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 (동성애자인권연대 웹진기획팀)
한겨레와 경향에 실린 ‘동성애 혐오 조장 광고’
동성애 혐오를 조장하는 신문 광고는 예전부터 조선일보와 국민일보 등에 실려왔다. 그런 광고가 신문이라는 매체에 실릴 수 있다는 것이 충격적이긴 했지만, 이들 신문사의 논조를 모르고 있던 것도 아니었으니 그저 ‘또 하나의 동성애 혐오 사건’ 정도로만 생각했다. 문제는 얼마 전 한겨레신문과 경향신문에도 이 같은 광고가 실린 것이었다. 이제까지 알아왔던 한겨레와 경향의 논조와는 맞지 않았다. 한마디로 배신당한 기분이었다. 이것밖에 안 됐던 걸까? 성소수자 운동은 진보운동에 끼워주지 않는 것이었나? 아니면, 인권은 광고료에 팔아도 될 만큼 하찮은 것이었나? 대체 이 광고가 진보를 표방하는 일간지에 전면광고로 실릴 수 있었던 건 무엇 때문이었을까?
한겨레와 경향에 실린 '한국교회언론회'의 전면광고
이에 대해 경향신문 편집국 관계자는 신문사의 광고 사정이 좋지 않다는 핑계를 댔다고 하고, 한겨레에 실린 광고는 한겨레 본사가 아닌 수원광고지사를 통해 실린 것이라고 변명했다고 하는데, 한겨레 수원광고지사의 관계자는 다시는 이런 광고를 싣지 않겠다고 하면서도,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고 한다.
“누가 정답인지는 끝까지 살아 보아야 아는 것이고, 답이 나오지 않으면 각자의 삶을 살면 된다”
“동성애 문제도 정답이 없다고 본다”
“저는 동성애자들을 비토하지 않는다”
“동성애자의 생각을 이성애자에게 강요해서는 안 된다”
성소수자를 비난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소수자를 지지하는 게 옳은 건 아니라는 말인 것 같다.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를 조장하는 광고를 싣지 않는 것이, 그리고 그 때문에 광고 수익을 포기하는 것이 “동성애자의 생각을 이성애자에게 강요”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동성애 문제”가 “정답이 없다”는 말도 재미있다. 이 사람은 이런 말도 했다고 한다.
“기업 둘이 선의의 경쟁을 하고 있다고 가정할 때 둘 중 한 쪽의 의견만 지면에 실어야 하는가”, “반대 의견을 실을 수 있으면 싣겠다”
이쯤 되면 다시는 동성애 혐오 광고를 싣지 않겠다는 말이 거짓말이었음을, 설사 거짓말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아무런 원칙적 입장 없이 한 말이었음을 누구나 알 수 있다. 중립성과 객관성을 지키겠다는 말인데, 글쎄. 과연 이걸 중립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성소수자 인권 운동과 혐오 세력의 대립은 기업 간의 경쟁과는 분명히 다르다.
네이버 웹툰 도전만화에 실린 ‘동성애 혐오 조장 만화’
신문사에만 문제가 있는 게 아니다. 최근 네이버 만화 페이지에는 ‘도전만화’로 “동성애 옹호 교과서의 문제점을 알아보자”라는 만화가 게재됐다. 이 만화는 대표적인 동성애 혐오 단체인 ‘바른성문화를위한국민연합(바성연)’이 게시한 것으로, 몇몇 출판사의 고등학교 ‘생활과 윤리’ 교과서에 성소수자 인권 관련 내용이 수록된 것에 대해 “동성애를 일방적으로 옹호하는 내용만을 담아 위험하다"며 비과학적인 억지 주장을 사실인 것처럼 유포하는 내용으로 점철된 만화다.
네이버 도전 만화 “동성애 옹호 교과서의 문제점을 알아보자”의 한 컷.
이 만화가 네이버 ‘도전만화’에 처음 게시된 후, 사람들의 항의로 인해 잠깐 동안 만화를 볼 수 없는 ‘블라인드’ 처리가 됐다. ‘블라인드’ 처리는 항의가 많이 들어온 만화에 대해 네이버에서 일단 비공개 상태로 만든 후, 네이버 내부에서 논의를 거쳐 그 만화를 삭제할 것인지 다시 공개 상태로 되돌릴 것인지를 결정하는 단계다. 문제는 이 만화가 ‘블라인드’ 처리가 된 후 다시 공개가 됐다는 것인데, 이에 대해 동인련의 한 회원이 네이버에 문제 제기를 하자 다음과 같은 답장이 돌아왔다고 한다.
동인련의 한 회원이 네이버에 보낸 문제 제기에 대해 네이버가 보낸 답장
"사용자의 의사를 존중하고 창작에 제한을 두지 않기 위하여 폭력성, 선정성에 대한 내용을 고려하되 주제와 소재에 따른 게시 유무를 자체적으로 판단하지 않고 있습니다."
네이버는 아마도 이 만화가 전혀 폭력적이지 않고, 행동하지 않음으로서 중립성을 지키면 그만이라는 생각인 것 같다.
중립성이라는 망상 - 중립적이고 객관적이어도 공정하지 않을 수 있다.
중립성 혹은 객관성은 공정성과는 분명 다른 개념이다. 쉽게 이해하고 싶다면 한국의 민주화 항쟁 역사를 떠올리면 된다. 그 시절 학생이었던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은 행동하지 않는 것이 죄스러운 일이었다고 말한다. 용기 내서 소리 내어 말하지 않는 것이, 침묵하는 것 그 자체가 억압의 체제를 더 공고히 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 시절, 만약 한국의 대표 신문사가 독재 정권을 옹호하는 전면광고를 ‘객관성과 중립성’을 지키기 위해 실었다면 사람들이 뭐라고 했을까? 독재 정권을 옹호하는 시각과 비판하는 시각의 ‘형평성’을 맞추기 위해서 말이다. 만약 그 시절 유명 만화 잡지에 ‘객관성’을 지키기 위해 독재 정권 비판 세력을 빨갱이로 몰아세우는 만화가 실렸다면 사람들은 그 잡지에 대해 뭐라고 했을까.
성소수자의 권리는 민주 국가의 헌법에 근거해 당연히 보장 받아야 하는 권리이다. 민주화 항쟁과 성소수자 인권 운동은 차원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민주주의의 원칙에 의해 보장 받아야 한다는 점에서 전혀 다를 게 없다. 독재 정권 시절이나 성소수자가 오늘날 한국에서 처한 현실처럼, 힘의 저울이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상황에서는, 중립성을 지키려 하는 것이 오히려 공정성을 해치게 된다. 삐뚤어진 세상에서는 오직 삐뚤어짐으로써만 바로 설 수 있는 것이다. 1
남아공의 인종분리정책(아파르트헤이트) 반대에 평생을 바친 인권 운동가로 1984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으며, 최근 성소수자 인권 운동을 공개적으로 지지한 남아공 성공회 대주교 데스몬드 투투는 이렇게 말했다.
"불의한 상황 속에서 중립을 지킨다면, 당신은 억압자의 편에 서기로 선택한 것이다(If you are neutral in situations of injustice, you have chosen the side of the oppressor)”
기울어진 세계의 인식
세상이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진보 운동의 출발점이다. 교과서에선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이 평등하다고 가르쳐도, 힘 있는 자와 힘 없는 자가 법 앞에 평등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것 말이다. 한국은 성소수자가 ‘공정하게’ 살아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동성 애인과 밤늦게 손잡고 길을 걷다가는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르고, 이성애 커플이 결혼함으로써 갖는 수많은 경제적/사회문화적 권리들을 동성 커플은 가질 수 없다. 성별정정을 하고 싶은 트랜스젠더들은 의료보험 적용도 안되는 정신과 진단서, 호르몬 치료, 생식 능력 제거, 성전환 수술의 비용을 부모님의 도움 없이 마련하기 위해 20대의 전부를 바친다. 그 누구도 이런 혹독한 삶을 살게 될 성정체성을 “선택”하지는 않는다.
‘인권’이라는 단어는 당연히 힘의 불균형이 있는 상황을 전제하고 있는 말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중립적이라는 것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공정한 것일 수 없다. 인권이 중립적일 수 없는 이유다. 한겨레와 경향, 네이버 웹툰은 결국, 한국 사회가 성소수자에게 공정한 사회라고, 아무런 차별과 억압도 받고 있지 않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 현존하는 국제인권법에서 성소수자가 어떤 권리를 가질 수 있어야 하는지 궁금하다면 요그야카르타 원칙을 참고하라. http://www.tongcenter.org/nondiscrim/sogi/yogyakarta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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