렛세이어 달

시계도 시간이 흐르면 고장이 난다.

 

셔츠와 넥타이와 손목시계는 어린 내가 좋아하던 것, 그리고 가지지 못했던 것. 시간이 흘러 청소년기를 맞이하며 세가지를 모두 가지게 되었다. 새하얀 셔츠의 감촉과 살짝 목을 죄는 넥타이, 손목을 감싸 무게감을 드러내는 검은 손목시계. 교복 셔츠에 교복 넥타이, 입학선물로 받은 몇만원짜리 시계였지만 그 만족감은 왜 그렇게 컸는지.

 

5년 반. 학교에도 사복을 입고 다니면서 셔츠와 넥타이는 멀어지고, 생활방수라지만 꼬박꼬박 정기적으로 물을 먹던 손목시계가 망가지는 시간. 지하철을 타고 도계를 넘어가 수리를 받아왔지만 원인불명의 고장이 번번히 일어났다. 손목시계에 맞닿아 있던 살갗은 반들거리게 닳아있고 타지 않아 하얗게 바래있다. 5년 반은 그렇게도 긴 시간이다.

 

사르, 너의 이름을 처음 불렀던 날로 부터 5년 반이 지났다. 우리는 악연이었고 데면데면한 사이였고 친구였고 누구보다 가까운 사이였고 내 의지로 그리고 너의 상처로 또다시 멀어지기 시작했다. 너도 알고 있었을까. 내 연락을 무시하는 것이 네 습관이 되었을 때, 내가 너에게서 멀어지기로 결정했다는 것을. 너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네 슬픔까지 감당해 줄 여력이 없다.

 

섭섭도 했을 것이다. 나는 네게 항상 나를 던지곤 했으니까. 그 길던 5년 반, 당연하던 나의 태도가 그렇게 변해버렸으니까. 네 말대로 인간관계 참 어렵다. 나에게는 당연한 일이 너에게는 아니었기에 항상 너를 기준 삼았었던 우리의 관계는 더더욱 어렵다. 트위터에 너와의 추억을 써올리던 날이 바로 어제였는데, 모르는 사이에 너는 나에게 상처를 받았고 그 사실 자체에 내가 다시 상처를 받았다. 우리는 서로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컸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의 관계는 더더욱 이어질 수 없다. 왜 이렇게 비틀려 버렸을까. 그래, 맞다. 그 전에는 인간관계라는 게 설정놀음에 불과 했다. 네가 그 경계를 파고 들어 온 것도 맞고. 그리고 네가 그걸 책임지리라 기대했던 것까지도 다 맞다. 어떻게 말해도 모두 내 잘못이다. 내 행동은 너에게 상처였다. 그리고 네가 상처받았다는 게 나에게는 상처였다. 둘 다 그 이상을 바라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멀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같은 인격에서 갈라져나와 서로 다른 성격을 지니게 된 게 아닐까, 하고 나누던 그 날의 말들처럼.

 

자기가 밀쳐낸 사람이 떠날까봐 두렵다니, 그래서 나에게 화가 났다는 전개로 왜 흘러가는지는 이해할 수 없다. 이 사실 하나 만큼은 확실하다. 나와 너의 반년도 채 남지 않은 고등학교 시절은 아픔이 되어가고있다. 그건 내 잘못이자 네 잘못이다. 착한척 하기 좋아하는 네 자신도 이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울 때 너도 울었던 건 사실이지만, 나는 네가 너무 슬퍼서, 너는 네가 너무 슬퍼서, 그렇게 울었을 뿐이다. 처음부터 나는 가해적 피해자, 너는 피해적 가해자였다. 그렇게 겉핥기 식으로 5년 반이 정의된다.

 

아무리 배터리를 갈고 맡겨도 수리를 요청해도 원인을 찾을 수 없다던 고장은 어이없게 고쳐졌다. 배터리 뚜껑 사이에 끼인 5년 반의 먼지들이 배터리와 접촉 단자를 닿지 못하게 한 것이다. 핀셋으로 깨끗하게 긁어내니 멀쩡하게 돌아갔다. 그 긴 시간을 함께해온 손목시계를 고장으로 몰아간 건 자그만 먼지들이었다. 그리고 나는 너에게 기대를 하나 해본다. 그렇게 어려웠던 우리의 관계도 한낱 먼지같은 이유로 틀어진 게 아닐까, 먼지를 없앤다면 다시 좋은 친구사이로 돌아올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렛세이어 불

무감각한 변화

 

너 요즘 되게 생각 없어 보인다.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서 마시던 커피를 든 채 그대로 눈알만 쳐들어 상대를 바라보았다. 그 반응에 놀란 것은 오히려 상대방이었다. 그 모습에 순간 울컥했던 더러운 성질머리를 누를 수 있었다. 요새 무기력하게 살고 있긴 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다시 눈을 내려 쥐고 있는 머그컵 끄트머리를 바라보았다. 조그맣게 이가 빠진 머그컵을 다시 멍하게 바라보았다. 그런 내 모습에 상대는 당황한 것 같았다. 그래서 말을 덧붙이기 시작했다. 아니 그냥, 너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한테 죄책감이니 양심이니 이런 저런 이상한 말들을 잔뜩 했었잖아, 그런데 요새는, 안 그래서. 그래서 그랬지. 끝이 기어들어가는 상대방의 목소리가 묘하게 거슬렸다. 하지만 토를 달거나 해명하고 싶은 기분은 아니어서 그런가, 하고 그냥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모든 빛을 다 털어낸 후 산 뒤로 숨어버리기 직전의 태양 같은 기분이었다. 식어빠진 씁쓸한 음료는 언제나 그러했듯이 그런 내 기분을 지속시켜주는 좋은 조력자였다. 

 

그녀와 나는 같은 학교이므로, 나는 싫어도 그녀를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그녀의 다이어리를 본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모두가 부산스레 움직이고 들락날락 거리는, 수업이 없는 시간의 강의실에서 나는 생각 없이 아무 자리나 의자를 빼어 몸을 앉혔다. 비가 시원스레 쏟아지지도 않고 그렇다고 아예 오지 않는 것도 아닌 젖은 날씨는 사람을 무기력하고 숨 쉬는 것만으로도 피곤하게 만들었다. 물을 먹어 눅눅히 젖은 구겨지고 시커먼 담배꽁초, 새하얗게 말라비틀어진 잎사귀 끝의 투명한 물방울, 먼지를 뒤집어 쓴 회색 천막에 고인 물웅덩이에 부리를 비비는 까치들이나, 짓눌러 죽여 버리기 직전까지 정신없이 사람 주위를 날아다니는 날벌레들, 그런 것들이 머릿속에서 떠나가질 않아서 더욱 쳐져가고 있었다. 눈꺼풀 위로 몰려드는 무거운 무게감에 책상 위에 그대로 엎어졌다. 흠집과 낙서들로 가득한 책상에 눈길을 두다가 발견한 것은 어쩐지 익숙한 가죽 표지의 다이어리였다. 그리고 나서야 나는 내가 드러누운 책상이 그녀가 방금까지 앉아 있다가 자리를 비운 곳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당황스러움이 들기도 하였으나 그보다 더 귀찮은 것은 굳이 피해가야 하는가, 하는 의문과 공룡 같은 귀찮음이었다. 얼마간 그렇게 눈만 뜬 채로 뺨을 책상에 붙이고 있다가, 손을 뻗어 다이어리 겉장을 펼쳤다. 아무 생각 없는 행동이었다. 아니, 사실 호기심이 치밀긴 했을 것이다. 나와 헤어진 이후에 이 여자의 다이어리에는 어떠한 글들이 적혀있을지, 그것이 너무 궁금해서 두꺼운 가죽 표지와 얇은 속지들을 가볍게 넘겼다. 그리고 늘 그렇듯이, 호기심은 고양이를 죽인다.

 

흔히 보던 달력 형태의 글귀들을 무심히 지나치다가, 멈춘 것은 다이어리 뒤쪽의 글들이었다. 줄도 쳐져 있지 않은 하얀 여백에 꾸물렁거리는 글자들 속에서 나는 익숙한 글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때도 역시나, 정신이 갑자기 번쩍 들어서, 물먹은 뇌는 순식간에 건조되어 내 늘어진 몸뚱이까지 일으켜 세웠다. 몇 문장으로 구성된 글귀는 얼마 전에 내가 지인의 블로그에서 본 것으로, 지인은 단순한 일기 형식으로 쓴 글이었으나 난 그 문장들이 상당히 마음에 들어, 떠오르는 이미지와 함께 드로잉 북에 기록해 둔 것이었다. 23살의 너는, 으로 시작되는 그 문장들은, 마침 23살인 그녀가 본다면 내가 그녀 자신에게 쓴 편지처럼 보이기에 딱 오해하기 좋을 글귀였다. 그녀가 내 지인과 알리는 없으니, 이러저러한 생각 끝에 도달한 결론은 그녀가 내 드로잉 북을 몰래 봤다는 사실이었고, 그 사실에 화가 난다기 보다는 미련함에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곧 헛웃음이 나왔다. 그녀가 한 행동은 내가 지금 그녀의 다이어리를 몰래 본 행동과 딱히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또한 이 글귀가 절대 너를 생각하며 쓴 글이 아니라고 바로잡아주고 싶은 충동도 치밀었으나, 그게 모두 무슨 소용일까 싶어서, 나는 그냥 다시 다이어리를 원래 위치대로 덮어두었다.

 

다만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것은, 그녀가 추가적으로 덧붙인 것으로 보이는 문장들이었는데, 너는 항상 반짝반짝 빛난다. 하얗고 까맣고 붉게 반짝이는 네가 보고 싶다, 그 감성이 충실하다 못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그런 것들이 나는 그저 좀 웃겼다. 눅눅함이 다시 물밀듯 밀려와 나를 담갔다. 귀 끝에서 후드득 곰팡이가 떨어질 것 같아서 강의실을 서둘러서, 하지만 천천히 걸어 나왔다. 차라리 습한 바람이라도 불어주는 바깥이 내게는 더 절실했다. 습기 찬 유리문에 기대어 물에 젖어 썩어 들어가는 나무 난간을 바라보았다. 얼마 전에 친구가 한 말이 떠올랐다. 너 요즘 되게 생각 없어 보인다. 그래, 그런 것 같다. 예전 같았으면 그, 하얗고 까맣고 붉게 반짝이는 네가 보고 싶다, 라는 문장에 같잖은 죄책감과 닳아 없어지는 양심에 대한 갖가지 잡생각으로 허우적거렸을 터인데, 지금 나는 그저 물먹어 늘어진 몸뚱이일 뿐이다. 그저 내 눈에 보이는 것은 비에 젖은 난간의 얼룩들이고, 들리는 것은 위층 음악 연습실의 뚱땅거리는 악기소리일 뿐이고, 그리고.

 

그래도 하얗고 까맣고 붉게 반짝인다는 표현은 좀 재밌는 것 같아,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그렇게 생각하였다. 나는 점점 죽은 해파리처럼 무감각해져 가고 있는 것 같다.

  

 

 

렛세이어 물

화해

 

오랜만에 본 네 팔목에는 은시계가 채워져 있었다. 그걸 발견한 게 우리가 화해한 날이었는지, 아니면 화해를 하고 나서 조금 더 내가 너에게 다시 편안해지기 시작했을 때였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어쨌든, 그건 그렇게 내가 잘못을 한 이후로 네가 없던 내 인생의 두 달 간 너에게 새롭게 생긴 액세서리였다.

 

네가 없던 두 달은 불안함의 연속이었다. 억지로 감정을 짓눌러서 네가 남긴 흔적들을 봐도 나는 덤덤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네가 말한 ‘끝내자’는 너무 가슴을 아프게 찔러왔다. 그 때의 일기들은 온통 그런 얘기들뿐이다. 네게 마지막일 줄 알았던 메시지를 보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그리고 울면서 타자를 쳐내려갈 때. 어서 빨리 괜찮아지려고 또다시, 고등학생 때 나처럼 살기 위해 약속을 잡고, 할 일을 만들어냈었다. ‘제발’이라는 말의 공허함도 그 때 처음 알았고, 일부러 욕을 써봤는데 아주 티가 나게 흔들리는 글씨체. 왠지 모르겠지만 꿈에서 나오는 너. 그래서 잠을 많이 자려고 했다는 나. 그 때 봤던 연극들이 아무리 유쾌한 내용이어도 이상하게 눈물이 쏟아졌다고. 전시회를 가는데도 네 생각이 난다고. 피곤에 찌들어있고, 아주 예민해져서는 괜히 다른 친구들에게 신경질을 내는 모습도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아무렇지도 않게 보낼 수 있었던 일에 괜히 혼자 꼬투리 잡고, 그 친구의 단점만 봤다. 그런 내가 너무 싫어져서 아주 아주 유쾌한 사람이 되자고 결심하기도 했다. 그래서 네가 간간히 보낸 카카오톡이나 문자메시지에 반응을 해서 가슴이 아파오는 게 너무 힘들었다.

 

​아주 밝고 가볍고 유쾌해졌다고 믿었는데, 그게 그냥 나를 숨기려는 일이라서 더욱 그랬다. 예민하고, 밝고, 그러다가 한참 울다가. 감정이 왔다 갔다 하긴 했지만 언제나 모든 감정이 고조된 상태였다. 그 당시 잠깐 만났던 언니에게선 언니를 본 게 아니라 언제나 너를 봤다. 너를 떠올려서 비교했고, 얘기할 때 결국 나는 널 생각하면서 얘기하고 있었다. 너의 상태메시지에 괜히 집착해서 그걸 일기에 써놓고 있는 내 모습에서 그 때의 생각이 읽혔다.

 

그리고 너의 시계를 보게 된 후부터 다시 일기는 점점 안정되었다. 언제나 들쭉날쭉하던 감정이 정리되어서 글씨도 그렇고, 내용도 그렇고 행복하다는 표현이 많았다. 하지만 여전히 불안했는데, 그 일이 아주 확실하게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거다. 하지만 이제 그 불안마저도 많이 가라앉았다. 이상하게도 그렇게 한 번 멀어진 다음에 다시 가까워졌을 때. 그 사람이 나에게 얼마나 필요한 지를 깨닫게 되자 예전에는 아예 말할 생각조차 없던 얘기들을 아주 조심스럽게라도, 하나씩 꺼낼 수 있게 됐다. 그렇게 해서 말하게 된 나의 불안감, 그리고 그렇게 해서 듣게 된 답들. 혼자 속으로 끙끙거리며 싸매는 건 결국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걸 다시 한 번 더 깨달으면서 보낸 며칠 전의 대화는 나를 굉장히 편안하게 만들었다.

 

인연이라는 글에서 ‘회자정리 거자필반’이라는 내용을 쓴 적이 있었다. 그리고 한 달인가 두 달인가 쯤 전에는 그런 일은 없다고 아주 거칠게 내 마음을 써내려갔다. 그리고 지금 와서 나는 다시 회자정리 거자필반을 써내려간다. 인연이라면 돌아온다. 불안을 잠재운 그 대화에서, ‘내가 돌아왔다는 사실에 집중해줬으면 좋겠다.’고 했을 때 순식간에 마음을 채우는 안도가 그 어구를 다시금 떠올리게 했다. 인연이라면, 떠난 사람은 돌아올 거라고. 시계가 돌아서 다시 같은 시간을 알리듯이 그렇게.

   



렛세이어 나무

2000

 

'달그락달그락-' 차가운 물로 샤워를 마치고 나와서 옷을 입는데 평소엔 들리지 않던 소리가 들린다. 소리에 놀라 블라우스 단추도 채우지 않고 부엌으로 달려갔더니 아침잠 많은 그녀가 서있었다. 너무 놀란 나머지 멍하게 서 있자 그녀가 내 앞으로 걸어오더니 "오늘은 일찍 들어와 여보. 알았지?" 무슨 일인가 하고 멍하니 쳐다보자 더 가까이 다가와서 블라우스의 단추를 하나하나 잠궈주고서는 넥타이를 매어주었다. 이제 조이기만 하면 되는데 그녀가 조이지 않은 넥타이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고 그녀와 나의 거리는 1cm도 채 되지 않았다. '쪽" 가벼운 입맞춤을 한 뒤 넥타이를 정리해준 그녀는 뒤돌아서서 다시 부엌으로 가려고 했다. 그런 그녀를 뒤에서 안으며 "아... 오늘 왜 이렇게 이뻐. 출근하기싫게.." "아 이러다 늦어! 늦으면 그 노처녀한테 또 뭔소릴 들으려고. 얼른 가. 나 너 그 노처녀한테 잔소리 듣는 거 싫어" "네에네에 여부가 있겠습니까~" 라고 말한뒤 툴툴대며 머리 손질도 하고 화장도 마쳤다.

평소 같았으면 내가 준비가 끝나고 아침밥을 차릴 때 쯤 일어나는 그년데 오늘따라 왠지 부산스럽다했더니 준비 끝내고 돌아보니 그녀가 아침상을 다 차려놨다. "우와... 무슨 날이야 오늘?" "몰라서 물어?" 뭐지? 오늘 무슨 날인가.. 요새 시간 개념이 워낙 없어서 기억이 안 나는데....는 무슨 모를리가 있겠는가. "오늘 며칠이지?" 능청스럽게 물어보자 그녀의 반응은 예상대로 툴툴거린다. "몰.라. 앉아서 밥이나 먹어. 오늘 숙제야." 냠냠. 오늘에서야 문뜩 드는 생각이지만 내 여자 음식 솜씨가 정말 많이 늘었다. 이제는 정말 내 입맛에 쏙 든다. 역시 같이 사니까 입맛도 닮아가나보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밥을 먹다보니 어느새 밥 그릇은 비워져 있었고 출근 시간이 다 되어갔다. "으 진짜 늦겠다. 우리 사랑하는 여보님. 나중에 마칠 때 데리러 갈게요." "흥" "사랑해. 이따 마치고 봐요. 칼퇴하고 로비에서 기다려줘요."

 

실은 그랬다. 오늘은 그녀와 나의 2000일. 벌써 반년만 더 지내면 우리가 6년이 된다. 그래서 그동안 나와 함께 해준 그녀를 위해 자그마한 언약식을 준비해두었다. 열아홉살 스무살의 철 없던 시절을 지나, 스무살 스물한살이라는 성인으로서 만남. 그리고 그 뒤로 이어진 5년이 넘는 시간. 다사다난한 많은 일들이 있었고 수차례 좌절을 겪는 내 곁을 묵묵히 지켜준 그녀였다. 물론 그녀도 나도 서로에게 못할 말도 많이 했지만 그러면서도 돌아가야할 우리의 자리는 서로의 곁이라는 것을 더욱 깨닫는 계기가 될 뿐이었다. 업무 시간 내내 업무에는 집중하지 못한 채 그녀와의 오늘 저녁만을 기대했다. 오늘은 근사한 저녁 식사. 그리고 친구가 운영하는 바에서의 언약식. 호텔 스위트룸이 기다리고 있기에 더욱 두근 거릴 수 밖에 없었다. 시간이 어떻게 지났는 지도 모르게 어느새 퇴근 시간이 되어있었다. 평소엔 업무를 끝마치고서야 퇴근하는 나였지만 그날은 6시 정각이 되자마자 뛰쳐 나가서 운전대를 잡고 그녀의 회사로 향했다.

 

너무 들떠있었나? 평소엔 안전운전을 그리도 중요시하면서 오늘은 사고를 낼 뻔할 정도로 험하게 차를 몰았다. '끼익-' 그녀의 회사를 한 블럭 남겨 놓고 차를 길가에 세운 뒤 머리와 매무새를 다시 정리하고 화장도 두번이나 확인하고서 다시 차를 몰았다. 나보다 한 시간 출근 시간이 늦은 대신 퇴근 시간이 한 시간 늦은 그녀는 로비에 아직 내려오지 않았다. 두근거리며 기다리고 있을 무렵 그녀의 마쳤다는 문자가 도착했고 나는 차에서 내려 그녀를 맞았다. 한껏 꾸민 그녀의 모습은 정말 예뻤다. 아직 아침의 화가 덜 풀린 건지 입술이 튀어나와있는 그녀에게 안전벨트를 채워주는 척 하며 나도 모르게 입맞춤을 해버렸다. 놀란듯한 그녀의 표정. 너무 귀여워서 웃어버리고 말았다. "지금 웃겨? 응? 내가 웃기냐고" "아니 예뻐" 그 말 한 마디를 던져놓고서 차를 출발했다. "어이 예쁜 아가씨. 오늘은 나랑 내가 근사한 코스로 모실테니까 투덜대기없기." "ㄷ.." "돈 얘기 꺼내면 혼나. 이거 내 돈이야. 알아 나도. 오늘 우리한테 어떤 날인지. 그러니까 쉿."

 

그렇게 그녀의 입을 막은 채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고 친구의 가게로 향했다. 가는 내내 어디 가는 거냐고 물었지만 그녀에게는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 그러자 제 풀에 지쳤는 지, 멀미가 나는 지 창문에 기대어 그녀도 조용해졌다. 그녀에게 나즈막히 말했다. "오늘 내가 정말 사랑하는 여자한테 고백하려고 하거든? 그래서 말인데 말야. 오늘은 나 집에 안 들어가. 알았지?" 황당하다고 쳐다보는 그녀를 향해서 한 번 더 쐐기를 박았다. "내가 긴장되서 그러는 데 너가 대신 좀 전해주라. 오늘 집에 가지말라고." 어버버거리는 그녀를 내버려둔채 나는 가게 앞에 서서 내렸다. 그리고 한 손으로는 문을 잡고, 한 손으로는 그녀의 허리를 감싼채 그녀에게 말했다. "사랑하는 내 여자 우리 오늘 언약식 하자." 

 

.

.

.

 

'딸랑-' 가게의 풍경 소리와 함께 나는 꿈에서 깼다.

 

  

 

렛세이어 돌

10시, 우리 엄마

 

야자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고 나면, 일주일에 두 번, 엄마께서 완전 탈수 된 세탁기 속 빨래를 잔뜩 꺼내어 옷걸이에 걸거나 서랍에 넣기 위해 접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틀어져 있는 드라마 앞, 불 꺼진 거실에서, 나보다도 더 마른, 팔과 다리는 온통 뼈밖에 남지 않은 엄마가, 시선은 드라마에 고정한 채로 빨래는 내려다보지도 않고 손을 움직이신다. 그리고 다녀왔습니다, 하는 나의 목소리를 들으면 웃는 얼굴로 나를 돌아본다. 어서 오라는 대답은 해주시지 않지만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리고 다시 엄마는 고개를 돌린다. 여전히 시선은 드라마에 고정되어 있다. 엄마의 손이 바쁘게 움직인다. 이건 첫째 딸 서랍에 들어가는 것, 이건 둘째 딸 서랍에 들어가는 것, 이건 화장실에 넣어둘 수건. 따로 분류해서 정리 된 빨래가 차곡차곡 쌓여간다.

 

나는, 우리 집 서랍의 냄새를 꽤나 좋아한다. 거기서는 서랍장 특유의 냄새보다, 금방 빨아서 보송보송한 이불 속에 들어가 있는 것 같은 냄새가 난다. 냄새라기보다 향기에 가까운, 포근한 그런 향이다. 섬유유연제의 냄새. 그리고 확실하게 섞여 있는 엄마의 냄새. 좀 더 포근하고, 따뜻한, 그냥 그 자체로 엄마의 뒷모습이 떠오르는 그런 냄새, 엄마의 손을 거쳐서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는 서랍장에서는 그런 냄새가 난다. 그래서 나는 우리 집 서랍의 냄새를 좋아한다.

 

입을 옷을 찾는다는 핑계로 가만히 그 서랍에 얼굴을 묻고 있으면- 그냥 괜히, 저녁 10시가 넘은 시각에 드라마를 바라보며 빨래를 개는 엄마의 모습이 떠오르고는 한다. 나보다도 작고, 나보다도 더 마른 사람이 어두운 거실 한 가운데에 앉아서 드라마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손을 움직인다. 그 장면은 언제 바라봐도, 항상 영화관에 홀로 앉아 스크린 너머의 풍경을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항상 내가 좋아하는 얼굴이라고, 정말로 예쁜 사람이라고 말해왔던 그 사람이, 집에서 집안일을 하는 것보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모습이 더 잘 어울리는 그 사람이 나의 옷을, 내가 쓸 수건을, 내가 세탁기 안에 던져 놓은 것들을 정리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굉장히 기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이상한 장면이라고, 왠지 저 빨래들과 엄마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도 하지만 난 역시 섬유유연제의 향에 섞인 엄마 냄새가 좋다고 생각해 버리는 것이다.

 

불효,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쌓인 빨랫감, 개어서 집어넣어야 하는 빨랫감이 요즘에는 고기도 비린내가 난다고 먹지 못하는 그 가녀린 사람 옆에 쌓여 있는데, 나는 교복도 벗지 못한 채로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외면해 버리곤 했다. 씻어야지, 하고. 엄마의 손은 어찌나 빠르던지 내가 씻고 옷을 갈아입고 거실로 나오면 항상 모든 빨랫감들은 예쁘게 정리가 된 후였다. 잠옷차림이 된 나를, 엄마는 그 정리 된 빨랫감을 쥐고 스쳐지나가면서 분주하게 움직인다. 나는 그런 엄마를 잠시 눈으로 쫓다가, 다시 고개를 돌리고 컴퓨터 방으로 들어간다. 손에 쥔 오늘 입었던 반팔 티셔츠를 세탁기 안에 던져 넣고서 말이다.

 

확실히, 이렇게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매일 말라가는 모습이 걱정 돼요, 엄마, 좀 쉬면서 하세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 그저 듣기 좋은 말에 불과하게 되는 일이었다. 섬유유연제 향에 섞인 엄마 냄새를 좋아한다. 그 냄새를 맡고 있으면 마음이 굉장히 편해지는 기분이 들고는 한다. 그러면, 그렇다면.

 

이번에 빨래 개는 일은, 내가 해야겠다. 그렇게 다짐한다. 엄마께서 드라마 보시던 중간에 일어나 분주하게 움직이는 일이 없도록, 편하게 소파에 누워 끝까지 보실 수 있도록.

 

 

 

웹진 랑은 퀴어 에세이 블로그 LETSSAY의 글들을 기고받아 연재합니다. LETSSAY 블로그에서 더 많은 에세이들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달, 불, 물, 나무, 돌 다섯 레세이어들의 이야기를 기대해주세요. 

LETSSAY란? 각양각색의 다섯 명의 여성 성소수자의 솔직담백한 퀴어 생활 에세이입니다. "Let's say"와 레즈비언 에세이(Lesbian Essay)라는 의미처럼 여러분과 공감할 수 있는 퀴어풀한 에세이를 쓰고 있습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무지개문화읽기 > 렛세이LETSSAY' 카테고리의 다른 글

[LETSSAY] 11월의 렛세이  (0) 2014.11.11
[LETSSAY] 10월의 렛세이  (0) 2014.10.15
[LETSSAY] 9월의 렛세이  (0) 2014.09.10
[LETSSAY] 7월의 렛세이  (0) 2014.07.17
[LETSSAY] 5월의 렛세이  (0) 2014.05.26
[LETSSAY] 3월의 렛세이  (0) 2014.04.01

댓글을 남겨주세요

Name *

Password *

Link (Your Homepage or Blog)

Comment

Secr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