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사(동성애자인권연대 웹진기획팀)


이 글은 2014 LGBT 인권포럼에서 동인련이 기획한 이야기방 “무지개 깃발은 왜 거리로 나가는가?” 시간에 발표한 내용 중 일부를 정리한 것이다. 저항운동과 함께 해온 무지개의 역사를 간략히 살펴본 뒤 참가자들은 진보적 사회운동과 성소수자운동의 관계, 연대의 의미 등에 대해 함께 토론했다.



거리의 무지개 깃발은 언제나 설렘, 흥분, 자랑스러움을 느끼게 합니다. 많은 경우 성소수자들이 존재를 부정당하고, 비난받기 때문에 스스로를 드러내는 일조차 용기와 자신감이 필요하기 때문이죠.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존중받은 경험이 없는 성소수자들이 무지개 깃발과 함께 거리에 섰을 때 느끼는 해방감과 자긍심은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성적 다양성은 모든 역사와 문화에 존재했지만 그 사실은 우리의 이름을 찾고 또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존중받는 것을 자동으로 보장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 존재와 삶은 계속해서 싸워왔습니다. 그리고 이런 우리의 싸움은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위한 수많은 투쟁들로부터 영감을 받고 관계를 맺어 왔지요.



영국의 사회주의자 에드워드 카펜터와 그의 파트너 조지 머렐. 두 사람은 30년 가까이 공개적으로 동거했다.



독일 동성애운동의 선구자 마그누스 히르슈펠트. 그는 독일사민당원이었다. 독일 공산당 지도자였던 펠릭스 할레. 그는 히르슈펠트가 설립한 성과학연구소에서도 활동하는 저명한 성개혁 활동가이기도 했다.




성소수자 해방운동의 선구자들 중에는 급진적인 사회운동가들이 많았습니다. 보편적 인권과 민주주의라는 사상이 확산되고 사회주의의 이상이 떠오른 시기에 여성해방과 성적 자유 등의 이슈가 함께 제기됐기 때문입니다. 프랑스혁명은 유럽의 많은 지역에서 동성애를 비범죄화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영국의 유명한 사회주의자인 에드워드 카펜터는 동성 연인과 말년에 공개적으로 함께 살면서 노동계급에게 사회주의와 새로운 세계의 필요성을 알리는 활동을 벌였죠. 동성애 비범죄화를 위한 운동이 대중적 운동으로 발전한 독일에서는 사민당과 공산당이 동성애자 인권을 지지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러시아에서는 혁명이 성공하면서 동성애 처벌법이 철폐되고 동성간의 결혼을 인정하는 등 급진적인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물론, 스탈린이 집권하고 혁명이 패배하면서 성소수자 탄압이 다시 시작됐고, 독일에서는 나치의 집권으로 성소수자들에게도 암흑 같은 시간이 찾아오게 됩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 사회도 성소수자들을 가혹하게 탄압하는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동성애자들은 처벌받고, 해고되고, 거리와 술집에서 경찰들에게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매카시즘 광풍 속에서 공산주의자뿐만 아니라 동성애자들도 반미국적인 존재로 취급받았죠. 요즘 한국에서 ‘종북 게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듯이 당시 미국에서는 ‘핑코-코미-퀴어(호모-빨갱이-변태)’라는 말이 있었다고 합니다. 


매타친협회 창립회원인 해리 헤이. 그는 오랜 공산당원이었다. Photo: LeRoy Robbins


메타친협회 회원들의 크리스마스 파티. 사진출처: http://en.wikipedia.org/wiki/File:Mattxmas.jpg




하지만 성소수자들은 무기력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전후 공민권운동이 성장하던 시기, 인권을 주장하는 동성애자 단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1950년에 설립된 매타친협회는 동성애자들을 단지 불행한 개인들이 아니라 부당하게 박해받는 소수 집단 중 하나라고 생각했죠. 창립자인 해리 헤이는 공산당원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미국 공산당은 동성애에 대해 잘못된 태도를 취하고 있었지만 인종차별주의와 불의에 맞서 투쟁하던 전통은 동성애자들에게도 영감을 주었던 것입니다. 매카시즘 선풍 속에 해리 헤이는 매타친협회를 떠났지만 이후로도 다양한 단체에 참여하며 급진적인 성소수자 운동을 지속했습니다. 1955년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들어진 레즈비언 단체 빌리티스의 딸들도 동성애자 역사와 권리에 대해 교육하고 잡지를 내는 등의 활동을 벌였습니다.



매타친협회와 빌리티스의딸들이 낸 잡지들


빌리티스의딸들 창립자인 델 마틴과 필리스 라이언의 결혼식 장면. 두 사람은 반평생 넘게 함께하고 2004년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캘리포니아에서 동성결혼이 주민발의안8에 의해 뒤집어지는 우여곡절로 2008년 다시 결혼하게 된다.


공민권운동과 반전운동이 성장하면서 성소수자 커뮤니티의 저항도 점차 늘어났습니다. 매타친협회 워싱턴DC 지부 창립자인 프랭크 캐미니는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미군에서 해고된 것에 맞서 소송을 벌였고, 정부 기관들 앞에서 동성애자 권리를 요구하는 최초의 공개적인 피켓 시위를 조직했습니다. 60년대 중반부터 특히 경찰 폭력에 항의하는 시위와 소요들이 심심찮게 벌어졌습니다. 술집에서 성소수자를 괴롭히고 체포하는 일들이 일상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스톤월 항쟁 이전에도 샌프란시스코의 캠톤 카페테리아 항쟁, 블랙캣터번 단속 항의 시위, 패치 항쟁 등 스톤월의 예행연습이라 부를만한 사건들이 여러 번 일어났습니다.




샌프란시스코 텐더로인에 있던 캠톤카페테리아에서 트랜스젠더들이 술집과 경찰의 차별과 괴롭힘에 저항하면서 벌어진 항쟁 기념비. 사진출처: http://knowledgeequalsblackpower.tumblr.com/post/55354473513/another-side-of-queer-and-trans-history-the-comptons 1967년 1월 1일 경찰이 로스앤젤레스의 바 블랙캣터번을 급습하고 성소수자들을 연행한 것에 항의하는 시위. 사진출처: http://www.lamag.com/citythink/invisible-la/2013/09/02/before-stonewall


스톤월 항쟁. 사진: Fred McDarrah



그리고 68혁명의 여파 속에 1969년 6월 뉴욕에서 벌어진 스톤월 항쟁은 성소수자 운동의 새 장을 열었습니다. 이 항쟁에 참여한 새로운 세대의 활동가들은 ‘게이해방전선(GLF)’을 결성하고 급진적인 성소수자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미국에 맞서 영웅적인 투쟁을 벌인 베트남민족해방전선에서 이름을 따온 이들은 이렇게 선언했죠. “우리는 모든 천대받는 사람들과 우리를 동일시한다. 베트남인들의 투쟁, 제3세계, 흑인들, 노동자들, 이 썩어빠지고 더럽고 추악한 엉망진창인 자본주의의 음모가 천대하는 모든 이들이 곧 우리다.”



게이해방전선이 발행한 잡지 <컴아웃!!>


GLF는 스톤월항쟁을 기념하며 1970년 ‘크리스토퍼 거리 게이 해방의 날’ 집회를 열기도 했습니다. 이 행진은 오늘날 전 세계 자긍심 행진의 시초입니다. GLF가 낸 잡지는 이 날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오늘은 모든 동성애자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 처음으로 성차별적 사회가 우리를 가둬놓은 감옥을 부수고 분노와 자긍심, 즐거움을 표현하며 거리에 나선 것이다.” GLF는 반전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를 조장하는 언론사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습니다. 






게이해방전선과 70년대 초 게이해방운동의 다양한 활동들. 사진 :Diana Davies, 출처: http://digitalgallery.nypl.org/ 



GLF 창립 멤버이자 미국 트랜스젠더 운동의 선구자인 실비아 리베라는 이렇게 당시를 회상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여성운동, 평화운동, 공민권운동에 참여했다. 우리는 모두 급진주의자들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운동을 설득할 수 있었다. 나는 급진적인 혁명가였다. 그때 나는 세상이 나와 내 친구들을 위해 변하는 것을 봤다."



거리의 트랜스젠더 혁명가들(Street Transvestite Action Revolutionaries or STAR) 창립자이자 게이해방전선 활동가였던 Marsha P. Johnson (왼쪽) and Sylvia Rivera (오른쪽), 1973 크리스토퍼거리해방의날 집회에 참여한 모습. 사진: Leonard Fink 출처: http://www.qualiafolk.com/2011/12/08/icon/



이런 분위기는 전세계로 퍼져 영국, 캐나다, 뉴질랜드 등에서 GLF가 결성됐고 프랑스에서도 ‘혁명적동성애자행동전선’이라는 이름의 급진적 단체가 등장했습니다. 이런 운동을 밑거름 삼아 몇 년 뒤 샌프란시스코에서는 하비 밀크가 공직에 당선되고 활동을 벌이게 됩니다. 



프랑스의 혁명적동성애자행동전선


영국 GLF 선언 소책자. 프랑스FHAR이 발행한 잡지 <비정상>


한편 68운동의 급진적 분위기가 퇴조하면서 성소수자 운동도 반격에 직면하는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성소수자 차별을 금지하는 법률들이 생겨난 데 반발해 차별금지법안에 반대하는 운동이 시작됐습니다. 샌프란시스코에서는 동성애자 교사를 해고하는 법률이 추진됐습니다. 하비 밀크는 노동조합 등과 연대해 이 법안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이끌었죠.






하비 밀크와 브릭스 발의안 반대 운동



밀크를 살해한 댄 화이트가 터무니없이 낮은 형을 선고받자 분노한 성소수자들이 거리로 쏟아져나와 폭동이 벌어졌다.


영국에서도 대처가 집권하면서 보수적인 분위기가 확산됐습니다. 사유화와 복지 삭감을 밀어붙이고 탄광을 폐쇄하고 광부들의 파업을 폭력적으로 탄압했습니다. 광부들은 이때 1년 가까이 파업을 벌였습니다. 성소수자 운동은 광부 파업에 대한 연대 활동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콘서트를 열고 술집을 돌며 파업기금을 모았던 것입니다. 동성애자 커뮤니티와 광부들 사이에서 논란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런 활동은 이듬해 자긍심행진에 광부들이 성소수자들을 지지하며 참여하는 연대로 이어졌습니다.


광부들을 지지하는 레즈비언과 게이들. 그들이 주최한 연대 콘서트 포스터. 


80년대는 에이즈가 성소수자 커뮤니티를 강타한 시대이기도 합니다. 정부와 우익들은 질병에 제대로 대처하기는커녕 소수자들을 박해하고 비난하는 데 이용하기 급급했습니다. 소중한 친구들을 잃어가면서 제대로 된 정보와 예방법을 알리고, 정부의 위선과 무책임에 맞서 싸운 것은 성소수자들이 주도한 운동이었습니다. 미국에서는 액트업이라는 전투적인 단체가 등장해 “침묵은 죽음”이라고 선언하며 투쟁했고 소중한 성과들을 얻어냈습니다. 지금도 액트업은 보편적 의료보장제도를 요구하고, 다국적제약회사의 탐욕을 비판하며 활동하고 있습니다.



1989년 높은 약값에 항의하며 뉴욕증권거래소 앞에서 시위를 벌이는 ACT-UP 활동가들




영국에서는 80년대 말 지방정부법 28조를 둘러싼 투쟁이 벌어졌습니다. 지방정부가 동성애를 조장하거나 학교에서 동성애가 괜찮다고 가르치는 것을 금지하는 법률을 도입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성소수자들과 노동조합운동이 연대해 이 법안의 도입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였습니다. 배우 이안 맥켈런도 이 운동에 열심히 동참했었죠. 비록 법제정을 막지는 못했지만 대대적인 운동 때문에 법률은 힘을 잃었습니다.


지방정부법 28조에 반대하는 시위. 1988년. 가운데 있는 사람이 배우 이언 맥켈런이다.


이렇게 역사는 성소수자들의 삶이 시대의 흐름과 어떤 영향을 주고받는지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일반적으로 자유와 권리가 확대될 때와 축소될 때 우리의 운명은 더 극적으로 이를 반영했죠. 세계의 다른 여러 지역에서 벌어지는 일들도 성소수자 운동과 사회운동의 관계에 대해 중요한 시사점들을 던져줍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세계 최초로 헌법에서 LGBT 권리를 인정한 국가입니다. 아파르트헤이트 시절 동성애는 7년형에 처할 수 있는 범죄였고 군대에서 동성애자들은 전기충격 요법과 성전환을 강요당했습니다. 하지만 아파르트헤이트 체제를 끝장낸 대중 운동이 새로운 사회에 대한 전망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고, 새로 제정된 헌법은 전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인 인권조항들을 포함하게 됐습니다. 80년대 중반 흑인 봉기와 노동계급 운동의 성장 속에서 흑인 LGBT 단체들이 만들어졌고 사이먼 응콜리처럼 아파르트헤이트 반대 운동 활동가들이 커밍아웃하고 투쟁에 참여하면서 두 운동을 연결시켰습니다. 남아공 최초의 자긍심행진이 만델라가 석방된 1990년에 열린 것은 우연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아파르트헤이트 반대 운동 지도자이자 남아공 최초의 흑인 동성애자단체 GLOW를 설립한 게이 활동가 사이먼 응콜리.


중동지역에서 최초로 성소수자 인권단체가 결성돼 활동하고 있는 레바논은 또 다른 사례입니다. 레바논 성소수자들은 2003년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는 운동에 최초로 무지개 깃발을 들고 나갔습니다. 이후에도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탄압에 반대하는 운동에 함께하면서 성소수자 운동에 대한 지지를 넓혀갔습니다.


2011년 아랍을 휩쓴 혁명의 열풍 속에서도 변화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법적인 처벌을 비롯해 차별적인 현실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요. 아랍의 봄을 촉발한 튀니지에서는 2011년 최초의 성소수자 잡지가 등장했습니다. 이집트에서도 혁명 과정에 많은 성소수자들이 참여했고 변화의 가능성을 기대하게 됐습니다. 한 이집트인 게이 블로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랍 게이로서 나는 모든 측면에서 저항운동이 나를 대변한다고 느낀다. 그리고 언젠가 동성애자 권리 운동이 아랍 거리를 휩쓸 날이 올 것이란 확신이 든다.” 동성애혐오를 드러내는 거리의 낙서가 혐오에 반대하는 낙서로 바뀐 모습도 인상적입니다.



2013년에 터키 반정부 투쟁에도 무지개 깃발이 함께 했습니다. 오래된 공원 개발을 반대하는 시위대를 폭력진압하면서 촉발된 몇 달에 걸친 거리 항쟁에 성소수자들도 적극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며 참여한 것입니다. 터키는 90년대부터 여러 성소수자 단체들이 활동해 왔지만 혐오와 차별이 심각했습니다. 이슬람주의 색채의 집권당은 공공연히 성소수자 단체들을 탄압하기도 했죠. 그런데 거대한 반정부 운동이 벌어지고 투쟁의 거점이던 탁심광장에서 그해 열린 자긍심행진에는 10만 명이 참여해 사상 최대 규모를 자랑했고, 성소수자 운동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습니다. 성소수자 활동가들은 다른 운동참여자들과 성소수자 이슈에 대해 토론하고 그들이 무심코 드러내는 혐오에 도전할 수 있었습니다.


터키 반정부 운동의 거점이었던 게지 공원의 LGBT들


거리 시위에 참여하고 있는 LGBT들. 2013년 터키.


2013년 이스탄불 자긍심 행진. 10만 명이 참여해 사상 최대 규모를 자랑했다.


물론 위에 열거한 많은 국가에서 혐오는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최근 러시아와 아프리카 등지에서 국가가 동성애혐오와 폭력을 조장하는 상황은 환멸을 자아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거리로 나선 무지개 깃발의 역사는 침묵하지 않는 용기와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상상력, 저항하는 사람들의 연대에 희망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잊지 맙시다. 어떤 권리나 혜택도, 심지어 우리 삶을 긍정하게 하는 자긍심조차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땅에서 솟지 않았다는 것을. 그리고 현재 상태에 우리의 꿈을 가둘 필요가 없다는 것을요. 저항하는 무지개들의 역사가 전해 주는 해방의 꿈이 여전히 절실한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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