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원(동성애자인권연대)
동성애가 비전통적이라고?
오늘날 러시아에서는 동성애자에 대해 말하거나 보도할 때 흔히 ‘비전통적 성적 지향(нетрадиционная сексуальная ориентация)’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즉 이성애는 전통적이고 동성애는 비전통적이라는 말인데, 조금이라도 역사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이 단어 조합이 사실은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가를 잘 안다. 다른 문화권과 마찬가지로 러시아 사료 중에도 동성애, 양성애, 성전환 등이 언급되는 부분은 무수히 많다. 11세기의 ‘보리스와 글렙에 관한 이야기(Сказание о Борисе и Глебе)’, ‘키예프 페체르스크 성자전(Киево-Печерский патерик)’이 대표적인 예이며, 모스크바 공국 시대에 러시아를 여행했던 유럽인들도 “농민부터 귀족까지 모든 사회 계층에서 동성애가 목격된다”고 기록해 놓았다. 시베리아 원주민들의 동성애, 양성애, 무성애, 성전환 등에 관한 기록도 다수 남아 있다. 대다수의 백인 연구자들은 시베리아 원주민들의 동성애 욕망과 젠더 전환이 기독교를 배우지 못한 아시아 민족들의 미개함이라고 봤지만, 블라디미르 보고라스(Владимир Богораз, 1865~1936) 같은, 원주민들의 성적 다양성 수용을 진지하게 고찰한 혁명가도 있었다.
- 관련 글: 러시아 시베리아와 극동 지역 원주민들의 동성애, 양성애, 성전환
서유럽의 영향으로 동성애를 처벌하기 시작한 러시아
이런 역사적 기록에는 한계도 존재한다. 러시아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했던 농민이나 농노보다는 귀족과 황실에 관한 기록의 비중이 더 크고, 여성의 성보다는 남성의 성에 더 많은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역사적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러시아 지역에서도 시대를 불문하고 성적 다양성이 늘 존재해 왔다는 사실이다. 18세기 전까지 러시아에서 동성애는 법적으로도, 관습적으로도 억압되지 않았는데, 동시대에 동성애를 죄악이자 범죄로 간주해 엄벌로 다스렸던 서유럽과는 매우 대조적인 상황이었다.
러시아에서 동성애가 처음으로 범죄의 영역에 포함된 것은 표트르 1세 때였다. 표트르 대제로도 불리는 그는 서구화 정책과 영토 확장으로 러시아 제국을 성립한 것으로 세계사에 자신의 이름을 남겼는데, 바로 그가 통치하던 1706년에 멘시코프 공작(Князь Меншиков)이 스웨덴 법률을 본따 군법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남색’을 포함하는 ‘비자연적 음란 행위’를 화형으로 다스리는 조항이 생겼다. 10년 뒤 표트르 1세가 군법을 개정해 화형을 태형으로 대체했다. 군법이 아닌 형법에서도 동성애를 처벌하기 시작한 것은 1세기가 지난 1832년으로, 당시 러시아 제국 황제 니콜라이 1세가 독일 뷔르템베르크 왕국의 법률을 본떠 형법을 제정하면서 남성 간 합의하 성관계를 처벌하는 조항을 만들었다. 모든 권리와 재산을 몰수하고 4~5년의 시베리아 유형을 규정했던 러시아 제국 형법 제995조는 1890년대 들어 일부 학자들의 비판을 받기 시작했다. 이때 동성애 처벌법 폐지 운동에 앞장섰던 인물이 <롤리타>의 작가로 유명한 블라디미르 나보코프(Vladimir Nabokov, 1899~1977)의 아버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Владимир Набоков, 1869~1922)였다.
사회주의 혁명과 동성애자 해방
나보코프와 같은 일부 법학자, 정치인, 의학자들의 끈질긴 노력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제국에서 남색 처벌법은 끝내 폐지되지 않았다. 남성 동성애가 비범죄화된 것은 1917년 사회주의 혁명 때였는데, 이때 ‘결혼 해소에 관한 포고’와 함께 ‘동성애 처벌 폐지에 관한 포고’가 발표된 것이다. 당시 러시아 혁명가들은 국가나 종교가 개인의 성에 개입하는 것에 반대했다. 또 억압받던 여성의 권리를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로 인식했는데, 낙태 합법화, 양육비 보조, 어린이 도서 출판, 탁아소, 유치원, 공동 식당, 제노텔(여성부) 설립은 모두 이런 노력의 일환이었다. 동성애 비범죄화 역시 그저 부르주아 차르 체제의 법 체계를 거부한 것이 아니고, 매우 의식적인 노력의 결과였다. 실제로 1922년과 1926년 새 형법을 제정할 때 동성애는 언급되지 않았다. 당시로서는 전 세계적으로 상당히 진보적인 조치였다. 세계 성개혁 동맹 국제회의는 러시아를 성개혁 운동의 모범 사례로 꼽을 정도였다.
반동과 동성애 처벌법 부활
그러나 레닌 사후 1920년대 후반 스탈린이 권력 투쟁에서 승리하면서 동성애자들의 운명이 뒤바뀌게 된다. 1906년 러시아 문학 최초의 ‘동성애자 선언문’으로 불리는 ‘날개(Крылья)’를 출간하여 화제가 된 미하일 쿠즈민(Михаил Кузмин, 1872~1936)의 1928년 예술사대학 강연을 마지막으로 동성애자들의 공개 행사는 사실상 불가능해졌고, 동성애 하위문화는 지하로 숨을 수 밖에 없었다. 1930년대 전 세계적으로 군국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제국주의 세력 간 갈등이 첨예화되면서 소련에서도 탄압과 숙청이 자행되는데, 남성 동성애 처벌법이 부활하고 낙태가 금지되는 것도 바로 이 시기다.
1933년 남성 동성애 처벌법 부활에 가장 앞장선 것은 오게페우(통일국가정치부)였다. 사실상 오게페우를 주도했던 겐리흐 야고다(Генрих Ягода, 1891~1938)는 남성 동성애자들이 간첩이라는 논리를 스탈린에게 설득시켰다. 이듬해 그는 공안 기관인 내무인민위원회 위원장 자리에까지 올랐다. “동성애는 부르주아의 도덕적 타락의 산물”이란 논리가 이때 퍼졌다. 이런 역사적 반동으로 말미암아 소련의 남성 동성애자들은 1934년 3월부터 이 법이 폐지되는 1993년까지 범죄자로 낙인찍혀 살아야 했다. 야고다는 얼마 지나지 않은 1937년 스탈린의 명령에 의해 체포되어 1938년 반역 및 음모 행위로 처형됐다. 당시 그를 숙청했던 인물은 니콜라이 예조프(Николай Ежов, 1895~1940)였는데, 스탈린의 대숙청을 실질적으로 지휘한 인물로 유명하다. 그러나 예조프 또한 1940년 숙청의 대상이 되어 처형됐는데, 문제가 된 것이 바로 내란 음모와 남성 동성애 혐의였다.
남성 동성애에 대해 3~5년 징역을 규정했던 형법 제154a조(1960년 이후에는 5년 이하의 징역을 규정한 형법 제121조)는 1930년대 정치적으로 많이 이용되어 대숙청 때 간첩, 반혁명 혐의와 긴밀히 연결됐다. 1970년대에도 반정부 세력 탄압에 이 조항이 자주 이용됐는데, 국제 사회에 물의를 일으킬 수 있는 정치적 조항보다 이 조항이 더 편리했던 것이다. 유명한 영화 감독 세르게이 파라자노프(Сергей Параджанов, 1924~1990)와 레닌그라드 대학 교수 레프 클레인(Лев Клейн, 1927~)도 이 시기에 ‘남색’ 혐의로 체포, 투옥됐다. 1930~1980년대 매년 약 1,000명이 이 조항에 따라 처벌받은 것으로 보이며, 학자마다 계산법은 조금 다르지만 대체적으로 모두 합쳐 6만 명에서 최대 25만 명이 ‘남색’ 혐의로 처벌받았다고 추정된다. 1980년대에 태동한 소련 동성애자 인권 운동이 ‘남색’ 처벌법 폐지를 우선 과제로 설정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남색’ 혐의로 1981년 체포, 투옥됐던 레프 클레인 교수. 학위를 박탈당해 당분간 강의를 할 수 없었다.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70세가 넘어서도 강의에 매진했고, 올해 2014년 87세를 맞은 클레인 교수는 여전히 활발한 저술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사진 출처: http://bg.ru/society/sdelat_geem_nevozmozhno-17139/)
소비에트 연방의 동성애자 인권 운동
1980년대 소련의 동성애자 인권 운동은 남성 동성애 처벌법을 철폐하는 것이 주요 목표였다. 그러나 정권의 탄압을 피할 수는 없었다. 1984년 결성된 ‘게이 연구소(Гей-лаборатория)’는 국제 사회에 소련의 성소수자 상황을 알리고 에이즈 예방 활동을 펼치다가(당시 소련에는 ‘에이즈 위기’를 맞은 서구와 달리 HIV 감염인이 한 명도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국가적 차원에서 진지하게 대응하지 않았다) KGB에 적발되어 정치적 탄압을 받았다. 일부 구성원은 해외 망명을 떠나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소수자들의 저항은 계속됐다.
1980년대 중반이 지나면 미하일 고르바초프 정권의 ‘페레스트로이카(개혁)’ 및 ‘글라스노스트(개방)’와 맞물려 동성애자 운동이 더욱 활발해진다. 1980년대 올가 크라우제(Ольга Краузе, 1953~)가 레닌그라드에서 조직한 ‘독립 여성 클럽(Клуб независимых женщин)’은 문화 교류, 레즈비언 고용 문제 해결, 동성애 혐의를 받은 남성들에 대한 법률적 지원 등의 활동을 펼쳤다. 1989년 11월에는 로만 칼리닌(Роман Калинин, 1966~)이 소련 최초의 동성애자 신문 <테마(Тема)>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1990년 초 예브게니야 데브랸스카야(Евгения Дебрянская, 1953~)와 로만 칼리닌이 조직한 자유주의당(Либертарианская партия)과 ‘성소수자 연맹(Ассоциация сексуальных меньшинств)’은 동성애 처벌법 폐지 운동을 벌였다. 이들은 극단적인 방식을 선호해 다른 성소수자 활동가들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는데, 예를 들면 1991년 5월 로만 칼리닌은 동성애 처벌 문제를 전국적으로 이슈화하기 위해 대통령 선거에 후보로 출마했다. 1990년 5월 소련 최초로 탈린에서 성소수자 인권 문제에 관한 국제 콘퍼런스가 개최됐다. 1991년 7월에는 일명 ‘차이코프스키 재단(Фонд Чайковского)’인 ‘성소수자 문화 이니셔티브 및 옹호 재단(Фонд культурной инициативы и защиты сексуальных меньшинств)’과 ‘성소수자 연맹’의 주최로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서 최초로 국제 게이 레즈비언 영화제가 열렸다. 성소수자 수백 명이 참가한 이 행사 기간 동안 처음으로 동성애 처벌법 폐지를 촉구하는 시위도 벌어졌다. 1991년 10월에는 1년 동안 법무부와의 끈질긴 싸움 끝에 처음으로 동성애자 인권 단체가 공식적으로 등록됐다. 올가 크라우제와 알렉산드르 쿠하르스키(Александр Кухарский) 교수 등이 참여한 단체 게이 레즈비언 연맹 ‘날개들’(Ассоциация геев и лесбиянок «Крылья»)은 성소수자 시민들의 위기 지원, HIV 예방, 동성애 처벌법 폐지 활동을 벌였다.
이 시기에 일부 소련 문화계 인사도 성소수자 인권 운동에 연대를 표명했는데,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1991년 가릭 수카초프(Гарик Сукачёв, 1959~)가 조직한 록 페스티벌 ‘테러에 반대하는 록(Рок против террора)’에서 아욱치온(АукцЫон)이라는 유명 밴드가 무대에 서서 성소수자 연대 발언을 하며 형법 제121조(‘남색’ 처벌법) 폐지를 촉구한 것이다. 이 록 페스티벌에 참가한 많은 소련 시민들이 형법 제121조 폐지 촉구 서명 운동에 동참했다고 한다.
러시아 연방의 동성애 비범죄화, 그러나 편견과 차별은 여전히
1990년대 초 소련이 해체되면서 러시아 성소수자 인권 운동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했다. 1993년 5월 27일 남성 동성애 처벌법이 폐지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전에 ‘남색’ 혐의로 유죄 선고를 받고 처벌된 자들에 대한 복권은 이루어지지 않은 한계도 존재한다. 인권 단체들은 정치 탄압 희생자 지위 획득을 위한 운동을 벌여 왔고, 2009년을 ‘정치 탄압 희생 동성애자 기억의 해’로 선포하기도 했다. 동성애 비범죄화 이후에도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차별은 여전히 강했다. 1993년 8월 러시아 27개 성소수자 단체의 연대체인 전국 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연합 ‘삼각형(Треугольник)’이 공식 등록을 시도했지만, 모스크바 시 당국은 “사회 정서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단체 등록을 불허했다. 다른 한편 국제 연대가 활발히 이루어지기 시작했는데, 마샤 게센(Masha Gessen, 1967~)의 주도로 국제동성애자인권위원회(IGLHRC) 내에 모스크바 위원회가 설치되기도 했다. 1999년에는 질병 및 관련 건강 문제의 국제 통계 분류(ICD) 10차 개정판이 수용되어 동성애가 질병 목록에서 제외됐고, 동성애자들의 군 복무도 공식적으로 가능해졌다.
1990년대는 레즈비언, 게이, 트랜스젠더들이 특정 공간에 모이기 시작하면서 커뮤니티를 형성한 시기이기도 하다. 모스크바의 경우, 레즈비언들이 모이는 푸쉬킨 광장, 게이들이 모이는 플레벤 영웅비 주변 공원이 대표적인 장소였다. 비록 당시 성소수자 업소들은 알코올, 섹스, 소비 등 오락 위주였고 정치적 이슈에는 관심이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현대 러시아 동성애 하위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에는 틀림없다.
옐친 정권의 신자유주의, 그리고 금융 위기의 대혼란을 극복하지 못한 성소수자 언론
1998년 최고조에 달한 러시아 금융 위기는 러시아 성소수자 커뮤니티도 뒤흔들어 놓았다. 1989년 최초의 동성애 신문 <테마>가 발행된 이후 굉장히 많은 성소수자 신문, 잡지가 발행됐는데, 안 그래도 늘 재정적 어려움을 겪었던 성소수자 언론 중에 1998년 금융 위기를 버틴 곳은 단 한 곳도 없었다. 이러한 신문, 잡지들은 비록 금융 위기를 피해갈 수 없었지만, 인터넷이 거의 보급되지 않았던 시절 성소수자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정보를 제공하는 데 아주 큰 역할을 수행했던 것으로 기억되고 있다.
사실 이 90년대는 현대 러시아의 가장 비극적인 시기라고도 할 수 있는데, 서방의 자금 지원을 받은 옐친 정권이 밀어붙인 신자유주의 정책들이 많은 가정을 폐허로 만들었다. 국내총생산은 50% 하락하고, 투자는 90% 감소했으며, 평균기대수명은 64.8세에서 57.3세로 낮아졌다. 총 인구는 6백만 명이 줄었다. 전체 인구의 6~10%가 전체 소득의 50%, 전체 부의 70~80%를 독차지하게 됐다. 경제적 비극은 사회적 비극을 초래하여 알코올 의존뿐 아니라 주사 마약 사용자가 급증했는데, 이는 HIV 감염 급증으로 이어져 현재 러시아 ‘에이즈 위기’를 낳았다. 다른 한편으로는 종교에 의지하는 인구가 급증하여 정교회 신자 비율이 높아지고 러시아 정교회의 영향력이 증대됐다.
러시아 1992~2008년 연도별 마약 중독자 신규 등록 현황 (그래프 출처: http://ffwfire.livejournal.com/5305.html)
러시아 1989~2012년 정교회 인구 비율의 증가 (그래프 출처: http://blog.jinbo.net/glocalpoint/31)
2000년대 점점 가시화되는 러시아 LGBT
금융 위기의 대혼란을 거쳐 경제가 다시 성장하고 사회도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기 시작하면서 2000년대 러시아 LGBT 인권 운동은 저변을 더욱 늘려갔다. 이 시기에 새로운 단체들이 설립되고,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방식의 활동이 이루어졌다. 2003년에 동성애 잡지인 <크비르(Квир)>가 출간되고, 2004년에 MSM 대상 HIV/AIDS 예방 단체인 ‘라스카이(LaSky)가 설립됐다. 2005년에는 니콜라이 알렉세예프(Николай Алексеев)의 주도로 모스크바 인권 단체 ‘게이러시아(GayRussia.Ru)’가 설립됐다. 이 단체는 다음 해인 2006년 제1회 게이 프라이드(자긍심 행진)를 조직했으나 모스크바 시청의 허가를 받지 못했다. 끝내 프라이드를 감행했다가 참가자들은 경찰에 연행되고 말았다. 같은 해 러시아 최초 및 유일의 전국 LGBT 운동 연대체인 ‘러시아 LGBT 네트워크(Российская ЛГБТ-сеть)’가 결성됐다. 2008년에는 MSM에 대한 헌혈 차별이 철폐됐고, 상트페테르부르크 국제 LGBT 영화제 ‘Bok o Bok(나란히)’가 출범했다.
2000년대 가판대에서 쉽게 구입할 수 있었던 동성애 잡지 <크비르(퀴어)>
동성 결혼 법제화를 위한 투쟁도 2000년대에 처음 시도됐다. 2005년에 야블로코(Яблоко) 당 소속의 바시키르 공화국 의회 의원 에드바르드 무르진(Эдвард Мурзин)과 동성애 잡지 <크비르> 편집장 에두아르드 미쉰(Эдуард Мишин)이 혼인 신고를 거부당한 후 소송을 제기했다가 패했다. 이들은 “러시아의 동성 결혼 금지가 러시아가 참여하고 있는 유럽인권보호조약을 위반하는 것”이라며 유럽인권재판소에 소송을 제기했지만 유럽인권재판소는 이 소송을 기각하고 말았다. 이후에도 다른 활동가들이 법정 소송을 통해 동성 결혼을 인정받으려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그들은 언론을 통해 성소수자 차별 문제를 널리 알리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2009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동성 결혼을 인정받기 위해 법정 투쟁은 벌인 활동가들 이리나 시피티코(왼쪽)와 이리나 페도토바(오른쪽)
언론 활동도 다시 활발해졌는데, 2003년부터 발행된 잡지 <크비르>뿐 아니라 1999년 12월부터 발행된 레즈비언 잡지 <오스트로프(Остров)>도 많은 관심을 받았으며, 2013년까지 56호가 발행됐다. <XXBi>, <Best For>, <Pinx>와 같은 잡지도 발행되었으나 지금은 발행이 중단된 상태다. 2000년대에는 인터넷이 널리 보급되면서 인터넷 홈페이지가 많이 생겼는데, Gay.Ru, GayRussia.Eu, LGBTRussia.Com, Tguy.Ru, Lesbiru.Com, BlueSystem.Ru, QueerRussia.Info, Out-Traveler.Ru 등의 포털들이 LGBT 소식을 빠르게 전하고 있다. 웹진 <파르니 플류스(Парни ПЛЮС)>는 동성애자, 양성애자, 트랜스젠더의 HIV/AIDS 이슈를 전문적으로 다루고 있다. 최근에는 SNS에 많은 LGBT 관련 그룹이 만들어져 소통의 장으로 기능하고 있다. ‘안티도그마(http://ru-antidogma.livejournal.com/)’나 페이스북의 ‘LGBT 토론장(ЛГБТ-дискуссионная площадка)’에서는 다양한 단체 소속의 LGBT 활동가들이 정보를 공유하고 토론을 벌이고 있다.
‘동성애 선전 금지법’에 맞선 투쟁
다른 한편, 이 시기에 러시아 사회는 보수화, 전체주의화를 겪고 있었다. 푸틴 대통령과 여당인 통합러시아당의 권력 강화와 더불어 시민 사회 탄압, 특히 성소수자 탄압이 가시화됐다. 푸틴 3기 정부의 보수화 정책을 가장 잘 드러내는 건 가부장적 가족 가치의 강화 조치들인데, ‘미성년자 대상 비전통적 성관계 선전 금지법’ 제정과 여성 낙태권 침해 시도들이 대표적이다. 2013년 6월 연방 차원에서 ‘비전통적 성관계 선전 금지법’과 같은 반동성애법들이 제정됨으로써 러시아 LGBT 운동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 프라이드 조직을 둘러싸고 때때로 이견을 보이기도 했던 활동가들은 반동성애법 철폐라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 힘을 쓰게 되었다. 차별에 맞선 투쟁에 가담하는 성소수자 당사자들이 점차 늘어났으며, 해외 성소수자 인권 단체들의 연대와 지지가 이어졌다.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 등 18개 지역에 지부를 두고 있는 ‘러시아 LGBT 네트워크’는 성소수자들에게 법률적, 심리적 지원을 제공하고 있다. 그들은 혐오 대응에 앞장서고 있으며 성소수자 가족 지원, 사회학적 연구, 국내 정당 및 시민 단체들과의 대화, 국제 연대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게이러시아(GayRussia.Ru)’는 2006년 이후 지금까지 게이 프라이드 개최가 금지되고 있는 러시아에서 성소수자들의 집회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싸우고 있다. 이들은 언론을 통한 가시화에 주력하며 러시아 및 국제 법원에서의 법정 투쟁을 통해 성소수자 인권 상황을 변화시키려는 시도도 계속하고 있다. 또 벨라루스 등 러시아 주변국 LGBT 활동가들과의 연대를 실천하며 혐오 발언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고, 2006년 랴잔 주를 시작으로 여러 지역에서(그리고 2013년 여름에는 연방 차원에서) 제정된 ‘동성애 선전 금지법’에 맞선 투쟁에도 적극 가담하고 있다. ‘러시아 LGBT 스포츠 연맹(Федерация ЛГБТ-спорта России)’은 소치 올림픽 폐막 직후인 2월 26일부터 3월 2일까지 제1회 러시아 LGBT 오픈 게임즈를 개최했다. 차별과 폭력에 맞서기 위해 뭉친 ‘LGBT 평등을 지지하는 이성애자 연합(Альянс гетеросексуалов за равноправие ЛГБТ)’도 활발한 활동을 펼치며 성소수자 당사자들과 비성소수자 지지자들을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정의로운 세상을 꿈꾸는 노동자들의 연대
지난해 ‘비전통적 성관계 선전 금지법’은 거의 만장일치로 의회를 통과했는데, 원내 정당 4곳 모두 이런 정책을 묵인, 지지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러시아 성소수자들은 푸틴 정권에 의해 사실상 2등 시민으로 낙인찍혔지만, LGBT 인권을 옹호하며 연대하는 시민들도 있다. 사민주의 성향의 야블로코 당은 LGBT 인권을 지지하는 거의 유일한 정당으로, 비록 지금은 세력이 많이 약화되어 2007년 이후로는 원내에 진입하지 못하고 있지만, 성소수자 탄압 반대 활동에 적극 연대하고 있다. 지난 9월 14일 지방 선거 때 좌파 사회주의 행동(Левое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ое Действие) 소속 LGBT 활동가 니콜라이 카프카스키(Николай Кавказский)가 모스크바 시 의회 선거에 야블로코 당 소속으로 출마해 12.78%를 득표, 자신의 선거구에서 3위에 오르기도 했다. 러시아 노동자 인터내셔널 위원회(Комитет за рабочий интернационал) 등 노동자 단체들도 성소수자 인권 옹호 및 소수자 탄압에 반대해 단결, 투쟁할 것을 호소하고 있다. 피로고프 국립의과대학, 모스크바주 국립대학, 경제행정법률대학, 북방연방대학 등 여러 교육 기관에서 진보적 교수 및 강사들, 특히 LGBT 인권을 옹호하는 교육 노동자들에 대한 불법 해고 및 탄압이 잇따르자 LGBT 단체 ‘무지개 연합(Радужная ассоциация)’과 노동조합원들의 공동 투쟁이 전개되고 있다. ‘비정상’으로 낙인찍혀 오랫동안 시민 사회의 일원으로 거리에 나설 수 없었던 성소수자 인권 운동의 상징물인 무지개 깃발이 이제는 집회 현장에서 힘차게 펄럭인다.
2014년 9월 20일 러시아 모스크바 ‘1905년 거리’ 지하철역 앞 광장에서 불법 해고에 항의하는 노동조합원들과 LGBT 활동가들
2013년 11월 2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개최된 ‘혐오 반대 행진(Марш против ненависти)’
2014년 5월 1일 러시아 모스크바 노동절 집회에 참여한 성소수자들
2014년 7월 26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개최된 제5회 게이 프라이드 집회 현장
가부장제, 이성애 규범성, 시스젠더 중심주의, 차별과 폭력에 맞서는 사람들
2009년 이후 매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국제 퀴어 문화 축제 ‘크비르페스트(КвирФест)’를 조직하는 ‘븨홋(Выход)’은 가장 활발한 활동을 벌이는 러시아 LGBT 인권 단체 중 하나인데, 여기에는 게이, 레즈비언뿐 아니라 트랜스젠더, 간성(인터섹스), 무성애자 등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시민들이 함께 활동하고 있다. 또 주목할 만한 단체로는 ‘포스트 소비에트 공간 트랜스 연합(Транс*Коалиция на постсоветском пространстве)’이 있다. 구소련 공화국들인 아르메니아, 조지아(그루지야),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몰도바, 러시아, 우크라이나 등 모두 7개국 트랜스젠더 활동가들이 뭉쳐 2013년 여름에 설립한 인권 운동 단체다. 이들은 트랜스젠더 권리 옹호, 객관적인 정보 제공, 학자들과의 교류 등을 통해 구소련 지역 트랜스젠더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들은 가부장제, 이성애 규범성, 시스젠더 중심주의, 그리고 차별과 폭력에 반대하며 각지에서 시민 사회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있다. 최근에는 러시아 곳곳의 집회 현장에서 트랜스젠더 깃발들도 종종 눈에 띄고 있다.
‘포스트 소비에트 공간 트랜스 연합’ 홈페이지(http://transcoalition.info/) 캡처
2014년 9월 21일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반전 평화 행진에 동참한
여성, 동성애자, 양성애자, 트랜스젠더들
모든 억울한 죽음을 애도하며
요즘 세계 곳곳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증오와 폭력이 조장되면서 군국주의화, 전체주의화가 가속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소수자 집단은 종종 이중의 고통을 겪는다. 성소수자 역시 예외가 아니다. 이는 역사로도 증명되었으며, 오늘날에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극이다. 무기 생산업자들이 쾌재를 부르는 사이 노동자, 병사, 여성, 성소수자들은 피눈물을 흘리고 있다. 그래서 오늘도 러시아 성소수자들의 투쟁은 현재 진행형이다. 끔찍한 무기와 혐오로 희생당한 모든 이들을 애도하며, 우리의 투쟁과 당신들의 투쟁 끝에 평화의 무지개가 뜨게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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