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즈 감염인은 꽃보다 아름답다. 함부로 꺾지도 짓밟지도 말라“
12월 1일은 세계 에이즈의 날이다.
1988년 1월, 영국 런던에서 열린 세계보건장관회의에 참가한 148개국이 에이즈 예방을 위해 ‘런던선언’을 채택하면서 이 날이 제정되었다.
그로부터 매년 12월 1일에는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에서 에이즈 예방 및 에이즈 감염인들에 대한 차별과 편견을 없애기 위한 다양한 행사들이 열려오고 있다.
사회적 편견과 낙인
1985년 한국에서 에이즈 감염인이 처음 발견된 직후 한국에서는 정부의 에이즈예방법에 따라 감염인은 언제든 준비된 범죄자로 취급됐고, 끊임없는 색출과 감시·통제의 대상이 됐다. 그래야만 ‘에이즈를 예방할 수 있다’는 게 이 정부의 신념인 듯했다. 사람들에게 ‘에이즈에 걸리면 죽는다.’고 겁을 주었고, 감염인들에겐 ‘에이즈 바이러스를 퍼트리는 걸어 다니는 시한폭탄’이라는 사회적 낙인이 들씌워졌다. 감염인을 비난하고 멀리하는 게 ‘에이즈를 예방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신기루가 만들어졌다. 정부가 이 ‘예비 범죄자들’에게 붙인 꼬리표는 ‘신의 천벌을 받은 문란한 존재’이자, ‘국민 건강을 해칠 수 있는 위험하고 더러운 존재’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회적 편견과 낙인으로 23년이 지난 현재까지 에이즈 감염인은 직장에서, 병원에서, 가족과 친구들에게서 버림받으며 사회적 죽임을 당하고 있다. 감염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살던 집에서 쫓겨나고, 병원에서 치료를 거부당하기 일쑤다. 직장 건강검진에 에이즈가 포함돼 있는 경우도 있어서, 그 결과가 사업주에게 전달되어 해고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감염인의 주민등록번호·성정체성·성행태 등에 관한 정보까지 질병관리본부에 차곡차곡 쌓이고, 이 정보들을 ‘질병관리’라는 미명 아래 함부로 사용한다. 또한, 에이즈에 감염된 외국인은 한국에 들어올 수 없고, 감염이 확인되면 강제출국을 당한다.
에이즈는 수혈이나 성행위를 통해서, 혹은 에이즈에 걸린 산모에게서 태아에게 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HIV)가 감염돼 면역력이 약해지는 질병이다. 이러한 에이즈는 이미 의학의 발전으로 치료제를 복용하면 고혈압이나 당뇨병처럼 관리할 수 있는 만성질병이 됐다. 2006년 11월 미국에서 발표된 한 연구 결과를 보면, 현재 미국 에이즈 감염인의 평균수명은 감염 뒤 24년에 이른다. 물이나 음식을 통해 감염되는 콜레라나 호흡기를 통해 감염되는 결핵과 달리 에이즈는 혈액이나 유즙을 통해 감염되기 때문에 일상생활을 통해서는 감염의 위험이 전혀 없다.
의학적으로 보더라도 에이즈 감염의 위험성은 성관계를 가지는 모든 이들, 수혈이나 헌혈 등 혈액을 다루는 모든 이들에게 동일하게 적용가능하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에 대해 무지한 듯한 정부의 대응은 정부 스스로를 오류에 빠뜨리고 말았다. 감염인·동성애자·성노동자·이주노동자에게만 예방책임을 강요하는 이제까지의 정부의 대응책으로는 에이즈를 예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감염인과 소외계층을 향한 차별적인 시선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정부의 잘못된 대응책 덕분에 우리사회에서 에이즈 검사를 받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 되었다. 지금도 자신이 에이즈에 걸린 줄도 모르고, 에이즈 검사를 받을 엄두도 못 내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에이즈 발병률이 줄어들길 바라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이다.
이렇듯, 정부의 어설픈 대응책처럼 감염인만을 감시하고 외국인, 성노동자 등 몇몇 집단에만 에이즈 검사를 강요하고, 기껏 콘돔이나 던져주는 것이야말로 국민건강권을 내팽개치는 길이다.
에이즈 감염인이란 사실을 당당히 밝힌다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고, 지지와 보살핌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에이즈 예방의 지름길은 감염인들의 인권이 보장될 때만이 가능하다.
에이즈의 날을 HIV/AIDS감염인 인권의 날로!
에이즈 감염인들과 인권단체 회원들, 그리고 에이즈 감염인들의 인권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모여 만든 “HIV/AIDS 감염인 인권의 날 준비위원회”가 올해로 3년째가 되었다.
HIV/AIDS감염인 인권의 날 준비위원회는 감염인들을 감시와 통제의 대상으로만 바라보고 감염인들의 인권을 침해해온 정부를 비판하며 ‘에이즈 감염인들의 인권증진이 진정한 에이즈 예방이다.’라는 슬로건을 가지고 만들어진 공동행동이다.
그 동안 이 공동행동은 매년 꾸준히 에이즈의 날을 HIV/AIDS 감염인 인권의 날로 선포하고 감염인들의 인권증진을 위한 활동을 해왔다.
올해는 감염인들의 인권을 지지하는 1201명의 페이스선언 조직과 거리 캠페인, 토론회와 문화제를 개최하였다.
그리고 12월 1일, 세계에이즈의 날을 맞아 감염인들과 인권주간 준비위원회는 사회적 낙인과 편견을 깨우는 소리라는 퍼포먼스와 함께 치료접근권 등을 주장하며 첫 집회를 열었다.
그 동안 자신들의 날이었음에도 한번도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감염인들은, 이날 집회와 거리 시위를 통해 23년 만에 처음으로 세상 밖으로 나와 자신의 목소리를 내었다.
감염인들은 집회를 마친 뒤 정부주최로 열린 에이즈의 날 공식 기념행사가 열린 프레스 센터까지 행진을 한 후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 _ 민중언론 참세상 이정원 기자
이 날 기자회견에서 나누리+대표인 윤가브리엘은
“23년 동안 한국 사회는 많이 변했지만, 에이즈 환자들은 달라진 게 없다” 며 “ 23년 전에는 약이 없어 죽어갔지만, 지금은 다국적 제약회사의 이윤논리 때문에 약이 있어도 사 먹을 수 없어서 죽어간다”고 말했다.
지난 2004년 건강보험에 등재된 에이즈 치료제, 푸제온에 대해 다국적 제약기업 ‘로슈’는 자신들이 요구한 약값이 아니라며 4년째 국내에 시판을 하지 않고 있다.
특허라는 독점을 무기로 이 제약회사는 근거 없이 비싼 약값을 주장하고 환자들이 약품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고 있지만, 정부는 아무런 대책도 없이 수수방관하고 있다.
이에 감염인들이 복지부에 푸제온 공급의 강제실시를 요구했지만, 복지부는 아무런 조치도 취할 수 없다며 환자의 건강권을 내팽개치고 있는 실정이다. 감염인들은 제약회사와 정부의 무관심과 무능력 사이에서, 치료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죽음을 기다려야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이다.
성소수자, HIV/AIDS를 껴안다.
그동안 사회보수화가 추진될 때마다 동성애자와 같은 사회적 약자들은 에이즈라는 무기로 꾸준히 공격받아왔다.
이주노동자들은 감염사실이 확인될 때마다 강제 추방되어야 하고, 성매매여성들은 본인의 선택과 무관하게 강제검진을 받아야 한다. 동성애자 역시 에이즈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한국의 성소수자 커뮤니티는 동성애자 감염인들에 대한 사회의 편견과 낙인을 적극적으로 방어하지 못했고, 자신과는 다르다며 끊임없이 분리시키려는 시도를 해왔다.
그러나 동성애자인권연대는 이러한 커뮤니티 내 분위기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동성애자 감염인들을 우리와 함께 해야 할 친구이며 커뮤니티 내에서 우리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한다고 호소해왔다.
동성애자 감염인들을 외면하는 것으로는 성소수자들을 문란한 집단으로 바라보는 사회적 편견을 바로 잡을 수 없다는 생각이, 그리고 감염인의 인권증진이 곧 에이즈 예방이라는 보편타당한 생각이 초석이 되어야만 동성애자들을 공격하는 이데올로기에 우리는 더욱 효과적으로 맞서 싸울 수 있을 것이다.
올해도 역시 동성애자인권연대는 인권주간 준비위원회, 그리고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와 함께 HIV/AIDS 감염인 인권을 지지하는 공동캠페인과 페이스선언을 서울 종로에서 열고, 12월 1일 HIV/AIDS 감염인 인권의 날에 함께 할 것을 호소했다. 많은 사람들이 감염인 인권에 지지를 표명하는 페이스 선언에 동참해 주었고, 감염인 인권의 중요성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 주었다. 이러한 성과들은 앞으로 이루어질 HIV/AIDS 감염인 인권 증진을 위한 행동에 있어 희망의 신호탄으로서 평가 가능하다.
사진 _ 민중언론 참세상 이정원 기자
12월 1일, HIV/AIDS 감염인 인권의 날 정부행사에서 한 동성애자 감염인은 아래와 같은 구호들을 외쳤다.
“인권 없는 에이즈의 날 필요 없다. 감염인 인권을 보장하라” 그리고,
“에이즈 감염인은 꽃보다 아름답다. 함부로 꺾지도 짓밟지도 말라”고.
그가 외친 이러한 구호들은 우리 사회가 에이즈 감염인들에 대해 가져야 할 올바른 태도를 상징적으로 잘 드러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고, 이 구호를 가슴 깊이 아로새겨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에이즈는 빈곤을 퇴치하고 약을 보급하고 성에 대한 보수적인 편견이 없어지고, 감염인들에 대한 인권이 보장될 때만이 예방될 수 있다. 행정적 편의나 정치논리에 의해 꽃보다 아름다운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권이 함부로 꺾어지거나 짓밟히는 일들이 더 이상 용납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정숙 _ 동성애자인권연대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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