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1월 9일 일요일, 대학로에서는 전국노동자대회가 있었다. 아침부터 쏟아지는 성가신 빗줄기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수많은 사람들이 목소리를 내면서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 날 동인련은 ‘한국감염인인권연대 카노스’와 함께 12월 1일 ‘세계 에이즈의 날’ 행사를 위한 모금 활동과 레드리본 페이스 선언을 받기 위해 대학로로 나갔다.
비구름이 조금씩 걷히면서 태양이 보이기 시작했고
무겁게 젖은 무지개 깃발도 바람을 맞으며 펄럭였다.
가판을 만들고 홍보를 시작하면서 다행히 비가 그치기 시작했다. 돌아다니는 사람들도 조금씩 늘어나면서 홍보를 담당한 사람들이 홍보물을 나누어 주며 소리쳤다.
“HIV/AIDS 감염인의 인권을 지지하는 페이스 선언에 함께 동참해 주세요!”
“감염인의 인권 지지와 함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러분의 얼굴을 보여주세요!”
나 역시도 홍보물을 나눠주면서 큰 소리로 외치긴 했지만 이런 종류의 활동을 처음 해봤던지라 초반부에는 무척 어색했고 목소리도 크게 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호의적인(?) 시선과 선뜻선뜻 홍보물을 받아가는 것을 보면서 용기를 얻어 나 역시도 분위기에 고무되어 큰 목소리로 페이스 선언에 참여해주길 호소했다.
많은 사람들이 페이스 선언에 참여를 했고 후원도 해주었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 사람들이 왜 이런데서 이런 걸 하나’하는 눈빛으로 쳐다보기도 했다. 나눠주는 홍보물을 관성적으로 받아가는 사람도 있었고, 어떤 내용인지 이해하지 못하실 것 같은 연세의 할아버지 분들이 홍보물을 달라고 하기도 했다. 이어폰을 꽂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우리 쪽에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지나갔고, 홍보물을 건네주자 “됐어요.”라는 말만 내뱉고 지나가는 사람도 있었다.
두어 시간 동안 홍보가 끝날 때쯤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전국노동자대회 때 이런 행사를 하는 걸까? 물론 다른 행사와 겹치지 않게 따로 캠페인을 벌이는 날도 있었지만 사방팔방에서 ‘노동’, ‘투쟁’, ‘MB OUT’등을 외치는 곳에서 레드리본 캠페인이 이 날과 어울리는지 고민하게 되었다.
답은 금방 나왔다. 우리는 ‘인권’을 가지고 연대하고 있었고 11월 9일에 나온 모든 단체들이 가지고 있는 이슈도 ‘인권’이라는 공통분모(노동권, 생존권 등)를 가지고 있었다. 좁게 보자면 자본주의, 넓게 보자면 자본주의 이상의 권력을 행사하는 이름 모를 거대한 시스템 안에서 우리는 같은 흐름 속에 있는 셈이다.
“서로 같다면 연대할 필요가 없어요. 그냥 같이 활동하면 되요. 다르기 때문에 ‘연대’를 하는 거죠.”라는 어느 활동가의 말이 생각난다. 그 날 우리의 캠페인을 보며 의문스러운 시선을 던졌던 사람들은 왜 우리가 거기에서 소리치고 있는지 알 수 없었기에 그런 시선을 보냈을 것이다.
‘로슈’는 자본주의의 거대한 그늘을 앞세워
PL의 생명을 담보로 이윤을 추구하고 있다.
‘이건 당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하는, 이른바 ‘정체성 정치’는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는 데는 효과가 있을지 몰라도 역사적으로 볼 때는 적절하지 않은 운동의 방식으로 알려져 있다. 결과적으로 각자의 정체성 때문에 연대의 지점을 찾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본주의라는 이 엄청난 시스템에서(나는 자본주의 이상의 무엇인가가 더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딱 무엇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무엇인가가 있다고는 느끼지만 ‘무엇이다’라고 알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굳이 정체성에 연연하지 않고 함께할 수 있는 지점을 찾을 수 있다. 인권과 생명이 시장의 상품이 되고 인륜보다 이윤이 우선시되는 이 흐름 속에서, 그 거대한 흐름에서 벗어나기 위해 함께 연대하고 소통하는 것이다.
이 원고가 웹진에 실릴 때면 레드리본 캠페인은 끝났을 것이다.
뭔지 몰라서, 하는 방법을 몰라서, 모르고 있어서 못 했던 당신,
내년 12월 1일까지 홀로 기다리지 말고 같이 연대해보자.
Anima _ 동성애자인권연대 걸음[거:름]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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