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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문화읽기/렛세이LETSSAY

[LETSSAY] 10월의 렛세이

by 행성인 2014. 10. 15.

렛세이어 달

가느다란 담배, 가느다란 손가락.

세상에는 너무 슬픈 삶을 살아야 했던 사람들이 많다. 묻혀갈 인생을 노래한 김광석, 빈집에 갇힌 기형도, 가느다란 담배와 그처럼 가느다란 손가락을 가진 윤여정. 왜 타인의 삶은 슬프게만 보이는지. 당장에 고개를 쳐들면 빽빽이 들어앉아있는 고삼들이 보인다. 그네들의 삶은 왜 그렇게 슬플까. 아니, 나는 왜 슬프다고 느끼고 있을까. 어쩌면 내 삶을 가엾게 여기지 않기 위해, 타인의 삶을 동정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 슬픔들은 정당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부당하다고나 할 수 있을까. 전적으로 내 감정이지만, 타인의 삶은 슬프기 그지없다.

그 슬픔이 섹시해보일 때가 있어. 윤여정의 손가락에서 피어오르는 담배연기. 윤여정과의 인터뷰를 정리하던 한 기자는, 슬프기만 했던 그녀의 삶을 간결한 문장으로 표현해냈다. 가느다란 담배, 가느다란 손가락. 그녀의 손가락을 누가 가늘게 만들었는지. 그 가는 손가락은 왜 아름답게 가는 것이 아닌 슬프게 가는 것인지. 물론 답은 명명백백히 드러나 있다. 아직 어린 윤여정을 미국으로 데려가 반쯤 가둬놓고 더 좋은 여자가 생겼다며 이혼을 요구했던 조영남. 13년을 같이 살아놓고도 자신의 재기를 위해 그녀를 철저히 짓밟은 사람. 어느 만화의 대사처럼, 왜 여자에게는 항상 파리똥처럼 골치 아픈 좆들과의 사랑이 수반되어야하는지. 적어도 남자와 사랑할 일은 없다는 점에서, 그나마 선천적으로 구차함을 덜 탑재하게 된 입장에서 보았을 때 윤여정의 삶은 너무나도 슬프다. 섹시할 만큼.

윤여정 선생님이라고 하는 게 맞을까? 아쉽지 않고 아프지 않은 인생이 어디 있어. 그 말을 내뱉은 그녀는 친할머니와 동갑인 68세. 나이든 여자를 보면, 무척 실례되는 일이겠지만 살아왔던 삶을 짐작해보며 아무도 모르게 혼자 슬퍼하고는 했던 나에게 윤여정은 상징적인 존재. 왜 여자의 삶은 그리도 슬플 수밖에 없을까. 아무리 세상이 변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성적 차별은 족쇄처럼, 넘지 못할 담처럼 굳건히 존재한다. 그녀가 담배를 피운다는 사실이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건, 어쩌면 여자로서 행하는 흡연이 어떤 항의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가지런하고 예쁜 손톱, 매끈한 팔다리와 겨드랑이, 인중, 눈썹. 브래지어, 거들, 스타킹 등등. 세상이 여자에게 강요하는 것들은 너무도 많았고 이제는 늙어버린 여자가 담배를 피우며 내보이는 눈빛은 어떠한 의미를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여자의 관상을 볼 때, 남편에게 순종적이고 지고지순하면서도 내조를 잘하는 상을 언제나 좋은 상이라고 말한다. 반면 남자의 얼굴에서는 결단력이나 의지, 재복 등을 상징하는 짙은 눈썹이나 높은 코는 자존심이 세고 양기가 강해 남편의 기를 살리지 못한다는 점에서 악상으로 여긴다. 자존심이 세고 양기가 강하다는 것과 결단력, 의지는 일맥상통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남녀 모두에게 관상의 원리는 같지만 해석이 다르게 된다는 것을 추론해낼 수 있다. 추론을 해봐야 뭣하냐만은 그래도 얼마나 억울하고 부당하게 사는지 속으로나마 계산해보며 잔뜩 옹졸하게 굴 수 는 있다. 나이든 여자의 관상을 보며 삶을 상상할 때, 언제나 슬퍼지는 이유는 그 옹졸함에서 나온다.




렛세이어 불

요지경

8절 도화지 속의 내 하늘은 언제나 단색이었다. 하늘이지만 하늘색은 아니었다. 회색, 보라색, 고동색, 하다못해 흰색으로라도 한 점 여백 남기지 않고 꽉 채워 칠하였다. 단색조의 숨 막히는 하늘이 내가 그리던 하늘이었다. 하늘이었을까, 배경이었을까, 그것은.

거침없이 문질러댄 회색 위에 흰색 크레파스를 몇 번 굴려 구름을 그리면 하늘이었다. 그렇게 쉽게 하늘을 그려내었던 그때와 달리 지금 난 하늘을 그리지 못한다. 그릴 수 있는 하늘은 하늘이 아닌 것 같다.

개강 뒤 첫 주는 대부분의 수업들이 일찍 끝난다. 그 덕분에 세 시간이나 생겨버린 공강 시간을 이리저리 배회하며 보내다가 안착한 마지막 공간은 인적 드문 건물 뒤편의 벤치였다. 바람에서 비에 젖은 나무냄새가 났다. 목덜미와 허리께가 버티기 힘들어 가방을 베고 드러누웠다. 머리통에 짓눌린 가방이 울퉁불퉁해서 조금 불편했지만 그것을 상회하는 망막의 사치에 빠져들었다. 나뭇잎 틈새로,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하늘을 나는 보고 있었다. 아니면, 나뭇잎으로 얼룩지고 나뭇가지로 금이 간 하늘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하늘을 보고 있지만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기도 하여서 눈이 편했다. 그리고 곧 아무생각이 없어졌다.

사람이 너무 달라졌다. 내가 알던, 내가 보던 그 모습이 아니다. 외관은 여전히 아름답기 그지없다. 까만 단발머리, 치켜 올라간 눈초리, 높은 콧대, 작고 빨간 입술, 통통한 목, 담배 냄새, 항상 뿌리던 달착지근한 향수 냄새. 다만 달라진 것은 공유한 시간이 상상 속의 화석이 되었다. 얼마 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우리 사이에는 대화도 없고 공유할 시간도 없다. 이유는 알지 못한다. 끊어버린 엿가락처럼 뚝 뚝 끊어져버렸다. 갑자기 그러는 것을, 나는 오는 사람 안 막고 가는 사람 안 잡는 다는 멋있어 보이는 모토로 방관하고 있지만 사실 속은 앓고 앓아서 썩어 들어가고 있다.

2시에 있을 수업의 강의실 번호, 제출해야 할 여러 가지 서류들, 연락이 끊긴 사람에 대한 심란함, 그런 얼룩덜룩한 것들로 가득 차있던 내가 비워지는 기분이었다. 더 이상 넣을 것 없이 가득 차보이면서도 한 없이 비어 보이는 그 광경이란.

하늘은 막혀있지 않다. 나는 하늘 아래 살고 있지 않다. 나는 하늘 속에 살고 있다. 땅 위가 하늘이라면 나는 하늘 속에 있다. 막혀있지 않은 그곳에는 내가 보지 못하는 많은 것들로 가득하다. 그 엄청난 것을 막혀진 단색 단면으로 그릴 순 없다.

분명 그러할진대 내 눈과 생각은 너무나 단순하다. 맑은 푸른색, 짙은 붉은색, 깊은 검푸른 색, 어슴푸레한 밝은 회색, 그런 색들의 너무 높은 천장. 그렇게밖에 보지 못하고 설명하지 못하는 이 한계는 무슨 죄를 지었기에 주어지는 벌인지, 다만 괴로울 뿐이다.

너는 나에게 하늘이다. 신과 동등한 위치에 두는 그런, 미사여구가 아니라, 도무지 알 수가 없는 그런 하늘이다. 그 예쁜 껍질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갈라보지 않는 한, 아니 갈라보아도 알 도리가 없음에 나는 네 막힌 단면에만 홀려서 작은 도화지 가득 또 회색 크레파스 하나로 메운 것이다. 하늘에 별이 몇 개 떠있는지 모르겠다고 하늘을 욕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마찬가지기에 나는 뻥 뚫린 창공을 보면서도 속으로 또 앓아 썩어 문드러지고 있다.



  

렛세이어 물

우윳빛 보라

하늘, 소리는 자연스럽게 ‘하늘’에서 ‘하늘색’으로 이어진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가로로 가늘고 작게 벌려져 있던 입술이 이번에는 위아래로 조금 더 크게 벌어진다. 곧장 머릿속을 채우는 이미지는 그래, 말 그대로의 하늘색이다. 무서울 게 없어 높게 치솟은 하늘은 그것이 깜깜한 색의 우주와 이어져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밝다. 푸르다. 얼마나 더 높이까지 이어져야 그 암흑을 짐작할 수 있을까. 동생은 구름이 낮게 있어 하늘도 낮게 보인다고 말했다.

하지만 구름이 낮게 있기 때문에 하늘이 더 높아 보이는 걸.

 

평소라면 구름과 같은 높이에서 끝나고 말았을 하늘은 그 위에 더 무언가 있다고 자기 의견을 열심히 피력한다. 흰 색의 구름을 가볍게 짓누르는 그 하늘색에 나는 이래서 가을 하늘을 예쁘다고 하는 구나, 하고 지금까지 살아오며 이 생각을 가진 모든 이들에게 동의했다.

하늘색, 하면 떠오르는 것은 중학생인가 초등학생 고학년인가 여튼 그즈음에 배웠던 국어책의 한 작품이다. 그림을 좀 잘 그린다고 자신하던 학생이 미술 대회에 나가서 하늘을 그린다. 밝은 색들만을 꺼내서 온통 하늘색과 파랑색으로 도화지를 범벅 칠했다. 그러다가 옆 친구의 그림을 본 순간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그 애의 그림에는 하늘색과 파랑색이 아닌 보라색과 분홍색, 붉은 빛깔들과 그리고 절대로 하늘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검정색이 섞여있었다. 주인공은 그 친구에게 묻는다. 토씨 그대로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네가 그린 하늘은 틀렸다며 왜 그런 색으로 칠했냐는 내용이었던 것 같다. 친구는 이것도 하늘이라고 대답을 했고, 미술 대회에서 상을 받은 것은 그 친구였다. 주인공은 여전히 ‘틀린 하늘색’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가 틀린 하늘색을 마주한 것은 어느 해 질 무렵의 창가였다.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데 ‘이 색이야!’라고 규정을 내릴 수 없는 색으로 뒤엉킨 하늘이 그녀의 눈앞에 펼쳐졌다. 그제야 그녀는 그 보랏빛과, 붉은빛이 하늘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꼬리를 이어져 계속되는 생각에서는 마치 그 애의 그림처럼 느껴지는 작품 한 점이 나온다. 마틴 갈레의 ‘우윳빛 보라’. 밀크 퍼플이라는 원제보다 우윳빛 보라. 그 단어가 입에 완벽하게 달라붙어서 절대로 떨어지지 않는다. 고등학교 2학년 때인가 성남아트센터에서 열렸던 ‘독일현대미술전’에서 보고 왔었던 작품이다. 몽환적으로 보이는 보랏빛 하늘에 뜬 둥그런 보름달. 그 아래에서 하늘을 담아내고 있는 듯한 같은 색과 모양의 호수. 아마 몇 번이고 그 작품 앞으로 돌아와서 얼쩡거렸던 것이 생각난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림 자체도 내 마음에 쏙 들었다지만, 이 전시회를 다녀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녀를 알게 됐기 때문이다. 그 때는 핸드폰 문자와 스카이프로 연락을 주고받았었는데, 아마 이 이야기는 스카이프를 통해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전시회를 다닌다는 말을 듣고 얼마 전 다녀온 그 전시회를 말하자 그녀도 그곳에 다녀왔었다고 했고, 나는 내가 가장 좋아했던 그 작품을 말했다. 원제는 기억하지 못했던 나와는 달리 그것까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이야기하던 것을 보고 괜히 그 작은 채팅창에서 그녀에게 호감을 느꼈다. 우윳빛 보라가 풍기는 것과 같은 알 수 없는 매력이 그녀가 지닌 것이었다.

하늘.

​ 그리고 하늘색.

입술이 부드럽게 벌어지며 ‘색’이라는 단어를 발음한다. 나는 더 이상 ‘하늘색’을 나의 하늘색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 아이의 그림과, 우윳빛 보라와 그리고 네가 뒤엉킨 하늘색은 아직도 미묘하게 나를 뭉클거리도록 만든다.

렛세이어 나무

이상해

'스윽-'

"이상해. 하지마아..." 아무리 평소 그녀 앞에서는 어린 아이처럼 구는 나지만, 이런 말투가 내 입에서 나올 리가 없다. 그러나 지금 내 입에서 나오고 있다. 그 이유인 즉슨, 스.타.킹.이 문제다. 생일에 중간고사 대체 발표라는 자체 생일빵을 때리기 위해 정장을 차려입었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그에 맞는 아찔한 킬힐을 신었고, 다리를 좀 더 매끈하게 보이기 위해 짙은 커피색 스타킹도 신었다. 그게 문제였다. 발표도 끝나고 그녀와 휴식을 가지기 위해 찾은 이곳은 모텔. 분위기 때문일까 그녀의 장난은 짓궂기만 하다. "몸이 왜 이렇게 뜨거워?" 평소에 아무렇지 않게 주고받던 질문 임에도 그저 나를 놀리려는 장난으로만 들렸다. "긴장 풀려서 몸살기 올라서 그런거야아... 흐아.. 정말이라고.." 오늘따라 그녀의 표정이 장난기가 가득해보인다.

 

그녀의 한 쪽 손은 내 무릎에서 자꾸만 머물었고 다른 한 쪽 손은 허벅지 위를 오르내렸다. 손가락 끝만 아슬하게 지나다니는 지라 내 감각은 더욱 예민해져있었다. 체열을 핑계 삼고 싶었지만, 자꾸만 달아오르는 내 감정은 숨길 곳이 없었다. 이내 그녀의 장난이 더 짓궂어지기 전에 나는 욕실로 향했다. 욕조에 물을 받고 거품을 내어 그 속으로 숨었다. 왠지 부끄러운 이런 기분이 나쁘진 않지만 너무나도 낯설었기에 거품 속에서 나를 잠재웠다. 아니, 나를 숨겼다. 시간이 되었다고 그녀가 나를 부르러왔을 땐 어서 달려가고 싶었지만, 새삼스럽게도 매우 부끄러웠다. 1년 넘는 연애 기간 중에 이랬던 적이 몇 번이나 되었던가. 내 기억이 맞다면 두 번째였다. 이 정도로 그녀 앞에서 쑥스러움을 탔던 기억은 그녀 앞에서 한 달 넘게 준비했던 춤을 그녀의 지인들 앞에서 췄던 그 날 이후로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이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두근거림과 부끄러움이 섞인 묘한 기분이었다.

그래도 그녀가 기다릴 세라. 물기를 대충 훔쳐내고 그녀를 향했다. 분명히 그녀가 무슨 말을 한 것도 아닌데 왜인지 나 혼자 로션을 바르면서 발그레해졌다. 그때였다. 아직 로션이 다 마르지 않아 가운 매듭도 채 매지 못했는데 갑자기 등에서부터 따스한 기운이 다가왔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향기가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였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스킨십. 백허그. 그리고 그녀가 좋아하는 스킨십. 그녀와 하나가 될 수 있는 스킨십은 많지만 역시 백허그만한 것이 없다. 소설이나 드라마를 보다 보면 주인공들이 자신의 심장소리가 커서 다른 이에게 들릴까 걱정하는 장면들이 종종 있다. 나는 그걸 보며 괜히 오바한다고 했었지만 지금의 내가 그 걱정들을 하고 있었다. '들리면 어쩌지...' '쿵쾅쿵쾅' 심장은 가라앉을 생각도 없이 점점 더 크게 빠르게 뛰고 있었다. 오늘의 나는 아무리 돌이켜봐도 이상했다. 나는 내가 이상해진 이유가 스타킹 때문일 것이라며 괜히 애꿎은 스타킹을 탓했다.

 

우리는 그 이상하지만 나쁘지 않은 기분으로 충분히 뜨겁게 서로를 안아갔고 더욱 더 깊이 서로를 알아갔다. 하루 종일 예민했던 감각 덕분이었을까? 그녀의 손길도 나의 손길도 세심하고 좀 더 아찔해졌다. 차가운 이성이 뜨거워졌다는 느낌이 이런 걸까. 평소에도 나를 유혹하기에는 충분히 아름다운 그녀였지만, 오늘의 그녀는 정말 아찔했고 나를 미치게 하기에 충분했다. 1년 넘는 시간 동안 장거리지만, 장거리 같지 않게 자주 만나고 오랜 시간을 같이 보냈던 그녀였다. 날이 특별해서였는지 내 감각이 예민해서였는지는 시간이 꽤 지난 아직까지도 알 수 없다. 하지만, 늘 새로운 모습으로 나를 유혹하는 그녀지만 그날의 난 이상하리만치 그녀에게 매료되어있었다.

렛세이어 돌

Something

아침에 일어나서 핸드폰을 손에 쥐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있다. 굳모닝~! 하고 문자를 보내는 것. 얼마 전부터 완전히 나의 일상이 되어버린 일이다. 메시지가 전송된 것을 확인하고 나면 그제서야 빵이 놓인 식탁 앞에 앉는다. 답장은 내가 학교에 있을 동안 올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으니 마음 편하게 아침을 먹는다. …핸드폰을 바로 옆에 둔 채로 말이다.

내가 이렇게 아침 일찍 가장 먼저 문자를 보내는 상대는, 한 달 하고도 더 전에 친해진 두살 위의 언니다. 카페 활동을 하다가 우연히 만난 언니로, 아직 언니에 대해서 아는 것도 잘 없고, 서로 존댓말을 하는 사이기는 하지만 나와 친한 언니의 학교 친구여서 그런가 대화 패턴이 잘 맞아서 그런가 근 한 달간 이렇게 둘이 문자를 주고받고 있는 사이까지 되었다. 나와 이 언니 사이에는 두 사람을 모두 알고 있는 또 다른 언니가 있어서, 그 언니의 주도로 오프라인에서 만나본 이후로 더 호감이 가, 내가 열심히 대화를 건 것도 사실이다. 언니는… 완전히 내 이상형의 사람이다.

그러니까, 외적인 것부터 이야기 하자면, 나와 비슷한 키에, 생머리고, 통통한 몸매의 사람이다. 평범한 얼굴이지만 나름 예쁜 편이라고 생각되는 그런 얼굴이었다. 무엇보다도… 가슴이 컸다. 언니가 입고 있던 티셔츠의 프린트가 완전히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으니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었다. 단순한 티셔츠인데도 가슴과 허리라인이 제대로 들어나니 굉장하다고도 생각했다. 몸매가 상당히 예쁜 언니였다. 처음 얼굴을 마주했을 때 놀랐을 정도로, 놀라서 당황까지 했을 정도로 '예쁜 사람이다.' 라는 감상이 절로 나오는 사람이었다. 완전히 이상형의 울타리 속에 있는 사람이었다.

거기다가, 외적인 것뿐만이 아니라 내적인 모습까지 그러하니 내가 언니를 싫어할래야 싫어할 수 없고, 좋아하지 않을 래야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지 않겠는가. 논리적으로 이야기하는 듯 하면서도 의외로 허점이 많은 대화법이 귀여웠다. 허를 찔리면 당황하는 얼굴도 말이다. 앞서 이야기 했듯이 대화 패턴 자체가 나와 잘 맞기도 했다. 내가 말이 많은 듯 하면서 대화 주제를 잘 못 찾아가는 경향이 있는데, 그 언니는 옆에서 대화를 끌어주면서도 너무 당기지는 않는 느낌이 들게 했다. 겸손하지만 인정할 줄도 아는 사람이고, 농담과 진담을 구별해서 드립도 잘 치는 유머러스한 사람이었다. 나의 이러한 평가가 '단순히 이상형이라 콩깍지라도 쓰인 것 아니야?'라고 말을 들어 버린다면 나는 할말이 없지만 말이다.

아무튼, 내가 정말 좋아하는 타입의 사람인 것은 틀림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언니도 나를 상당히 좋아해주고 있다는 것이 느껴져서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오프에서 만나기 전에, 나와 그 언니가 함께 들어가 있는 단체 톡방에서 스칼렛 요한슨 이야기를 하다가 좋아하는 여성상에 관한 얘기가 나온 적이 있는데, 그 때 내가 나와 비슷한 키의 사람이 하이힐을 신어주는 것이 너무 좋다고 이야기 했었다. 그러자 그 언니는 내게 키가 몇이냐고 물었고, 알고보니 나와 그 언니는 같은 키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러고 몇 주 후 오프에서 만날 때 그 언니는 하이힐을 신고 있었다. 사실 그 때 그것에 완전히 감동 받아 버려서, 어쩌면 정말 반해버린 걸지도 모른다. 그것과 더불어 최근에 나는 시험 준비로, 그 언니는 회사 면접 준비로 서로가 바빠 대화를 못하고 있다가 겨우 시간이 맞아 길게 대화를 나누게 되었는데, 내가 오랜만에 제대로 대화한 것 같아 좋다고 했더니 자신 또한 너무 기쁘다며 몇 번이고 강조해서 문자를 보내왔다. 그에 또 괜히 혼자 얼마나 설렜는지.

「굳모닝이예요~」

「어제 많이 피곤했나봐요ㅠ 시험공부 열심히 하시되 무리는 하지 말아요ㅠ」

도착한 문자를 확인하다가, 어젯밤에 내가 정신이 없어 잘 자란 인사를 빼먹었단 사실을 떠올렸다. 열심히 'ㅠ' 버튼을 누르며 미안하다 사과하고 언니 또한 취업 힘내라고 이야기한다. 언니는 어제 내가 잘 자란 인사를 해주지 않아 서운했던 걸까? 그냥 보낸 말이 아니라, 정말로 그래서 저렇게 문자를 보낸 거였으면 좋겠다고 바라게 된다. 어쩐지 심장이나 뇌가 몽글몽글 부들부들 해지는 기분에 조금 웃어버렸다.

"이 언니 좋다."

장난감과 엄마를 좋아하는 아이처럼, 친구를 좋아하는 여고생처럼, 이상형의 누군가를 생각하며 좋아하는 어린 여자처럼 그냥 그렇게 중얼거리며 핸드폰 액정을 가볍게 문질렀다. 괜히 기분이 좋았다. 이 언니가 L이었으면 좋겠다고 조금 생각하다가, 같이 노래방 가기로 했으니 빨리 시험이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웹진 랑은 퀴어 에세이 블로그 LETSSAY의 글들을 기고받아 연재합니다. LETSSAY 블로그에서 더 많은 에세이들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달, 불, 물, 나무, 돌 다섯 레세이어들의 이야기를 기대해주세요. 

LETSSAY란? 각양각색의 다섯 명의 여성 성소수자의 솔직담백한 퀴어 생활 에세이입니다. "Let's say"와 레즈비언 에세이(Lesbian Essay)라는 의미처럼 여러분과 공감할 수 있는 퀴어풀한 에세이를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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