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터남 (동성애자인권연대)
HIV/AIDS 감염인 친구가 소개팅을 해 달라고 했다. 전부터 소개팅 시켜 달라고 하긴 했지만 언제나 장난스럽게 말했었다. 어쩌면 내가 그렇게 받아들이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정말로 소개팅을 시켜줘야 한다고 생각하면, 누구를 소개해줘야 할지 앞이 막막했다.
그 애가 감염사실을 알고, 처음 말한 사람은 나였다. 3년 전 여름이었다. 친구는 그때 씁쓸한 표정 이었다. 나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랐지만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적어도 극단적으로 힘들어하고 있는 것 같진 않았다. 친구는 보건소에서 들은 말을 내게 해 줬다. 이제 에이즈도 당뇨병이나 고혈압처럼 관리만 잘하면 오래 살 수 있고, 건강검진을 주기적으로 해야하기 때문에 성인병으로 일찍 죽는 사람들보다 더 오래 산다고 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감염 사실을 알리지 않고 성관계를 하면 법적으로 처벌 받는다고 했다. 주기적으로 건강검진을 받지 않으면 범죄자 취급을 당한다고 했다.
그때만 해도 난 에이즈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다. 한 번은 그 친구와 같이 카페에 가서 팥빙수를 먹었는데 “이거 같이 퍼먹어도 되는 거야?”라는 말을 해버리고 말았다. 그땐 그게 잘못한 건 줄도 몰랐다. 친구는 그럼 두 개 시키자고 했고, 그냥 같이 먹자고 했지만 기어이 두 개를 시키겠다고 했다. 팥빙수는 엄청 컸고, 결국 둘 다 남기고 말았다. 그 이후로 동인련에 가입하게되었고, HIV/에이즈와 감염인의 삶에 대해 배울 수 있었다. 평생 그런 교육은 받아본 적이 없었다. 같은 음식을 먹는 것으로는, 일상생활을 같이 하거나 가벼운 뽀뽀를 하는 것으로도 감염되지 않는다는 걸 처음 알았다. 나는 ‘팥빙수 사건’ 후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친구에게 그때 일을 사과했다. 친구는 괜찮다고 했다. 그게 더 미안했다.
나는 친구의 고민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지 못했다. 사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생각해보면 그럴 수 밖에 없는 게, 친구와 감염 이후에 대해 속 깊은 대화를 나눌 일이 없었다. 친구가 나를 대화할 만한 사람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난 팥빙수를 따로 먹자고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혹은 나와 이야기를 해도 답이 나올 수 없다고 미리 결론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에이즈 혐오라는 거대한 적을 혼자서 어떻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대화 없이(물론 다른 대화는 많이 했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 애는 한 번도 연애를 하지 않았다. 물론 연애를 하지 않는 이유가 HIV에 감염 되었기 때문만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남자 고를 때 이것저것 따지는 게 많아서 그랬는지도 모르고, “평범한 연애”니 “캠퍼스 연애”니 하면서 종로엔 나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그런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 뿐이었을까? 내가 감염인이었다면 어떨지 생각해봤다. 눈 앞이 막막했을 것 같았다. 똑같은 감염인을 만나야 하는 걸까? 게이들 중에 HIV 감염인을 찾는 게 쉬운 일일까? 비감염인은 만나도 되는 걸까? 비감염인 애인에겐 감염 사실을 어떻게 털어놔야 하는 걸까? 털어놓은 다음에도 계속 만날 수 있을까? 계속 그렇게 거절 당하는 걸 겪다 보면, 이 모든 걸 다 견딜 수 있을까?
지난 몇년 간 성소수자 운동을 지켜봤지만, 이런 고민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HIV에 감염된 게이들은 생각보다 많다. 내 주변에만 여럿 있다. HIV 감염인은 비감염인과 사귈 수 있을까? 애인에게 감염사실을 고백하면 어떻게 되는 걸까? 감염인은 감염인과만 연애해야 하는 걸까?
내 마음 한 구석에선 HIV 감염인도 쉽게 연애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다른 한 구석에선 누군가 새롭게 감염되어선 안된다는 생각이 든다. 더구나 그 동기를 내가 마련해준 것이라면, 내가 소개팅을 시켜줘서 누군가 HIV에 감염된다면 나는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건 내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감염인 친구가 어련히 알아서 하지 않을까? 섹스 하기 전에 미리 감염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까? 나조차 내 친구를 “잠재적 에이즈 전파 범죄자”로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친구는 내게 가장 먼저 HIV 감염 사실을 이야기해줬다. 그 애가 나에게 HIV 감염 사실을 말해주지 않았다면, 그 애가 HIV 감염인인 걸 내가 모르고 있다면 어땠을까? 아마 그랬으면 소개팅 시켜주는데 아무 망설임도 없었을 것이다.
마음 한 구석은 여전히 뒤죽박죽이다. 친구에게 누군가를 소개시켜 줄 방법을 아무리 이성적으로 생각해봐도, 게이 커뮤니티 내부의 에이즈 혐오가 전혀 이성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돌아간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이제 친구와 더 솔직하게 이야기해봐야 할 것 같다. 친구도, 나도 딱 떨어지는 답을 찾을순 없겠지만, 이야기를 시작조차 하지 않으면 마음 속에서 더 곪기만 할 것 같다.
'HIV AIDS'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외로움의 조건 (11) | 2014.09.10 |
---|---|
보건소에 다녀왔다. (0) | 2014.09.10 |
HIV/AIDS와 건강권 - 성적지향 + HIV/AIDS에 따른 차별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 - (2) | 2014.07.17 |
키벡사 - '형, 저 HIV 양성이래요. 제발 전화 좀 받아줘요.' (2) | 2014.05.26 |
러시아와 포스트 소비에트 공간의 HIV/AIDS (3) | 2014.05.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