렛세이어 달, 똑같은 목도리들.

 

  아무렇지도 않게 비가 내린다. 이렇게 성긴 눈발은 비라는 이름이 붙어 마땅하지 않을까. 미적지근하고 메마른 위성도시에 비슷비슷한 눈이 내린다. 눈은 딱딱한 아스팔트를 적시지도 못하고 녹아내린다. 진눈깨비는 눈이 아니래, 어느 어린 기억. 마른 눈발은 점점 더 굵어져만 간다. 버스 창밖으로는 우산 하나를 나눠 쓴 세 명의 여자들이 보인다. 촌스럽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새빨갛게 칠한 입술은 지나온 세월을 가려주지 못한다. 나는 눈을 맞이하며 마른 입술을 뜯는다.  

 

  추위는 무섭지 않다. 무서움, 공포, 두려움, 기피, 포외, 불안. 무서움과 비슷한 말들을 나열해본다. 추위라는 말에 붙기엔 무겁지 않은가, 그런 생각을 한다. 그런 무거움이 어색해서 나는 추위를 타지 않는다. 패딩은 올 겨울 내내 옷장에서 숨을 죽였다. 작년 늦겨울 선물 받은 털장갑은 포장만 뜯긴 채 서랍장에 처박혀 개시도 하지 못했다. 하물며 목도리는, 아예 없다.

  

  어릴 때부터 목에 무언가 닿는 것을 불편해 했다. 머리카락이 거슬려 항상 단발을 했고, 그때만 해도 꼭 써야만 했던 미사포도 목에 닿는 느낌이 싫어 쓰지 않았다. 털목도리의 까슬한 질감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얼굴을 덮지 않으면 목도리는 질질 흘러내렸고, 얼굴을 덮으면 그건 그 것대로 불편했다. 비염이 있어 코로 숨을 쉬는 게 어려웠기 때문에, 입을 덮으면 금방 숨이 찼다. 또, 목도리에 갇힌 입김은 안경을 뿌옇게 흐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별로 다를 것 없이 지난 지금도 목도리를 두르지 못한다.

 

  목도리를 두르지 못하는 나는 목도리를 풀리지 않게 잘 매는 편이다. 잘 매는 편이라기 보단 잘 매주는 편이다. 자주 매주는 편이다. 모양새는 엉성하지만, 자주 부탁을 받는다. 긴 쪽과 짧은 쪽을 나누고, 매듭을 짓고, 남은 것들은 목에 둘러가며 여민다. 얼굴을 반쯤 덮도록 올린 다음, 귀 뒤로 손을 넣어 머리카락을 빼준다. 다 됐어, 목도리를 한 번 더 다듬어 주고 손을 떼면 끝이다. 내가 목도리를 둘러주는 그 녀석들은 형형색색의 목도리를 가지고 있다. 조금 어두운 청록색, 엷은 미색, 눈이 아프리만치 강렬한 빨간색, 무난한 청회색. 여러 목도리를 다 똑같은 모양으로 만들어 버리고 나면, 형형색색의 목도리는 모두 다 똑같아 보인다.

 

  물밀듯이 밀려오는 인파를 거스른다. 카키색 야상이 하나, 둘, 셋, 넷. 빨간 목도리가 셋, 검은 칼라의 미색웃옷이 다섯, 일자 앞머리에 가슴께 까지 오는 검은 머리가 일곱, 검은 백팩이 넷, 둥글고 큰 뿔테안경이 둘, 조금 밝은 갈색머리가 셋. 시선을 돌릴 때마다 비슷한 스타일들이 눈에 띈다. 지하에 가득한 먼지 냄새에 비슷비슷한 체취가 섞여 멀미를 일으킨다. 사람들, 진짜 몰개성 하구나. 속으로 생각하다가, 직접 소리 내어 말해본다. 사람들. 진짜. 몰개성 하구나. 스쳐지나가던 사람 몇몇이 나와 눈이 마주친다. 어쩌면 자격지심에 착각한 것일지도 모른다. 똑같이 몰개성한 차림의 내가 다른 사람들이 몰개성하다는 생각을 한다는 것을 자조해본다.

 

  야, 추운데 목도리라도 좀 하고 다녀. 등굣길에서 만난 친구가 내 가슴팍을 때리며 말했다. 그 녀석의 목에도 겨자색 목도리가 둘러져 있었다. 나는 희게 웃었다. 녀석이 목도리는 다른 모양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 목도리마저도 똑같은 모양으로 만들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비슷비슷한 목도리를 더 비슷하게 만들고 싶다는 생각. 몰개성함을 비판한 몰개성한 내가 몰개성을 보편화 시키고자 한다. 꼬인 문장들을 되뇌며 등교를 했다.

 

  그러고 보면 꼭 목도리를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조금 짧은 워머를 한 철 내내 하고 다녔던 적이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석과 조합되어 한낱 베게에 불과하게 되었지만, 자전거를 타면 차고 건조한 공기가 호흡기를 파고들었기에 어쩔 수 없이 두 번 꼬인 워머를 맸다. 몰개성의 대열에 합류했다는 것이 완전한 사실인 것이다.

  

  이번 눈은 습설, 우산을 쓸 만한, 비 같은 눈이라고 한다. 비슷비슷하게 생긴 검은, 빨간, 남색 우산에 쌓이는 눈들을 보며 또다시 입술을 뜯는다.

 

  

렛세이어 불 , 악순환의 계절

 

  낡은 벽돌 틈으로 깊게 쌓인 눈은 어느새 질퍽거리는 회색 결정으로 변해 있었다. 길가에 드문드문 켜진 때 묻은 가로등들이 저마다의 영역을 흐릿한 주황빛으로 물들였다. 가로등 발치에 쌓인, 아니 쌓였다기보다는 뭉치고 녹고 얼고 행인들의 발에 채이기를 반복한 눈 더미들은 본연의 색이 무엇인지 생각나지 않을 정도의 오묘한 색을 가지고 있었다. 흐릿한 가로등 불빛의 경계 안에 발을 들이고 잠시 그 오묘한 색을 바라보았다. 이들도 얼마 전에는 공중에서 하늘거리며 누군가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첫눈이었을 것인데, 지금은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쓰레기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이대로 녹아버리면, 눈은 누군가가 잠시 설레어 했던 마음만이 그 존재의 증거가 되겠지.

 

  눈은 나와 누군가의 만남인 것 같다고, 그래서 생각한다. 처음 오는 눈은 그저 아름답다. 세상에 이들보다 더 하얀 것은 없을 것 같다고, 어디부터인지 모를 그 높은 곳에서 떨어져 팔랑거리는 그것들은 마치 살아있는 존재마냥 모든 것에 큰 의미를 쥐어준다. 그것은 겨울의 시작인 것 같기도 하고, 보고 싶은 누군가를 떠올리게도 하고, 괜스레 마음을 들뜨게 해서 모두 바보처럼 눈 내리는 하늘만 고개 들어 바라보게 한다. 지금 첫눈이 와요! 그런 즐거운 어투의 글귀들이 온갖 sns에 도배되고, 막 쌓인 눈에 발자국 몇 번 찍고, 손끝에 차가운 촉감을 새기고, 그러고 며칠이 지나면, 눈은 그냥 눈이 된다. 시간이 의미를 빼앗고 그냥 눈 그 이상 이하도 아니게 되는, 그래서 부질없고 서글프다. 그러다 보면 이제 이놈의 눈 언제 녹나, 보도블록에 질척이는 회백질의 덩어리들로 전락했다가, 그리고 아무도 눈길 주지 않고, 그리고 사라지고.

  

  나도 너를 처음 봤을 때는 첫눈 보듯이 설레어했었다. 심지어 우리는 그때 손잡고 첫눈도 함께 보았던 것 같다. 보기만 해도 행복했다가, 만지면 심장이 터질 것 같고, 껴안으면 머릿속이 멍해져서 네 숨소리밖에 들리지 않았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되돌아보니 내가 지금 바라보고 있는 가로등 발치의 잿빛 눈 더미가 돼 버린 것은 도대체 왜일까. 그 생각은 되새김질 하면 할수록 서글프고 아련하고 그리우면서, 처음의 마냥 희었던 빛을 떠올리게 한다. 지금 내가 슬픈 건지, 슬픈 척 하는 건지, 네가 보고 싶은 건지 그저 먹먹해지는 가슴팍에 응어리진 울렁이는 느낌은 딱히 무어라 정의할 수 없는, 녹아 질척이는 이 눈덩어리의 색깔 같다. 처음은 설레고, 쌓이면 행복하고, 녹으면 서글프고, 사라지면 기억나는, 그리고 다시 오기를 기다리게 되는 이 현상은 겨울마다 맞이하는 악순환이다.

  

  차가워진 손끝이 더는 못 견딜 정도로 시리어서, 가로등 불빛 밖으로 걸음을 떼었다. 새벽녘의 도시는 잠시 멈춰있다. 눈도 녹기를 잠시 멈추고 길가 구석진 곳 여기저기에서 죽은 듯이 잠들어있다. 해가 뜨면 다시 녹을 텐데, 녹아가는 눈들은 차가운 달과 따뜻한 햇볕 중에 무엇을 기다릴까, 그런 쓸데없는 의문이 들었다. 질척이는 도로의 눈들 때문에 자전거를 타기에 부담이 갔다. 그래서 빨리 녹았으면 하는 마음은, 떠올릴 때마다 불편해지는 마음 때문에 어서 잊히기를 바라는 너에 대한 추억과 닮았다. 하지만 모순적인 나는 네가 완전히 내 속에서 잊히기를 바라지 않고 있음을 안다. 눈이 녹고, 새로운 눈이 또 오면, 학습 능력 없는 나는 그저 또 설레어할 것이다. 이 손 시린 계절은 마주하면 슬프고 오지 않으면 기다려지는 암울한 악순환이다.

   

 

렛세이어 물, 후회

 

  나는 길다란 목도리에 로망 같은 게 있었다. 그래서 재작년 크리스마스쯤이었나, 블로그에 내가 사고 싶은 것의 목록을 몇 개 적어 올렸다. 원래 시답지 않은 글들로 블로그를 가득 매워놨기 때문에 그 목록도 별 생각 없이 쓴 글이었다. 며칠 후, 그녀와 나는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하게 됐다. 처음 만나고 난 이후로 가지 못했던 서울 나들이. 체험 전시를 마치고 나와 저녁을 급하게 먹고 나서 그녀는 내게 그래도 나름 기념일인데 뭐 가지고 싶은 게 없냐고 물었다. 나는 아직도 스스로 이해가지 않는 미안함 때문에 괜찮다고 말했다. 사줄게, 아냐, 괜찮아, 집에 들어가면 뭐라 변명할 수도 없고, 그렇게 나는 그날의 즐거웠던 추억만 가지고 지하철을 탔다. 이상한 느낌이었다. 그냥, 이럴 수 있는 날이 마지막일 것 같은. 나는 그 지하철 안에서 자꾸만 슬퍼졌다. 그녀는 기분이 안 좋아? 안 좋아 보여. 하고 내 얼굴을 살피며 물었고, 사실 따지고 보면 슬플 거 하나 없던 나는 슬픈 기분을 탈탈 털고 아니~, 기분 좋은데? 하고 웃으면서 말했었다.

 

  아침부터 그녀와 하루 종일 있을 수 있었던 그날은 내 생애 최고로 기분 좋은 날이자, 그리고 가장 후회되는 날이 되고 말았다.

 

  한 달 후, 그녀와 나는 그 데이트를 마지막으로 헤어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내가 가지고 추억할 게 있으면 좋을 텐데 나에게는 남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녀가 예전에 선물로 줬던 펜 3자루 이외에는.

 

  작년 내 생일, 그녀와는 친구 사이로 아직 연락을 계속 하고 있었다. 내 쪽에서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 한 채로. 수능이 얼마 남지 않아 우리는 바빴었고, 솔직히 말해 나는 그녀가 내 생일을 기억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난 그냥 친구일 뿐이었으며, 그녀와 사귀긴 했어도 내 쪽에서 일방적으로 좋아해서 고백해서 사귄 그런 케이스였기 때문에 (게다가 깨진지도 오래돼서), 즉 그녀에게 나는 아무런 특별한 인연이 없는 그런 사이라고 생각해서 그랬다. 그런 사이라도 생일정도는 기억해, 하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기억력이 꽝인 나는 그게 무리라고 생각됐다.

 

  어쨌든, 별 기대도 하지 않고 있었던 차에 그녀가 12시에 생일을 축하한다고 문자를 보내줬다. 고작 문자에 감동한다고 비난하기에 나는 그 때 너무 행복했었다. 수능이 앞에 있으니 선물은 시험 끝나고 주겠다는 그녀의 말에 나는 기다리겠다고 그랬다.

 

  ‘뭐해줄까, 뽀뽀해줄까?’

 

  글쎄, 지금 생각하면 너무 지독하다. 여전히 미련이 남아있는 사람에게 그런 선물은. 나야 좋지만 싫어하는 거 굳이 안 해도 괜찮다고 하자(그녀는 스킨십을 싫어한다.) 그녀는 왜 그러냐며 해주겠다고 그렇게 말했었다. 또 이 글을 쓰고 있는 시점에서 그 때를 생각하자 그녀는 농담일 수도 있었겠다. 이걸 심각하게 물고 늘어지는 내가 한심하기도 하다. 아주 멍청했다. 하지만 나는 목도리 때를 떠올리며 그녀는 충분히 기억할 거라고 믿었다. 고3 때 마지막으로 만날 때까지는 먼저 손도 잡아줬던 그녀라서 아직 스킨십은 괜찮은가, 하고 농담이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괜히 설레 했다.

  

  하지만 수능이 끝나고 다시 만나게 되자, 목도리와 같은 일은 다시없었다. 사람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 하는 경향이 있고, 즉, 기억하고 싶지 않거나 그닥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건 기억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녀도 그랬다. 나는 더 이상, 아니 어쩌면 원래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그녀에게 있어서 기억할 만한 중요성을 지니고 있지 않은 사람이다. 그걸 인정하려고 애썼지만 이상하게도, 그럴 때마다 스스로 부정하고 싶어져 그냥 생각을 멈춰버리게 된다.

 

  나는 이제 길다란 목도리 3개가 생겼다. 그러나 기분은 여전히 씁쓸하다.

   


렛세이어 나무, For

 

  For 미국·영국 [fə(r)강형fɔ:(r)]

 

  1. (…가 갖게 하기) 위한, …의, …에 둘 2. (…을 돕기) 위해 3. …에 대해

  

  요리라는 것은 항상 아끼는 사람을 위해서 하게 된다. 사랑하는 연인이나, 가족 혹은 친구, 마지못해 나 스스로라도 말이다. 그래서 흔히 하는 프러포즈 중에 "너의 된장국을 매일 아침 먹고 싶어." 라던지. "매일 맛있는 저녁밥을 해줄게." 라는 멘트들이 존재하기도 하고 말이다. 요리를 개인적으로 좋아하고 꽤나 많이 해왔던 나는 그동안 누군가에게 해주기만 했었다. 그래서 은연 중에 언젠가 내 여자가 싸준 도시락을 먹고 싶다는 생각, 누군가가 나를 위해 요리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른다. 늘 말로는 "내가 요리를 잘 하니 넌 안 해도 되. 내가 먹여 살릴게."라고 했지만, 서툰 솜씨라도 나를 위해 요리해주길 바랬던 걸지도 모른다.

  

  작년 연말 데이트 전 그녀의 선전포고. "도시락 싸갈게!" ... 나도 모르게 두근거리고 설레는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내 여자의 나를 위한 요리라.. 그녀 역시 누군가를 위해 도시락을 싸보는 건 처음이라고 그랬었다. 걱정도 되고 기대도 되고. 뭔가 마치 처음 데이트하던 날의 느낌 같았다고나 할까. 평소보다 훨씬 설레이는 내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헤헤헿 거리면서 바보 같은 웃음을 지우지 못했다. 아침부터 그녀가 준비해온 도시락을 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데 뭔가 감정이 벅찼다는 것은 이제서야 밝히는 비밀. 다 먹고 싶었지만.. 양이 너무 많았,.. 그래도 진짜 맛있게 먹었다. 그녀가 해주는 것이 뭐가 맛있지 않겠느냐만은 정말 내 취향대로 해줘서.. 그저 행복했다는.

  

  실은 온전히 누군가를 위해 요리한다는 것은 상대의 취향을 알고, 그 사람의 입맛과 식성을 고려하며 알러지 유무까지 파악해야하는 것이기에 정말 까탈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요리가 결혼의 전제조건이 되는 것이기도 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항상 요리를 하면서도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위할 때 더 정성을 기하게 되고 맛을 내고 건강한 요리를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당연한 일. 인공 조미료를 넣지 않기 위해 다른 것들을 이것저것 해보고, 알러지가 있는 식재료의 맛을 대신 하기 위한 고민을 하고. 조금 더 예쁘게 보이기 위해 고민하게 되고, 그것이 진정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는 요리가 아닐까 한다.

  

  고기를 한 번 구워도 탄 부분이 없었으면 하는 마음에, 조금 더 맛있게 구워졌으면 하는 바람에 심혈을 기울이게 된다. 겨우 고기를 불 위에서 구울 뿐인데 말이다. 야채 하나를 다듬어도, 혼자 먹으면 대충 그냥 먹을 것도 하나하나 도려내고 준비하게 되고, 조금 더 깨끗하고 조금 더 꼼꼼하게 씻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서 봐주면서 쫑알거리는 게 좋으면서도 다치지 않길 바래서 괜히 멀리 가 있으라고 짜증을 부리기도 하고 요리라는 게 그래서 좋은 것 같다. 온전히 누군가를 위할 수 있는 시간이니까.

  

  앞으로 돌아오는 발렌타인. 그녀는 내게 쿠키를 구워줄거라고 한다. 음.. 나는 초콜렛을 만들어줄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애인을 위해 만들어보는 게 처음인지라,걱정이 된다. 뭘 해주면 좋을까. 단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커플이라 고민이 아직 되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달콤한 초콜렛이라. 가끔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이런 상술에 넘어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렛세이어 돌, 생각하는 것을 포기하다.

 

  나는 어릴 적부터 생각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나는 정말이지 수동적인 사람이다. 겉으로는 자유롭고 싶어 하고, 규칙에 얽매이는 것을 지독히도 싫어하는 척 하면서도 막상 내게 자유가 주어지면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그런 사람이다. 내가 무언가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 무서웠고, 두려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어떠한 주장을 함으로써 누군가가 상처를 받을까봐, 내가 무언가를 망쳐 버릴까봐 선뜻 내 생각을 말할 수가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지나칠 정도로 쿨한 사람’ 또는 ‘짜증날 정도로 우유부단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착한 아이. 그 말에 대한 내 솔직한 감상을 얘기하자면, 착한 아이란 그저 타인의 말을 잘 들을 뿐인 인형이라는 것이다. 인형. 인형이다. 사고를 포기해버린 인형이다. 불만이 있어도 말하지 않고, 감정을 들어내지도 않으며, 그저 활짝 웃으면서 남이 시키는 일을 하는 인간의 모습을 한 다른 무언가다. 나는 착한 아이였다. 나는 잘 울지도 않았고, 대들지도 않았으며, 아프다고 조퇴를 하거나 결석을 한 적도 없는 성실하고 착한 아이였다. 엄마께서 주신 선택의 기회에 당황해서 어찌해야 할 지 갈피를 못 잡던 사고를 포기한 아이였다.

 

  어렸을 때, 나는 엄마의 ‘네가 알아서 해.’라는 말이 너무 싫었다. 놀이터 갔다 와도 괜찮은지 물었을 때도, 친구랑 집 근처에 있는 한강으로 가서 자전거를 타고와도 괜찮은 거냐고 물었을 때도 엄마는 항상 내게 ‘네가 알아서 해.’라는 말만 하셨다. 그리고 내가 한참이나 자라고 나서 엄마께 왜 항상 그런 식으로만 대답했냐고 물었을 때, 엄마가 내게 한 대답은 그저 ‘나는 네게 선택의 기회를 주었을 뿐이야.’였다. 그것뿐이었다. 어릴 적 나의 질문에 엄마의 심기를 거스를 만한 요소는 하나도 없었고, 오히려 엄마는 딸이 스스로 무언가를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렇게 대답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나에게는 그것이 마치 벌처럼 느껴졌었다. 내가 엄마 없이 아무 곳에나 돌아다닌다고 화를 내시는 건 줄로만 알았다.


 사고를 완전히 포기했던 어릴 적의 나는 심지어 내가 받아야 할 선물을 골라야할 때도 제대로 말을 하지 못했다. 지금의 나는 조금도 기억나지 않은 아주 어릴 적의 나를 데리고 고모께서 인형가게에 간 적이 있다. 고모는 내게 인형을 하나씩, 하나씩 보여주시며 어떤 것이 마음에 드는지 물었다. 그러나 나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에 고모께서 마음에 드는 인형이 없었는가 보다, 하며 나를 데리고 집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그때서야 내가 울었다고 한다. 사실은 그곳에 있던 토끼 인형이 마음에 들었었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고.

 

 중학교에 올라와서야 나는 처음으로 스스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것은 그저 단순하게 엄마가 시키던 문제집 풀기만 하다가 자기주도 학습을 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중학교에 와서, 나는 처음으로 엄마께 싫다는 말을 내뱉었다. 그 때의 나는 남자친구가 생겼다며 내게 자랑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같은 반 여학생을 짝사랑 하고 있었고, 오늘 엄마랑 싸웠다며 화를 내는 친구들의 대화에 혼란스러워 하고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가 왜 착한 아이로 있어야 하는 가에 대해서 의문이 들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엄마의 요구를 들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되었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엄마께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 엄마께 소리를 질러서 좋은 꼴을 본 것은 아니다. 나는 그 때 아빠께 엄청 혼났다. 아니, 혼났다고 하는 것에는 조금 어폐가 있을 지도 모르겠다. 나는 부엌 식탁에 앉았다. 아빠와 엄마는 나의 반대쪽에 앉으셨다. 그리고 부모님은 내게 물으셨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거냐고, 뭘 원하는 거냐고. 말해보라고. 엄마와 아빠는 너를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도대체 뭐가 불만이기에 이러는 거냐고. 나는 그 순간 생각했다. 내 생각을 이야기 해봤자 좋을 일 하나 없고, 그저 지금의 행복한 생활을 망칠 뿐이구나, 하고.

 

 중학교 때, 아주 잠깐. 아주 잠깐 생각을 했던 나는 다시 생각하는 것을 그만 뒀다. 흘러가는 대로 흘러왔다. 특별히 친구와 크게 싸우거나 친구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여러 사람과 모두 친한 것도 아닌 평범한 교우관계에, 수업이나 야자를 빠진 적도 없고 성실하게는 하지만 그렇다고 열심히 하는 것도 아닌 학교생활을 보내며 살았다.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살다가 주변사람들에게 핀잔을 듣기도 하고, 왜 그런 것도 기억 못하냐며 사소한 것에서 친구들의 장난스런 짜증을 듣기도 하면서, 그렇게 살았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다. 나는 이렇게 사는 것이 좋았다. 매일 매일이 행복한 일로 가득 차있고, 이대로만 살아간다면 나는 이 행복을 유지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생활에 아주 만족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최근 ‘생각’을 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나를 가장 사랑하고 있는 줄만 알았던 사람은 알고 보니 겉으로만 착한 사람이었다. 겉으로만 좋은 사람이었다. 겉으로만 나를 가장 사랑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것을 알았을 때 느낀 것은 배신감이 아니라 허탈함이었다. 나는 들리는 대로 믿는다. 아무리 확실한 증거가 있다고 할지라도 상대방이 부정하면 그런 줄 아는 멍청이다. 그리고 내가 그것을 믿고 있는 동안에는 제 3자가 아무리 애를 써도 쉽게 그 믿음이 부서지지 않는다. 그 믿음이 잊혀지는 일은 생길지 몰라도, 그 믿음이 부서지는 일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 나는 그런 멍청이다. 생각을 포기했기 때문에, 의심하려 들지 않는 것이다.


 그에 나는 지금 너무나도 후회하고 있다. 지금의 감정을 솔직하게 말하자면 놀이공원에 가자는 누군가의 말을 철썩같이 믿고 따라갔다 주사만 맞고 온 기분이다. 그리고 그제야, 모든 일이 다 일어나고 나서야 ‘아, 지난번에도 이런 일이 있었지.’하며 떠올려버린 그런 허탈하고 분한 기분이다. 나는 어쩌면 이렇게나 학습 능력이 떨어질까, 자신이 지독히도 싫어져 버리게 될 정도로 허탈하고, 분하고, 괜히 억울하다. 나는 생각했어야만 했다. 그저 의심하는 게 싫다고 가만히 앉아서 흘러가는 것을 바라보며 믿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믿어도 될까? 하며 생각을 했어야만 했다. 그러나 나는 하지 않았다. 하지 않아서, 생각하지 않아서 또 다시 사람한테 속아 넘어갔다.

 

 야, 우리 영화 그냥 디지털로 볼래, 아니면 4D로 볼래?


 그러나 방금 전까지 ‘생각’하기로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또 다시 생각하기를 포기하고야 만다.


 글쎄, 아무거나. 네가 좋은 걸로 해. 대신 네가 쏴.


 자신의 이익을 생각하는 척, 뻔뻔한 척, 상대를 향해 지나칠 정도로 웃으며 선택을 떠넘긴다. 생각하는 것을 그만둬버린다. ‘생각’해야지, 하고 ‘생각’한지 3초 만에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고, 또 다시 ‘생각’하기로 마음먹는다. 그것의 연속이다.


 나는 도대체 언제쯤이면 이 나쁜 버릇을 버릴 수 있는 걸까. 아니, 솔직하게 말해서 말만 버리고 싶다 얘기하는 것은 아닌지, 속으로는 이 것에 대해 깊게 생각하는 것을 또 포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



웹진 랑은 퀴어 에세이 블로그 LETSSAY의 글들을 기고받아 연재합니다. LETSSAY 블로그에서 더 많은 에세이들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달, 불, 물, 나무, 돌 다섯 레세이어들의 이야기를 기대해주세요.  



 


LETSSAY란? 각양각색의 다섯 명의 여성 성소수자의 솔직담백한 퀴어 생활 에세이입니다. "Let's say"와 레즈비언 에세이(Lesbian Essay)라는 의미처럼 여러분과 공감할 수 있는 퀴어풀한 에세이를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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