렛세이어 달
<저희가 상투구를 읊지 않게 하옵시고>
우리는 무의식 속에 상투적인 말들을 수 없이 가지고 있다. 시네마천국, 흩날리는 벚꽃, 하늘이 무너지는 듯 한 슬픔, 삶의 애환,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저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옵시고. 처음에는 인상적이었을 그 말들. 아직도 주체할 수 없는 매력 또는 미련으로 남아 수 없이 반복되는 상투구. 짧은 말들을 하나하나 매만지며 상투의 출발점을 기억해내 본다. 영화 제목, 소설의 한 구절. 다들 고만고만한 출생지이다. 저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옵시고, 이런 문장 하나마저 나에게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의 한 구절로 느껴질 뿐이지 어떤 종교적 의미도 가지지 못한다. 시험에 들지 않게 하옵소서, 시험은 종교적 선을 행하는 데 방해가 되는 모든 것들이다.
종교적 선? 종교적 선이라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같은 종교도 같지 않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각각의 개인들은 스스로의 신념을 믿을 뿐이다. 다만 그 신념이 소위 말하는 종교에 가까운 것이 되느냐 아니냐의 차이가 두드러지기는 한다. 무신론자는 신이 없다는 신념을, 종교가 없는 유신론자는 신의 가르침을 따를 필요가 없다는, 어쩌면 또 다른 신념을, 종교가 있는 이 들은 그 종교를 따르면서도 각각 받아들임의 차이가 있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종교적 선이 아무 의미도 없다는 증거가 되어 주지 않을까.
종교를 불문하고 존경받으셨던 법정 스님은 저서에 이렇게 적었다.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은 자비가 아니라 동정이다. 가난하던 아니던 그냥 돕는 것이 자비다. 불교도가 아닌 나는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불교도가 아니어도 불가의 가르침에 동의하고, 실천하려고 한다. 그렇다면 나는 불교의 종교적 선을 따르려는 사람인가, 그것도 아니다.
한참을 빙빙 돌려 말하지만 결국엔 종교적 선은 사람마다 다르고, 시험에 들지 않게 해달라고 말할 때의 시험도 제각각 다른 기준으로 전재한다는 말이다. 그래, 내가 믿는 종교에서는 동성애가 죄라고 말한다. 그리고 나는 신학적 틀을 벗어나지 않은 선에서, 최대한의 자기합리화를 거친 신념을 가지고, 내가 종교적 선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저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옵시고. 옛날에는 그렇게 말했는지 몰라도 지금은 조금 쉽게 재번역 되었다.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비슷한 부분을 다 옮겨 적어 본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였으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여기서 말하는 잘못은, 죄는, 유혹은 무엇인지. 종교적 선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분명하지만, 19년 평생 받아온 가르침과 나름 수없이 반복해온 자기 합리화는 아직도 팽팽하게 긴장되어있다. 그래서 나는 기도문을 읊지 못한다.
분명히 잘못도 죄도 유혹도 아니다. 잘못이고, 죄이고, 유혹이라면 기꺼이 잘못을 저지르고 유혹을 받으며 살겠다. 그런데 무언가 죄책감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 상투의 말들 때문일 것이다. 상투의 말들은 언제나 나의 선을 방해하고 있다. 나는 상투구가 싫다. 자기합리화를 하기에는 너무도 많은 사람의 손을 거쳐 온 상투구가.
렛세이어 불
<밤손님>
왜 중세 사람들이 보름달에 갖가지 미신을 만들었는지 알 것 같다. 새까만 배경으로 희뿌연 청회색 구름과 섞이고 있는 시린 달을 보면서 그렇게 느꼈다. 밤은 조용하다. 밤이 나를 삼켰는가, 아니면 밤과 함께인가. 조용한 어둠은 사람을 차분하게 만든다. 내 머리 위에서 빛나고 있는 하늘의 조명과, 그 보다 좀 더 낮은, 좀 더 내 가까이서 빛나고 있는 가로등 불빛은 나를 이 밤에 좀 더 편안하게 있게 해주는 위안이었다. 불 꺼진 학교는 조용하다. 시끄러운 소음과 발길에 점령당했던 길가 쉼터는 잔잔한 어둠에 기대어 쉬는 것처럼 보였다. 채 덜 진 벚꽃이 가끔 떨어졌다. 어둠과 침묵과 나지막한 불빛과 철 지난 꽃잎, 목덜미와 머리카락에 가끔 머물렀다 가는 바람과 나는 함께였다.
그 고요함과 차분함은 흔치 않은 시공간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사람이 그리워졌다. 햇빛 아래에선 멀미나는 사람들 틈 속에서 벗어나고 싶었으나, 정작 벗어난 시간 속에 있으면 이상하게 사람이 그리워진다. 제멋대로의 감정변화에 혀가 내둘렸다. 이 고요함과 기분 좋게 우울한 시간을 함께 공유할 사람이, 한 명 정도 있으면 싶었다. 친구 두 명에게 차례로 전화를 걸었으나, 한 명은 받지 않았고, 한 명은 술자리라며 간단한 안부인사 후 통화가 끊어졌다. 내 님은 오늘 낮부터 졸리다 소리를 연신 내뱉더니 일찍 잠자리에 든 모양이었다. 내 감정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당장 있지 않다는 것은 슬픈 일이어서 나는 이 밤중에 더 센티해졌다. 포기하고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대신 담배와 라이터를 들었다. 조용한 밤공기는 낮의 그것과는 확연히 다른 좀 더 선선하고 상쾌한 것이었다. 연기와 함께 폐부로 끌어들이는 일은, 1초도 쉼 없이 하고 있는 호흡이란 행동을 새삼 다시 느끼게 해주는 일이었다. 내가 호흡하고 있구나. 그래서 나는 담배를 필 때마다 항상 내가 어항 속에 담긴 금붕어 같다고 느낀다. 뻐끔대는 호흡과 싸하게 내뿜어지는 담배연기는 내 호흡의 증거처럼 느껴져서. 좋았다.
우연적인 만남은 항상 뜻 밖에 찾아온다. 바람이 꽃잎을 간질이는 소리를 뒤덮고 들리는 자박이는 발자국소리는 처음에는 낯선 불청객이었으나, 곧 반가움으로 바뀌었다. 내가 익히 알고, 가끔 보고 싶다고 떠올리기도 했던 곱상한 얼굴은 어둠 속에서도 흰 빛을 띄었다. 안녕, 반가운 마음은 산처럼 컸으나,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그 반가움을 입 밖으로 잘 표현하는 사람들이 아니었기에 건조하지만, 충분한 인사말이었다. 나란히 앉아서 우리는 나란히 담배만 피웠고, 대화는 딱히 없었다. 왜 이 시간에 이곳에 있는지, 그 물음과 대답만 두어마디 오갔을 뿐, 나는 그 공간에서 비로소 같은 감정을 나눌 사람을 만난 것이었고, 그 충만감에 딱히 다른 대화는 필요 없었다. 아마 너도, 아닌가, 네 감정은 잘 모르겠지만 아마 그랬으리라 생각한다. 밤손님, ‘윤’은 나에게 반가운 밤손님이었다.
‘윤’과 알고 지낸지는 2년이 채 덜되었으며 자주 만나는 편도 아니었으나, 그녀는 이렇게 항상 뜻밖의 장소에서, 사람이 필요한 장소에서 마주치게 된다. 작정하고 대화를 나눈 적도 그렇게 많지는 않지만, 진지하고 생각 깊은 말을 하는 그녀여서 우리의 대화는 그 수가 적고, 무거웠다. 그런 윤에게 얼마 전 크게 배신감을 느꼈던 적이 있었는데, 그녀에게 남자친구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상세한 과정은 기억나지 않지만 윤은 내가 여자를 사귀는 것을 알았고, 관심을 가졌으며, 자신도 여자와 사귀어보고 싶다고 말하였었다. 그 관심이 단순한 흥밋거리가 아닌 감정적인 측면에서 상당히 오랜 생각 끝에 나온 결론이었기에 나는 그녀의 상담 대상이 되어주고는 했다. 그런 그녀에게 얼마 전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소식은, 처음에는 믿기지 않는 내심 충격적인 것이었다. 심지어 같은 학과의, 소위 말하는 c.c였고, 인정 할 수밖에 없는 공식 커플이었다. 하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타인인 그녀가 누구를 사귀든 배신감을 느낄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쓸데없는 감정소모 대신 관심을 끊어버리는 것으로 스스로 결론을 내리고, 행동했다.
그리고 그 소식을 접하고 내 감정정리를 끝마친 후, 처음 만나는 ‘윤’이어서, 그녀는 분명 반가운 밤손님이었으나 조금 어색함이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었다. 남자친구는, 잘 사귀고 있어? 아무렇지 않게 물어보려고 노력했으나 내 말투나 표정이 어땠는지는 잘 모르겠다. 한때는 여자를 사귄다는 문제에 대해 상담을 해주고 했던 내가 남자친구와 잘 사귀고 있냐는 질문을 하고 있다니, 어쩐지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조금 웃음이 나왔다. ‘윤’도 나와 같은 이유인지, 아니면 그냥 멋쩍은 웃음인지는 모르겠으나 희미하고 짧게 웃었고, 그냥 그렇지 뭐, 하는 대답으로 내 질문을 흩뜨렸다. 그러고 또 아무 말 없이 담배를 한 대 씩 더 피고, 어둠과 침묵과 바람과 불빛을, 담배연기를 함께 공유할 뿐이었다.
나 그만 가볼게, 윤이 마지막으로 한 말에, 그제야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언뜻 그녀의 입술 사이로 보인 교정기에 시선을 두었다가, 다시 바닥의 담배꽁초를 바라보았다. 그래, 라는 대답을 했을 때는 이미 윤은 일어나서 몸을 돌린 후였고, 그녀는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조용하게, 당연한 행동을 하는 듯이 사라졌다. 애써 그녀가 간 방향을 보지 않고, 여전히 바닥의 담배꽁초를 쳐다보던 나도, 잠시 후 일어나서 윤과는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조용하고 차분한 밤이었지만, 왠지 어둠이 좀 더 바닥으로 가라앉은 것 같았다. 새하얗고 맑은 달을 바라보면서 나 역시도 좀 더 가라앉은 기분으로 걸음을 옮겼다.
렛세이어 물
<말뚝에 묶어 놓다>
방금 막 강원도에 도착했다. 베터리와 함께 넷북도 챙겼고, 데이터 무제한인 엄마 휴대폰으로 핫스팟도 준비했다. 과제와 렛세이까지 휴가에 들고 오긴 했지만 장비가 빵빵해서인지 마음이 놓인다. 이 숙소는 바다와 무척 가깝다. 자동차에서 내려서 한껏 숨을 들이마시자 바다의 짭짤한 내음새가 진하게 후신경을 건드리고 기도를 지나 폐를 가득 채웠다. 파도 소리가 먹먹하게 들려왔다. 아마 태백산맥을 지나느라 기압 차이로 팽팽해진 고막을 음파가 사정없이 거칠게 때리고 있기 때문일 거다. 새까맣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건 눈앞에 펼쳐져 있는 모래밭도 마찬가지다. 무엇이 땅이고, 무엇이 바다인지, 그리고 무엇이 하늘인지 아무것도 구분할 수 없다. 온통 앞을 가늠할 수 없는 어둠뿐이고 단지 고개를 들었을 때 상하(上下)만 분별 가능할 수 있게끔 무수한 별들이 박혀있는 게 끝이다. 그게 유일한 빛이다.
옛날이라면 무서워했을 어둠인데, 지금은 이쪽이 더 편하다. 그녀와 같이 갔었던 어둠 속의 대화라는 체험 전시 때문인지, 아니면 더 이상 그녀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는 어둠 때문이어서인지는 잘 모르겠다. 사실 잘 모른다는 것 자체가 불만족스럽다. 생각이 더 이상 진전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모른다. 나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일종의 장애다. 모든 일을 주체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게 하는 커다란 장애.
요즘 생각 없이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나의 이런 불만족스러운 말에 누군가 이렇게 얘기했다. 그래도 자신이 뭐가 먹고 싶은지, 뭘 입어야 하는 지 정도는 생각하잖아. 나는 이미 누군가에게 길들여져있다. 그런 생각만 할 수 있다. 그녀를 만나는 날이거나, 또는 그렇지 않거나. 나는 내 생각을 할 수 없게 된 지 오래다. 첫사랑에서부터 너무 오랫동안 그게 편하게 여겨졌고, 어느새 불치의 장애로 남아버리게 됐다.
새까만 어둠을 보고 다시 돌아오질 그 때의 추억을 곱씹어 봤자다. 그래봤자 어차피 나는 그녀에게 기꺼이 을이 되는 관계니까, 그런 추억은 다른 생각을 방해할 뿐 이제는 아무런 기쁨도 가져와주지 못한다. 그러니까 내 머리가 생각의 장애가 된 까닭은 그녀가 들어온 이후부터 인가보다. 모든 사고 회로가 아마 그녀 쪽으로 잔뜩 모여서 엉켜 하나의 거대한 암덩어리가 되어 있는 것이다. 잘라내기에는 이미 너무 커져버렸다. 회로 하나하나를 끊어내다가는 내가 그나마 할 수 있는 그녀에 대한 생각마저도 사라져버리게 되는 거다. 그럼 오래 걸리더라도 그거 하나씩 풀어내면 되잖아, 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게 싫은 거다. 그녀와 이렇게라도 얽힌 관계가 좋은 거다. 그렇게라도 옆에 있을 수 있다면 괜찮아. 비련의 여주인공마냥 신파극의 대사를 읊는다. 생각을 안하고 있는 것도 나의 장애이지만 어쩌면 슬프고 우울한 감정에 익숙해져버린 모습도 내가 정상적으로 살아가는 데 분명히 장애 요소가 되고 있음에 틀림없다. 주요 정서가 한없이 푸르기만 하다니. 그것도 생각 없는 사람의 대책 없는 우울은 어떻게 손 대야할지 모르겠다. 모르겠다는 단어를 모르겠다는 것만큼이나 어렵고, 모호하다.
약 2년만의 휴가다. 모두 할 일을 하고 왔기 때문인지 다들 피곤함에 일찍 잠이 들었다. 뒤에 과제가 남아있기는 하지만 나도 이번에는 외면하고 눈을 감아봐야겠다. 이것까지 하다가는 아무래도 내일 설악산에는 오르지 못할 것이 뻔하다. 아침에 일어나서 다시 폐에 훅하고 찔려오는 바다 냄새를 맡고, 아침을 먹고, 등산 채비를 한 뒤 나는 설악산으로 갈 것이다. 모를 것이 없는 일정과 그리고 그와 비슷한 일상. 나는 이미 생각 없는 것에 익숙해져있다. 장애에 익숙해져서 말뚝을 뽑아버릴 용기가 없는 커다란 코끼리가 된 것이다.
렛세이어 나무
<모든 것의 이유>
몇 년 전의 나는 참으로 무뚝뚝하고 감정 표현 없는 사람이었다. 적어도 소위 말하는 '이쪽'에 발을 들이기 전까지는 말이다. 진짜 나를 찾았기 때문이었을까. 단순히 나를 사랑하고 누군가를 사랑하는 법을 모르는 그런 사람인 게 아니라, 그저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에너지 소모 정도로 밖에 생각되지 않았던 나는 그냥 숨쉬는 껍데기에 불과했던 것 같다. 지금의 나를 아는 사람들에게 물어도 그 때의 나는 어땠냐고 하면 그저 웃기만 할 뿐 그 때의 나를 자세하게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처음 내가 여자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그냥 내가 취향이 좀 특이하구나에서 생각이 멈췄는데, 내 취향을 가진 사람이 나 말고도 있다는 생각에 커뮤니티에 가입을 했고 그 때부터 진짜 나를 찾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나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지만 남들에게 함부로 말할 수 없는 나의 '비밀'을 공유한 사람들이었고 특별한 인연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솔직해질 수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것에도 한계는 존재했다. 내 나름의 감정표현을 배우긴 했지만, 남들이 흔히 말하는 웃음과 울음에서는 멀었다. 내가 잘해준다고 생각했던 지금의 그녀도 그때는 많이 상처 받았었다고 했었으니까 말이다.
지금의 그녀가 그 때 내게 늘 하던 말이 있었다. 좀 더 많이 웃고, 좀 더 표현 할 줄 알았으면 좋겠다고. (물론, 지금의 그녀는 그 말들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듯하다.) 그리고 좀 머리도 기르고 예쁘게 꾸밀 줄 알았으면 좋겠다고. 그러면 좀 더 예뻐질 것 같다고. 솔직하게 그런 말은 처음 들었었다. 아무도 내게 그렇게 해보라는 말을 해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내가 억지로 웃는다는 것을 그때까지는 잘 몰랐고, 내가 속으로 얼마나 우는 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녀는 나와 겨우 문자가 몇 번 오갔을 뿐인데도 내 마음을 알아주는 것 같았다. 내게 비친 그녀의 모습에는 아픈 웃음들이 간혹 보이기도 했지만, 그 땐 나와 같은 줄만 알았다. 남들에게 보이지 않길 바라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을 지켜주고 싶었고 그녀와 만남을 시작했었다.
조금 아픈 기억이지만, 그녀와 헤어지고 나서 다른 사람을 만나는 내내 나는 멍했었다. 새로 만나는 사람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그저 그러지 않아야지라는 생각이 전부. 그녀를 떠올리면 안 된다였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지나 연말을 맞이했고, 나는 신년 계획을 세웠다. 그때의 나는 열아홉. 이제 갓 스물이 되기 위한 준비를 할 때였다. 나는 조금 달라져보기로 다짐했었다. 그녀가 내게 말했던 대로, 머리도 길러보고 화장도 하고 예쁜 옷도 입어보고... 웃어보고. 그러면 인생이 조금 달라질 거라고 생각했나보다. 나의 그녀 외에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내게 그런 조언을 해준 적이 없어서였나, 그 때 내가 자연스레 그녀의 말을 떠올렸던 것은 지금도 의문이다.
그 덕분이었을까. 해가 바뀌고 나의 모습은 하나둘 변해갔다. 처음 거울 앞에서 웃는 연습을 했을 땐 정말 행복하지않아보였었다. 아니 나는 웃고있지않았었다. 그러나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며 연습하고, 억지로가 아닌 자연스레 웃어보는 나를 언젠가 발견할 수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그녀를 다시 만났을 때 나는 비로소 환하게 웃을 수 있었다. 다행이었다. 그녀 앞에서 자연스럽게 웃을 수 있다는 것은. 머리를 기르니 훨씬 낫다는 그녀의 말에 뭐가 그리도 좋았는 지 모르겠다. 치마를 입고 만난 어색한 자리였지만, 이쁘다는 그녀의 말에 굽 높은 구두를 신고도 뚜벅뚜벅 잘만 걸어갔다.
그녀와 다시 연락을 시작하고, 만남을 시작했을 때 주변에서는 내게 하나둘 물어보기 시작했다. 요새 좋은 일 있냐고,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난다고. 그러고 그녀와 연애를 시작한지 반년쯤 되자, 얼굴이 많이 예뻐졌다고. 사랑이라도 하는 거냐고. 재작년 그녀와 연애할 당시 많이 들었던 질문이었다. 그녀가 정말 내 여자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수많은 사람을 거쳤지만, 그녀만큼 나를 변하게 하는 사람은 없었다. 남들에게 숨기고 연애를 함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겉으로 티가 나도록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녀 뿐이었다.
일년이 넘는 시간 그녀를 만나면서 아픈 시간도 있었다. 그 시간이 되면 모두들 내게 물었다. "애인이랑 싸운거야?" 첫 질문이었다. 무슨 일 있냐는 말 전에 그녀와의 사이를 물었다. 그제서야 알았다. 내 모든 것의 이유는 그녀라는 것을. 그녀에게 예뻐보이기 위해서라면 불편한 원피스도, 귀찮은 화장도 좋았다. 좋아하지않았던 옷도 그녀가 좋아하면 그걸로 좋았고, 정말 좋아하던 옷이라도 그녀가 별로라고 하면 다시는 입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전부인 것이다. 요새 '사람다워졌다'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요즘에서야 살아가고있다는 그런 생각이 든다. 내가 웃을 수 있는 이유는 그녀 뿐이라는 것. 그녀가 존재하기에 내가 웃을 수 있다는 것. 사람은 절대로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 맞는 것 같다. 감정표현은 에너지는 소모될 지언정, 새로운 에너지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이었다.
렛세이어 돌
<진통제>
지금 한창 상담을 받고 있는 상태이기에, 그리고 이번 주제가 내가 하는 상담 내용과도 맞물리기에 나는 내가 받은 상담에 관련해서 이번 글을 써보고자 한다.
나는 웃음이라는 것이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것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기본적으로 사람들은 잘 웃는 사람을, 밝은 사람을 싫어하지는 않는다. 우리 속담에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우울한 얼굴로 타인마저 우울하게 만드는 사람보다 밝은 얼굴과 웃음으로 타인을 기쁘게 만들어주는 사람에게 더 호의를 베푼다. 그것은 아주 당연한 이야기이다. 깊게 생각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도대체 몇 명이나 되겠는가. 웃음이라는 것은 그 분위기를 적당히 가볍게 만들어주는 법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나는 웃음이 굉장히 쉬운 사람이라는 것을 스스로가 잘 알고 있다. 나는 잘 웃는다. 아주 어렸을 적, 모든 아이들이 다 낯을 가리는 나이에도 나는 낯을 잘 가리지 않았다고 한다. 먼저 가서 인사를 했고, 먼저 가서 웃었으며, 낯선 곳에서도 잘 뛰어 놀았다고. 친구들과 이야기 할 때도 항상 웃는 채이고, 엄마에게 혼나고 나서도 금방 또 엄마 앞에서 재롱을 부리며 잘 웃는다. 밤 새 잠 못 이루고 울면서 우울감에 몸부림을 치다가도 아침에 일어나면 아무렇지도 않게 웃는 사람이다. 나에게는 웃는 것이 너무나도 쉽다.
특별히 ‘웃어야지’ 라고 생각하고 웃는 것은 아니다. 그냥 기분이 좋으니까 웃는 것뿐이다. 나는 감정 추스르는 것에는 도가 텄는데, 그래서인지 우울하고 기분이 좋지 않다가도 친구들과 대화를 하거나 내가 좋아하는 것을 보면 금방 웃음이 터졌다. 내가 언제 기분이 나빴냐고 스스로에 묻기라도 할 듯, 그 전의 일들은 완벽하게 잊어버리고 그 기분 좋은 일에만 집중한다. 그리고 웃는다. 정말이지 즐겁게 웃는다.
나의 그런 성격에 의구심을 품었던 적은 없다. 무언가의 의심을 했던 적도 없다. 단지 기분 좋으니까, 기분 좋은 게 결코 나쁜 것은 아니니까 웃으며 넘어갔을 뿐이다. 그런데 내 어린 시절의 이야기와 지금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상담 선생님께서 한 마디를 하셨다. 혹시 마음의 상처나 잊고 싶은 일들, 겪고 싶지 않은 상황들을 웃음으로 넘겨버리고 묻어가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사실, 상담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에 대해서는 내가 어떻게 대답을 하면 좋을지 몰라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조차도 나는 웃었다. 웃으면서, 그럴지도 모르죠. 하고 그냥 넘겨버렸다. 지금 생각해봐도, 다시 그 때로 돌아간다면 나는 똑같은 반응을 했을 것이다. 그냥 웃음으로 넘겨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나쁜 걸까? 고작 웃음으로 넘겨버리는 게 정말 나쁜 걸까? 선생님께서는 계속 그렇게 묻어가다가는 분명 나아지질 못하고 더 아프기만 할 거라고 하셨지만, 웃고 있는 그 순간에는 즐거운 것만 생각날 뿐인데 정말로 그게 좋지 않은 일인 걸까? 나는 잘 모르겠다. 대답할 수 없다. 이것이 나를 방어하기 위한 어떠한 방법일 거라고는 생각하지만, 그것이 옳지 않은 방법이라는 말을 들으면 그 말에 마냥 긍정할 수도 없다. 분명히 나는 스스로 짓는 그 웃음에 내가 싫어하는 것들에 대한 고통을 잊어버리고 있으니까.
이 글을 쓰면서, 어쩌면 내게 있어 웃음이라는 건 진통제와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통제. 진통제다. 실질적으로 상처를 치유하는 것은 아니지만, 고통을 무마시켜주기는 한다. 내게 있어서 웃음이라는 건, 그런 존재인 게 아닐까.
웹진 랑은 퀴어 에세이 블로그 LETSSAY의 글들을 기고받아 연재합니다. LETSSAY 블로그에서 더 많은 에세이들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달, 불, 물, 나무, 돌 다섯 레세이어들의 이야기를 기대해주세요.
LETSSAY란? 각양각색의 다섯 명의 여성 성소수자의 솔직담백한 퀴어 생활 에세이입니다. "Let's say"와 레즈비언 에세이(Lesbian Essay)라는 의미처럼 여러분과 공감할 수 있는 퀴어풀한 에세이를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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