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육우당 문학상

육우당 문학상 우수작 - 그렇게 우리의 시간은 익지 못했다.

by 행성인 2014. 4. 30.

그렇게 우리의 시간은 익지 못했다.

 

양진솔

 

1.

연락을 끊었다. 이곳으로 오며 한국에서 알고 지냈던 대다수와. 하지만 몇몇은 남겨두기로 했다. 그렇게 정리하고 정리해서 남겨둔 이들의 대략 120명에서 20~30명으로 팍 줄어버렸다. 알고 지내도 별 상관없는 사람들이 100여명이라니, 지우는 내내 신기하고 허탈해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렇게 주소록을 정리하다 보니 애매한 번호들이 몇 개 남고 말았다. 아, 이 번호들을 지워야 할지, 아니면 그냥 놔둬야 할지.. ‘삭제’에 대한 확인을 승낙하기가 어렵다. 겨우 번호 몇 개 때문에. 나는 그 번호들의 주인들을 찬찬히 떠올렸다. 그렇게 찬찬히 되새겨 보니 지우는 번호가 또 늘었다. 그러다 보니 또 줄어든 번호들을 보며 난 손톱을 자근자근 씹었다.

가족도 아니고 그렇다고 ‘옛 애인’이라고 칭하기 애매하며 ‘친구’라 칭할 수도 없는 한 번호의 주인. 이 아이와의 관계.. 과연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감이 영 잡히질 않는다. 관계가 지속된 시간은 친구라 할 수 있고.. 그 시간 속의 관계는 친구라고 하기에는 애매하다. 중학교.. 그 때부터 시작된 인연.. 벌써 횟수로만 대략.. 13년이 넘는 관계의 시간...

나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창밖을 응시했다. 노을이 내려앉고 있다. 아주 천천히 느리게 말이다.

2.

달리는 버스 안으로 볕이 잘도 따라오는 하굣길이었다. 우리는 대화를 하기 위해서 혜연은 볕을 등지고 선채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난 볕을 마주한 채로 자리에 앉아 혜연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등 뒤에 있던 볕이 앉아 있는 나의 눈을 찔러 나는 눈살을 찡그린 채로 혜연과 대화를 이어갔다. 눈살을 찡그린 채로 대화를 이어가는 내 모습이 우스웠는지 혜연은 풋풋한 웃음을 띠운 채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희던 볕이 진해지자 노을이 내리기 시작했다. 다홍색으로 진해진 볕은 혜연의 등 뒤로 쏟아졌다. 새하얗던 혜연의 블라우스가 물이라도 들인 것 마냥 노을이 내려앉아 울긋불긋했다. 난 울긋불긋하게 변한 혜연의 블라우스를 빤히 바라보았고, 혜연은 내게 노을이 내려앉기 시작한 창밖이 신기하다며 노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래, 창밖의 노을이 내리는 풍경은 아름다웠다. 늘 보는 노을일 뿐인데도. 늘 이 시간대에 보는 풍경이었지만, 그 날따라 노을은 아름답게 땅으로 내려앉고 있었다. 하지만 난 혜연에게 ‘별거 없잖아.’라고 심심하게 답했다. 그 말에 혜연은 노을에서 시선을 거두고는 나를 향해 둥글게 웃었다. 어느새 노을은 혜연의 등에서 가슴으로 위치를 옮긴 지 오래였다. 다홍빛의 노을이 혜연의 안면에 자리 잡았다. 혜연의 안면은 노을빛으로 붉게 물들었다. 붉게 물든 혜연의 얼굴로 혜연은 혼이 빨린 사람처럼 먼 곳을 응시했다. 나무가 팔을 간간히 흔들고 있었다. 버스가 약간씩 속도를 줄일 때 마다 혜연은 나무의 팔처럼 가볍게 간간히 앞뒤를 흔들렸다.

꽃은 가는 바람에도 흔들린다. 나는 가는 바람에 흔들리는 꽃처럼 혜연의 모습에 어느새 흔들리고 있었다.

3.

누구나 그렇듯이 내게도 팔짱을 끼고 서로 무릎베개도 해주는 친구가 있었다. 그게 혜연이었다.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서로의 팔짱을 끼고 서로의 무릎을 베개 삼아 눕기도 했었다. 나는 혜연과 팔짱을 끼는 것을 좋아했고, 혜연은 내 무릎을 베개 삼아 눕는 것을 좋아했다. 난 이 행동이 동성끼리는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행동이라 생각했고, 거부감도 있지 않았다. 하지만 남들의 눈에는 그 행동들이 자연스럽지도 않고, 오히려 거부감이 드는 행동처럼 보였었나 보다. 이 시선은 환경 탓에 만들어졌을지도 모른다. 여중에서 여자와 여자가 했기에. 그래서 그런 걸까?

나와 혜연에 대한 소문은 삽시간에 학교에 퍼져나갔다. 그 소문을 들은 수많은 친구들은 그 소문의 진위여부를 내게 물었다. 난 그럴 때 마다 아니라고 헛소문일 뿐이라고 답하며 그 손문을 부정했다. 혜연은.. 뭐라 답했는지는 아직까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한바탕 소문이 돌고난 뒤부터 혜연과 나의 사이에는 무어라 말할 수 없는 벽이 생겼다. 그 벽이 조금씩 두꺼워 지더니 언제부턴가는 일방적으로 혜연이 나를 피하기 시작했다. 가장 친했던 친구가 나를 피한다는 거리감에 나는 혜연이 나를 피하듯 혜연을 피했다. 언제는 바닥에 눌러 붙은 껌 마냥 찰싹 달라붙어 다니던 나와 혜연이 서로를 피하며 지내기 시작하자 친구들은 우리들의 사이를 걱정했다.

‘야, 너희 싸웠어?’

‘너희 사이 왜 이리 냉랭해?’

아무 일도 아니라고 나는 대충 얼버무렸고, 혜연은 그저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 때 소문을 퍼뜨린 사람이 원망스러웠다. 혜연과 겨우 그런 소문 때문에 멀어진 걸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 때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했다면 아마 혜연과 멀어지지 않았을 터이니..

그 후로 나와 혜연은 그렇게 멀어진 채로 서로 다른 고등학교에 입학했고. 그 뒤로 2년 후 연락이 끊겼다고 생각하던 때에 혜연에게서 먼저 연락이 왔다. 나의 번호를 어찌 안건지.. 첫 문자는 평범하게 ‘잘 지내?’ 였다.

이 문자에 나는 담담하게 ‘잘 지내. 너는?’ 이라는 답을 보냈다. 바로 또 답이 왔다. ‘잘 지내는 구나. 잘됐네.’ 이 문자 때문에 나는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잘 지내는구나. 나는 아닌데...’ ‘나는 잘 못 지내는데 넌 잘 지내는구나.’ 이렇게 말이다. 나는 답을 할 수가 없었다. 연신 혜연에게만 문자가 왔다.

‘고등학교 생활은 괜찮아?’

‘친구는 많이 사귀었어? 공학 갔다며? 재밌겠다. 나는 여고라 재미하나도 없는데.’

‘다음에 만날까? 밥 사줄게.’

나는 그 모든 문자에 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핸드폰 전원을 꺼버렸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고 싶지 않아서.

4.

그렇게 연락이 끊어진 혜연을 다시 만나게 된 건 첫 중학교 동창회 때였다. 3~4년 만에 다시 본 혜연은 몰라 볼 만큼 변하지는 않았다. 그 때 그 앳된 얼굴이 연필 자국이 흐려지듯이 조금 희미해졌을 뿐.

혜연은 술집에 들어오자마자 자연스레 내 맞은편에 마주 앉았다. 아, 나는 혜연의 얼굴을 볼 사진이 없었다. 죄스러움과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은 미안함에 얼굴이 술기운과 뒤섞여 화끈거렸다. 그 화끈거림은 서서히 위로 밀고 올라오더니 어느새 귀까지 올라왔는지 귀에서 열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피해자의 유가족을 만난 죄수처럼 고개를 들지 못하는 나에게 혜연은 먼저 말을 걸었다. ‘어.. 응.’ 나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미안하다. 근데 혜연은 과거가 생각나지도 않는지 연신 나에게 말을 걸었다.

“남자친구 생겼다며? 축하해. 오래되었다며. 고등학생 때부터 만났다며?”

그 때 혜연에게서 문자가 왔을 때 난 이미 남자친구가 있었고, 아직까지도 그 남자친구와 만나고 있다. 하지만 내 머리 속은 ‘그 때가 생각 안나나? 아, 지워버렸나? 그런 건가?’라는 문장으로 꽉 들어차고 있었다. 오만 가지 요상한 생각들이 다 들었다. 너에게서 ‘나’를 지워 버린 건가. 고개를 숙인 채로 나는 말없이 내 잔을 비웠다. 귓속이 열이 달아올라 퉁퉁 부은 목구멍처럼 느껴졌다. 모든 말소리가 ‘웅웅-’거리는 자동차 엔진소리로 걸러지는 것 같다. 그 어떤 소리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야, 니들 되게 친했잖아. 왜 이렇게 어색하게 굴어. 오랜만에 봤다고 낮 가려?”

옆에 앉아 혜연과 술잔을 부딪치던 민주는 내 속도 모르고 내 팔을 툭툭 쳤다. 안면이 뜨거워져 목구멍도 열리지 않는다.

“너 술 혼자 마셨냐. 왜 혼자만 얼굴이 뻘게?”

웃으며 말하는 혜연의 모습도 내겐 그저 죄책감을 부가시킬 요소일 뿐이었다.

“애 혼자서 몇 잔이나 마신 거야.”

아무렇지도 않게 맑게 웃으며, 혜연은 잔에 입을 가져다 대었다. 혜연의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나에게는 텁텁한 밀가루처럼 느껴졌다. 술집의 멜랑꼴리한 냄새가 코로 슬금슬금 기어들어온다. 술 냄새와 튀긴 안주의 기름내 그리고 담배냄새까지. 옆에서 민주가 담배를 태우니 코로 담배냄새가 깊게 스며든다.

“아, 담배냄새. 나가서 피고와.”

담배를 태우는 민주를 향해 인상을 찡그리며 혜연은 타박했다. 그런 혜연의 말에도 민주는 아무렇지도 않은지 낄낄 웃더니 재떨이에 담배를 지져 끄고는 날 흔들었다.

“너는 왜 혜연이 오니깐 조용해지냐? 아까 까지는 잘도 떠들더니. 니들 엄청 친했잖아. 그 때 그 소문만 안 돌았으면 지금도 잘 지냈을 텐데..”

뒷말을 흐리며 민주는 내 눈치를 힐끔 보더니 잔에 입술을 붙이고 있는 혜연에게 잔을 내밀었다. 혜연도 나도 그 말에 대해서는 답을 하지 않았다. 괜시리 이 이야기 때문에 분위기가 사그라지자 민주는 혜연에게 장난스럽게 말을 건넸다.

“혜연! 넌 남자친구 없냐?”

그 질문에 나는 마른 침을 삼켰다. 남자친구가 없기를 원했다. 왠지 모르게 혜연에 대한 소유욕이 끓어올랐다.

“없어. 대학가면 누가 생긴대. 안 생기더라.”

내 속을 읽었는지 혜연은 너털웃음 터뜨리며 없다고 답하고는 잔을 들이켰다. ‘다행이다..’ 속으로 ‘다행이다..’ 를 몇 번이나 곱씹으며 나는 전보다는 긴장을 풀고는 잔을 들었다. 잔이 몇 번이나 비워지고 채워지다 보니 우리는 어느새 얼큰하게 하나 둘씩 취하고 있었다. 내 잔이 다시 채워지자 혜연은 술기운이 올라온 손을 내밀며 내 잔을 집어 들었다.

“니 맥주 좀 마시자.”

내 맥주잔이 혜연의 손에 들어가자 난 나도 모르게 혜연에게 이질감을 느꼈다.

“안돼! 마시지 마!”

내 생각과는 다르게 큰소리가 나오고 말았다. 혜연은 소리를 지른 날 놀란 듯 빤히 쳐다보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내 맥주를 크게 속으로 쏟아 부었다. 그런 혜연의 행동에 나는 넋이 나가 멍하니 반쯤 비어버린 내 맥주잔을 바라보았다. 무슨 의도였을까..

아직도 이해가지 않는 혜연의 행동. 그 많은 애들의 잔 중에 내 잔을 왜 집은 건지.. 그 날 나는 어지러운 머릿속과 몸뚱이를 이끌고 남자친구인 정호에게 찾아갔다. 내 어두운 표정에 정호는 무슨 일이냐고 내게 묻지 않았다. 그저 날 자신의 침대로 끌고 갈 뿐. 침대로 이끌려가며 난 혜연에게 잠깐 이질감을 느꼈던 내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5.

정말로 별 볼일 없는 장례식이었다. 엄마가 돌아가신 그 날은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을 정도로 날이 좋았다. 그렇게 날이 좋던 날. 엄마는 차에 치여 내 곁을 떠났다. 죽은 엄마의 장례식은 정말로 쓸쓸하기 그지없었다. 오는 이도 적었고, 나와 함께 빈소를 지켜주는 이도 하나 없었다. ‘나는 수업이 있어서.’ ‘난 내일 아침 알바라서 미안.’ 하나 같이 다들 비슷한 이유를 대며.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떠나가는 이들을 난 잡을 수가 없었다. 엄마의 지인 분들마저도 가셨을 때, 빈소는 나와 엄마의 영정사진 둘 뿐이었다. 가는 순간까지도 엄마는 외로운 사람이었다. 하나 뿐인 형제는 이미 엄마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기에 ‘가족’이라고는 엄마와 나. 둘 뿐이었다. 홀로 빈소에 앉아 자리를 지키고 있을 때였다. 갑작스레 사람들이 대량입고 되듯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 무더기로 쏟아져 들어오는 사람들 속에 혜연이도 있었다. 내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동창들에게 건너건너 들었는지 아니면 일찍 아침에 먼저 왔다간 민주에게 전해 들었는지는 몰라도. 그 늦은(어쩌면 이른) 새벽에 빈소를 찾아와 혜연은 내 두 손을 걱정스런 마음을 담아 잡아 주었다. 손을 잡아주는 혜연의 행동에 나는 죽은 조개마냥 입을 앙 다문 채 열지 않았다. 솔직히 난 혜연의 얼굴을 볼 낮 짝이 없었다.

“빈소가 왜 이리 쓸쓸해. 빈소는 이렇게 꽉 차있어야지.”

검은색 크레파스처럼 새까만 옷을 입은 혜연의 안색은 나만큼 창백해 보였다. 내 두 손을 잡은 혜연의 손은 전보다 많이 거칠어져 있었다. 체대에 입학 했다는 느낌이 내 손을 잡은 혜연의 손에서 느껴졌다. 그 작고 여리던 그 손이 어느새 단단해져. 나를 대신해 빈소를 찾아오는 이들을 3일 내내 맞이했다. 빈소를 찾아오는 손님들 중에는 난생 처음 보는 얼굴이 대다수 였다. 하지만 난생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지만 혜연은 그들을 아는 듯 했다. 낮선이들은 혜연의 지인들이었다. 혜연은 자신의 일도 아니면서 내 일을 자신의 일처럼 받아들인 듯 했다. 3일 내내 힘들 법도 했을 텐데 혜연은 마지막 날까지도 내게 투정 한 번 하지 않았다. 미안했다. 하지만 나는 그 3일 동안 혜연을 신경 쓸 틈이 없었다. 내 코가 석자였다.

엄마를 놓아주어야 하는 그 날이 오자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23년 동안 엄마와 보내 온 모든 순간이 밤이 끓듯 천천히 끓어올라 내 머리 속을 꽉 채웠다. 아, 엄마가 타오를 때, 마치 난 모래 늪에 빠지는 듯 했다. 서서히 아래로 잡아 먹혀가는..

“아..”

겨우 겨우 빠져나와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혜연을 바라보았다. 가만히 내 옆에 서서 혜연은 마치 자신의 엄마가 돌아가신 것처럼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폭우가 내리는 여름날 같이 축축하고 어두운 표정. 그 표정이 아직도 눈앞에 선하다.

“너희 어머니 말이야..”

시선은 여전히 불 속에서 천천히 육신이 사라져가는 나의 엄마를 응시하며 혜연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얼마나 말을 조심스레 꺼냈는지. 나는 혜연의 표정에서 그걸 읽을 수 있었다.

“응.. 우리 엄마.”

목구멍 속으로 설움을 애써 꾹꾹 눌러가며 나는 혜연의 말에 담담하게 답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난 무딘 쇠와 같은 상태였다. 바닥으로 가볍게 떨어트리기만 해도 움푹 패여 버리는 무딘 쇠. 혜연의 한마디 말에 나는 움푹 패여 들었다. 내 대꾸에 혜연은 뒷말을 꺼내기 껄끄러운지 연신 입술을 씹기 바빴다. 역으로 내게 상처가 될까 두려웠는지 혜연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 시선을 피했다. 그래, 차라리 서로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자. 혜연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나는 깊에 숨을 내쉬었다.

다 타고 난 엄마의 뼈를 추려낸 것을 보니 가슴 전체가 불에 덴 듯 뜨겁고 아렸다. 이 흰 백골 위에 새빨간 피가 지나다녔을 혈관이 있었고, 선홍빛의 근육들과 지방 그리고 보드라웠던 피부가 있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엄마의 뼈는 희고 깨끗하게 탔다. 50여 년이라는 엄마만의 생이 담긴 뼈를 또 다시 잘게 빻는다. 빻는 과정을 보겠냐고 묻는 말에 나는 볼 수가 없다고, 보고 싶지 않다고 말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거품 없는 걸음으로 밖으로 나오니 혜연이 쳐진 내 어깨를 다독였다. 가벼이 툭툭-. 그 순간에도 혜연은 날 보지 않았다. 대신 슬픈 듯 먼 곳을 응시할 뿐. 나의 일이 자신의 일 인 듯, 또 아닌 듯.

*

뼛가루가 되어버린 엄마는 바다에 뿌려졌다. 주위에서는 수목장을 권했지만 나는 한사코 엄마를 바다에 뿌리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곱게 빻아진 뼈 한 줌 한줌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날릴 때. 그 순간에도 ‘이게 과연 엄마였나..’ 라는 괴상한 생각이 들었다. 겨우 이 몇 줌의 뼛가루가.

혜연이 뼛가루를 손에 움켜쥐었을 때. 나는 혜연의 옆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까만 옷과 파리한 안색. 그리고 손에 쥔 곱디고운 뼛가루까지. 그 셋 중 무엇도 혜연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혜연의 손에 쥐어진 뼛가루는 가루약처럼 느껴졌다. 어린 시절 먹던 그 가루약. 바다에 혜연이 뼛가루를 흩뿌리자 바다는 처음 약을 먹는 아이마냥 기침을 내뱉고 몸서리를 쳤다. 쿨렁쿨렁-. 쏴아-. 입가심할 사탕이라도 달라는 듯이 투정을 부리며 바다는 바삐 움직였다. 손에 붙은 뼛가루를 마저 털어내며 혜연은 내게서 등을 돌렸다. 바다가 입김을 불자 텁텁한 가루냄새와 짠 내가 뒤엉겨 불어왔다. 그 때 까지도 혜연은 실어증에 걸린 사람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나는 혜연이 흩뿌리고 남은 엄마의 뼛가루를 바다에 마저 흩뿌렸다. 그 때였다. 구름이 트여 볕이 구름 사이로 드러나자 흩뿌린 뼛가루가 섬섬하게 허공에 퍼졌다. 허공에 뼛가루가 흩날리자 혜연도 허공을 바라보았다. 바다가 미쳐 다 삼키지 못한 뼛가루들이 허공에 퍼졌다.

함 속에는 더 이상 단 한줌의 뼛가루도 남지 않았다. 뼛가루를 담았던 유골함을 당장이라도 바다에 냅다 던져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 때, 혜연이 내 손목을 붙잡았기에 난 유골함을 던져 버리지는 못했다. 그 유골함을 그대로 품에 꼭 안은 채.. 나는 도로 집으로 돌아왔다.

*

화장까지 끝나자 나는 이젠 뼛가루로도 내 곁에 남아있지 않은 엄마가 물이 차오르듯 보고 싶어지기 시작했다. 컵에 물이 차오르다 보면 물은 어느새 넘친다. 엄마에 대한 그리움과 미안함이 그렇게 내게 다가왔다.

혜연은 모든 장례절차가 끝나고 나자 내게 흰 봉투 하나를 건넸다. 나는 그 것을 선뜻 받지는 못했다. 내가 주저하며 봉투를 받아들지 못하자 혜연은 내 손에 봉투를 떠넘기듯 쥐어주었다. 손에 들어 온 봉투는 꽤나 두툼했다.

“나랑 내 지인 분들이 조금씩 모은 부조금이야. 큰돈은 아니야.. 미안 도움이 못 되어서.. 미안해..”

미안해하지 않을 일인데도 혜연은 진심으로 내게 미안해했다. 부조금을 받아 든 나는 봉투를 손에 쥔 채. 이번에는 내가 실어증에 걸린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혜연에게 미안하고, 한 편으로는 고마웠다.

6.

비는 사람들이 걸을 때 마다, 찰박거릴 정도로 내렸다. 저녁에 가까워진 시간대라서 주위는 어둠이 어둑어둑하게 여기저기에 내려앉고 있었다. 속눈썹 위로 올라 온 빗방울에는 조명이 둥글게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래, 그저 그렇게 비가 내리는 저녁일 뿐이었다.

‘별 일 없는 저녁이야.’

라고 말하듯이 빗방울들이 우산을 톡톡 두드리고 가며 속닥거렸다. 나는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멀리서 바라본 정류장은 마치 버섯들이 빼곡하게 자라나 있는 썩은 나무 아래 같았다. 색색의 우산을 들고 있는 사람들이 정류장 안, 옆, 앞에 빼곡하게 모여 있었다.

‘저 안은 사람들 숨결로 후덥지근하겠지..’

그 자리에 서서 버스 정류장을 바라보고만 있자 내가 타야 할 버스가 막 정류장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냅다 뛰어가면 충분히 탈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빗물은 거리에 찰박거릴 정도로 고여 있었기에 뛰고 싶은 맘이 선뜻 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일단은 뛰었다. 거리에 고인 빗물이 죄다 내 신발과 바지 밑단으로만 들러붙는 것 같았다. 거리의 바닥으로 쏟아져 내리던 빗물이 뛰는 내 얼굴로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들고 있는 우산이 필요 없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그렇게 버스를 향해 뛰던 때였다. 버스를 향해 뛰다 옆으로 고개를 돌리니 택시를 타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사람들 중에 혜연도 있었다. 비에 젖기 싫어서 인지, 이 날씨에 사람들과 섞이기 싫은 건지. 혜연은 택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혜연에게 아는 체를 하고 싶었다.

‘그 때 고마웠어.’

라고 혜연에게. 하지만 나는 그냥 혜연을 지나쳤다. 비에 젖어 시궁창에서 막 기어 올라온 시궁쥐 같은 내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택시가 오자 혜연은 망설임 없이 택시를 타고 떠났다. 혜연이 택시를 타고 가는 모습을 보는 사이 내가 타야 할 버스는 진즉에 떠나 나는 비에 젓은 채로 떨며 다음 버스를 기다렸다.

7.

바람이 간들간들하게 부는 저녁이었다. 전화가 왔다. 혜연에게서. ‘무슨 일 일까?’ 라는 생각보다는 ‘오랜만이네.’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동창회 이후 혜연에게서 전화가 온 것은 거의 2주일 만이었다. 일단 나는 전화를 받았다.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혜연의 목소리는 질척질척했다.

“응, 왜 전화했어?”

“니네 집 앞이야. 좀 나와봐.”

집 앞이라는 말에 나는 눈살을 찡그렸다. 이 시간에 집 앞이라니. 생선가시가 목에 박힌 것 처럼 껄끄러운 기분이 들어 나는 섣불리 나가겠다고 답하지 않았다. 답이 쉽사리 입 밖으로 넘어오지 않았다. 한참을 내가 답하지 않자 전화기 너머에서는 혜연의 짙고 더운 숨소리만이 들렸다.

“나와 줘..”

풀 죽은 배추마냥 혜연의 목소리는 기가 빠져있었다. 나는 그런 혜연의 목소리에도 아직까지도 나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창밖을 곁눈질로 흘끔 보았다. 본다고 해도 창 밖이 보이지는 않았다. 나는 결국 혜연에게 어디에 있냐고 물으며 밖으로 향했다. 속이 공기가 꽉 찬 것 마냥 답답했다. 밖으로 나오니 바람은 간드러지게 불며 내 뺨을 스치고 멀리 도망쳤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혜연이 눈에 보였다. 가로등에 젖은 수건 같은 몸을 기댄 채로 날 보더니 내게 가까이 오라고 혜연은 내게 손짓했다. 가까이 간 혜연에게서는 쓰고 떫은 술 냄새가 풍겼다. 가로등 불빛은 혜연의 숙인 머리통 위로 내리고 있었다. 지가 마치 영화나 드라마 속 주인공이라도 되는 것처럼 혜연은 계속 내게 더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가까이 다가갔다. 가까이 갈수록. 옆으로 다가가 갈수록 혜연에게서는 술 냄새가 심하게 진동했다. 소주로 샤워라도 하고 온 것처럼.

내가 자신의 옆으로 다가오자 혜연은 인상을 찡그린 채로 내 옷깃을 잡았다. 난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술에 만취한 채로 전화를 한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집 앞이라는 것도. 거기다가 내가 여기 있는 것 까지도 마음에 드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난 일부러 내 옷깃을 잡는 혜연의 손을 떨쳐내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술 마시고 왜. 아니, 근데 도대체 몇 병이나 마신 거야?”

손가락을 세어보던 혜연은 생각이 잘 나지 않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4~5병..? 몰라..”

무슨 일이 생겨서 마신 건가. 껄끄러움 대신 어느새 걱정이 내 머릿속으로 치고 들어왔다. 소주 4~5병이라니. 내 기준에서는 이해 못할 주량이었다.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생겼어?”

“...아니.”

아무 일도 없으면서 소주 4~5병이라니.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입 밖으로 비집고 나왔다. 내 헛웃음 소리를 들은 건지 혜연은 날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돌리고는 가로등에 앞에 주저앉았다. 나도 가로등 앞에 쪼그려 앉아 혜연의 어깨를 흔들었다.

“집 가라. 술 많이 마셨잖아. 택시라도 불러줄까?”

“여기 앉아봐. 할 말이 있어.”

옆자리를 가리키기에 나는 혜연의 옆자리에 주저앉았다. 다 큰 처자들이 맨 바닥에. 그것도 밤에 주저앉아 있는 꼴을 보면 동네 사람들이 뭐라 할까.

내가 자기 옆에 주저앉자 혜연은 내 허벅지에 누웠다. 당황스러웠지만 이내 나는 학생 때 일이 떠올라 혜연의 머리칼을 손으로 쓸어주었다. 혜연이 커다란 한 마리의 강아지 같이 느껴졌다.

“우리 학생 때, 이러고 자주 있었는데.”

무성의하게 나는 ‘응’이라고 짧게 답했다.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매캐한 시멘트 냄새가 냉기와 함께 스멀스멀 올라왔다. 바닥은 차가웠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별은 하나도 없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혜연은 자기 혼자서 내게 계속 의미 없는 말을 건넸다. 아무 말도 내게 들리지는 않았다. 난 어서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었다.

“술은 왜 그렇게 많이 마신 거야. 무슨 일 진짜로 없어?”

그래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나는 혜연에게 다정한 어투로 물었다. 한결 누그러진 내 어투에 혜연은 잠시 고민하는 듯싶더니 시선을 딴 곳으로 돌렸다.

“괜찮아. 말해봐. 무슨 일 없어?”

“...아니, 별일 없어. 이번 주에 우리 집 올래? 맛있는 거 해줄게.”

대화 주제를 바꾸며 혜연은 내 볼을 쓰다듬었다. 나는 그게 싫어 내 볼을 쓰다듬는 혜연의 손을 잡아 내 허벅지 위에 내려놓았다. 단호하게 스킨십을 거부하는 내 행동에 혜연은 실망했는지 시선을 축 늘어뜨렸다.

“요번 주 토요일은 안되는데.. 정호랑 데이트 약속이 있어.”

‘데이트’라는 말이 목에 걸렸지만 밖으로 내뱉고는 난 시선을 멀리 두었다.

“그래. 데이트 남자친구랑. 좋은 거지. 알았어. 괜히 너 잡아뒀다. 난 가야겠어. 술도 어느 정도 깬 것 같으니깐.”

혜연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머리를 흔들었다. 괜히 죄 지은 것 같아 미안해 나는 택시를 불러주겠다고 했지만 혜연은 혼자서 갈 수 있다고 답했다. 나는 그래도 끝까지 혜연에게 택시를 잡아 주겠다고 말했다.

“택시 그럼 잡아줄게. 응?”

“됐네요. 나 혼자서도 택시 정도는 잡을 수 있어.”

어느 정도 정돈 된 걸음을 내게 보여주며 혜연은 예전부터 그랬듯이 맑게 웃었다. 소주 냄새가 씁쓸하게 풍겨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혜연의 맑은 웃음이 내게는 씁쓸한 웃음으로만 느껴졌다.

8.

결국 그 때, 그렇게 혼자 돌아간 혜연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나는 토요일에 잡힌 정호와의 데이트 약속을 다음으로 미루고 혜연네 집으로 놀러갔다. 집은 깔끔했다. 혼자 사는 여자집 치고는 매우. 난 내 방과 대조되는 혜연의 집을 보고는 감탄을 내뱉었다.

“와.. 집 진짜 깨끗하다.”

“그래? 그럼 다행이다. 난 또 더럽다고 할까봐 걱정했는데.”

칭찬에 멋쩍은지 혜연은 뒤통수를 긁적였다. 나는 바닥에 주저앉아서는 혜연의 집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모든 것이 차곡차곡 그리고 줄 맞춰 정돈되어 있었다.

“뭐 마실래? 커피? 주스?”

“난 그냥 물. 나 USB에 영화 담아 왔는데 그거 보고. 그냥, 오늘 자고 가면 안돼?”

자고 가도 되냐는 내 말에 혜연은 잠시 날 바라보더니 입술을 내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가져온 USB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는 바닥에 드러누웠다.

“바닥 차. 침대에 누워.”

물을 내 옆에 내려놓으며 혜연은 매트리스만 가져다 놓은 침대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나는 기어가듯 매트리스로 몸을 옮겼다. 매트리스는 생각보다는 딱딱했다. 혜연은 매트리스에 허리를 기댄 채로 날 빤히 바라보았다.

“오늘 데이트 있다고 했잖아.”

그 말이 마음에 걸렸는지 혜연이 내게 물었다.

“정호가 일이 생겼대. 그래서 할 일도 없고.. 심심해서 왔어.”

혜연의 손에는 캔 맥주가 하나 들려있었다. 치익- 탄산이 튀어 오르며 소리를 내뿜었다. 혜연은 맥주를 물 마시듯 마시더니 느리게 눈을 껌뻑거렸다. 맥주를 마시는 혜연의 모습에 나도 갑자기 맥주가 마시고 싶어졌다.

“나도 맥주 주라.”

뜬금없는 내 말에도 혜연은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다. 하지만 나는 당장 맥주가 마시고 싶었기에 혜연이 바닥에 내려놓은 캔 맥주를 집어 들었다. 입 안에 감도는 탄산은 쓰고 더부룩했다.

“야, 그냥 새 거 마셔.”

“어차피 얼마 안 마실 것 같아. 그냥 이거 조금만 마실게.”

조금만 마신다고 말하며 나는 맥주를 천천히 한 모금 더 입에 머금었다. 우리는 맥주 한 캔을 둘이 사이좋게 나눠 마셨다. 나는 조금만 마신다고 해놓고는 혜연에게 술이 더 없냐고 물었다. 그 말에 혜연은 무슨 대낮부터 술판이냐고 나를 타박하면서도 집안에 모아두었던 소주와 맥주를 내 앞에 풀어놓았다. 술은 꽤나 많았다. 내가 입을 벌린 채 바닥에 늘어진 술병들을 바라보자 혜연은 미간을 찡그렸다.

“가끔 학교 애들하고 집에서 마셨거든. 마시고 남은 걸 모아두다 보니 양이 꽤 되네.”

그 말을 듣고 술병들을 보니 반만 차있는 소주병이 몇 병 있었다. 나는 꽉 들어찬 맥주 페트병을 집어 들었다.

“영화 보면서 마시자. 영화 꽤 길어.”

잔에 소주를 채우며 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혜연의 노트북에 영화를 띄웠다. 영화는 길고 지루했다. 레미제라블. 정말로 재미없는 영화였지만 나는 미지근한 맥주를 입에 채우며 영화가 띄워진 노트북 화면 대신 혜연의 뒤통수를 쳐다보았다. 맥주는 쉽사리 줄어들지 않았다. 탄산 때문에 조금만 마셔도 속이 더부룩했고 화장실을 자꾸만 찾게 되었다. 반면 소주는 정수기로 물을 마시는 것처럼 빠르게 밑을 드러냈다.

“소주 맛있어?”

별 말 없이 소주를 비우는 혜연에게 물었다.

“맥주를 잘 안 마셔서. 우리 과는 맥주보다는 소주를 더 많이 마시거든. 그래서 대학 간 뒤부터는 맥주는 잘 안 마시고 소주만 마시게 되더라고.”

물 컵에 물 따르듯 소주를 채우며 혜연은 맥주 캔을 발로 슬며시 밀어냈다.

“음, 그래? 나도 소주 좀 줘봐.”

잔을 내밀자 혜연은 선뜻 내 잔에 소주를 채워주고는 다시 노트북 화면을 응시했다. 잔에서는 독한 알콜 향이 피어올랐다. 나는 소주에 입을 가져다 대었다. 쓴 알콜 맛이 혀끝부터 화끈하게 퍼졌다.

“쓰다.”

“달아. 끝이.”

무심한 혜연의 태도에 나는 뒤로 벌러덩 누웠다. 누우니 술기운이 온 몸에 늘어지기 시작했다. 혈관을 타고 알콜이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매트리스에 몸을 뉘인 채 나는 혜연을 불렀다.

“혜연아, 나 정호랑 헤어질까.”

“무슨 소리야. 뜬금없이.”

고개를 내 쪽으로 돌렸다가 이내 다시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며 혜연은 중얼거렸다.

“걔 없어도 더 좋은 사람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그게 여자든 남자든 말이야. 넌 어떻게 생각해?”

혜연은 머뭇거리더니 소주를 마시고는 노트북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리고는 매트리스 위에 팔을 걸치고는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만날 수야 있겠지. ‘옛’애인 보다는 ‘현’애인이 더 좋다고 다들 그렇게 말하니깐. 남자친구랑 헤어지면 걘 너한테 ‘옛’애인이 되겠지..”

잔을 만지작거리며 혜연은 고개를 숙였다. 나는 손을 뻗어 혜연의 머리칼을 헤집었다. 짧은 혜연의 머리칼은 손가락 사이를 간질였다.

“그렇구나.. 그럼 헤어져도 상관없다는 거네?”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지. 니 남자친구지. 내 남자친구가 아니니깐.”

애써 태연한 척 하는 것이 느껴졌다. 혜연은 잔에 남은 소주를 마시고는 도로 등을 돌려 앉았다.

“정말로 상관없어?”

나는 슬며시 혜연은 떠보았다. 혜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진짜로 내가 정호랑 헤어져도 너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야?”

잔에 소주를 채우기만 할 뿐 혜연은 아직까지도 조용했다. 나는 혜연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콕 찌르며 다시 물었다.

“나 그럼 정호랑 헤어지지말까?”

“아, 몰라. 니 마음대로 해. 니가 하고 싶은 대로 해. 왜 자꾸 나한테 물어보는데.”

화가 난 어린아이처럼 혜연은 퉁퉁거렸다.

“친구니깐. 친구니깐 답 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깐.”

정적이 순간 흘렀다. 정적 사이를 파고드는 건 영화 소리뿐이었다.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입안에서 찝찌름하게 머물던 맥주향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고, 술기운이 퍼진 몸뚱이는 물에 푹 익은 것처럼 나른했다.

“나한테 묻지 마. 딴 애한테 물어봐. 민주나.. 다른 애. 난 잘 모르는 문제니까.”

답을 회피하며 혜연은 고개를 숙인 채 잔을 만지작거렸다. 나는 더 이상 혜연에게 묻지 않았다. 그저 천장을 바라보고 누워 있을 뿐.

*

혜연이 먼저 잠들었다. 혜연이 옆에 누워있으니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자는 혜연을 보니 왠지 모르게 마음 한편이 아릿하게 저려왔다. 괜히 혜연을 떠 본 것 같아 죄책감이 파도가 밀려오듯 내게 다가왔다. 미안한 마음에 나는 자는 혜연의 앞머리를 곱게 정리해주었다.

‘괜히 떠봤나.. 미안하네..’

혜연이 숨을 내뱉을 때 마다 진한 소주냄새가 코를 찔렀다. 나는 그 마저도 좋았다. 정호의 곁에 누워있을 때 보다 훨씬 더 편안했고, 목구멍이 간질간질하게 떨렸다. 혜연에게서 등을 돌려 누웠다. 피가 온몸에 빠르게 도는 느낌이었다. 이 상태면 밤이 아무리 깊어가도 쉽사리 잠이 올 것 같지는 않다. 술기운에 몸이 나른한데도 말이다. 밤이 익어가는 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것 같았다.

9.

혜연과 연락을 하고 지내다보니 정호에게 소홀해지고 말았다. 정호는 그것에 대해 불만을 표출했고 나는 ‘뭐 어때 그냥 친구인데.’ 라는 심심한 답을 건넸다. 그게 또 맘에 안 들었는지 정호는 혜연에 대해서 걸고 넘어졌다. ‘너무 남자 같다.’ ‘레즈비언 아니야? 너 좋아해서 연락 하는 것 아니야?’ 라는 둥의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연못에 돌 던지듯 내던졌다. 나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호는 미간을 구긴 채로 내 핸드폰을 쏘아보았다. 나는 보란 듯이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정호에게 답했다.

“알지도 못하면서 혜연이에 대해서 말하지마. 네가 걔가 여자랑 데이트 하는 것 봤어? 여자랑 모텔 들어가는 거 봤냐고?”

신경질적이고 사나운 내 말투에 정호는 인상을 찡그리더니 ‘아니.. 그건 아니지만..’ 이라며 말을 흐렸다.

“그럼 됐어. 말 꺼내지마. 그냥 친구사이 일 뿐이니깐.”

“친구사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이상하잖아!”

정호는 언성을 높였다.

“중학교 때 친구인데 중간에 연락이 끊겨서 그래. 몇 년 동안 못한 연락을 그냥 몰아서 한다고 생각하면 안돼?”

신물이 올라올 정도로 정호의 행동은 껄끄러웠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정호는 다시 툴툴거리기 시작했다. 그 행동이 나에게는 ‘남자 놈이 찌질하게 친구에게 질투를 한다.’ 라고만 느껴졌다. 빈정이 상해서 왠지 더 이상의 데이트는 싸우기만 할 것 같았기에 나는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 집에 갈 거야. 나중에 연락해.”

“아! 어딜 가!”

소리를 버럭 지르며 정호는 날 잡으려 했지만 난 정호의 손을 탁 쳐냈다. 얼얼할 정도로. 내가 쳐낸 손이 얼얼한지 정호는 맞은 손을 다른 손으로 감싼 채로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카페를 빠져나가는 나를 바라보았다. 진절머리가 난다. 이 상황이.

*

카페에서 헤어지고 난 뒤 정호에게서 몇 통의 연락이 왔다. 하지만 내가 연락을 받지 않자 정호는 더 이상 나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나도 정호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일종의 자존심 싸움이었다. 주위 친구들은 우리가 권태기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건 이미 오래 전 이야기였다. 나와 정호는 고등학생 때 만났고, 정호가 군대에 갔을 때도 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정호를 기다렸다. 권태기는 이미 한 번 겪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나는 정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카페에서 헤어지고 2주 만의 첫 연락이었다. 나는 최대한 담백한 말투로 정호에게 말했다.

“할 말이 있어. 그 때 그 카페로 나와.”

[왜,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건데.]

떫은 감이라도 씹은 사람마냥 정호의 목소리는 떨떠름했다. 나는 숨을 깊게 들이쉬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평소처럼 ‘그냥, 할 말이 있어.’라고 답했다.

[알았어. 언제 몇 시에 만나?]

한풀 죽은 목소리로 정호가 답했다.

“지금 당장 올 수 있어?”

잠깐의 정적이 흐르더니 정호는 이내 알았다고 답했다. 나는 전화를 끊고는 다시 머릿속을 정리했다. 차곡차곡 빨래를 개듯이 머릿속을 정리하며 생각했다. ‘이게 옳은 일인가?’에 대해서.

*

카페 안은 시끄러웠다. 커피의 후끈한 냄새와 여러 사람들의 체취가 공중에 떠다니다 내가 숨을 들이쉬면 그것들이 몸속으로 뒤엉켜 들어왔다. 정호가 오기 전에 나는 카페모카를 한 잔 시켜 놓고는 그걸 마셨다. 숨을 내뱉을 때 마다 더운 숨과 커피 맛이 뒤섞여 입이 텁텁했다.

“일찍 왔네.”

의자에 앉으며 정호는 날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그리고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무슨 말을 하려고 불렸냐고 물었다. 나는 죽을 듯 말듯 한 노인처럼 숨을 내쉬다 마지막 유언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입을 열었다.

“헤어지자고.”

말이 툭 튀어나오자 등 뒤에 땀이 주륵 흘렀다. 안은 그다지 덥지 않은데도 말이다. 정호는 내 말을 듣자마자 얼이 빠진 사람처럼 ‘뭐?’라고 다시 되물었다. 아, 드라마 같다. ‘뭐라고? 다시 말해봐.’ 이 말조차도.

“장난이지..? 헤어지자고?”

허무하다는 듯 웃음을 풍선 바람 빠지는 것처럼 내뿜으며 정호는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그래, 헤어지자고.”

담담하게 커피를 넘기며 난 다시 말해주었다. 목 뒤로 커피가 ‘꼴깍-’ 넘어가는 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이유가 뭐야? 니가, 나 군대도 기다려 줬고.. 진짜 이유가 뭐야? 다른 남자 생겼어?”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남자는 아니지. 여자가 생겨버렸지.

“그럼 뭐야?”

“나도 잘 모르겠어. 그런데 왠지 헤어져야 할 것만 같아서.”

잔을 내려놓으며 나는 뚱한 표정을 지었다. 내 뚱한 표정을 보았는지 정호는 미간을 팔(八)자가 되도록 찌푸리더니 고개를 팩 돌렸다.

“지친거야?”

아니, 지친 건 아니었다. 우린 2주 전까지만 해도 침대 위를 같이 뒹굴었고 난 그것에 대해서 만족했다. 모든 것이 다 좋았다. 근데 그 좋음이 너무 케케묵어 경직된 것 같은 것이 난 싫을 뿐 이었다.

“아니, 그건 아니야. 그냥.. 너무 단조로워서.”

인생은 평범할수록 좋다고들 한다. 하지만 그 평범한 삶은 맨밥만을 먹는 것과 같다고 느껴진다. 때로는 밥에 자극적인 양념과 찬이 필요하듯. 평범한 삶에 나는 조금 자극적인 무엇인가가 필요하다고 느낄 뿐이었다. 하지만 이건 변명일 뿐이었다.

정호는 좋은 남자다. 가정적이고 남성성도 어느 정도 갖추고 있으며, 친절하고 외모도 준수하다. 그리고 잠자리도 여자가 만족감을 느낄 정도로 좋은 잠자리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런 정호는 너무 좋은 남자이기 때문에 지루하다. 맨밥 같은 남자. 성실하고 평범한. 그런 맨밥같이 아무 맛도 없는 남자. 하지만 주식 같이 필요하긴 남자. 그 주식 대신 난 강렬한 자극을 주는 찬을 찾았다. 그게 바로 혜연이었다.

나는 다 마신 커피 잔을 만지작거리다 정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한숨을 쉬는 정호의 손을 잡았다.

“우리는 이젠 서로에게 ‘옛 연인’이야. 알겠지? 잘 지내.”

손을 툭툭 쳐주고는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정호는 이번엔 나를 붙잡으려 일어나지도, 그리고 날 부르지도 않았다. 심각한 고민이 생긴 사람처럼 마른세수를 연신 할 뿐 이었다. 근 8~9년을 사랑한 연인과 연을 끊기 쉽다는 걸, 이 일로 나는 깨닫게 되었다. 사람사이는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리 끈끈해보여도 결국에는 가볍게 끊어지는 종이끈 같다는 것을.

10.

통화를 하다 보니 혜연에게 결국 정호와 헤어졌다는 말을 하고 말았다. ‘헤어졌어. 이틀 정도 되었나?’ 라는 내 맛없는 말에 혜연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속으로 좋아하고 있을까? 이상한 망상에 젖어 들 때쯤 혜연이 내게 기분 전환 할 겸 드라이브를 가자고 제안했다. 나는 별 생각 없이 ‘그래’ 라고 답했다.

일산에 꽤나 오래 살았지만 공단을 도는 건 처음이었다. 공단의 밤은 불이 켜진 동화 속 유리 성처럼 보였다. 꽤나 아름답게 반짝이는 공단의 불빛들. 낮에는 비루하고 초췌한 공장이 몰려있는 곳에 불과했던 곳이 어둠에 가려져 불빛만 껌뻑이니 딴 세계를 보는 듯 했다. 나는 감탄사를 내뱉으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창에 너무 가까이 붙은 탓인지 창에는 이내 내 숨결 때문에 뽀얀 김이 서렸다.

“와 진짜 예쁘다. 나 여기 밤에는 처음 와본다.”

그랬냐는듯 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뭔가가 생각났는지 속도를 낮추며 내게 물었다.

“남자친구하고 헤어졌다고 했지? 근데 남자친구하고는 왜 헤어진거야? 8년? 9년 동안 잘 사귀더니 말이야.”

혜연은 정호를 ‘남자친구’라고만 칭했다. 동갑인데도 절대로 ‘정호’라는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어차피 지나간 일이니 나는 뜸들이지 않고 답했다.

“맨밥만 먹으면 질리잖아.”

“뭐?”

혜연은 내 말 뜻을 알아듣지 못했는지 ‘무슨 소리야?’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정호는 맨밥 같잖아. 주식 같은 그런 남자. 근데 맨밥만 먹으면 심심하잖아. 그래서 난 그냥 자극적인 걸 찾고 싶어서 헤어졌어.”

차창에 서린 김을 소매로 닦아내며 난 눈을 얇게 뜨고는 창밖을 응시했다. 어둠이 많은 걸 집어 삼키니 밖이 아름답다. 어둠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극적인 걸 찾으려고? 무슨 남자를 만나려고 그래. 근데 자극적인 것도 주식이 있어야지. 곁들어 먹는 거잖아.”

장난스럽게 웃으며 혜연은 앞을 주시했다. 반대편 차선으로 차는 없었다.

“꼭 남자만 만나란 법 있냐? 자극적인 여자를 만날 수도 있는 거지. 그리고 찬만 먹어도 되는 거지.”

진지하게 말하며 나는 차 창문을 조금 열었다. 창문을 여니 김이 더 이상 창에는 서리지 않았다.

“그래, 만날 수도 있지. 후회는 안 해?”

어색한 듯 혜연은 시선을 옆으로 돌리고는 백미러로 내 표정을 살폈다.

“뭐 아직은 안 해. 오히려 잘 헤어졌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

이 말이 끝나자 차안은 고요해져 차가 달리는 소리와 우리 둘의 숨소리만이 가득차기 시작했다. 라디오도 키지 않았다. 혜연은 그저 가만히 운전만 했고, 나는 감성이 차오른 시인마냥 창밖의 유리 성 같은 공단의 밤을 바라볼 뿐이었다.

“있잖아, 나 말이야. 임용고시 준비하려고.”

생뚱맞은 혜연의 말에 나는 얼른 몸을 돌려 혜연의 옆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뭐? 임용고시? 교사하려고..?”

“응 교사하려고. 안정적인 직업이잖아.”

핸들을 왼쪽으로 꺾으며 혜연은 태연하게 웃음을 얼굴에 그림 그리듯 그렸다. 난 커다란 돌멩이가 머리에 떨어진 것 같은 충격에 입을 떡 벌린채 혜연을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체육교사하려고. 어때, 어울리지 않아?”

우스갯소리를 하듯 혜연이는 장난꾸러기처럼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얼이 빠져 멍하니 듣기만 했다.

“그런데 교사되기가 쉽겠어? 한 번에 붙는다는 보장도 없고. 그래서 아무래도 여러 사람들하고 연락을 끊을 것 같아. 아마 너하고도 연락이 잘 안될 거야.”

“아, 그래..?”

“그래서 말인데. 너한테 할 말이 있어. 예전부터 하려고 하던 건데 맨날 미뤘거든.”

평소와 같은 말투. 혜연은 평소와 같았다. 왠지 모르게 차 안의 공기가 히터라도 켜놓은 것처럼 후덥지근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무슨 말인데?”

“그냥, 별거 아니야. 너 예전부터 좋아했다고. 지금도 좋아하고. 친구로 말고 애정 관계로써 말이야.”

미지근하게 식은 커피를 단숨에 마시듯 혜연은 빠르고 담담하게 말했다. 알고 있었다. 혜연이 날 좋아하는 것을. 그런데 나도 혜연을 좋아했다. 좋아했으니 붙어 다녔고, 좋아했으니 혜연을 감싸 안은 것이고.. 난 이미 오래 전부터 혜연에게 흔들리고 있었다. 다만 그걸 자각을 못하고 있었을 뿐. 그걸 너무 늦게 알아차린 것 뿐.. 우리는 서로를 좋아하고 있었다.

“그, 그래.. 알겠어.”

알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당사자에게 들으니 머릿속이 아무것도 없이 텅 빈 것처럼 느껴졌다. 제일 충격적인 고백이다. 내 인생에서 맨밥만 먹어오던 내게 캡사이신을 누가 한 사발 먹인 것 같은 느낌이다. 너무나도 자극적인 느낌이다. 나는 벙어리처럼 어버버 거리며 눈을 소마냥 껌뻑거렸다.

“너무 마음에 담지는 마. 안 받아줘도 그만이라고 생각하고 뱉은 말이니깐.”

캡사이신 마신 것 같은 느낌을 준 혜연은 나와 반대로 담백하게 말을 끝내며 앞만 응시했다. ‘그래.. 안받아줘도 그만이지..’ 속으로 곱씹으며 나는 도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서. 맨밥만을 씹던 나에게 캡사이신같은 혜연의 고백은 아직 너무 자극적인 맛이었다.

결국 답은 끝끝내 하지 못한 채로 나와 혜연은 헤어졌다. 혜연은 내게 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후회했다. ‘왜 답하지 못했을까.’라고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옆에 늘 있어주던 혜연을 난 잡지 못했다.

11.

그렇게 혜연과는 그 일을 끝으로 더 이상 만나지 않았다. 그 때 그 드라이브를 마지막으로 혜연이 바로 임용고시 준비에 들어갔기 때문에 연락을 할 수가 없었다. 나도 때마침 학교에서 나를 교환학생으로 프랑스에 보내준다는 말에 나는 ‘오냐, 잘됐다.’ 하는 심정으로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내가 프랑스에 간다는 말은 내가 친하게 지내는 몇몇 소수에게만 말한 채로.

왠지 프랑스로 가기 전에 엄마에게 한 번 들러야겠다고 생각을 했지만. 그건 생각으로만 끝났다. 나는 그냥, 엄마를 만나지 않고 그냥 한국을 떠났다. 맨밥 같이 무난한 일상을 도피하기 위해 떠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주소록에 혜연은 그냥 남겨두기로 했다. 내년쯤에 아마 한국으로 돌아갈테니. 혜연에게 연락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때 연락이 닿으면.. 나는 혜연에게 그 때 물었던 질문에 대한 답을 명확하게 해줄 것이다. 좋다고. 나도 니가 좋다고. 머뭇거리지 않고, 벙어리처럼 버벅 거리지도 않고, 명확하게 말이다.

아, 창밖이 어느새 어둠에 잡아먹혔다. 나는 핸드폰을 침대 위에 던져두고는 외투를 걸쳤다. 그 때 본 유리 성 같은 공단보다 더 아름답게 어둠에 잡아먹힌 낮선 거리를 걷기 위해서. 밖으로 나오니 어둠에 잡아먹히는 거리는 유리 성 같은 공단보다 더 아름다웠다. 하지만 로봇에 볼트가 헐거워진듯 뭔가가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쓸쓸한 낮선 나라의 낮선 거리. 그리고 낮선 외모의 사람들.. 이곳에 나를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 길을 마저 걷다보니 어둠을 배경 삼아 입을 맞추는 남자 두 명이 보였다. 나도 모르게 흐뭇하고 뜨끈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 그렇게 살아요. 어둠에 녹아들 듯 두 사람은 웃고 있는 듯 했다. 그 사람들이 있어도 이 곳의 저녁은 ‘그저, 그렇게 별 일 없이 흘러가는 저녁의’ 일부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