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회원 이야기/회원 인터뷰

동네에 퀴어가 없다고요? 설마? 진짜? - 전국 퀴어 모여라 수다회

by 행성인 2014. 9. 10.


동네에 퀴어가 없다고요? 설마? 진짜? 

- 전국 퀴어 모여라 수다회

 

*동성애자인권연대 회원 소모임 <전국 퀴어모여라>에서 진행한 수다회의 내용을 전국 퀴어 모여라 블로그와 동성애자인권연대 웹진 <너 나 우리 랑>에 중복 기재합니다.


 

네네, 전국 퀴어 모여라에서 지난 7월 26일 동성애자 인권연대 무지개 텃밭에 모여 개최한 첫 수다회가 공개되었습니다! 정말 많은 이야기(라고 쓰고 섹드립이라고 읽는다)를 나눠보았습니다. 무척 건전하고 올바르고, 어쩜 이렇게 건실한 청년들이 있을까 싶은 자리였어요. 아하, 아하하. 

지방에서 살다가 이러저러한 이유들로 서울에 상경해서 살게된 퀴어들이 지방에서는 어떻게 살았으며, 어디에서 퀴어들을 만나고, 커뮤니티를 만들거나 만들기 위해 노력했는지,  한번 알아볼까요? 




재경: 안녕하세요. 지방에서 서울로 이주한 퀴어들의 수다회 사회를 맡게 된 재경이라고 합니다. 다들 바쁘신 와중에도 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우리 먼저 소개부터 할까요?


진기: 안녕하세요. 진기라고 합니다. 대구에서 태어나 20살까지 쭉 대구에서 살았어요. 2010년에 대학 진학하면서 서울에 오게 됐고요. 그 전에도 서울에 종종 다니곤 했어요.





캔디: 안녕하세요. 저는 캔디입니다. 저는 광주에서 태어나 계속 광주에서 살았어요. 서울에서 잠깐 산 적도 있었고요. 대학까지 광주에서 나오고, 2005년에 서울에 왔습니다. 이제 10년 쯤 되네요.





벼: 안녕하세요. 저는 벼입니다. (웃음) 처음으로 닉네임 말하는 거라 너무 어색하네요. 저는 서울 토박이입니다.


재경: 그 유명한 서울 여자.


모리: 저는 부산에서 태어나서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살았습니다. 그런데 부산 얘기는 할 게 없는 게, 저는 범일동도 안 가봤고, 서면에서 게이들 만나본 적도 없거든요. 일단 서울에 올라오는 게 목표였던 것 같아요.





종원: 저는 충주에서 온 종원이라고 합니다. 서울에 온 지는 2년 정도 됐습니다.





재경: 저는 재경이고요. 광주에서 23살까지 살다가 대학 마치고 서울로 올라왔어요. 광주에서는 이성애자의 삶을 살아서 잘 모르겠어요. (웃음) 


진구: 안녕하세요. 저는 진구라고 합니다. 경북에서 왔고요. 대학 때 서울 와서 이제 한 10년 된 것 같아요.





재경: 아, 그래서 사투리를 전혀 안 쓰시는군요.


진구: 쓰까? 쓰면 못 알아들으니까요.


재경: 대구에서 온 진기님은 알아듣겠네요.


진구: 대구가 더 세고, 우리는 좀...


진기: 에이, 거기가 더 세죠. (일동 웃음)


진구: 아닌데... 저는 서울 사람이에요~ (일동 웃음)


재경: 경상도하고 전라도 분들이 많네요. 여러분은 정체성을 처음에 어떻게 깨달았나요? 


캔디: 전 바이(양성애자)인데요. ‘데뷔’라는 단어가 참 애매해요. 어쨌든 정체성을 안 건 고등학교 때였어요. 그 옛날 유명한 티지넷 초창기 때 들어가서 활동을 하기도 했어요. 그땐 알음알음으로 티지넷에 접속했어요. 데뷔라고 하는 건, 대학교 막 입학할 무렵이었죠. (웃음) 레보(레스보스)가 신촌에 있던 시절이기도 하죠. 계속 남자친구를 만나서 여자를 탐색할 시간이 없었어요. 광주에서 번개를 몇 번 나가긴 했는데,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언니들이 되게 착했어요. 내가 바이라고 말하고 남자친구도 있다고 해도 잘 놀아 줬어요. 


재경: 인터넷으로 여자를 배우셨군요.


캔디: 그렇다고 그 전에 좋아하는 여자가 없었던 건 아니기 때문에 인터넷으로 배운 건 아니죠.


진구: 저는 10대 때. 저는 딱 봐도 티 나는 친구들이 많이 있었어요. 중학교 때 대놓고 자기가 레즈비언이라는 정체성을 표현하는 친구가 이쪽(레즈비언)인것 같은 친구들을 자꾸 찌르는 거예요. 지나가다가 “너 이반이냐?” 이렇게 막 물어 보고. 근데 어떤 친구는 그 질문에 “나 5반인데~” 이랬죠. 무지 진지하게. (일동 웃음) 말하고 말하지 않고 그런 것들이 필요 없었어요. 그냥 아는 거지.


재경: 천국이네요.


진구: 약간 좀? 우리는 커뮤니티 만들어서 동네 애들 다 모아서 놀고 만나고, 우리가 이런 걸 동네에서 다 알았어요. 그 근처 사람들 다 같이 만나서 놀고 그랬죠. 막 물든다 그러잖아요. 이성애자인데도 우리랑 같이 놀다 보니까 자기도 여자가 좋은 거 같다고 착각하는 애들이 있으면 “정신 차려라, 잘 생각해 봐라” 이랬죠. 그때 만났던 친구들 지금까지 다 보고 있는데, 모두가 여자를 만나고 있지는 않죠.


캔디: 옛날에 여자 만났다가 지금은 남자 만나는 친구들은 옛날 얘기를 잘 안 하려고 하나요?


진구: 그런 건 없어요. 어릴 때였고, 성 정체성에 대해서 확실히 모르는 애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누군가가 너무 좋을 때 그 아이를 사랑한다는 생각을 한다기 보다는 ‘얘가 여자를 만나는 아이니까 나도 그것과 똑같은 감정인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 같아요. 지금도 대부분 편하게 지내요. 


재경: 희한한 동네네요.


진구: 우리는 진짜 파라다이스였죠.


진기: 저는 처음으로 애인을 사귄 건 15살이었어요. 그냥 그 여자아이를 사귄 거죠. 나중에 알게 된 건데, 그러니까 중1 때 ‘데뷔’할 수도 있었더라고요. 학교에 일진 서클 같은, 그러니까 부치 서클이죠. (일동 웃음) 나름의 커뮤니티였던 거예요. 새학기가 되면 선배들이 신입생들을 탐색해서 데려온대요. 신입생 중에 데려오는 역할을 하는 아이가 한 명 있었는데, 그 아이가 제 친구였어요. 저는 제 자신의 정체성을 모르던 시기였는데, 걔는 절 보고 딱 안 거죠. 선배들이 저 데려오라 했는데, 그 친구는 나름대로 절 지켜준답시고 안 데려간 거예요.


캔디: 어머, 의리 있다~


진기: 전 좀 섭섭하기도 했죠. (일동 웃음) 더 빨리 데뷔할 수도 있었는데, 그땐 그렇게 모르고 지나쳤죠. 그러다가 15살 때 처음으로 애인을 만나서 2년 반 정도 사귀었어요. 

1년 후에 현실적 고민이 닥치기 시작했어요. 아웃팅이라든지, 커밍아웃이라든지. 거기에서 그 친구는 호모포비아의 길을 선택했고요. ‘나는 이러면 안 되는데’, ‘너무 이상한 짓 아닌가’, 그러면서 매일 같이 하고. 하고 나면 후회와 멸시가 들고. 근데 그 친구가 고민을 얘기할 사람이 저 밖에 없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 모든 스트레스가 저한테 쏟아지고 그랬죠. 어떻게 해결할까 하다가 인터넷 검색을 하게 됐어요. 그때 처음 나온 사이트가 동인련(동성애자인권연대)이었어요. 되게 멋있어 보였죠. 저는 그 친구에게 이걸 알려 주고 싶었는데 그게 잘 안 됐죠. 그래서 ‘데뷔’라고 하면, 이런 게 우리 지역에 있나 찾아보다가 알게 된 대구경북성소수자인권모임에 나간 거였어요. 2005년에 국제앰네스티에서 소모임 형식으로 만들어진 거였어요. 제가 17살 때 거기 나가면서 소위 ‘데뷔’를 한 거죠.


캔디: 그리고 카페 만드셨잖아요. 그 유명한 ‘라틴’ 창설자시죠.


진기: 데뷔와 함께 프라이드(자긍심)가 넘쳐서. (일동 웃음)


재경: 데뷔가 라틴 창설. (일동 웃음)


캔디: 나도 우리 대학 카페 만들었는데 아무도 안 들어왔어요. (일동 웃음)


재경: 지역에서 사람들 어디서 어떻게 만났어요?


캔디: 방금 말한 대학 카페 만들었을 때 1명이 가입했어요. 만났는데 얌전해 보이는 남학생이었어요. 지금 생각해 보니 게이처럼 생겼어요. 그때는 게이다라는 게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냥 얌전하구나 생각했죠. (웃음) 둘이 만나서 할 얘기가 뭐가 있겠어요. 우리 학교에도 있구나, 서로 인사하고, 어색하게 있다가 헤어졌죠. 제가 4학년 땐가 5학년 땐가 고학년만 들어갈 수 있는 인문대 독서실에 갔는데 독서실 반장으로 그분이 계셨던 거예요. 누군지 몰랐다가, 독서실 사람들끼리 친분 쌓아가면서 같이 밥도 먹고 얘기도 하는데, 갑자기 그 분이라는 게 생각난 거예요. 그게 끝이에요.

그리고 대학교 다닐 때 좋아해서 친하게 지내던 후배가 있어요. 이반이었는데. 지금도 가끔 연락해요. 요즘 물어보죠. 고등학교 때 친구들 만나면 그런 얘기 하냐, 그러면 그런 얘기 안한대요. 이 친구도 어쨌든 소위 ‘탈반’을 한 건데, ‘탈반’한 친구들은 모이면 옛날 얘기를 안 한다는 거예요. 아는 분이 ‘탈반’한 사람들 인터뷰를 했는데, 비슷한 얘기를 하더라고 들었거든요. ‘전원 탈반’, 말이 좀 이상한데, 그러니까 같이 놀던 애들이 다 남자만 만나고 살거나, 1명만 여자를 만나고 나머지는 이성애자의 길을 가면, 과거 이야기를 안 꺼낸다는 얘기 많이 들었어요.


진구: 우리 같은 경우는, 만약에 여자 만나다가 남자 만나면 친구들이 “너 예전에 여자 만났잖아? 지금은 남자 만나네?” 하면 그냥 “응” 이러고, “또 여자 만날 거야?” 그러면 “응, 뭐 되면” 이런 식이에요. 옛날에 여자 만난 걸 안 좋게 볼까 봐 얘기를 못 하겠다는 그런 게 있더라고요. 본인 스스로가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남이 보는 시선이 문제인 거죠. 사회 분위기 자체가 그런 걸 흉보잖아요. 자기는 그런 무리에 속하고 싶지 않은 거죠.


캔디: 얘기를 하더라도 ‘흑역사’라고 그러죠.


재경: 그럼 보통 어디서 많이 놀았어요?


진구: 우리는 아지트가 있었어요. 그런 데 있잖아요. 학창 시절에 “소주 주세요” 하면 사이다 주는. 거기에 소주 들어 있고. 그럼 애들이 거기에 빨대 꽂아서 쪽쪽 빨고 있고. 뒤에 가서 담배 피우고.





재경: 그게 일진 아니에요?


진구: 아니에요. 우리 일진 아니었어요. 나 일진 아니야~


진기: 우리 서클도 그렇게까지 놀진 않았는데... (일동 웃음)


진구: 카페 사장님이랑 편하게 지내다 보니까 “너네 많이 힘들지~” 이러면서 조금씩 길을 열어 주셨어요. 우리도 동인련 파티 같은 거 하다 보면 왜 논알콜 파티를 해야 하느냐, 왜 청소년이 술 먹지 못하게 해야 하느냐, 이런 얘기들을 하잖아요. 그 사장님이 약간 그런 식이었던 거예요. “힘들면 술 마실 수 있지 가서 사고만 안 치면 되지 뭐” 이런 마음이 있었던 거예요. 이 정도(동인련 사무실) 크기를 우리가 썼어요. 카페 전체 크기는 동인련 사무실의 4배 정도 됐고요. 항상 우리가 노는 데였죠. 거기엔 일진도 있고, 저처럼 걸친 애도 있고, 아예 아닌 애도 있고 그랬어요. 일진인 애들은 통틀어 모두가 얘가 일진이라는 걸 아는 거고, 걸친 아이들은 같은 학년만 알고 후배들은 모르는 거죠. 


재경: 아지트가 학교에서 가까웠어요?


진구: 네. 동네가 워낙 좁으니까. 홍대가 학교면, 홍대입구역 정도에 카페가 있고, 근데 거기는 거의 다 쓰려져 가는 곳이었고. 다른 이웃 도시들에서도 오고 그랬어요.


일동: 오~ 우와~


재경: 원정을 가는 게 아니라 온 거예요?


진구: 학교끼리도 교류하고 그랬어요. 문학 대회 같은 거 하면 우리 중에 한 명이 나가서 거기서 만나서 데려오고 그랬어요. 최대 2~30명까지 모였어요.


일동: 오~ 우와~


재경: 경북에 있는 퀴어 다 모인 거 아녜요?


진구: 아는 애들 중에선 제일 큰 규모였죠.


재경: 아는 애들이 2~30명이면 더 있단 얘기잖아요.


캔디: 늘 더 있기야 하죠. (웃음)


진구: 더 있고, 우리는 다 파악하고 있죠. 한번은 이런 적도 있었어요. 순수한 여자아이가 있었어요. 우리가 학교 끝나면 어딜 가니까, 그 친구가 왕따시키는 거냐고 그러는 거예요. 죽어도 우리가 노는 아지트에 같이 가겠다고 해서 데려갔는데, 그 친구가 거기 들어가자마자 본 풍경이 오후 4시에 소주, 담배. 그 친구가 바로 펑펑 우는 거예요. “왜 울어?” 그러니까 “그럼.. 너랑 너랑 사귀고, 엉~ㅠ 둘다 여잔데~ㅠ” 이러는 거예요. 알고는 있었는데 실제로 보니까 놀란 거예요. 그날 걔가 술을 엄청 마셨어요. (일동 웃음) 진짜 계속 마시는 거예요. 그러고는 그냥 편안하게 지냈죠. 그 친구가 “나중에 힘들면 놀러 갈게” 이러고.





진기: 저는 애인을 만나면서 정체성을 자각했지만 고립돼 있었잖아요. 소통에 대한 욕구가 엄청 컸어요. 나중에 알게 된 건데 학교 별로(동성애 커뮤니티가) 있었대요. 그게 ‘동성애’를 한다는 느낌이 아니라 학교 문화? 

대구에 2.28공원이 있어요. 계속 퀴어문화축제 하는 곳인데, 거기가 원래 L(레즈비언)들이 모이는 곳이었어요. 신공(신촌공원)처럼. 제가 데뷔하기 몇 년 전에 폭력 사태가 있었대요. ‘탈반’한 애들을 불러서 때리고 그랬던 거예요. 그러면서 뜸하게 되더니, 시내 중심가가 되면서 아예 그런 문화는 없어졌죠. 근처에 (레즈비언)카페가 있대서 가보기는 했는데, 그냥 카페예요.  

어쨌든 제가 고등학생 때 대구경북성소수자인권모임 나가서 만났던 분들이 20대 초중반, 저보다 나이 많으신 분들이었어요. 그 분들 통해서 커뮤니티에 들어갔어요. 이름은 여성영상모임인데 그중에 L들 많고, 뭐 그런.





재경: 그게 고등학교 때라고요? 대단하다~


진기: 그렇게 해서 인권 활동, 여성 운동 하시는 분들 많이 만났어요. 또 대구에서는 학교 안에 어떤 사진 동아리가 그렇다더라, 그런 거는 알고 있었지만, 딱히 거기에 속하지는 않았고요. 


캔디 : 대구 왔다가 혹시 고등학교 때 알던 사람들 만나거나, 뭐 그러지 않아요? 대구에서 어쨌든 그 사진 동아리 사람들이라던가요.


진기 : 제가 진짜 대구 가면 그냥 집에만 있어서요. (웃음) 그냥 집에서 먹고 자고, 커밍아웃한 친구들만 만나요. 


재경 : 근데 왜 사진 동아리는 안 들어갔어요?


진기 : 거기는 이미 소문이 다 퍼져있었어요. 거기 들어가면 딱 레즈비언이다고 소문이 돌았죠. 저는 그 당시에 아직도 호모포비아 친구와 사귀는 상태였고, 그 친구가 제가 사귀는 친구들을 다 정해줄 정도였고요.


재경 : 무서운 여자네.


캔디 : 그 친구한테 차인 거예요 그러면?


진기 : 아뇨, 제가 차고 라틴을 만들었어요.


(일동 웃음)


재경 : 가장 큰 역할을 하게 해주셨네요. 감사해야겠어요.(웃음) 라틴 처음 만들 때 사람들 반응이 어땠어요?


진기 : 기억도 안 나네요. 처음에는 그냥 저 혼자 만들어서 아무 생각도 없이 기사만 모으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들어온 거죠. 6개월 만에 300명 가량이 가입했었어요.





캔디 : 그 당시에는 10대들을 위한 카페가 없었어요. 그래서 라틴은 새로웠던 거죠.


진기 : 네, 저와 같은 욕심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나 봐요. 친구사이에서 본인들도 청소년을 위한 사업을 하려고 하는데, 라틴을 보고 도와주겠다는 거였죠. 그래서 서울에서 처음으로 ‘이반 놀이터’를 진행하고. 제가 기억하는 마지막 ‘이반 놀이터’ 행사에선 거의 150명 정도 모였었어요.


캔디 : 정말 큰 행사였네요.


진기 : 그리고 90퍼센트 이상이 십대였던거죠.


재경 : 그럼 서울을 굉장히 많이 오가셨겠네요?


진기 : 네, 저는 그 당시에 돈이 없었어요. 그래서 버스 충전비가 필요하다고 엄마한테 말해가며 조금씩 모아서 한 달에 한 번 씩 서울을 갔었어요.


캔디 : 그때 전 진기님이 서울 사시는 줄 알았어요. 


(일동 웃음)


재경 : 올 때마다 기분이 어땠어요?


진기 : 솔직히 그 때는 죄책감이 제일 컸어요. 왜냐하면 엄마에게 거짓말을 하고 새벽부터 나와서 한밤중에 집을 들어가야 되잖아요. 굉장히 모범적인 아이로 살았는데.


재경 : 모범적으로 집에 데려와서 하고.


(일동 웃음)


진기 : 두 번째로는 서울은 확실히 대구와 다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단체들도 많고,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것도 많고. 지역에서 채우지 못했던 소통의 욕구를 채우는 공간으로 느껴졌어요. 서울에 오면 마치 다른 나라에 온 것 같은 해방감이 있었죠.


재경 : 그래서 서울로 대학을 오셨군요.


진기 : 아무래도 그렇죠.


재경 : 진구님은 서울에 오기 전에 많이 여기 오고 가셨었어요?


진구 : 네, 아무래도 사귀던 친구가 서울 사람이어서요.


재경: 서울에 올 때는 그 때 사귀던 애인 분의 친구들도 만났어요?

 

진구 : 네, 만났어요. 그 친구들은 어디서 굴러 들어온 애가 이 친구 보러 서울까지 왔나 이런 눈치였어요.


캔디 : 어디서 (애인분을) 만났는데요?


진구 : 커뮤니티를 통해서 만났어요. 어쩌다보니 번호 교환을 하게 되고 아이가 저를 좋아하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사귀다가 중간에 헤어지고 만나고를  반복하고 지냈죠. 남들이 늦게 못된 짓 하는 것을 일찍 한 셈이에요. 어쨌든 애인의 친구 중 한 명이 제 애인을 좋아하고 있던 거죠. 까딱하면 헤어지고 나랑 사귀자고 하고. 본인은 당장 달려올 수 있지만, 쟤는 아니라고 말한 거죠. 전 그 얘길 다 알고 있었어요. 그 친구가 날 노려보며 술을 먹자길래 먹었죠. 그래서 계속 먹고 이 친구는 이제 화장실을 가고 저도 갔는데, 얘가 이제 안되겠구나 느꼈는지 절 쳐다보는 거에요. 전 ‘그냥 옆에서 잘만 해줘라. 더 이상은 하지 말고.’ 이랬죠. 그러더니 알겠다고 하고, 술 취해 가지고.


재경 : 아 그러면 혹시 게이친구도 있었어요?


진구 : 저는 동인련 와서 처음 알았어요. 일단 남자는 관심이 별로 없었어요.


재경 : 놀 때도 그럼 다 여자들 하고만 놀았어요?


진구 : 네, 놀 때도요. 그래서 남자들의 행동이나 성격, 모션 이런 건 너무 어색하고 겁나고. 


진기 : 처음에 친구사이의 가람님과 통화를 하고 서울에 올라왔는데 남자들이 다 게이처럼 얘기하는 거예요. 저는 그게 너무 충격이었어요. 왜냐하면 경상도에서는 남자들이 절대 그렇게 얘기 하지도 않으니까.


캔디 : (서울은) 어딜 가도, 가도 다 게이, 게이, 게이!


(일동 웃음)


모리 : 전 좋았는데. 서울 올라왔을 때 너무 반가웠어요. 다들 조곤조곤해서.


모리 : 그리고 부산이랑 정말 다른 건 사람들이 욕을 안 썼어요.


캔디 : 똑같이 욕을 해도 애들이 그 욕 느낌이 너무 다른 거예요.


진기 : 그래서 대구에서는 애들이 이제 중학교 ~ 고등학교 때 까지 농담 중 하나가 서울 애들 욕하는 것 따라하기에요. 막 ‘씨~발!’, ‘야, 이 바보야!’ 이러면서요.


(일동 웃음)


진구 : 맞아요, 처음에 서울에 와서 친구들이랑 지하철을 탔는데 앞에 계신 아주머니가 저희를 치더니 ‘싸우지 마~ 친구랑 싸우는 거 아니야~’ 이러는 거예요.  나중엔 (말투가 다른 것에 대해서) 공포가 생겼어요. 서울에서는 말을 안 하게 되는? 택시를 타고 ‘시청역 가주세요.’처럼 딱딱하게 말하고, ‘시청역이요~!’ 라고 편하게 말은 못하게 된 거죠. 


진기 : 진짜 저도 급하게 택시를 타고 이대를 갈 일이 있었는데 왠지 ‘이화여대’라고 얘기하면 들킬 것 같은거예요. (일동 웃음) 그래서 택시를 타러 뛰어가면서 억양을 생각했어요. 이대? 이대? 그 발음을 생각하며 택시문을 열었는데 ‘아이씨(경상도 사투리로 '아저씨'), 이대요!’ 라고 해버린거죠. 


(일동 웃음) 


캔디 : 사실 전 서울 올라와서는 사투리보다 욕이. 직장을 다닐 때 동료들이 저랑 나이대가 비슷해서 서로 얘기하다가 제가 ‘아, 염병하네..’ 라고 했죠. 근데 그 상대가 서울 아가씨였어요. 그 분이 저한테 정색을 하며 ‘너, 나한테 욕한거니?’라고 받아들인거죠. 나는 욕한 게 아닌데. (웃음) 아니 지랄, 염병은 욕이 아니에요 우리한텐. 


재경 : 근데 아까 동네에서 퀴어인지 알아보는 표식 같은 것을 얘기 했는데, 뭐 보니까 진기님은 사진 동아리, 진구님은 아지트 모임. 뭐 그런식이 되는거고.


캔디 : 근데 광주에도 바는 있었어요. 왜 옛날에, 제가 대학 다닐 때 바 이름이 ‘안티프라민’이었는데, 그래서 벽에 커다란 안티프라민 약이 있었어요.


(일동 웃음)


캔디 : 그래서 가봤는데 사람이 별로 없어서 실망하고 나왔어요. 정말 이쪽 알아보기는 어려운 것 같고, 그래서 알아보는 방식이 소위 보이시한 애를 찾는 정도였어요. 어느날 티지에 글이 올라온 거예요. 전남대학교 인문대 앞에 회색 니트를 입고 반삭발 한 언니 너무 멋있다고요. 제 후배였는데 걘 헤테로거든요? (웃음)


재경 : 나 그 언니 알아! 잘생겼어, 잘생겼어. 봤어 내가.


캔디 : 그래, 되게 잘 생겼거든. 예쁘고 잘생긴 애. 잘생쁨이 이런 애구나, 싶었는데 걔가 삭발을 하고 맨날 회색 니트를 입고 학교를 돌아다녀요. 그러니까 애들이 걔를 찍으며 저 사람은 분명히 L이다 하는거죠. 아무튼 그렇게 글이 올라왔는데 그 땐 대처 방법을 잘 몰라서 댓글을 단 게, 걘 제 후배고 헤테로니까 이 글 지워주세요 했죠.


재경 : 상처 받았겠다.


캔디 : 정말 그런 스타일 자체도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없던 스타일이고.


재경 : 광주는 특히 없었어요. 가봤잖아 우리.


캔디 : 어쨌든 대학 다니면서 졸업하고, 광주에 살다가 서울에 올라 온 사람들이 있는 커뮤니티를 찾아다니는 오랫동안 찾았어요. 광주에서 서울 올라온 사람들이 정말 많았는데, 서울에 있는 정말 많은 활동가부터 직장인까지 광주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수가 어마어마해요. 근데도 우리 대학 사람만 없는 거예요. 


진기 : 근데 정말 지역과 서울 간의 온도 차가 있기 때문에 그 환경 때문에 타협하는 친구들이 참 많은 것 같아요.


재경 : 환경 때문에 타협한다는 게 어떤 말씀이죠?


진기 : 사실은 어떻게 보면 그 친구도, 그러니까 저랑 사귀었다는 그 친구도.


재경 : 아 그, 포비아. 라틴 창립.


진기 : 아 네, 라틴 창립 후원자이신. (웃음) 그 친구는 본인이 여자와 사귀었던 게 알려지면 안된다고 했어요. 근데 어릴 적 동네 친구들이 전부 이반이었던 거예요. 그 때 조금만 그 친구한테 손을 내밀었더라도 달라졌을 텐데 싶던거죠. 고등학교 때 반에 있던 커플을 봐도, 결혼을 해야되니까, 대학교에 가서 남자친구를 사귀겠다, 라던가요. 예를 들어, 머리를 조금만 더 짧게 해도 서울에선 전혀 아무렇지 않은데, 대구에선 보는 시선이 확 달라지는 게 느껴져요. 


캔디 : 서울에서 카페든 온갖 커뮤니티든 어디에서도 광주 쪽 대학교 커뮤니티가 없고, 광주 커뮤니티 게시판에서 사람을 찾는다는 글, 광주 사람들 번개를 열어도 절대 대학 얘기를 하지 않아요. 제가 나온 대학 앞에서는 안 모여요. 그 학교 앞에서 모이자고 하는 사람들은 최근에 광주로 이주를 했거나 대학을 다니지 않는 사람이죠. 


모리 : 근데 부산도 그런 게 있었어요. 마초적인. 학교를 부산 다녀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뭔가 여성 혐오같은 것도 많고.


진기 : 사실 대구만 해도.. 지금도 비슷할 거예요. 지금도 터미널 같은 곳에서 여자가 담배피 우고 그러면 때리고 가는 사람들도 많아요. 사실 저도 이 지역 기반이 아닌 사람이라서 얼굴을 내놓고 활동하는거지. 대구에선 그런식으로 활동하시는 분들이 대단한 거죠. 거기서 삶의 기반이 있는데도 얼굴을 내놓고 활동할 정도로 욕구와 자존심을 가지고 활동하시는 거죠. 


재경 : 아 대구에 (진구님)친구 분이 계시는데 우리가 만나러 가려고 했었어요. 만나기 전에 그 퍼레이드 하는 근처에 있다고 했는데 다른 데서 보면 안되겠냐고.


진구 : 그 친구야말로 대구에 기반이 있고, 대구에서 자랐고 거기서 직장 생활을 하고 있으니까 아무리 근처에서 그런 축제가 열려도 선뜻 나서질 못하죠.


캔디 : 나도 광주에서 뭐 영화 상영을 하고 강의를 하고 뭐 내려갈 일이 생기잖아. 일단 광주라고 하면 고민하게 돼요. 고등학교 때, 518 체험 활동이 있었는데 부모님께 말 안하고 갔거든요. 근데 티브이에 내가 잠깐 나간거야. 부모님 친구분들이 ‘너네 딸 TV에 나왔더라.’ 하면서 다 말한 거지. 너무 무섭고 무슨 얘기를 할지 모르겠고.


진기 : 그런 일이 똑같이 서울에서 일어나도 전화하지 않아요. 똑같은 직장 사람이어도 그 사람이 대구 사람인지 서울 사람인지에 따라 내가 커밍아웃을 할지 말 지가 좀 달라지니까.


캔디 : 난 지금도 그렇긴 한데 어쨌든 기본적으로 ‘안녕? 너 어디서 왔니?’라고 하고 광주에서 왔다, 광주에서 대학 나왔다 정도까지만 확인하고 얘기하지만 그 이상은 서로 별로 물어보질 않아요. 고등학교를 물어본다거나, 뭐 물어봐도 더 이상 얘기를 하지 않는다거나 깊이 들어가지 않아요. 깊이 들어가서 두 다리 건너면 100% 알거든. 


진구 : 줄줄이 고구마 줄기처럼.


캔디 : 그래서 사실 내가 졸업한 학과를 밝히는 건 무섭지만, 학교 정도는 밝힐 수 있을것 같아. 아직도 찾고 싶어.


재경 : 자! 이만 마치겠습니다.