자리스트를 만들어 탄압을 주도함)의 등장과 함께 일어난 매카시즘을 빼놓을 수가 없다. 공직사회에서 공산당원이나 아나키스트 등을 색출하기 시작했고 “동성애자는 공산주의자만큼 위험하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 피해는 동성애자들에게도 무자비하게 확산되었다. “성도착자들은 대부분 감정이 불안정하고 윤리의식이 부족해 간첩의 회유나 협박에 넘어가 쉽다”는 것이 그들의 이유였다. 1955년까지 8천명 이상이 위험인물이라는 이유로 해고되었다. (600명 이상이 성도착자라는 이유로 포함되었다.) 당시는 동성애자 치료를 목적으로 한 치료법들이 다양하게 소개된 시기이기도 하다. 최면술, 전기충격, 구토제, 수술 등이 있었고 레즈비언들은 호르몬투여나 음핵절제술을 받아야 했다.


억압이 거세지면서 이에 대항하는 운동들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당시 공산당원이었던 해리헤이는 공산당이 동성애를 “불건전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만들어진 불건전한 생활방식”으로 간주한 상황에서 쉽게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여하튼 그는 주변을 모아 메타친 소사이어티를 설립하였고 함정수사로 인해 희생양이 된 동성애자들을 지원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바로 동성애자들을 교정하여 윤리적으로 올바른 사회구성원으로 인정받게끔 하는 것을 목표로 삼은 것이다. 메타친 소사이어티 등장한 시기와 비슷하게 빌리티스의 딸들이라는 조직도 등장하였는데, 이념에선 큰 차이가 없었다. 그들이 펴낸 잡지 <래더Ladder>는 회원들에게 ‘사회에 대한 반항심을 키우지 말 것’과 ‘표면적인 준수’를 내보일 것을 주장했다. 이들의 이런 한계로 수년이 지났어도 단체가 크게 성장할 수 없었다. 심지어 단체 대표급인 해리헤이가 반미활동에 관한 청문회에 끌려갔을 때 그는 자신이 설립한 조직에서 추방당하기도 하였다.

메타친리뷰 - 메타친협회에서 1959년에 발간한 책자


빌리티스딸들- 래더는 1956년부터 1972년 사이 빌리티스의 딸들이 발간한 출판물. 사진은 1964년 5월에 출간된 래더의 표지



Part3. 스톤월 항쟁 이전(3) - 서서히 불길이 타오르다.

1960년대 들어서며 메타친 소사이어티와 DOB와 다른 새로운 ‘호모필 운동’이 등장하기 시작하기 시작했다. 특히 워싱턴DC에 설립된 메타친의 설립자인 프랭크 카메니의 활동이 주목할 만하다. 그는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일하는 직장(Amry Map Service)에서 해고되었고 복직을 위해 싸웠다. 카메니는 동성애자는 이성애자와 다르지 않다고 이야기했고 메타친협회 회원들과도 논쟁했다. 당시 공민권 운동의 영향을 받은 그는 1965년 백악관 앞이나 또 다른 정부기관 앞 피켓시위를 조직했다. 게이커뮤니티는 놀랐고 메타친협회와 DOB의 리더들은 굉장히 당황했다. 사회에 대한 반항심을 키우지 말고 단지 올바른 사회구성원으로 인정받는 게 목표였던 그들의 눈엔 카메니의 행동은 굉장히 위험했을 것이다. 당시는 미국정신의학회가 동성애를 정신질환으로 지정해놓았는데, 이 회의장에 들어가 정신과 치료가 게이와 레즈비언들의 삶에 끼치는 피해에 대해 토론했다.


2009년 프레드 카메니의 모습 : 워싱턴DC 메타친 설립자로 당시 백악관 앞에서 시위주도함


동시대는 벽장 속에 갇혀 있던 게이와 레즈비언들이 공민권 운동, 여성운동, 베트남전쟁 반대 시위에 참여하면서 그들 자신의 억압을 참을 수 없게 된 급진적인 새로운 세대가 갓 형성되었다. ‘검은 것이 아름답다’나 ‘블랙파워’와 같은 구호들을 급진적 운동의 용어로 만든 블랙파워의 영향을 받아 1968년 호모필 운동은 ‘동성애자는 아름답다’와 ‘게이 파워’를 자신들의 구호로 채택할 정도였다.


또 하나 소개할 사건은 1966년 스톤월 예행연습처럼 샌프란시스코 텐더로 지역의 한 카페테리아(Compton's Cafeteria)에서 벌어졌다. 일리노이주를 제외하고 1960년대 미국에서 동성애는 여전히 불법이었고 뉴욕의 경우 자신의 성에 맞는 의상 품목을 3가지 이하로 착용한 사람들을 체포하기도 하였다. 카페매니저는 카페 손님 가운데 트랜스젠더, 트랜스베스타이트, 드랙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시끄럽게 떠들고 있자 경찰을 불렀고, 카페로 온 경찰은 그 중 한명을 체포하려했다. 그 순간 그들은 유리창을 깨고 신문판매점을 불태우는 등 소요사태가 일어났다. 다음 날 더 많은 사람들이 카페테리아 앞으로 모였고, 피켓시위를 벌였다. 이 항쟁은 스톤월과 함께 성소수자 운동의 중요한 전환점이 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샌프란시스코의 트랜스젠더 운동의 시작으로 기록되어 있다.


2006.6.22 캠톤 카페테리아 투쟁 40년을 기념해 세운 기념비



Part4. 스톤월 항쟁의 시작 - 바에서 벗어나 거리로


뉴욕 크리스토퍼가에 위치한 ‘스톤월인’은 바 두 개와 주크박스가 있었고 드랙퀸들, 집 없는 게이들, 상대를 찾는 남자들이 뒤섞인 무리 속에 레즈비언들이 간간히 눈에 띄는 어두운 장소였다. 흐르는 물이 없어 사용한 잔을 고여 있는 물통에 대충 헹군 후 다시 잔을 채우고 또 다른 손님에게 내어졌다. 적어도 한번은 손님들 사이에 간염이 돈 적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영화감독 비토 루소는 스톤월을 이렇게 묘사했다. “너무 어리고, 너무 가난하고, 또는 너무 심해서 다른 어떤 곳에도 들어갈 수 없었던 사람들을 위한 술집”이라고. 스톤월은 뉴욕에서 게이출입을 허락한 유일한 바였고, 춤추는 것을 허용하였다. 주말에 입장할 수 있는 티켓은 3달러였고, 알코올을 교환할 수 있는 티켓 2장을 받을 수 있었다.


스톤월은 주류면허증이 없어 늘 경찰단속에 시달려야 했다. 경찰들이 뇌물을 챙겨가는 모습을 보는 건 너무 익숙했다. 스톤월은 경찰들이 예고 없이 들이닥칠 때 늘 하얀 경고등이 켜졌다. 그러면 바에 있던 사람들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 춤을 추거나 서로 몸을 더듬던 행동을 멈춰야 했다. 스톤월과 같은 술집에서 경찰들이 기습단속이 있었던 것은 너무 흔한 일이었다.



1969년 스톤월 바의 모습이곳은 어리고 가난하고 그 어디에도 들어갈 수 없었던 사람들을 위한 술집이었다.크리스토퍼가를 걸어다니는 경찰의 모습 스톤월은 주류허가증을 발급받지 않아 늘 경찰단속에 시달려야 했다.



저항이 시작된 6월 28일도 주류 판매를 허가 없이 운영하고 있었다는 핑계로 경찰단속이 있었다. 새벽 1시20분 어두운 정장의 경찰이 바로 들어왔다. 그날 밤 스톤월에는 200명에 가까운 손님들이 있었다고 한다. 경찰검문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순간 매우 혼란스러워졌고 경찰들은 차별적이고 혐오적인 말로 바에 있던 사람들을 농락했다. 손님들의 성별, 신분을 확인하고자 욕실, 화장실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남자로 분장한 여성들과, 드랙퀸, 종업원, 미성년자들을 우선 체포하려 했다.


하지만 이 날은 이전과 달랐다. 스톤월 주변으로 군중들이 모이기 시작했고 폭력적으로 그들을 호송차에 밀어 넣으려고 했을 때는 “돼지새끼들, 호모경찰들” 이라며 여기저기서 야유 소리가 쏟아졌다. 그들에게 동전과 술병을 던지기 시작했다. 위협을 느낀 경찰들은 스톤월 바 안으로 들어갔지만 군중들과 바 안에서 심한 모멸감을 느낀 성소수자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스톤월의 저항이 시작된 것이다. 당시 그 자리에 있던 경찰의 말처럼 그 날은 “전쟁 상황”과도 같았다. 시위가 시작된 지 45분 정도가 지나자 경찰은 전투경찰대에 도움을 요청했고, 당시 베트남전 반대 시위 확산대응을 위해 만들어진 정예부대가 도착했다. 그들은 헬멧을 쓰고 경찰봉이나 최루가스 등 다양한 병기 등을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2천명에 달했던 성소수자들은 뒤로 물러서기는커녕 더 격렬하게 저항했다. 새벽 4시 정도가 돼서야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다고 한다.


당시 목격자들의 진술에 따르면 게이 커뮤니티 내에서 가장 멸시받던 이들이 선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한다. 대다수 집에서 내쫓기거나, 학대를 피해 달아나 거리에서 살던 가난한 10대들이었다. 뾰족한 구두 굽으로 경찰을 때리며 조롱한 여장남자들은 저항과 유머가 조화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뉴욕데일리뉴스>는 당시 항쟁의 분위기를 “호모소굴 단속, 여왕벌들이 미친 듯이 침을 쏘아대다”라고 표현했다. 비록 성소수자들을 경멸하기 위한 기사라고 하지만 스톤월 항쟁은 누가 뭐라 해도 여왕벌의 침이 얼마나 매서운지를 보여준 역사가 되었다.


6월28일 소요가 일어났다는 소식이 각종 일간지에 실리고 널리 퍼지면서 다음날 저녁에는 더 많은 LGBT들과 조직된 좌파들이 모여들었다. 전날 일어났던 잔해들을 훑어보기 위해서, 또는 오랫동안 모두를 모욕하고 구타한 경찰들에게 복수할 기회를 잡기위해 밖으로 나왔다. 7월2일 수요일 밤까지 매일 저녁 폭력사태가 벌어졌다. 퀴어 무리들에게 창피를 당했다는 굴욕감에 경찰들은 수를 더 늘려 크리스토퍼 거리를 탈환하려 했지만 결국 그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억압과 천대 속에서 살았던 그 당시 성소수자들의 완전한 승리였다.


1969.6.29 뉴욕신문 표지를 장식한 사진“경찰에 맞서 싸우는 거리의 아이들”경찰에게 돌과 동전을 던지는 모습시위대를 진압하는 경찰의 모습


구세대 조직자들과 새롭게 떠오른 투사들 사이 갈등은 항쟁 일요일부터 드러나기 시작했다. 시장과 경찰을 만난 메타친 소속의 활동가들은 동성애자들이 무질서하고 바보같이 행동하는 여장남자들로 비친다고 생각했고 “우리 동성애자들은 빌리지 거리에서 평화적이고 조용한 품행을 유지해 주실 것을 호소합니다.”라는 게시물을 게재했다. 하지만 그들의 게시물은 찢겼고, 완전히 무시당했다.

메타친협회에서 스톤월에 붙인 게시물““우리 동성애자들은 빌리지 거리에서 평화적이고 조용한 품행을 유지해 주실 것을 호소 합니다.”라는 내용이 적혀있었지만 환영받지 못했다.


Part5. 반란에서 운동으로

둑이 터진 것처럼, 스톤월은 극소수의 남녀가 지난 20년 동안 의식적으로 바꿔왔던 활동의 분출이었다. 다양한 그룹들이 스톤월 주변으로 모이기 시작했고 항쟁이 지속하자 모임을 알리는 리플릿이 배포되었다. 이 모임은 처음에 항쟁을 기념하는 행진을 조직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메타친 뉴욕의 특별위원회로 존재했지만 이후 게이해방전선이라는 본격적인 하나의 조직으로 발전했다. 처음으로 게이라는 용어가 단체이름에 사용되었고, 이들의 이름에서 드러나듯이, 숨 막히는 동성애혐오만이 아니라 억압적이고 착취적인 체계전체에 대항하고자 했다. 내부에서도 운동의 정치적 관점을 둘러싼 논쟁이 존재했다. 급진화하는 활동가 대다수는 LGBT이슈와 의식향상에만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기존 방식을 탈피하고 뒤집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구역질나는 건 내가 아니라 나더러 구역질난다고 말하는 사회다’라는 슬로건처럼 이전세대와는 완전히 다른 활동을 보여주었다. 1969년 그들은 자신들의 신문인 <컴 아웃!>을 창간했다. 매호 2만 5천부 이상이 팔릴 정도로 그 당시 성소수자들은 독립적인 LGBT언론에 대한 갈증을 보여주기도 했다.

Gay Liberation Front(게이해방전선)에서 나온 신문 ‘Come out'


물론 한계도 존재했다. 그들은 늘 커밍아웃의 도전을 받았다. 내재화된 호모포비아를 버려야 혁명이 시작된다며 개인이 자유로울 것을 요구하였다. 사실 이것은 일하는 성소수자들에게 현실적으로 맞지 않는 요구였다. 또한 여타의 다른 운동들과 충분히 조우하기 전 시들해졌다. 일부 활동가들은 분리해 나와 ‘Gay Activist Allian(GAA)’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이들은 오로지 동성애자 해방에 헌신하고 명시적인 관계가 없는 어떤 활동에도 참여하지 않는다고 규정했다. 이쯤만 봐도 내부에서 상당한 논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서로에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협력적으로 경찰단속에 항의하는 운동과 스톤월 기념행진을 공동으로 기획하였다. 또한 이들은 1970년, 흑표범당의 공개적인 지지성명을 이끌어내기도 하였으며 1970년 6월 스톤월 항쟁 1주년을 맞아 최초의 성소수자들의 행진이 센트럴파크에서 개최되었다. 퍼레이드는 뉴욕, 샌프란시스코, 시카고를 시작으로 다음해 달라스, 밀워키, 런던, 파리, 스톡홀롬 등으로 확대되었고 1972년부터는 미국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그래도 그 시대에 가장 위대한 승리 가운데 하나는 미국정신의학회가 동성애를 정신질환으로 지정한 규정을 삭제한 것일 것이다.(1973)

스톤월 항쟁 후 1970년 최초의 성소수자 행진 모습


스톤월은 미국을 넘어 영국 GLF, 이탈리아 푸오리, 프랑스 동성애자혁명행동 등 급진적인 운동이 전세계 지역에 형성될 수 있게 하였다. 물론 1970년 후반 들어 GLF에서 레즈비언들이 분리해나가며 별도 조직을 형성하는 등 정치가 분화되는 상황을 보이기도 했지만, 그것 역시 스톤월이 없었다면 과거 메타친 수준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스톤월 항쟁 40년을 기념하는 바 전경




시사점

누가 뭐라 해도 스톤월 항쟁은 전 세계 성소수자 인권의 시계를 빠르게 변화시켜놓았다. 물론 아직까지 사형이 집행되고 동성애행위를 불법으로 규정하는 나라들이 있지만 운동을 빠르게 시작한 서유럽 국가 일부(네덜란드, 덴마크 등)와 캐나다, 미국 일부 주에서는 동성 간 결혼할 수 있거나 입양할 수 있는 권리가 쟁취되었다. 이들 나라들에서도 혐오범죄에 노출된 성소수자들이 상당한 만큼 완전한 해결은 아니다. 하지만 이 만큼이라도 인권신장이 진전될 수 있었던 것은 스톤월 항쟁 후 전 세계의 많은 성소수자들이 자긍심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두 번째는 작은 권리라고 하더라도 아래로부터의 요구와 대중적이고 폭발적인 운동이 있어야 빠르게 쟁취될 수 있다는 점이다. 소수의 활동가들의 노력 또한 점진적인 발전을 이루긴 하지만 성소수자 대중들에 의해 움직이는 운동은 더욱 강력하게 전달된다. 하지만 스톤월과 다르게 군중들의 소요가 일시적으로 끝나고 이후 운동으로 연결되지 못한다면, 권리는 그대로 정체될 수 있다. 물론 투쟁을 경험한 성소수자들의 의식수준까지 이 전으로 되돌아간다는 의미는 아니다.


세 번째는 스톤월 항쟁 이후 등장한 운동이 급진화하면서, 서로 다른 사람들이 연대하고 투쟁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를 설명해 주었다. 흑표범당으로부터 받은 성소수자 지지선언은 단지 성소수자들이 좋았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성차별적인 태도나 동성애혐오적인 태도가 내부에서도 일부 있었겠지만, 그 이전의 낡은 가치로부터 완전히 단절시킬 수 있었던 것은 연대를 통한 투쟁을 함께 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마지막으로 스톤월에 있던 손님들이 과연 경찰단속과 폭력이 다른 날 보다 심했기 때문에 아주 우연히 소요까지 번질 수 있었겠냐는 것이다. 그들은 늘 그랬듯이 참고 있었을 수도 있었다. 직접적인 촉매제가 무엇이었든 간에 그 당시는 1969년이었고 사회적 격변과 저항으로 뒤흔들린 사회 속에 있었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공민권 운동이 성장한 시기의 이런 활동에 영향을 받은 성소수자들의 투쟁이 일부 스톤월 이전에도 존재했음을 확인했다. 즉 민주주의와 인권을 지키고자 하는 대규모 저항운동은 성소수자들 삶과 의식의 변화를 함께 동반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