렛세이어 달

<세상에서 제일 우울한 척, 개어지지 않은 이부자리에 눕다.>


 불그스름하게 부풀어 오른 모공을 바라본다. 몇 달째 깎지 않은 손톱을 세워 털을 잡아당긴다. 씁쓰름한 기분이 들어 다시 눈을 감는다. 존재의 서러움은 몸을 불려나간다. 생의 이유는 우울도 슬픔도 아니었으나, 어떤 이유일지라도 상실은 필연적으로 외롭다. 인간은 직립보행을 함으로써 동물이 아니 기로 한 거야. 포기한 건지, 상실한 건지 우리로서는 알 수 없지만, 동물이 아니기에 찾아오는 외로움은 누구도 환영하지 않을 것이다. 존재로서 서러워지는 인간의 숙명은 털이 퇴화한다는 것을 발견 했을 때 더 더욱 심화된다. 짐승의 손톱을 세운다. 야성의 털을 일깨운다. 그럼에도 외로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스스로의 울부짖음을 잊고 조밀한 발음을 구사하라 강요당했고, 본질의 바탕을 잃도록 억지로 만들어진 이름으로 불렸다. 그리고 아무도 원하지 않을 삶을 원하는 것인 것처럼 만들어버렸다.

 

  무슨 글을 쓰려했는지 모르겠다. 무의식적으로 놀린 손가락은 느글거리는 글줄이나 찍찍 그어댔고, 욱신거리는 팔은 이유 없이 조용한 울음을 운다. 언제나 그렇듯 다시 생각 없음의 생각에 빠졌다. 이러면 안 되는데. 잠이라도 자야하나 싶다. 필사를 마치고나면 다시 글을 쓸 의욕이 날까. 이유를 불문하는 방전 위험에 노트북을 닫는다. 통증이 지속되면 그림은 그리지 말아야지. 얼마 그리지도 않은 그림에게 통증의 이유를 돌려버린다. 우악스럽게 세통의 수박을 썰어냈다. 팔이 아플 법도 하지만, 수박을 썰었다는 이유는 아닐 것이라고, 그렇게 중얼거려본다. 내가 팔이 아픈 것은 전적으로 일상의 탓. 비일상 속에서 일어난 일 때문이 아니다.


   2013년 이상 문학상 수상작이었는데,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 작품이 하나 있다. 김애란 작가의 작품인데……. 그 작품은 상실되어가는 언어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사라져가는 언어가 강하게 내리치는 폭포와도 같은 굵직한 언어로 표현 되어 있기에 더 무자비하고 폭력적이다. 작 중 주인공은 마지막 숨을 내쉬며 화자라고는 자신뿐이고, 청자는 아예 없는 서러운 울음을 외친다. 그건 주인공의 이름이었다.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그가 해왔던 말들은 모두 그의 이름이었다. 평생에 걸쳐도 부를 수 없을 만큼 긴. 그의 이름. 울음으로 시작해 울음으로 끝나는 삶. 우리는 그 이름을 다 부를 수 없어, 짧은 이름 하나를 붙인다. 석 자의 짧은 이름, 내가 짓지 않은.

 

  가수 이소라의 7집, track9에서는 비슷한 가사가 나온다, 나는 알지도 못한 채 태어나 날 만났고/내가 짓지도 않은 이름으로 불렸네. 나는 알지도 못한 채 태어나 나를 만났음에도, 내 이름은 내가 지을 수 없었다, 누가 나를 나로 만들었는지. 왜 나는 나의 이름이 되어야만 하는 지. 왜, 나에게는 한 치의 모도 없는, 평범한, 흔한 이성애자 여자로 자라리라는 기대가 담긴 이름이 붙었는지.

 

   내가 지은 이름으로 불리던 어느 비일상적인 날. 나는 과학책을 뒤적이다 찾아낸 성의 없는 닉네임으로 불렸고, 그건 내가 지은 내 이름이 되었다. 나는 세통의 수박을 썰고 술을 섞어 팔며 조금씩 취했다. 즐거운 날들이었다. 몇 시간이고 지속되는 대치상황, 그리고 완주. 그 비일상의 날은, 내가 이성애자로 오해받지 않을 수 있었던 단 하루의 날은 갔다. 다시는 오지 않는다. 즐거우면 즐거울수록 반동은 크다. 나는 사람이었고 삶을 사는 사람이 되기에 필연적으로 서러울 뿐이다. 야성의 본능은 다름을 배척하고 다름의 기준은 그 서러웁다는 사람들이 만들어낸다. 이름붙이기와 다르도록 나누기는 전혀 다르지도 같지도 않다, 내 이름은 열아홉이 되고 더 이상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다.


 




렛세이어 불

<좋은 기분이네요>


 다리 사이로 새빨간 덩어리가 떨어져 살갗을 타고 흐른다. 생각 없이 맞고 있는 물줄기가 짙은 선혈과 몸을 섞고 한데 엉기어 흐려지다 이내 소용돌이치며 배수구 구멍으로 빨려 들어간다. 습한 샤워실에 가득한 뿌연 물비린내와 섞이어 신선하면서도 역겨운 피비린내가 진동한다. 물에 젖어 늘어진 까만 머리칼이 시야를 뒤덮는다. 손가락으로 쓸어 올렸다. 질척이는 이 공간은 녹아내릴 것만 같다. 물이 모두 씻어 가버렸는지 더 이상 붉은 기가 보이지 않는다. 아랫배에 조금 힘을 주었다. 묽고 질척이는 액체덩어리가 구멍을 벌리고 쏟아지는 선연하고 적나라한 느낌에 잘게 몸서리쳤다. 다시 한 번 다리 사이로 새빨간 물줄기가 흘러내린다. 아, 이 시간이 끝나지 마라. 저절로 올라가는 입 꼬리를 느끼며 하염없이 뜨거운 물줄기를 맞고 있었다.

 

 울컥 쏟아지는 느낌에 몸서리치느라 하던 대화가 잠시 끊겼다. 의아하게 바라보는 언니에게 아. 피 쏟느라, 라며 장난스럽게 말하니 작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말마따나 나는 생리기간에 온 몸의 피에서 못해도 1/3 가량은 쏟아내는 기분이다. 기간 내내 가장 큰 사이즈의 생리대를 해도 모자랄 정도로, 피는 스며나오는 게 아니라 쏟아진다. 화장실에서 속옷을 내릴 때마다 훅 끼쳐오는 비린내와 정육점에서나 볼 수 있는 시뻘건 색은 내 온 감각을 주무르며 말초신경까지 전율을 흘려보낸다. 선지 덩어리가 뚝뚝 떨어지는 느낌은 자다가도, 말하다가도, 밥을 먹다가도, 걷다가도, 24시간 쉬지 않고 느껴지면서도 이상하리만치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또 쏟아내는 양에 비해서 생리통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한 달에 한번 날뛰는 자궁 때문에 고통 받는 주변 사람들에 비하면 축복받은 것이지만 가끔 그 고통을 모르겠어서 궁금해질 때도 있다. 생리통도 없고 생리전의 징조도 전혀 보이지 않고, 날짜도 몇 년이 지나도록 매우 불규칙해서 핏자국 때문에 버린 속옷이 한둘이 아니다. 한 달에 두 번 하기도 하고, 세달 동안 안하기도 하고, 해도 이틀 정도 만에 끝날 때도 있고, 2주내내 쏟아지기도 한다. 그래도 그 쏟아지는 엄청난 양은 항상 같은 것이라 제멋대로이면서도 일관적인 내 자궁에게 혀를 차곤 한다. 그렇다고 생리하는 것이 싫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난 이 기간을 좋아한다고 할 수 있으며 기다려지기도 한다. 아마 피어싱이나 문신을 좋아하는 이유와 같은 연장선상이리라 생각하는데, 안전이 보장된 상태에서 겪는 생소한 느낌이라고 굳이 문장으로 쓰자면, 그렇게 설명할 수 있겠다. 쉽고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평소에 남들이 다 있는 공간에서 그토록 뚝뚝 떨어지는 느낌으로 몸속의 무언가를 싸지를 수 있는 기회가 있겠는가. 그나마 가장 나은 땀이나 눈물도 남 앞에서 펑펑 쏟아 내고나면 민망함이라는 후폭풍이 덮치는데, 그런 점에서 이 생리라는 것은 합법적으로 남 몰래, 터부시되는 일을 대놓고 하는 기분이라 나는 이 현상이 참 좋다.  

 

 생리기간에는 앞서 말했듯이 생리통이나 다른 외현적 변화는 딱히 없다. 다만 이 기간에는 심한 허기가 몰려든다. 텅 빈 몸 속 어딘가가 목구멍부터 헤집는다. 먹는 양이 평소의 2배정도로 늘어난다. 아래로는 선지 덩어리를 뚝뚝 흘리면서 위로는 정신없이 목구멍과 뱃속으로 먹을 것을 집어넣고 있노라면 이 몸뚱이가 무엇을 원하는 것인지 의아스럽다. 몸속의 빠져나갈 그 어떤 것이 사라지고 남은 빈자리를 끝없는 기갈에 굶주려 하염없이 다시 채워 넣는다. 발가벗은 채 초원위에서 축축한 흙으로 나를 비비어대는 것 같은, 한없이 동물적이며 본능에 가까운 행동이라는 기분이 원초적인 욕망 앞에 나를 세워둔다. 몸에서 나갈 것은 나가고, 나는 그 빈자리를 다시 채워 넣는다.

 

 가장 은밀한 구멍에서 쉼 없이 떨어지는 핏덩어리에는 단순히 그 뿐만이 아닌 낡고 바스라지고 독기 찬 지난 기억과 시간과 감정도 섞여 빠져나가는 기분이기에, 몸뚱이가 살아있는 이 기간은 내가 다시 태어나는 듯 한, 살아있는 시간이다. 핏덩어리에는 외로움도 함께 섞이어 나가는 것이 분명하다. 내 몸의 변화 하나만으로도 벅차고 충만한 기분이 평소에 사막의 모래처럼 몰리어 오는 외로움도 모두 덮어버린다. 내 몸은 들어오지 않는 타인의 아기씨에 몸서리치지만 내 감정은 이 동물적인 선연한 기분에 완연히 충족된다. 자궁은 외롭지만 나는 내 존재 하나만으로도 육회를 잇새로 짓씹는 즐거움에 몸서리친다. 내 몸속 깊은 곳의 외로움이 내 존재의 외로움은 모두 가져가 핏덩어리로 싸지른다. 이 얼마나 역설적이면서도 즐거운 기분인지. 






렛세이어 물

<세상은 좁고, 인간관계는 어렵고, 나는 여유롭지 않다.>


 세상은 좁고, 인간관계는 갈수록 어렵고, 여유롭게 살고 싶지만 그럴 환경은 아니고. 잘 살아보겠다고 마음먹은 이십대 첫 해의 반이 이렇게 갔다. 패기 넘치던 그 처음에 잡았던 무수한 계획과 약속들은 차라리 강하게 묻고자 하는 마음이 진실한 이유다. 바쁘게 나를 재촉해야 해. 잊고 싶은 기억들이나 감당하기 힘들었던 감정들은 자고로 몸이 편안할 때 덮쳐오는 편이다. 더 바쁘게, 잠이 모자라서 지쳐 쓰러질 때까지 채찍질 하다보면 그런 건 뒤로 미루게 되었다. 애매한 사람들과 애매한 감정, 애매한 추억들은 그렇게 놔두는 게 편했다. 

   

  날 지치지 않게는 못하면서도 휴식을 갈망했다. 휴식을 갈망하면서도 넘쳐나는 시간의 무게가 겁이 났다. 방학이 두려웠다. 누군가 사라진 시간은 언제나 익숙하지 않고, 하루는 더 길게 느껴지는 법이니까. 늦은 새벽에 잠들어 아침이라고 하기에는 늦은 오전 시간에 일어났다. 배는 고프지 않아서 학기 중엔 억지로 챙겨먹었던 아침도 관뒀다. 하루를 여러 번 나눴다. 늦은 오전부터 오후 3시,4시까지. 그때서부터 저녁시간까지. 그리고 8시쯤부터 통금시간까지. 모두 다른 사람을 만났다. 그것도 아니면 차라리 길게 새로운 사람과 시간을 보내는데 열중했다. 도피와 같은 개념은 아니다. 사람들은 편했고, 좋았고, 귀여웠다. 즐거웠다. 그렇게 그냥 내내 즐겁고 싶어서 스스로에게 무자비할 정도로 시간을 나누고 먼 거리를 이동하며 약속을 잡았다. 방학인데 정말로 바빴다. 이번 주는 무차별적인 약속들로 나는 이동하는 시간을 제외하곤 남들과 함께여야 했다. 다음 주부터는 2주간 학교에서 하는 프로그램으로 기숙사에 들어가 그곳에서 짜여진 바쁜 일정에 온몸을 맡기기로 했다. 그 속에서 짜증내고 휴식을 갈망할거면서.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기를 애타게 갈구하면서.


  어떠한 무의미한 말을 쓰고 있는 건지 나도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다. 분명히 재밌었던 시간들의 집합이었는데, 충분히 지칠 만큼 이야기를 듣고 돌아다니고 나를 긴장시키고 옥죄었는데. 아마도 이제는 그냥 앉히려는 의도인가보다. 지치든 피곤하든 간에 일단 앉아서 넌 생각이나 하라는 거다. 그동안 너무 오래 피해다녔으니까 더는 시간을 못주겠다는 잔인한 처사다. 그걸 이런 무의미한 단어들의 나열로 멋들어지게 치장하고 싶었나. 아침에도 저녁에도 앉았다. 쓰잘데기 없는 생각으로 시간을 보내면 새벽 한 시, 두 시는 금방이다. 오만가지 잡생각으로 가득 차있던 머리는 하나의 길로, 가까스로 모인다. 그리고 그 때면 항상 나타나는 12월. 겨울. 손등에 닿던, 그 조심스러운 체온. 12월을 지나 치닫는 지금의 감정. 세상은 좁고. 인간관계는 어렵고. 나는 여유롭지 않다. 그 때와 똑같다. 나는 2012년에서 전혀 자라나지 않았는데 자라난 것처럼 보이고 싶었다. 아무렇지 않고 초연한 것처럼 보이고 싶었다. 그럴수록 초라해졌다. 솔직하게 인정하면 나체가 되어서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 될텐데, 그게 싫어서 억지로 옷을 누벼 입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기억들은 어딘가에 묻어두고 다른 추억들과 바쁜 약속들로 추하게 나체를 가렸다. 아무것도 아닌 인간은 곧 아무 것이라도 될 수 있는 존재를 전혀 모른채로.


  작년 4월이었나. 렛세이어 19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을 때 인연이라는 글을 썼었다. 나는 만난 사람과는 반드시 이별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별 후에는 반드시 다시 만남이 있다는 글을 아주 확신에 찬 믿음을 가지고 써내려갔었다. 열아홉 살과 스무 살의 차이, 스물아홉 살과 서른 살의 차이는 크다고 누군가 말했었나. 일 년이 조금 지난 지금, 나는 이제 그런 확신을 버린 지 오래다. 그건 정말 빨간 줄로 이어진 인연일 때나 가능한 거다. 사막에 꽂힌 바늘의 구멍에 꿰어진 실 같은 소리는 그런 실낱같은 희망만 선사해줄 뿐이다. 잔인하게 내비쳐져서 결국은 나체를 보이게 될 거면서, 나는 언제까지 이렇게 추한 두루마기 안에 몸을 숨길 건지 본인도 알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렛세이어 나무

<너랑 있으면>


고등학교 2학년. 지겨웠던 여름방학 보충수업. 학교 - 독서실 - 기숙사. 반복되는 일상이었지만, 사이사이 잠깐 쐬는 바깥 바람이 좋았다. 그 날도 어김없이 보충수업을 마치고 반 친구 K와 함께 독서실로 향하고 있었다. 워낙 길이 험해 차도 잘 다니지 않는 골목길이기에 안심하고 걸어가는 도중 뒤에서 차가 달려오는 걸 느낀 나는 K를 안쪽으로 안았다. 이어폰을 끼고 가다 놀란 K었가 무슨 일이냐는 듯 쳐다봤다. "차" 이어폰을 다시 끼워주고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길을 걸어갔다. 독서실 앞에 도착하고 K를 돌아봤을 때 무엇인가 할말이 있다는 듯 보였지만, 이내 K는 말을 삼키고 자신의 자리로 들어갔다.

 

며칠 지나지 않아 뜨겁게 타오르는 열을 식혀주기라도 하듯이 시원한 비가 쏟아졌다. 아침 일찍 나왔던 우산을 미리 챙겨나왔지만, K는 바삐 나오느라 우산도 챙기지 못했는지 교문 앞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같이 우산 쓰고 가자고 할까...하고 망설이는 찰나 K는 빗 속으로 뛰어갔다. 우리 학교 교복은 아무 무늬도, 색도 하물며 교표마저도 없는 아주 깨끗한 순백의 하얀 블라우스였기에 비를 맞으면 속옷이 비치는 것은 당연했다. 더군다나 학교 근처는 성범죄 우범지역. 위험했다. 아무 생각도 없이 K의 이름을 외치며 K를 향해 달려가 우산을 씌워주었다. "들어." 놀란 토끼눈이 되어 쳐다보던 K는 나의 화난 듯한 낮은 목소리에 지레 겁을 먹기라도 한 듯이 얌전히 우산을 들었다. 우산을 드는 것을 확인하고서 나는 내가 입고 있던 가디건을 벗어 K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그러고서는 K와 함께 우산을 썼다.


독서실 앞에 도착하자마자 가디건을 벗어 내게 돌려주려는 것을 외면하고 내 자리로 들어가 앉았다. 저녁 시간이 되었지만 아까 맞은 비때문일까 감기 기운이 오르는 지 입맛이 없었다. 같은 실을 쓰는 친구들은 다들 밥 먹으러 가서 조용해진 덕에 잠이나 잘까하고 의자를 붙였을 때였다. '덜컥-' 담임 선생님이라도 오신 줄 알고 벌떡 일어나 앉았더니 K였다. "아 뭐야. 너였어? 아 쌤인줄 알았잖아." "저기.. 우리 얘기 좀 할래?" "그냥 여기서 하지? 아무도 없는데." "옥상 가자" "아 귀찮게..." 내심 불안했다. 얘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고 그러는 건가 하고. 옥상에 올라가 테라스에 앉았다. '덜컹-' 뭐지 하고 돌아보려는 찰나 얼굴에 닿은 차가운 감촉. "뭐냐?" "감사의 인사." "아니 할 얘기가 뭐냐고." "아, 그거? 그게 말이야."


그렇게 운을 띄운 K의 질문은 나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왠지 너랑 있으면 말야.. 남자랑 있는 거 같다?" 무슨 소리냐는 듯 쳐다보자 그동안 내가 아무렇지 않게 해왔던 행동들에 대해 K는 이야기했다. 자신 말고도 많은 애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고. 그래서 반 아이들이 모이면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한다고. "애들이 너 괜히 일부러 남자처럼 굴려고 그러는 거라고 말 많이 해. 너 레즈비언 같다고." 아무리 침착해보려고 해도 머릿속이 백지장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내가 대답도 못하고 어버버거리자 K가 말했다. "너가 누굴 좋아하던 상관 없어. 그게 나라고 해도 말이야. 하지만, 정말 너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렇게 여자들을 착각하게 만들면 안 되지. 안 그래?" 어지러웠다. "넌 남자로 태어났으면 정말 여자들 많이 울리고 다녔을거야. 애들이 너 욕 하면서도 그 말 많이 해. 전에 너 사복 입고 왔을 때 모자 벗기 전까지는 다 남자앤 줄 알았다고. 너 남자이고 싶은 거야? 아니면 여자인 네 모습이 싫은 거야?" ...글쎄. 그런 건 아닌데. 남자이고 싶은 것도, 여자인 내가 싫은 것도 아닌데. 그저 그냥 그게 편하고 당연했던 건데.. 

 

"아까 우산도, 가디건도 정말 고마웠어. 순간 정말 남자라고 착각할 뻔 했다니까. 남자였으면 정말 나라도 반했을 것 같아. 왜 네가 남자가 아닌 지 조금은 아쉽다는 생각을 하는 나를 보면서 좀 당황하기도 했고.." 그저 헛웃음이 나왔다. "너 여자 좋아하지? 저번에 났던 소문. 전부가 거짓은 아닌거지?" ...나는 말없이 끄덕였다. "어떤 여자든, 아마 좋아할거야 너라면. 행운을 빌어줄게. 이성애자인 나 역시, 너랑 있으면 왠지.. 너라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한 거 한 두 번 아니니까. 좋은 사람 만나길 빌어줄게. 가끔은.. 연애상담도 좋으니까 그렇게 끙끙 앓지 말라고. 너라면 왠지 그런 이야기들도 재밌을 것 같거든. 그럼 가디건은 내일 빨아서 갖다줄게. 잘 입었어. 나 먼저 내려갈게. 몸 조리 잘하고!"


그렇게 K는 자신의 자리로 내려가고 나는 한참 동안이나 자리에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나라서 괜찮다는 말. 나랑 있으면 어떠하다는 말. 왠지 기분 좋은 말인 것 같다. 그 일이 있고 3년이 지난 지금도 종종 연락하며 우리는그런 이야기를 꺼내며 웃고는 한다. 고마워 K.


 




렛세이어 돌

<학교매점에서 여자 얘기>


 나는 석식 시간 때가 되면 항상 매점에서 시간을 보내고는 하는데, 그곳에서 친한 오빠가 알바를 뛰고 있기 때문이다. 8교시나 석식 중에는 학생들도 한창 방과후 학습을 뛰거나 석식을 먹고 있는 중이라서 항상 학생이 미어터지는 매점이라도 텅텅 비어있고는 하는데, 그곳에서 오빠랑 나랑 둘이 만담이라도 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은 오빠랑 친해진 것보다도, 오빠의 전 여자 친구와 먼저 친해졌다. 내 친구는 처음 보는 사람이건, 원래 친한 사람이건 모두에게 친근하게 대하는 아주 개방적인 성격인데, 처음 그 오빠랑 말문을 트게 된 것도 그 아이 때문이었다. 특유의 제스쳐로 팔랑팔랑 거리면서 매점을 돌아다니다가 매점 직원 한 분의 눈에 띄어서 매점오빠한테 서비스로 과자 가져다 달라고 시켰더랬다. 그렇게 해서 처음 만났는데, 그 오빠 스타일이- 이리 보고, 저리 봐도 락앤롤, 이모펑크, ‘락 이스 네벌 다이’라도 외치고 다닐 것 같은 스타일이 아니던가. 아무리 매점 알바생이라도 그렇지, 학교에 있는 매점이거늘 노랗게 물든 머리칼은 길러서 눈을 가린 채로 하나로 묶여 있었다. 원래가 펑크룩 좋아하는 나였기에, 괜히 친근한 마음이 들었던 것 같다.


 그렇게 친구랑 둘이서 석식 먹고 나서 항상 매점으로 찾아가 거기에 죽치고 앉아 놀았다. 야자도 몇 번 빼먹고 셋이 놀러 나가기도 했다. 그 오빠는 양아치 같이 생긴 주제에 또 멍청할 정도로 착한 사람이라서, 나나 친구가 우울해 할때마다 항상 우리한테 끌려 다니고는 했다. 그리고 우리 학교와 같은 재단의 학교이기도 하고, 내가 졸업한 학교이기도 한 중학교의 밴드 교사로 무대를 준비할 때도, 이것저것 도와주기도 했다.


 그러다가 그 오빠의 전 여자 친구를 만났다. 오빠가 하도 나보고 여자 친구랑 취향이 똑같다고, 진짜 비슷하다고 하기에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싶었는데, 진짜로 예쁜 사람이었다. 예뻤고, 오빠가 했던 말대로 나랑 취미와 취향이 똑같아서 말도 잘 통하는 사람이었다. 오빠의 여자 친구를 처음으로 만나고, 전화번호를 교환하면서 나는 오빠보다도 그 언니와 더 친해졌다. 그때까지는 오빠랑 주말에 만난 적이라곤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언니랑 단 둘이서 홍대와 동대문에 놀러가기도 하고, 둘이서 촬영을 하러 가기도 했다. 그렇게 오빠의 여자 친구랑 친해지고 나니, 자연스럽게 오빠와의 사이도 더 가까워졌다. 그 때 나와 오빠의 주 대화 주제는 ‘오빠 여자 친구인 언니가 예뻐. 몸매도 좋아. 오빠 좋겠다.’였다.

 

 오빠랑 여자 얘기를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오빠의 여자 친구 얘기부터. 그리고 오빠네 커플이 깨졌고, 그로부터 3달쯤 후에 나도 깨졌다. 헤어지는 단계에 있어서 화가 나는 일이 많았는데, 그걸 오빠한테 하소연 하다가 얼떨결에 ‘언니’라는 호칭을 사용해버렸다. 그대로 패닉상태가 와버려서, 카톡방도 나가버리고 그저 자책만 하고 있었는데, 오빠 반응은 의외로 담담했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고 말이다. 그날 이후로는 둘이서 하는 대화 사이에 있던 어떠한 벽 같은 것이 완전히 허물어져버렸다.

“아, 가슴 큰 아가씨 만나고 싶다.”

“나도. 가슴 큰 언니 좋지, 뭔가, 가슴이 크면- 아, 이렇게 폭 안기고 싶어.”

“으흐흐. 위험발언, 위험발언.”

“왜, 음- 가슴 큰 언니들은 백허그 하는 것도 좋아.”

“아, 그렇지, 그렇지.”

“근데 사실, 그, 명대사 있잖아. 큰 가슴은 안기고 싶고 작은 가슴은 안아주고 싶다고.”

“어쨌든 좋다는 거네.”

“하지만 난 가슴 큰 언니가 좋아.”

“네가 없어서?”

“죽을래? 아씨, 남자한테도 A컵 B컵 달아야해.”

“설마-.”

“트위터에서 본 건데, 막 여자들도 남자들 쓱 보고 ‘아, 뭐야. A컵이잖아?’ 하고.”

“난… A컵은 아니겠지.”

“내가 어떻게 알아.”


 주 대화 주제는 둘 다 외로운 솔로임으로 가슴 큰 언니 보고 싶다는 것. 그 다음은 오빠가 바텐더로 일하는 바에 오는 예쁜 언니들에 대한 이야기와 오빠의 ‘이 아가씨가 찾아왔는데 엄청 예뻐서 놀랐거든? 그런데 가슴이- 응.’하는 일방적인 자랑. 그리고 빨리 대학생이 되고 싶다는 나의 짜증 섞인 한 마디. 거기다가 나랑 오빠는 좋아하는 여자 스타일이 상당히 비슷해서, '오- 맞아, 그런 거 좋아.'하며 고개를 끄덕이다보면 한없이 이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대화를 하다보면 처음 오빠와 친해지게 된 계기를 만들어준 친구가 좀 느지막하게 매점 안으로 들어서다 우리의 대화를 듣고는 민망하다며 돌아선다. 나와 오빠는 걔한테 변명이라도 하려 쫓아 나서고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나는 석식을 먹으러. 다시 내일 봐, 하고.


 내일이 되면 또 다시 아슬아슬한 대화를 이어간다. 오늘은 또 어떤 예쁜 언니가 바에 왔었어? 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말이다.



웹진 랑은 퀴어 에세이 블로그 LETSSAY의 글들을 기고받아 연재합니다. LETSSAY 블로그에서 더 많은 에세이들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달, 불, 물, 나무, 돌 다섯 레세이어들의 이야기를 기대해주세요.  




LETSSAY란? 각양각색의 다섯 명의 여성 성소수자의 솔직담백한 퀴어 생활 에세이입니다. "Let's say"와 레즈비언 에세이(Lesbian Essay)라는 의미처럼 여러분과 공감할 수 있는 퀴어풀한 에세이를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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