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우당 문학상 우수작 - 물감옥

Posted at 2014.04.30 17:19// Posted in 육우당 문학상

물감옥


 

비로

 

 

 

나는 너를 보고 있다. 5, 축제가 있는 계절.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 사이로 너는 굼뜨게 움직이는 중이다. 느릿느릿. 팔을 활짝 벌려 벽을 한 번 껴안았다가 떨어진다. 벽보가 삐뚤지 않게 제대로 붙었나 눈으로 가늠한다. 나는 사람이 콸콸 쏟아져 흐르는 학생회관 통로 한가운데 서서 그런 너를 보고 있다. 너의 얄팍한 윤곽을, 좁은 어깨를, 균형이 기운 골반을 본다. 인파가 어깨를 치고 스쳐간다. 숨쉴 틈 없이 밀려오는 사람들의 체취를 비집고 어디선가 비릿한 향이 풍겨 온다. 돌아선 그 애도 나를 알아 보았다. 향은 너에게서 온다. 독 같은 달콤함으로, 속이 메슥거린다. 네 뒤로 압정이 빠진 종이 한 귀퉁이가 덜렁거리는 게 보인다.

안녕하세요 저는 성소수자입니다……」

고해 같은 글자가 고개를 까딱 숙여 보였다.

 

"일부러 놀러왔어? 우리 학교 축제, 별로 볼 것도 없는데."

그 애는 음료수를 건네며 내 옆에 태연히 걸터앉았다. 치익. 캔을 따는 마른 손가락에 뼈마디가 도드라진다. 좀 투박해진 것 같다.

", 사실 나도 직접 본 적은 없는데."

"작년에 안 봤어?"

"나 고등학교 1년 늦게 졸업했잖아."

"……."

몰랐구나. 흐흠, 콧소리만 내는 특유의 웃음은 여전했다. 나는 재빨리 말을 돌렸다.

"너 이 대학 다니는 줄은 몰랐다 야."

그냥, 다시 만나는 일 자체를 상상도 하지 못 했다. 가까이에서 보는 그 애의 모습은 많이 변해 있었다. 젖살이 빠져 뺨은 핼쑥했고, 턱 부근에 좁쌀 같은 소름이 투둘투둘 올라와 다소 거칠해 보였다. 어이김승현! 저만치 건물 입구에 옹기종기 모인 사람들이 그 애의 이름을 불렀다. 승현은 그들을 동아리 사람들이라고 소개했다.

"곧 갈게요-!"

둔중한 저음이 홀 안에 메아리친다. 그들은 손을 흔들어 화답했다. 단체활동을 하고 있구나. 신기하다. 가야 한다며 그가 일어섰다. 검게 보풀이 일어난 터틀넥과 청바지로 감싸인 몸에 여성적인 볼륨이라곤 전혀 없다. 거뭇거뭇하니 병약한 안색임에도, 전체적으로 전보다 더 단단해 보였다.

"너 좀 달라 보인다."

나는 언제나 교실 한구석에 조용히 웅크려 있었던 여자애를 떠올리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러자 그 앤 픽 웃곤, 네가 더 심해. 처음에 못 알아봤어. 나는 아침부터 고데기로 열심히 말아 온 머리카락을 무심코 가렸다. 승현은 가만히 눈을 돌렸다.

 

"옛날엔... 내가 ''가 아니었으니까 뭐."

 

비가 내리고 있었다.

 

 

*

 

 

승현과 나는 고등학교 2년 내내 학년에서 나란히 '남자 같은 애들'로 통했다.

일단 내 경우. 뭐 소위 말하는 '보이시 컨셉'이란 거였지. 170에 달하는 큰 키 덕분이었는지 입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밴드부에 스카웃 됐고 어느 여고에서든 흔히 그렇듯 곧 교내 여학생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호응에 답하듯 나는 어깨까지 오던 머리를 짧게 잘랐다. 여자애들은 마치 내가 자기네 남자친구라도 되는 마냥 팔짱을 껴왔으며 나 또한 연유야 어찌 됐든 상황을 즐겼다. 고만고만한 남자들한테 꺽다리라고 놀림받던 중학교 때보단 훨씬 나았다.

그러다 언제 한 번 다리 위에 옆반 앨 앉히고 노는 모습을 담임한테 들킨 적이 있다. 그날 선생님은 험험 과장된 헛기침을 하며 '작년에 졸업한 너네 선배들 중에 여자끼리 사귄 애들이 있었다', '걔네들 정신과에서 오래 상담 받았다'는 얘길 수업시간에 굳이 늘어놓었다. 엄숙하게 경고하기를, "가능하면 하늘이 허락하는 사랑을 하세요." 그날 선생님은 끝까지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머릴 도로 길러야 하나 하는 생각을 잠깐 했던 것 같다. , 바로 그 다음 날부터 다시 평소대로 돌아갔지만.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척.

 

한편, 박승현. 그 앤 나와 성격이 정반대였다. 키가 작고, 조용하고, 친구가 없었다. 잘 움직이지도 않았다. 늘 교실 어딘가 구석자리에 그 애의 조막만한 얼굴이 유령처럼 덩그러니 떠 있곤 했다. 똑같은 숏컷인데 아이들이 그 애와 날 대할 때 태도가 사뭇 달랐던 건, 그 애의 또래답지 않은 과묵함 탓도 있었겠지만그보단 다소 사람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묘한 인상 탓이 더 크지 않았을까 싶다. 승현은 나보다 머리가 훨씬 더 짧았다. 그러니까, 남 보기에 좀 부담스러울 정도로 바짝 깎은 그런 머리였다. 아이들은 종종 두피를 훤히 드러낸 그 애 뒷덜미의 바리깡 자국을 놓고 수군거리며 웃곤 했다. 더러 대놓고 "그 머리는 좀 아닌 것 같다"며 참견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승현은 그냥 웃었다. 대꾸는 일절 안 하고. 늘 미묘한 표정, 밋밋하고 어정쩡한 반응. 그 앤 언제나 어떤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 또한 2년 연속 같은 반을 하면서도 줄곧 얘기하기 좀 불편한 애라고 생각했었다. 다만 아주 가끔 어디선가 따라붙는 시선에 눈을 돌리면 그 자리에

승현이 조용히 나를 보고 있는 때가, 있었다.

 

어떻게 보면 나는 그 날에 이르러서야 겨우 그 앨 "만난" 거다.

2학년 2학기 제주도 수학여행, 집합장소에서 올려다 본 5월 하늘은 무척 푸르렀던 것으로 기억한다.

 

 

비행기가 이륙하는 순간부터 아이들은 흥분으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 몸이 이렇게 높은 곳까지 올라오다니! 쑥쓰럽지만, 당시 나는 항상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어하는 아이였다. 학교에서 친구들과 잘 노는 것처럼 보이다가도 시시때때로 맘이 스산해지고, 야자가 끝나도 곧장 집에 돌아가지 않고 한참 밤동네를 배회하는늘 이혼 얘기가 오가는 집구석이 지긋지긋해서였을 수도 있고, 아니면 가슴 속에 한창 자리를 키워가고 있던 어떤 빈 자리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우웅기체가 크게 기울었을 때, 그 빈 곳에 강한 예감이 들어차 안쪽에서부터 판막을 강하게 꾸욱 밀어냈다. 처음 느껴보는 감각이었다. 늘 뻐근하게 멀었던 하늘이 그토록 가까웠다.

첫날은 무척 즐거웠다. 사진을 찍고, 조랑말을 타고, 유채꽃과 햇살에 파묻혀선. 무슨 음식이든 맛있게 먹고. 하지만 그 첫 번째 밤, 아이들이 숙소에서 과자를 까먹으며 뒹구는 동안 나는 밖에서 엄마와 전화통을 붙들고 싸우고 있었다. 넌 엄마 걱정하는 거 뻔히 알면서 어떻게 전화 한 통 안 하냐, 나중에 한다고 했잖아…… 아빠랑 싸우고 왜 나한테 신경질이야, , 아 어차피 이혼할 거면 빨리 하든가…… 그러고 그 밤 내내 복통과 속쓰림으로 끙끙 앓다가 기어이 탈이 나고 말았다. 모처럼 여행 와서 혼자 숙소에 뻗어 있긴 싫어 끙끙대면서도 죽어라 아이들 꽁무니를 쫓아다녔지만, 몸상태는 갈수록 나빠졌다. 하지만 잔뜩 들뜬 아이들에겐 아픈 친구를 일부러 챙겨줄 만한 여유가 없었다. 별로 아파 보이지도 않는다나. 결국 부아가 나 나 버스에서 혼자 앉을래.” 심통맞은 말을 툭 던졌더니, 걔넨 너 편한 대로 하라며 정말 홱 돌아서버렸다. 그렇잖아도 내가 귀찮았던 눈치였다. 결국 다음 장소로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나는 정말 그 애들에게서 멀리 떨어진 자리에 혼자 앉았다. 자기들끼리 떠드는 꼴을 안 보니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다음 예정지는 도깨비도로, 도깨비도로입니다. 우웅. . 나랑 무슨 상관이야. 저기. 부디 빨리 끝나기만 해다오. 저기! ? 돌연한 부름에 고개를 돌렸더니

"있잖아."

비어 있던 옆자리에 그 애가 앉아 있었다. 승현. 항상 침묵하는 아이.

"바다 안 간대."

"?"

나는 말의 내용이 아니라 그 애가 별안간 내 옆에 있다는 것에, 그리고 먼저 말을 걸어왔다는 것에 놀라 되물었다.

"바다 안 간……"

똑같은 말을 반복하려다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본다.

"너 어디 아파?"

가까이선 처음 들어보는 그 애의 목소리는 오래 숙성시켜 온 것처럼 깊게 울렸다. 좌우지간 아프냐고 관심을 기울여주는 것에 없던 호감이 팍 솟아났다.

"별 거 아냐! 근데 뭐라고 했지?"

"이번에 우리 바다 아예 안 간대."

웅웅. , , 마이크 테스트. 듣기 싫은 초고음의 쇳소리에 우리 둘은 동시에 얼굴을 찡그렸다. ~ 지금 우리는 도깨비 도로, 도깨비 도로를 지나가고 있습니다~ 아주 신기한 착시현상이 일어나는 곳이죠? , 지금부터 아저씨가 운전을 한번 멈춰볼 텐데…… 가이드를 겸한 기사가 뭐라 떠들거나 말거나, 뜻밖의 흉문이었다!

"진짜? 일정표엔 있잖아!"

"그거 아니래. 어제 숙소에서 선생님들끼리 하는 말 들었는데 이번에 아예 애들 물 근처에 못 가게 할 거라고. 아무리 하지 말라고 해도 쫄딱 젖는 애들 매년 생기니까 기사들도 막 뭐라고 한대."

품행이 어떻니 하면서 모든 단체야외활동에서 교복 착용을 강요하던 고지식한 여학교였다. 물론 그때 그 수학여행도 예외는 아니어서, 숙소 밖에선 무조건 교복을 입어야 했다. 그런데 제주까지 와서 바다도 못 보게 한다고? 맙소사, 선생님들 뭐 저래. 그러게. 짜증나. 돌아오는 반응에 옆을 본다. 안쪽으로 쑥 들어간 좁은 턱이 새삼 눈에 들어왔다. 얜 왜 친하지도 않은 나한테 굳이 이런 걸 가르쳐주는 걸까. 승현이 갑자기 눈을 돌렸다. 나도 눈을 뗄 타이밍을 놓쳐 엉겁결에 마주보는 상황이 된다. 도로는 끝나가고 있었다. 주변 아이들이 남과 북을이편과 저편을오르막과 내리막을 분간할 수 없는 기묘한 착시에 쉴 새 없이 탄성을 내지르는 동안, 오직 승현과 나만이 고요했다. 침묵이 부담스러워지려는 찰나, 승현의 손이 조심스럽게 내 시야를 까맣게 덮는다.

", 열 있다."

손바닥에 옅은 습기가 배여 있었다.

 

여행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약이 들었는지 몸은 제법 개운해졌지만, 친구들에게 서운한 마음이 쉽게 가라앉질 않아 내내 절그럭거렸다. 마지막 밤엔 통 크게도 선생님들이 맥주를 돌렸는데, 나는 아픈 척 부루퉁해 있느라고 끝까지 잔치 분위기에 끼지 않고 뭐 그런 식이었다. 그렇게 돌아가는 날 아침이 밝았다. 오전에 수목원 구경 - 근처에서 이른 점심 - 공항 으로 일정이 마무리될 예정이었다. 참 시시하기 짝이 없는 스케쥴이었지만 다들 슬슬 피곤했는지 별 잡음은 나오지 않았다.목적지 수목원, 수목원에 도착했습니다…… 아이들이 썰물처럼 우르르 버스를 빠져나가는 내내 나는 창문에 얼굴을 박고 우울한 생각만을 반복했다. 저희들끼리 삼삼오오 짝지어 몰려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이 보였다. 늘 가슴 속에 상주하던 것이 점점 몸집을 부풀리는 게 느껴졌다. 그건 단순한 친구들과의 다툼이라든지 엄마와의 충돌 이상의…… 그러니까잠깐의 소요라지만 왠지, 세상 전부로부터 버려진 기분. 그때까지만 해도 그런 감정을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 알지 못 했다. 눈물이 치미려는 찰나, 바로 곁에서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저기."

버스에 나 혼자 남아 있다고 생각했는데 또, 승현이었다. 사람 놀래키는 덴 일가견 있네, 진짜. 이번엔 왠지 내게 무척 미안하단 표정을 짓고 있었다. 뜬금없는데 나 부탁 하나만 해도 돼? , ?

"이따 버스에서 인원체크 할 때 나 있는 척 좀 해주라."

"?"

선생님은 매번 인원점검을 그리 꼼꼼하게 하는 편이 아니었다. 그냥 빠진 자리 없나 대충 세어 보고 아이들에게 직접 확인시키는 정도. 그러니까 승현은, 선생님이 다들 짝 왔냐고 물어볼 때 나는 그냥 아파서 자고 있는 척이라도 해달라는 것이었다. 자신은 그때 물론 버스에 없겠지만. 얘가 지금 뭐래는 거야? 심지어 옆자리에 옷가지로 눈속임까지 해 두겠단다.

", 여기 다음에 바로 공항 가잖아. 미쳤어?"

"괜찮아."

"집에 안 가?!"

"나중에 나 혼자 따로 가면 돼."

"아니 대체 왜? 야 근데 미성년자잖아!"

"미성년자도 혼자 탈 수 있어. 미리 조사해봤어."

하도 황당하여 나는 미쳤어, 미쳤어 연발하며 고개를 팩 돌려버렸다.

"아 몰라. 나중에 내가 혼날 거 아냐. 난 못해."

"제발."

침울하게 조르는 것에 마지못해 다시 얼굴을 마주친다.

"도대체 그런 짓 왜 해?"

우리 둘밖에 남지 않은 버스는 광활하고 고요했다. 먼지가 둥둥 떠다니고 아이들의 떠들썩한 잔상이 주변 공기를 에워쌌다. 승현과 나는, 마치 고립된 섬 같았다. 대답을 듣기 전엔 물러나지 않겠다는 듯 눈에 힘을 주자 승현은 한숨을 푹 쉬곤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작게,

바다에 갈 거야.

 

어쩌면 또 열이 났고 그래서 제대로 된 사고를 제대로 못 했던 건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냥, 생각이 많거나 혹은 아예 없었거나. 돌아가는 비행기에서도 혼자 쓸쓸해하고 있을 생각, 그대로 서먹하게 친구들과 헤어질 생각, 집에 가면 또 벌어지고 있을 난장판. 너 진짜 웃겨. 사람 모양을 만들겠답시고 바람막이와 모자를 요리조리 의자에 꾸며놓는 모습을 보면서 툭 뱉었더니, 그 앤 진지한 얼굴로, 나는 바다에 갈 거야. 바다라. 단어에 청량감이 있었다. 승현이, "", 입술로, "", 파열음을 내는 순간 눈앞에 확 펼쳐지던 아득한 설렘. 34일 내내 먼발치에서 정수리만 슬쩍슬쩍 엿보이던 꿈의 장소. 비행기에서 느꼈던 선연한 가슴떨림. 그때 그 예감.

"."

?

"나도 갈래."

…….

 

이리 와. 승현이 버스 뒤편에서 내게 손짓한다. 나는 저만치 식당에서 하나둘씩 빠져나오고 있는 아이들 쪽을 바라보았다. 다들 여기저기 휘적거리느라 우리를 신경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뭐지. 진짜 괜찮은 건가. 막상 정말 일을 치르려 하자 이런저런 걱정이 뇌에 배기가스처럼 꾸역꾸역 차올랐다. 맘 바뀌었으면 안 와도 돼. 멈춰 있는 나를 건너다 보는 승현의 얼굴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 애는 나를 더 기다리지 않고 돌아선다. 난 혼자 가도 돼. 그리고 정말, 공항과 반대 방향으로 똑바로 걸어가기 시작한다. 나는 길 한복판에 멀뚱히 남겨져 멀어져 가는 뒤통수를 그저 쳐다본다. 온 사방에 햇빛이 하얗게 가득 차 있고 그 속에 꽃가루가 둥둥 떠다니고 그 가운데 네가 있었다. 등 뒤에서 왕왕대는 무리들의 소음이 까무룩 꺼져간다. 어지럽다. 그 애가 나를 한 번 더 돌아본다. 이미 나는 제 뒤를 따라 걷고 있다. , 웃는 것 같다. 얼굴이 말갰다.

 

 

버스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도로가 좌우로 갈라지는 길목과 맞닥뜨렸다. 승현은 겉옷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관광지도를 꺼내 펼쳤다. 그 동안 얼마나 조물락댔는지 접선면마다 하얗게 바랜 상태였다.

"지금 우리 있는 데가 한 이쯤일 거야. 여기 겹치는 거 보이지?"

도로를 표시하는 하얀 선 두 개가 교차하는 지점을 가리킨다.

"이 도로 따라서 걸어가면 바다가 나와."

승현의 손가락이 천천히 도로선을 덧그린다. 일부러 짓이긴 것처럼 온통 해진 손톱 피부가 언뜻 눈에 들어왔다.

"얼마나 먼데?"

"축척 계산해볼까?"

". 이런 데서 공부 잘하는 티 내지 마."

그러자 승현은 드물게 소리내어 웃었다. 멀지 않을 거야.

 

우리는 하늘이 넓게 펼쳐진 방향으로 나아갔다. 늦은 봄의 햇살은 팽창하는 듯 따뜻했다. 그 속을 너울너울 걷고 있자니더웠다. 처음엔 저질렀다! 는 일탈의 쾌감에 괜히 환호성을 지르기도 하고 여기저기 셔터를 눌러대는 등 마음이 마구 들뜨기도 했다. 녹음은 푸르렀고, 봄꽃은 아직까지 길가에 싱싱하게 피어 있었다. 분명 지난 며칠 여러 번 지나쳤을 흔한 시골길 1차선 도로에 지나지 않는데도. 바로 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섬에 와 있는 기분이었다. 새소리와 풀잎 스치는 소리, 바람소리. 단체로 이동할 땐 절대 느낄 수 없던 평화로움이었다. 그런데 갈수록 어깨가 쳐진다 싶더니 아스팔트에서 푹푹 올라오는 열기에 다리가 점점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승현은 시종일관 침묵한 채 앞서 걸었다. 이 화창한 날씨에 어두운 곤색 가디건과 검정 레깅스 차림. 덥지도 않은가. 친한 사이도 아니라 대놓고 징징대지도 못 하고 끙끙대고 있는데 승현이 먼저 말을 걸었다.

"<노킹 온 헤븐스 도어>라는 영화 혹시 알아?"

"뭔데 그게."

"그거 보면 남자주인공 둘이 바다 보려고 길을 떠나거든. 우리가 꼭 그거 같다."

아 그래? 딱히 흥미없는 얘기라 미적지근하게 반응했더니 승현은 도로 입을 다물었다. 나는 땀을 훔치며 쨍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헤븐이라.

 

그렇게 버스를 떠나 걷기 시작한 지 2시간이 채 지나지 않았을 즈음.

"저거 봐."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긴다. 숲을 따라 횡으로 난 길, 북쪽, 우리들의 몸 오른편으로. 연두색 수풀 사이에 파란 물빛이 어룽거렸다. 바다다! 내내 구부정하던 승현의 몸이 물오른 생선처럼 탁 튀어 올랐다.

"안 멀 거라고 했잖아!"

의기양양하게 좍 편 가슴이 놀랄 만큼 판판했다.

 

그러나.

바다는 역시 (보기보다)멀었다. 손에 쥘듯 말듯 좀처럼 닿지 않는 무지개처럼, 걸어도 걸어도 수평선은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았다. 나는 점점 골이 나기 시작했다.

"지금 이 도로가 해안선이랑 평행해서 그래. 내려가는 길만 찾으면 금방이야. 진짜로."

승현은 내 눈치를 살살 보며 그놈의 지도에 코를 박은 채 자신없는 투로 말했다. 관광지도따위 아무리 뜯어봐봤자 도로에서 바다로 빠지는 샛길 같은 게 표시되어 있을 리가 없다. 여기로 내려갈 수도 없고…… 승현이 걱정스레 바다 방향으로 난 도로 옆 경사진 덤불을 굽어보았다. 낭떠러지나 다름없었다.

"사람 하나 굴리면 길이야 금방 뚫리지 않을까?"

농담 삼아 중얼거리며 슥 쳐다봤더니 과장된 걸음으로 사삭 물러난다. 어허. 어딜 도망가. 장단을 맞춰줬더니 어색하게 무슨 만화 캐릭터처럼 방어자세 같은 걸 취한다. . 뭐하냐? 내가 웃자, 승현은 안심하는 것처럼 보였다.

 

언제부턴가 길 위에서 승현은 두서없는 말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까 말한 <노킹 온 헤븐스 도어> 말인데. 거기 주인공들은 우리처럼 이렇게 조용하게 여행 안 해. 엉겁결에 차 훔치고, 본의 아니게 강도짓도 하고, 마피아한테 쫓기고, 길 가다 만난 사람이랑 사랑에 빠지…… 아 이건 <델마와 루이스>구나. 하여튼 엄청 버라이어티해."

그날따라 승현은 답지 않게 유난히 말을 길게, 많이 했다. 오랫동안 입을 닫고 살아온 이 특유의 진한 목소리로, 별 것 아닌 소소한 이야기들을 밝게 하려고 애썼다. 쟤가 나랑 친해지려고 그러나?

"주인공 둘이 시한부야. 그래서 그런지 진짜 목숨 걸고 어떻게든 바다에 가려고 하거든. 죽기 전에. 그래서 영화가 코미디처럼 진행하다가도 뭔가 좀절박해. 우리도 오늘 당장 죽을 운명이라고 하면 지금 이렇게 한가하진 못 하겠지?"

호응을 해주고 싶어도 솔직히 잘 모르는 화제라……나는 땀을 훔치며 별 뜻 없이 툭 던졌다.

"내가 보기에 넌 지금도 엄청 절실한 거 같애."

나보다 앞서 걷고 있던 그 애가 어떤 표정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아마, 조금, 내가 어떤 부분을 건드렸던 걸지도 모른다. 잠시 정적이 흐른 후 승현이 비장한 목소리로 고백했다. 저기 사실은.

"나 가출하는 거야."

?

"어차피 제주에 있으면 결국 들킬 것 같긴 한데."

나는 얼이 빠지고 만다.

"뭔 소리야? 여기 아는 사람이라도 있어?"

"없어서 좋잖아. 난 옛날부터 아무도 날 모르는 곳에서 살고 싶었는데."

이전에도 승현에게서 어쩐지 집단이나 사회에서 좀 동떨어진 듯한 인상을 받은 적은 있지만, 그땐 뭐 이런 4차원이 다 있나 싶어 입이 떡 벌어졌다.

"무슨 죄 지은 거라도 있어? 뭐 꼭 숨어 살고 싶다는 거 같잖아."

"딱 맞네. 죄지은 것 같은 기분인 거. 난 내가 부끄럽고 수치스러워. 항상 그래."

바다 방향으로 아무렇게나 던진 시선은 어딘가 다른 차원을 응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영화 너무 많이 본 것 같다. 아니 그보다 이보세요.

". 그럼 난 어쩌라고."

"……."

"난 바다만 보고 바로 갈 줄 알았단 말이야."

"……."

"……."

"미안."

"너 진짜 사이코 같애."

 

나는 한동안 화났다는 걸 티내기 위해 일부러 군대걸음으로 그 앨 앞질렀다. 하지만 안 그래도 지쳐있던 터라 금세 주저앉을 듯 다리가 흐물흐물 풀려버렸다. 뒤에서 따라붙은 승현이 내 배낭을 죽죽 잡아당겼다. 아 뭐야! 들어줄게. 됐거든! 너 나한테 말 걸지 마! 택시비 줄까? ? 택시 타고 공항 가. 선생님 남아 계실지도 모르잖아. 아니면 부모님한테 전화해도 되고. 너는? 나는 계속 갈 거야. 대체 왜? 가출했다니까. 정신병자. 그러자 승현이 인상을 찡그렸다. 뜻밖의 노골적인 반응에 난 나도 모르게 움츠러들었고. 승현은 잠시 날 엄격한 눈초리로 쳐다보다가팔을 축 늘어뜨렸다. 지친 얼굴이었다.

"그래. 내가 봐도 나는 참 이상해."

그러고 기어이 내 가방을 뺏어 들더니 도로 앞장섰다. 나보다 키도 작은 게 센 척이야. 하지만 짐이 없으니 확실히 등이 시원하다. 종종걸음으로 그 애 뒤를 좇는다.

 

대화는 띄엄띄엄 이어졌다. 풍경이 한 번 바뀔 때마다, 도로가 조금 휘어질 때마다, 새가 숲에서 튀어나와 우리 머리 위를 스쳐갈 때마다.

 

"근데 나도 네가 진짜 계속 따라올 줄 몰랐어."

"……." 내가 뭐 여기까지 와서 어디 갈 데가 있어야지.

"미안해."

"됐어. 내가 따라온 거잖아."

"."

 

말하는 사이 조금씩 승현의 목소리는 가벼워졌다.

 

"그러고보니 몸은 이제 괜찮아?"

"빨리도 묻는다."

"……."

 

"."

"."

"너 왜 하필이면 나한테 부탁했어?"

우리 별로 친하지도 않잖아. 너랑은 그냥 교실에서 가끔 우연히 눈이 마주친 게 전부야.

 

"……."

때론 침묵했다.

 

"저기. 진짜 택시 타고 안 갈래?"

"나 혼자 어떻게 가. 너 나 보내고 싶냐?"

"아니……"

"……."

 

"유진아."

 

승현은 자기 것 같지 않은 묵직한 바리톤을 낼 줄 알았다.그 때마다 나는 일일이 놀라곤 했다.

 

"."

"너 혹시 집에 무슨 일 있어?"

……

"부모님 이혼하실 것 같아."

"그랬구나."

"."

 

타박타박.

 

"."

"?"

"어떻게 알았어?"

우리 집 안 좋은 거.

"집에 가기 싫어하는 것 같길래."

심지어 날 따라왔고.

그렇구나.

잠깐만 근데 보통 그런다고 바로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지.

사실은 찍은 거야.

…….

 

공기 중의 물방울이 조금씩, 느리게 움직인다.

 

야 박승현.

?

너 내 이름 처음 불러본 거 아냐?

아냐. 전에도 몇 번 부른 적 있어.

언제.

나는 기억해.

 

 

.

 

 

 

"비다."

 

 

하늘에 구름이 많아진다 싶더니 어느새 빗방울이 홀연히 유령처럼 떠올랐다. 하얀 블라우스 어깨에 살색 얼룩이 퐁퐁 솟았다. , 이 동네 비는 하얗고 추적추적하구나. 산뜻한 냄새와 시원한 기운에 마음이 붕 뜨던 것도 잠시. 비도 바다 만큼이나 보기와 달랐다.

"! 비 너무 많이 오는데?"

하늘이 밝아 잠시 지나가는 여우비라고 생각했는데. 솨아아아. 어느새 억센 장대비가 되어 도로는 금세 꽐꽐 흘러넘치는 빗물로 넘실거렸다. 운동화 앞코가 흥건히 젖어 걸을 때마다 찔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저기 나무 밑에라도 들어가 있을까."

". 어차피 벌써 젖었는데. 그냥 끝까지 가자."

"그래도. 유진이 너 아팠잖아."

"멀쩡하니까 여기까지 왔지. 너야말로 가방에 있는 거 다 젖겠다."

"괜찮아. 이건 안 젖는 거야……"

혹은 젖어도 나쁘지 않을지도 몰라. ? 뭐라구? 아냐. 빗발이 단숨에 더 거세졌다. 두두두두. 꼭 비에 후들겨 맞는 기분이었다. 마음이 붕 떠 찝찝한 신발과 양말을 아예 벗어버렸다. 도로 위엔 검은 자갈이 부비트랩처럼 잔뜩 널려 있었다. , , , 아씨. 나는 스텝을 밟듯 그 위를 팔짝팔짝 뛰었다. 발바닥에 알갱이들이 박힐 때마다 짧게 짧게 신음이 터져 나왔다. 아픔과 함께 야릇한 쾌감이 밀려든다. 승현이 내 쪽을 돌아본다.

", 이거 기분 진짜 좋아."

나는 얕은 물살을 맨발로 거침없이 헤치며 외쳤다. 여긴 정말 우리밖에 없어. 미미한 웃음을 띠고 날 바라보던 승현도 제 신발과 레깅스를 천천히, 힘들여 벗는 게 보였다. 곧 빗물이 난폭하게 엉겨드는 뿌연 시야에 앙상한 종아리가 허옇게 떠올랐다. 살이 얼기설기 온통 새빨갛게 해져 있다. 순간 숨을 들이켰다.

승현이 하늘을 향해 입을 벌린다. 그리고 지면에 발을 디디고 서서 연극적인 몸짓으로 천천히 양팔을 위로 쳐든다. 뿌리를 내리는 나무처럼 아스팔트에 붙박인 다리에 새겨진 붉은 맷자국은, 마치 도끼로 여러 번 찍어낸 실패한 벌목의 흔적 같았다.

"혹시 <쇼생크탈출> 봤어?"

둥치 내부의 공기가 웅웅 울리며 승현의 말을 실어 나른다.

"잘 안 들려!"

"쇼생크탈출! 영화 제목! 거기 포스터 포즈다 이거!"

"넌 뭐 하는 말마다 다 영화냐?!"

빗소리가 거셌고 우리는 큰 소리로 말을 주고받았다. 멀게 들렸다.

길게 화답하고서 승현은 이어

"나도 나중에 영화 찍을 거야!"

세상에 선언이라도 하듯 크게 외쳤다. 상처난 종아리에 진득하게 달라붙어 있던 내 시선도 매끈한 줄기를 타고 올라가. 양팔을 활짝 펼친 좁은 등판에 날개뼈가 움쑥거리는 모습을 본다. , 항상 혼자 그런 걸 생각하고 있었던가. 등근육이 한껏 수축했다가, 터진다.

!

뭔가 동시에 속에서 치고 올라오는 기분에 나도 노래하듯 맞받아쳤다.

!

!

빗속에서 탄성을 핑, , , 퐁 주고 받는다.우리는 어느새 너 나 할 것 없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깔깔 웃음이 터져 나왔다. 물에 젖은 풀들이 향기를 내뿜었고 콧속에서 술기운 같은 게 올라왔다. 시원했다. 시원했다! 죽도록 좋았다! 빗물로 가물가물한 눈꺼풀 사이로 엄마와 아빠, 냉담한 친구들의 모습이 아른아른 스쳐 지나갔다. 그들은 알까. 나는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참고, 견디고 있다는 걸. 내 속엔 실은 이만한 빛이 차고 넘친다는 것을. 그러니까, 나도 이게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눈을 거칠게 씻어내자 지척의 바다가 눈에 들어왔다. , 이 빗속에도 청록색으로 푸르른 저 맑은 소금물. 시야가 갑자기 환해진다. 나는 승현 몰래 조금 울고 말았다.

 

<쇼생크탈출>은 교도소를 탈출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야. 사실 남자에겐 죄가 없어. 누명을 썼거든. 하지만 쇼생크교도소에게 그의 죄의 여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 다만 그를 가두고, 그의 직업과 삶. 사랑. 모든 것을 빼앗을 뿐이지. 주인공이 오랜 세월에 걸쳐 드디어 그곳을 탈출하던 날, 하늘에선 비가 쏟아지고 있었고주인공은 뻥 뚫린 창공을 향하여 두 팔을 날개처럼 뻗친다. 그 자유를 다 담아내기에, 브라운관의의 화면은 너무 좁다고 승현은 말했다. 그럼에도 자신은 차라리 그 속에 들어가고 싶다고도.

 

우리는 줄척줄척 젖은 몸으로 길 끄트머리의 어느 버스정류장에 이르렀다. 고즈넉하니 버스는 좀처럼 오지 않을 것 같은 정류장이었다. 나는 기진맥진하여 의자에 간신히 올라 앉았다. 승현은 지붕 끄트머리 밑에 서서 치마를 쭉 짰다. 그 애의 마른 몸매를 본다. 윤곽이 드러난 몸뚱이는 군살 하나 없이 탄탄했다. 저 애가 몸이 저렇게 예뻤던가. 물방울이 튀는 하얀 다리가, 맨살에 휘감겨 붙는 젖은 치마가 어쩐지 무척 외설스럽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 애가 갑자기 내 쪽으로 돌아섰을 때 나는 나쁜 짓이라도 하고 있었던 마냥 눈을 꽉 감아버렸다.

". 뒤에 좀 봐."

버스정류장의 뒷벽은 투명한 가판으로 되어 뒤쪽의 풍경이 훤히 비쳐 보였다. 정류장의 프레임 너머로 바다가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이야. 바다와 비 내리는 하늘은 뿌옇게 경계가 무색하여 마치 하나로 합치된 것처럼 보였다.

승현은 의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와 떨어져 앉았다. , 왜 거기 앉아. 옆에 와. ? 춥다. 붙자. 승현은 조금 머뭇대다가 얌전히 건너왔다. 투투투투. 플라스틱 지붕이 비를 막아주기 때문인지 승현의 숨소리가 옆에서 무척 크게 들렸다. 몸에서 수증기라도 뿜어져 나올 태세였다. 품에서 비릿한 살냄새가 끼쳐 온다. 묘한 체취에 나는 고개를 돌려 그 애를 보았다. 늦봄의 폭우. 파리하게 질린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뺨은 발그레하니 생기와 기대로 넘친다. 꼭 뭔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속눈썹에 맺힌 물방울이 후두둑 다 떨어질 때까지, 그 무엇도 오지 않았으므로, 결국 네가 말을 걸 상대는 나밖에 없었을 거다.

"유진이 너 아까 울었지."

"……."

"지금도 표정 좀 그래. 눈치 안 봐도 되는데. 울고 싶으면 그냥 울어."

"싫어. 쪽팔리게."

"넌 울어도 예뻐. 괜찮아."

". 너 나 꼬시냐 지금?"

흐흠. 웃는 콧소리가 플라스틱 가벽에 퉁겨져 나와 웅웅 울렸다. 꼭 꿈속에서 듣는 음성 같다. 에휴. 모르겠다. 몸에 힘을 쭉 뺀다. 몸 속의 체액이 다 빠져나간 기분이다. 가슴 속 판막 같은 게 허물어진 것 같은…… 비가 세차게 오고 날은 차고 젖은 몸에선 더운 빗물이 주루룩 흘렀다. , 좋다. 갓난아기라도 된 것 같아. 문득 극심한 허기가 느껴졌다. 무언가 맛있는 음식을 배가 터지도록 맘껏 먹고 싶다. 이를테면, 과육이 흠뻑 배어져 나오는 달콤하고 신선한 과일 같은 것.

"야 박승현. 너 음식 챙겨 왔지? 지금 좀 먹자."

그런데 승현은 대답하는 대신 제 가방을 품으로 더 끌어들인다.

"뭣 좀 먹자니까?"

…….

"미안. 여기 음식 없어."

"우와. 야 너 가출하면서 식량을 안 챙겨오면 어떡해?"

승현은 잠자코 제 발치만 내려다 보았다. 얘 왜 이래? 그저 눈만 끔벅거리다가 옆구리를 푹 찔렀더니 그제야 침울하게 입을 뗐다.

"……사실은 말야. 나 가출하려고 한 거 아냐."

무슨 또 황당한 이야기를. 기가 차서 허허 웃고 만다.

"뭔데. 이젠 너가 뭐라고 해도 안 놀랠 것 같아."

또 침묵. 나는 한 번 더 채근한다. 뭔데, 말해 보라구. 나는 어쩐지 신이 나서 승현의 옆구리를 푹푹 찔렀다. 싫다고 이리저리 몸을 피하던 그 애는 결국 머뭇머뭇 가방을 열어 내용물을 보여주었다. 실은 그 순간을 줄곧 기다리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가방엔 두세 겹으로 밀봉한 비닐팩에 노트 2권과하얀 봉투가 들어 있었다. 겉봉에 '유서'라고 커다랗게 쓰여진.

…….

,

보지 말걸.

 

", , 정성스럽게 비닐로 싸기까지 했다 야."

가까스로 짜내는 말이 어찌나 그리 어눌하게 들리던지.

"바닷가에서 죽을 생각이었으니까. 혹시 몰라서."

승현이 팩을 내밀었다. 아니, 안 줘도 되는데. 엉겁결에 받아 들었다. 손에 시한폭탄을 든 기분이었다.

"…… 노트는 뭐야?"

"일기장."

지면을 후들겨 패는 난폭한 폭우에 물안개가 훅 피어올라 승현의 목소리를 제외한 다른 풍경을 지워버린다.

"나 아까 노킹 온 헤븐스 도어 얘기 했잖아. 사실은 그것처럼 죽으려고 했어.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바다를 보고 해변에서…… 그런데 너가 같이 와서……."

목소리가 점점 작아진다. 마치 버스정류장 아래 우리 주위만 시간이 멈춘 것 마냥 고요했다.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발치를 감싸는 수증기도, 직육면체의 공간도, 사위를 하얗게 지우는 저 먼 빗소리도 모든 게 승현의 자기고백을 위해 연출된 장치이며, 승현은 이제 그 무대 한가운데서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아 중얼중얼 1인극 독백을 시작하는 거다. 문장 끝마다 까무룩 꺼져가는 듯한 피로한 목쉰 소리가 난다. 속에 품고 꺼낼 때만을 기다리던 동안 가슴이 너무 너덜너덜해져버렸는가. 지친 낯이 무척 늙게 보였다. 세상의 진실을 너무 일찍 알아버린 반백의 원로배우처럼. 갑작스럽게 맞닥뜨린 타인의 맨얼굴 앞에서 마음이 무거워졌다. 세상 누구나가 그러하듯 나 또한 성장하면서 한 겹을 두르고 사람 대하는 법을 배웠다. 그런데 얜 딱히 친하지도 않은 나한테, 너무나.

"대체 왜?"

내 보조에 승현이 말을 고른다. 중요한 장면일 것이다. 이야기의, 주인공의 삶 기저에 깔린 비밀이 전격공개되는.

"내 몸이 싫어서..."

너의 몸? 내 눈이 그 애의 몸 위를 흝는다. 그 작은 키, 좁은 어깨, 소름이 돋은 창백한 살갗. 훤한 목덜미. 부러질 것 같은 목대의, 그 어떤 것이?

"몸이 여자로 태어난 게 싫어서."

으응?

승현은, 낮게 깐 목소리로, 강하게 말했다.

 

"난 여자 아니야."

 

 

*

 

승현과 그 친구들이 한 데 모여 있다.성소수자 동아리 부스를 둘러싸고 호객을 하거나 간간이 저들끼리 한담을 나누거나 한다. 남자로도, 여자로도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무리에 드문드문 섞여 있다. 승현의 이질감은 그 속에서 다소 평범해 보이기까지 했다. 어머 저 사람들 트랜스젠던가 봐. 남자친구와 나란히 우산을 쓰고 지나가던 여학생이 결코 작지 않은 목소리로 호들갑을 떨었다. 앞섶이 교묘하게 튀어나온 스포츠머리의 여자가 음울한 호랑이 같은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멍청했던 첫 남자친구가 지껄이던 음담패설이 문득 떠올랐다. 나 아는 누나가 홍콩의 클럽에서 꽤 잘 생긴 현지 남자를 만나서 원나잇을 했는데, 그 사람이 알고 보니 트랜스젠더였대. 수술해서 진짜 남자 자지가 달려 있긴 했는데 문제는, 거기 연결된 관 같은 게 오른쪽 골반 위를 지나가서, 거길 꾹 누르면 가짜고추에서 정액이! ! 하더라며, 모텔 침대 위에서 고환을 덜렁거리며 킬킬 웃지.

무심코 승현의 고간을 쳐다본다. 아무런 부피감도 없어 보인다. 수술은 했을까. 만약 했다면, 승현도 그런 모조품 같은 걸 달고 있는 걸까. 그의 아래턱에 툭툭 올라와 있던 좁쌀 같은 뾰루지가 수염 자국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뒤늦게 든다. 꼭 스크린 너머로 심해의 동물들을 바라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승현도, 그들도. 분명 이 세상 어딘가엔 존재하겠지만 육상에선 영원히 마주칠 일 없을 것 같던 색색깔의 발광체. 기괴하고, 낯설고, 하지만 사실은 매우 오래되었을 고대생물의 흔적기관. 이젠 그 누구도 제대로 기억하고 있지 못하는 사물의 기원원시바다에서 올라온 사람들. 그 모습을 티비로 지켜보는 나우리. 그 사이에 가로놓인 유백색 장막. . 낡은 필름이 재생된다. 좁은 시야, 갑갑한 화면. 빗속의 도로에서 한없이 뻗어나갈 것 같던 날개달린 양팔이 아주 오래 전의 일 같았다.

 

 

*

 

승현은 침묵을 견디지 못 했다.

"우리 꼭 <스탠바이 미> 같다. , 그것도 영화야. 남자애들이 집 나와서 그냥 계속계속 걸어가는 내용인데……. 거기 보면 어떤 남자애 하나가……. 그렇게 멀리까지 나와서야 선생님이... 폭력이 있었다고 친구한테 겨우겨우 고백하는데……."

주절주절. 이번에야말로 얼굴이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내 곁에 바싹 붙어 앉은 그 애의 몸뚱이에서 떨림이 전해져 왔다. 난 걔가 당장이라도 벌떡 일어나서 낭떠러지로 달려 내려가 버릴까봐 두려웠다. 그 애가 후회에 몸부림치면서서도 이미 봇물이 터진 입을 주체하지 못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마치 내가 그 애 생명을 손아귀 안에 꾹 쥐고 있는 기분이었다. 신경이 곤두선다.

"이럴 때도 영화 얘기야? 진짜 좋아한다."

나는 자극하지 않으려 최대한 천천히 달래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저기. 승현이 너는 꿈도 있고 공부도 나보다 잘 하잖아. 사정은 잘 모르겠는데. 치마야…… 이때까지도 참았는데 까짓 거 한 2년만 더 참으면 되잖아. 대학 가면 너 입고 싶은 대로 맘껏 입어도 되고…… 그땐 살고 싶은 대로 살 수 있잖아. 왜 죽어. 지금 죽으면 영화감독도 못 되잖아."

아니, 정말 죽을 생각이었을까? 그렇다면 왜 날 더 적극적으로 떼어놓지 않았지? 넌 날 기다리기까지 했잖아. 그런 게 아니야. 승현은 울적한 얼굴로 고개를 휘휘 저었다.

"치마를 안 입고 머리를 짧게 깎는다고, 가슴이 달렸고 자궁이 있고 여자화장실에서 볼일을 봐야 하는 내 처지가 달라지진 않잖아. 생리도 계속 하고."

"그거야네가 여자니까……"

승현의 목청이 별안간 높아지면서 소프라노로 치솟았다가

"남자라니까! 근데 이상하게 태어나서……"

곧장 풍선 마냥 피시식 수그러들었다. 웅얼웅얼. 말하고 싶지 않지만, 말해 봤자 소용없다는 걸 알지만. 속에 꽉꽉 눌러둔 게 줄줄 새어 나온다. 호르몬제를 복용한다는 것, 그래서 겨우 생리를 하지 않게 됐지만 대신 몸이 늘 아프다는 것. 어지럽고 아찔하다는 것. 손 하나 까딱 못 할 만큼 육신이 말을 듣지 않는 날이면 방바닥에 누워 생각할 수 있는 게 죽음밖에 없다는 것. 되도록 말을 하지 않는 건, 내 목소리가 싫어서야. 방금처럼 고음으로 확 올라갈 때, 그때 참 끔찍해. 일기장? , 이런 걸 다 적어 놓은 거지. 나는 청소년 트랜스젠더입니다! 이런 고민을 했고, 저런 고통을 겪었어요. 아프지 않게 자살하는 방법을 오랫동안 조사했습니다. 가슴제거수술을 어느 병원에서 해주는지, 성전환수술에 얼마가 드는지 나의 선생님들한테 묻고 다녔어요. 하지만, 이대론 아무도 들어주지 않을 것 같아. 나는, 내 죽음으로라도 이 세상에 ''를 알리고 싶은데. 역설적이지만, 그렇게 해야 비로소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서. 죽어, 죽어야만이. 강제로 교복치마를 껴입고, 폐를 조이는 압박조끼를 차고 교실에 앉아 있자면, 죽을 것 같아. 여기 이 살덩어리 두 짝이 꽉꽉 눌려서 숨이 찬다고요. 내가, 사람인지 어륜지. 생선대가린가. 왜 숨을.

마땅한 표현을 찾지 못하는 듯 얼굴이 더 더 일그러진다.

", 숨을 못 쉬겠어."

작은 몸이 폭발할 것처럼 응축된다.

 

살면서 한두 번 들어볼까 말까 한 단어들로 머리가 빙글빙글 어지러웠다. 그러니까... 관객이 필요했던 거구나. 제 죽음을 관람할 사람. 제 고통과 고민과 울분을 대신 전달해줄 사람. 걔가 그렇게 힘들었대요. 그런데, 왜 하필 그게 나인가? 흔들리는 시야에 언뜻 붉은 종아리가 내비쳤다. 가까이서 본 맷자국은 시뻘겋게 부어올라 곧 살가죽을 찢고 피가 터져 나올 것처럼 보였다. 퍼뜩 정신이 깬다.

그것 때문에 맞은 건가? 그러니까, 약이라든지 성별...이라든지 뭐 그런 거.

이 앤 좋은 애다. 숙제도 늘 꼬박꼬박 해오고 남의 부탁을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그리고 잘은 모르겠지만 꿈이 있다니 아마 알면 알수록 더 멋진 애일 거다. 아이들이 선뜻 말을 걸지 못 하는 건 딱히 이 애가 이상하거나 싫어서는 아니었다. 좌우지간, 정말, 누구한테 맞고 다닐 잘못을 저지르는 그런 애는 아닌데.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나도 쟤가 왜 저러는지 이해는 잘 안 가는데

그게 사람이 사람을 해할 수 있는 이유가 되는지?

나는 불현듯 이 세상이 그다지 정의롭지 못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

 

 

축제는 여느 대학축제와 같이 연예인의 무대로 이어졌다. 저녁 어스름이 깔리고 빗줄기가 잦아들어 공연은 예정대로 야외에서 진행된다. 초청된 뮤지션들이 차례로 무대로 올라왔다. 부스에 빛이 하나둘 꺼져가고 성소수자 동아리도 어느새 철수한 모양이다. 메인 게스트인 걸그룹이 등장하자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일제히 무대 앞으로 몰려갔다. 음악의 리듬에 맞춰 파도치고 흔들리고 벙벙 뛴다. 주점에서 열심히 굽고 나르던 학생들도 하나같이 무대를 주목한다. 배를 다 드러낸 다이나믹한 몸매의 소녀들이 허리를 매끈하게 돌릴 때마다 서치라이트가 요란하게 터진다. 나는 폭죽처럼 날아드는 빛덩이 사이에서 헤맨다. 하이라이트. 새하얀 빛이 온 사방을 팡 밝히는 순간, 그가 보였다.

사람들이 썰물처럼 쓸려나간 광장 뒤편에 우두커니 서 있다. 친구들도 다 어디론가 갔는지 혼자였다. 나무젓가락처럼 밋밋한 몸, 작은 얼굴을 꼿꼿이 받친 선 가는 목줄기, 푸석한 얼굴, 공허한 눈. ''는 내 시선을 알아차리지 못 하고 빛바랜 모습으로 여전히 어딘가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서글퍼졌다. 여전히, 이방인. 남자도 여자도 아닌 사람. 기울어진 몸. 건강한 숲 속에 유일하게 메마른 한 그루 고목처럼…… 풍경과 동화되질 못 하는…… 무대 위에서 또 한 번 빛을 쏘아보낸다. 내장처럼 붉은 등이다. 바로 그때, 나는 승현이 주먹을 말아 쥐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멍하니 있는 게 아니었다. 그는 무대를 노려보고 있었다. 흘러넘치는 그녀들의 성()에 맞서기라도 하겠다는 듯 무대와 정면으로 대치하고 있었다. 가슴 속에 빳빳하게 서 있을 심지에 불을 붙이면 어둠 속에서 언제까지고 불을 밝히며 그대로 서 있을 것만 같다. 제 몸을 불사르며

승현아. 그 애가 나를 돌아본다. 눈동자 안에 내가 익히 아는 빛이 일렁이고 있다.

 

 

*

 

 

내가 네게 물었었지.

"꼭 그래야만 해?"

그러니까, 어찌 됐든 여자로 태어났는데 왜 그런, 멀쩡한 가슴을 압박하거나 약을 먹거나. 그런 일까지 당하면서. 네가 너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 같애. 그냥 너는 너대로 살면 되는 거 아니니. 네가 무엇이든. 승현은 얼굴을 들고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래, 그 눈. 불꽃이 일렁이는 눈.

"이게 ''니까."

아득한 옛날처럼 뿌옇게 지워져가던 몇십분 전의 기억이 다시 성큼 가슴을 짓눌렀다. 승현은 다리를 조이던 레깅스를 벗어던졌고, 나는 동급생의 하얀 다리에 시선을 빼앗겼으며, 함께 빗속에서 춤을 추었다. 거긴 충만감이 있었고…… 그 정도로 자유로운 ""는 처음이었어. 그렇구나. 그게

''라는 거구나.

너 대단하다. 뭐가. 아니,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 흔치 않잖아. 그러니까 뭐가. ''라든가... 무슨 말이야? 나도 잘 모르겠다. 하여튼

"죽기엔 아까운 것 같애."

어쨌든, 바다는 한번 가봐야지. ? 우리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이번엔 내가 둘뿐인 행렬의 선두에서 승현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아까, 내내 앞장서서 길을 열어주었던 너는, 문득 문득 목마른 나무처럼 빗물을 받아 마셨지. 강하고 아름다웠어. 그런 네가 왜 날 선택한 걸까. 왜 내게 객석을 내주고, 지금 이렇게 관객 이상의 역할을 하게 만드는 걸까. 나는 이따금 마주치던 은근한 시선을 기억해냈다. 많은 비밀을 담고 있을 것 같던 눈동자를. , 이번 여행은 바다에 가지 않는다는 말 나한테 왜 했어? 내 눈두덩 얇은 살결 위에 착 달라붙던 뜨거운 손바닥도 살려낸다. 그때 긴장했던 거야? 네가 이번 수학여행 내내 나에게 친절했다는 건, 착각인가? 수많은 의혹들이 쏟아져 나올락 말락 목 언저리에서 꿈틀거렸다, 혹시, 혹시 말이야.

"너 혹시 날 보고 있었어?"

교실 한구석에서, .

"……!"

승현의 얼굴이 난처하게 일그러졌다.

". 진짜야? 어쩐지."

"……죽고 싶다 진짜."

손으로 자꾸 얼굴을 가리려드는 승현은 정말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반면 나는 웃음이 실실 새어 나왔다. 뜻밖의 기쁨이 가슴 속에 밀려들었다. 대놓고 물어볼까. 내가 좋은 거냐고. 한바탕 놀려먹고 싶은데 그랬다간 정말 울겠지. 자아는 강해도 마음은 여린 아이. 조금만 확 빗겨 그어도 피부가 종잇장처럼 얇게 찢겨나갈 것 같은. 그리고 그 속엔빛과 눈물로 가득 차 있을. 뭘까, 이 신비로운 생물은! 순간, 그 앨 한번 만져보고 싶은 불가사의한 충동에 사로잡혔다. 어쩌면 그건 처음으로 만나본 낯선 유형의 인간에 대한 호기심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환상의 동물이 잠들어 있다는 동굴을 탐험하기라도 하는 마냥. 와이셔츠를 열면 살냄새가 얼마나 진해질까, 뼈는 단단한가, 압박하지 않은 가슴은 얼마나 봉긋이 솟아 있을지? 하얗게 질린 저 입술에선 또 어떤 맛이 날까…….

 

.

키스할래?

?! 나 한 번도 해본 적 없어. 해보자, ? 어어?! 저기 가서. , ?

도로에서 빠져 숲으로 강제로 끌다시피 내려와 똑바로 마주 섰다. 나는 사랑받는 이의 배짱으로 소년 마냥 눈을 반짝였고, 바로 방금 전까지의 죽음으로 머리가 꽉 차 있던 녀석은 대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설렘 반 두려움 반으로 황망해했다. 그래 얼마나 황당했겠어. 나도 내가 돌았구나 싶었는데. 지나가는 차도 없는데 괜히 주위를 살펴 보고, 어깨를 붙들어.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었냐, 고 누가 묻는다 해도…… 아름다웠던 그 앨 잡고 싶었어. 그뿐이야.

 

그 순간에 하필 선생님의 그 말이 떠오른 건 왜였을까. 하늘이 허락하는 사랑을 하세요. 나는 승현의 감은 눈 너머로 하늘을 내다 보았다. 물이 쏟아져 내려 수평선을 뿌옇게 지우고 있었다. 도로 눈을 감는다. 하늘과 바다가한 데 섞이는 듯착란에 빠져.

 

 

*

 

 

"유진이 너, 혹시 나 좋아했었어?"

무대를 가르듯 나란히 맞잡은 손은 그날과 달리 서로 힘이 빠져 헐거웠다.

"아니."

그건 원래 내가 먼저 했어야 질문 아닌가.

"그럼 왜 그랬어."

"……. 그냥 그러고 싶어서."

뭐야. 그럼 좋아했던 거 맞잖아. 그럼 뭐가 달라지니. 너야말로 맨날 나 쳐다봤잖아. 네가 먼저 말 걸었잖아. 왜 하필 나였어. 네가 먼저 말해줘, 나를 특별하게 생각했었다고. 얼결에 책망하는 어조로 다그쳤다. 네 피로한 눈이 나를 본다.

"항상 혹시나 했었어."

, 참 보이시한 스타일이었잖아. 항상 여자애들을 데리고 다녔어. 혹시, 혹시나. 나와 비슷한 사람이 아닐까 했지. 너도 인터넷 커뮤니티에 같은 친구를 찾는 글을 올리는 애가 아닐까. 꼭 그게 아니더라도, 혹시 좀 통하는 데가 있지 않을까. 끊임없이 신호를 보냈었는데. 나를 알아봐달라고. 나는 너를 보고 있었어……

"왜 울어?"

승현이 묻는다. 모르겠어. 모르겠어. 수문이 터져버린 듯해. 기억도 마음도 줄줄 흘러나와. 괜찮아? 네가 머뭇머뭇 다가온다. 품에서 나는 냄새가 그때보다 더 진해졌다. 색색의 조명이 승현의 옆얼굴을 흐른다. 턱에도 근육이 잡힌 듯 전보다 뚜렷해진 그 윤곽을 바라본다. 몸에 어떤 변화를 일으켰는지 수염이 자라고 뼈마디가 굵어진 너. 남자의 향내를 어렴풋이 풍기는 너. 균형을 잡지 못해 어딘가 아파 보이는 너. 박승현이구나. 네가 무엇이든, 누구가 되었든, 변함없이. 빗속에서 물속에서 불꽃을 보여주었던 그 애.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나의 첫사랑.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힐을 신은 내 쪽이 실은 키가 조금 더 커서, 생각과는 달리 불편한 자세가 되었다.

후회해.

승현의 어깨가 가만히 들썩인다.

어떤 장면?

 

 

*

 

 

우리들은 결국 바다에 이르지 못했다.

 

아예 그날 중으로 학교에서 연락을 받은 지역경찰에게 붙잡힌 것이다. 다음날 부모님들이 몸소 제주까지 행차하셨다. 승현의 어머니는 경계의 눈초리로 내 모습을 아래위로 흝어 보았다. 쟨 무슨 여자애가 키가 저렇게 크니? 탈출한 짐승을 인계하듯 승현의 팔을 휘어잡고 끌고 가던 그 어머니가 그렇게 말하는 걸 나는 들었다.

월요일에 등교하자마자 나는 아이들의 질문세례에 휩쓸렸다. 야 너네 뭐야! 아니. 그냥 걔가 바다 보러 간다고 하길래. 우리 바다 못 봤잖아 제주까지 가서. 바보야, 공항 가기 전에 바다 한번 내려줬었어! 근데 생각보다 별로. 맞아. 비 오고 완전 다 콘크리트고…… 바보가 아니야. 나는 너희들보다 더 큰 바다를 보았어. 바다는 초록이었어. 그때까지만 해도 마법이 지속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나의 키 작은 연인이 뒷문을 열고 개선장군처럼 행차하기를 기다려 자꾸 뒷문을 엿보았지, 하지만 너는 그날 끝내 학교에 나오지 않았어. 나는 그 달뜸을, 사랑의 감정을 유지하기 위해 수업 내내 낮꿈을 반복해서 꾸어야만 했다. 필름이 다 닳도록. 지잉지잉, , 팟 하고.

그 다음 날, 교무실에 호출되었다. 승현이 먼저 와서 한창 설교를 듣고 있던 중이었다. 나란히 고개를 푹. 담임선생님은 아예 거품을 물었고, 구경하는 다른 선생님들은 엄한 눈초리로 같이 화를 내거나 재밌다는 듯 껄껄 웃거나 그랬다. 너넨 도대체 뭐냐, 난 니네 둘이 친한 줄도 몰랐다. 하여튼 꼭 남자 같은 애들끼리 어떻게 또 작당을 해가지고……. 나는 내 옆에 그저 조용히 선 승현을 곁눈질로 본다. 선생님한텐 남자 같은 게 아니라 난 남자에요, 라곤 차마 말하지 않는구나. 그때 옆을 지나가던 과학 선생님이 끼어들었다.

"너네 둘이 사랑의 도피라도 한 거 아니냐?"

순간 나는 찬물을 맞은 듯 숨을 삼켰다. 레즈비언! 그러자 담임이 눈에 힘을 빡 주고 우리 둘을 번갈아 노려보았다. 난데없는 현실감이 돋아났다. 뭐야, 뭐라고 해? 도와줘. 눈길을 돌려 본 승현의 그때 얼굴은어두웠다. 참으로 침중했다. 초라할 만큼 한없이 쪼그라들어 있었다. 뺨이 장밋빛으로 물들었던, 빗속에서 생명력으로 넘쳐나던 그 애는 더 이상 여기 없었다. 교무실 분위기가 이상해진다. 한없는 짜증이 몰려들었다, 뭔가 꿈도 환상도 다 박살나고 짓밟히는 느낌이다.

"그런 거 아닌데요."

나는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우리들의 가출소동에 대한 난무하던 온갖 소문과 억측이 가라앉을 즈음, 그 애가 교실에서 내게 비칠비칠 말을 걸어왔다. 그 애의 조물조물하는 입술이, 그 뒤로 우리 쪽에 시선을 던지는 아이들이 한꺼번에 눈에 들어왔고 가슴이 철렁했다. 내가 미쳤었나봐. 짐짓 큰소리로.

", 너 나 뭐 하고 있을 땐 말 걸지 마."

조용히, 무표정했지만 그 애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나만 알 수 있는 빛이었다 너는 돌아섰고 빛은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는 그날 친구들이랑 점심을 먹으면서 걘 왜 그렇게 꾸물꾸물 답답한지 모르겠다고 욕을 했다. 속이 갑갑했다. 그날 하루종일 위가 꽉 조였다. 너무나 싱겁게, 모든 꿈이 끝이 났음을 알 수 있었다.

 

3학년이 되어선 아예 반이 갈라졌다. 아예 시기도 시기고 층도 달라 마주칠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러다 어느날 소문이 들려왔다. 2반에 학교 안 나오는 애 있잖아, , 걔 자살기도했대. . 죽었어? 아니. 살아서 병원에 있대. 이런저런 얘기가 돌았다. 누군가는 걔 레즈비언인 것 같다고 했다. 누군가는 승현이 상의 아래 무슨 단단한 기구 같은 걸 착용한 걸 봤다고 폭로했다. 어쩌면, 구체적으로 뭘 상상하거나 하진 못 했지만, 머리를 유난히 짧게 깎고 자신에 대해서 그 어떤 말도 하지 않는 승현에게서 아이들 모두가 암암리에 위화감을 느껴왔던 걸지도 모른다.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어울리지 않는 장소에 있는 듯한.

선생님들은 아이들의 질문에 똑바로 답해주지 않았고, 며칠 후엔 자연스럽게 그 일 대신 수능과 대학에 대한 얘기가 다시 일과시간을 차지했다. 승현은 계속 학교에 나오지 않는 것 같았다. 이따금, 부모님이 정신과에 데리고 다닌다는 소문이 어렴풋이 들려왔다.

후에, 내가 졸업하자마자 같은 학교에 입학한 3살 터울의 여동생이 내게 물었다. 언니! 언니네 학년에 남자 같은 레즈비언 있었다며? 역사샘도 그러고 양호샘도 알더라. 나중에 정신과 갔다던데. 처음에 언니 얘긴 줄 알고 완전 쫄았잖아, 우리 언니 이젠 안 그러고 다니는데 혼자 속으로 막 그러고. 하며 여동생은 깔깔 웃었다.

 

어느 날 승현이 언급했던 탈옥 영화를 검색해 보았다. 상처 난 연약한 나무 같았던 그 애와 달리 훨씬 포스터의 배우는 더 힘차게 가슴을 활짝 펴고 있었다. 듬직하고 완연한 사내의 몸뚱이였다.

 

나는 대학에 입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를 사귀었다. 상대는 몇학번 위의 남자 선배. 흔한 얘기다. 과에서 유일하게 내가 힐을 신어도 나란히 다닐 수 있는 장신의 소유자였고 내게 친절했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그를 선택했다. 나는 그의 요구에 맞춰 주춤주춤 머리를 기르고 파운데이션을 찍어 발랐다. 다른 여자아이들을 어설프게 모방하는 그 일이 꽤 오랫동안 어색하고 불편했던 기억이 난다. 첫 행위는 학교 근처 모텔방에서 이뤄졌다. 담뱃내가 입 속에 우격다짐으로 밀려 들어와 늘 입안에 희미하게 남아 있던 너의 물맛을 덮어 버렸다. 불거진 몸뚱이가 숨이 막혀 몇 번이나 네 이름을 부르고 싶었는지.

새벽 3. 나는 모텔 욕조 안에 웅크리고 앉아 샤워기 물을 맞는다. 사내가 마구 헤집어 놓은 성기가 쓰라렸다. 울고 싶었다. 문 밖에 잠들어 있는 남자친구에게 들키지 않도록, 물소리 뒤에 숨어, 아이들은 연회를 벌이는데 나만 등 돌려 누워 숨죽여 울던 수학여행의 밤처럼. 흐느낌이 자꾸 새어나오자 아예 물 속에 잠겨버린다. 맘껏 울부짖고 싶다.

웃음이 나부낀다. 비와 물.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어지럽게 휘돈다. 우리들의 웃음과 울음. 번갈아가며 울다 웃는다. 더 깊게 잠수한다. 합쳐진 하늘과 바다에 방향도 무엇도 알 수 없는 곳에 감각만이 선연하다. , . 깊숙한 곳까지 가라앉는다. 비가 계속 내려 발을 감싼 하얀 연막이 더더욱 짙어진다. 구름층이 두터워진다. 바다와 맞닿은 하늘이 손바닥을 댈 수 있을 만큼 가까워진다. ... 숨이 막혀. 승현아. 사방이 막혀 있잖아. 하늘 말고는 머리를 들이밀 곳이 없어. 나는 90년대 영화가 좋아, 다들 어딘가에서 벗어나거든. 병실에서, 가정에서, 감옥에서... 네가 꿈꾸는 눈으로 말한다. 숨을 쉴 수가 없어. 네 곁에 어룽어룽 사람들이 보여. 네 친구들이니. 승현이 발돋움을 한다. 주위에 서 있던 성별 없는 사람들도 다 함께 팔을 뻗친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있는 힘껏 밀어 올린다. 너는 어느새 혼자 남아 그 하늘을 받치고 있다. 불투명한 막. 비가 내려, 물이 폐까지 차올라서. . 미안해 승현아 난 더 견딜 수가 없어…… 우리들은 하얗게 사라지고. 네가 웃는다.

 

 

 

무대에 오른 마지막 가수가 애절한 발라드를 노래한다. 한 남자와 한 여자의 비루한 사랑이야기. , 갈래. 승현은 나를 떼어내고 리듬에 맞춰 파도타기를 하고 있는 거대한 군중 속으로 들어가버렸다. 무너질 것처럼 기운 등이 흐느적대는 사람들의 몸통에 이리저리 치이다가 곧 보이지 않게 되었다. 네 친구들이 그 안에 있니? 나는 혼자 남겨진다. 저기. 나는. 살면서 너를 문득문득 생각했었어. 아니 어쩌면 항상 그랬던 걸지도 모르지. 고장난 테이프처럼 같은 영상을 반복재생했어. 네 꿈을 꾸는 건지 단지 너를 많이 떠올리는 건지 알 수가 없었어. 길을 걷다가, . 불 꺼진 방에 혼자 누워 있다가, . 하늘을 보다가, .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 그 하늘을, 바다를, 물의 맛을. ... 눈이 감겨.

.

교실 한구석에 늘 혼자 웅크려 있던 아이가 떠오른다. 고개를 푹 숙인 채 가방을 싸고 있다. 이것저것 꾹꾹 눌러 담던 그 애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본다. 나도 이미 그 애를 보고 있다. 도와줄까? 괜찮아. 나 혼자 가도 돼. . 도와줄게. 한 걸음 다가섰더니, 그 애가, 슥 웃는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입을 연다.

 

 

유진아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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